31.
황태자와 보드카 (1)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마법의 음료, 술!’
……이라고 외쳐 대는 한국인 사이에서 자란 탓인지,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게 황태자에게 먼저 술을 권해 버렸다.
‘무식하면 겁이 없다더니…….’
나는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난 이제 끝났다…….”
……보드카를 세 잔째 마시던 순간부터 기억이 없다.
남은 건 깨질 듯한 머리와……, 내가 지금 황태자의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지랄을 떨었으면, 황태자의 침대까지 뺏어 쓰고 있을까…….’
그리고 왜…… 이렇게 입술이 쓰라리지……? 알고 싶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아…….
아…… 엄마 보고 싶다…….
* * *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보드카는 운치 있는 저녁과 잘 어울렸다.
황태자는 해일의 잔에 네 번째로 보드카를 채워 주었다. 두 사람이 보드카 한 병을 깔끔하게 비운 것이다.
“오늘 큰일이 있었는데, 해일 경 덕분에 마음이 많이 가라앉은 것 같습니다.”
황태자는 제 몫의 잔을 바라보며,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샴페인을 제외한 술은 오늘 처음 마셔 보는데, 꽤 좋네요. 향기도 좋고, 취기가 도는 것도…….”
“훌쩍…….”
……이게 무슨 소리지?
황태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이미 만취한 듯, 해일의 코끝과 양 볼이 발갛게 물이 들어 있었다.
“……해일 경?”
“훌쩍……. 히이잉…….”
해일은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미간을 힘껏 구긴 채로 방울방울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그가 양손으로 제 귀를 틀어막으며 웅얼거렸다.
“시끄러워어어어…….”
“제,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했나요?”
“화내지 마…….”
“네?!”
화를 내다니, 나는 그냥 당신과 술을 마시는 게 좋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황태자는 억울해하면서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남성은 찌푸린 미간을 펴지 않았다. 해일의 머릿속에서는 성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너! 해일! 내 브랜디를 뺏어 마실 때는 그렇게 태연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빨리 취한 건가?!]
“으으, 나도 몰라아…….”
해일은 양 귀를 더 강하게 틀어막으며 칭얼거렸다.
“왜, 왜 자꾸 소리를 질러어…….”
“제, 제가요?”
“화내지 말라고 했잖아…….”
“저는 가만히 있었는데…….”
입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대체 왜 내가 화를 낸 사람이 되어 있는 거지?
‘설마, 환청 같은 걸 듣고 계신 건가?’
황태자가 당황스러워하며 해일을 지켜보던 순간, 해일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구석으로 향했다. 방의 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해일은 훌쩍훌쩍 서럽게도 울며 계속 칭얼거렸다.
“시끄러워, 시끄럽다고오…….”
[소리 질러서 술 깨게 만들어 달라고 한 건 해일 그대잖나! 정신 안 차려?!]
“화, 화내면 무섭단 말이야…….”
아이 같은 반응을 본 황태자와 칼서스의 입이 동시에 다물렸다.
해일은 조용해지자 귀를 막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떼고는,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좋게 대화로 풀 수도 있잖아. 그런데 왜 화만 내는 거야…….”
[…….]
“…….”
“나는 당신을 살리려고 이러는 건데…….”
그 한마디를 들은 황태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일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을…… 살리려고……?’
황태자의 표정에 순식간에 그림자가 졌다.
‘……해일 경은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용에게 바치려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가일에게 죽임당할 뻔했다.’
믿었던 가족으로 인해 죽을 뻔했다. 그 사실이 이 선량한 사내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많이 두렵고, 상처가 되었겠지……. 기억을 잃은 채로도 이렇게 환청에 시달릴 만큼. 아주 많이 괴로웠던 거야…….’
황태자가 짓씹듯 한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가일…….”
선황제이신 할아버님에게 광적일 정도로 충성하던 사내.
‘우리 아르테스 제국은 가일에게 너무 큰 빚을 졌다. 그렇다고 해도 그에게 너무 큰 권력이 주어졌어.’
일부 귀족들이 가일을 두고 ‘각하’라 부르며, 황족보다 그에게 더 큰 경외를 보낼 정도로. 가일의 영향력은 지나치게 커져 버렸다.
‘이번 대의 트레클리프 공작은 황제에게 충성한다. 하지만 다음 대의 트레클리프 공작 또한 그럴까?’
황태자가 해일의 곁에 쪼그려 앉으며 생각했다.
‘가일이 만들어 낸 권력이 고스란히 해일 경에게 옮겨진다면, 차기 황제인 내 목을 찌를 칼이 될 수도 있어.’
그러니 내가 황태자인 이상, 나는 응당 트레클리프 공자를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하지만, 이 가엾고 선한 남자가 그러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되레 가일에게 몰린 권력을 분산시켜 주고, 제국에 은은하게 감도는 쿠데타의 불씨를 꺼트려 줄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황태자는 훌쩍이는 해일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황태자는 해일을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이런 상황이 되어 버렸네요. 제가 묵을 방을 따로 준비해 주세요.”
“하오나 전하…….”
시종장이 곤란해하며 말했다.
“트레클리프 영식을 위해 전하가 객실에 묵는다니요. 이건 하극상입니다.”
“그럼요?”
황태자가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상태가 된 해일 경을 데리고 밖으로 나갈까요? 그럼 모든 귀족들이 만취한 해일 경을 볼 텐데요.”
“…….”
“경을 그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 셈은 아니시겠지요?”
산뜻한 질문에, 나이가 지긋한 백발의 시종장이 얼굴을 붉혔다. 황태자는 그런 시종장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려 주며 말했다.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사람의 앞에서까지 황태자라는 직위를 들먹거리고, 제 한 몸 편하자고 타인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네, 전하.”
시종장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황태자가 바라던 대답을 내놓았다.
“묵으실 방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부탁해요.”
대답을 들은 시종장은 한 번 더 황태자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방을 나섰다.
방 안에는 다시 두 사람만이 남았다.
“훌쩍…….”
“…….”
황태자가 조심스럽게 쪼그려 앉은 해일의 곁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해일 경.”
“……으으.”
“이젠 괜찮습니다.”
붉은 눈이 부드럽게 휘며, 예쁜 곡선을 그렸다.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해일을 얼렀다.
“제 방을 비워 드리겠습니다. 푹 쉬고 일어나세요.”
“…….”
어르는 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해일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황태자와 눈을 맞췄다. 흐린 눈빛과 눈물로 얼룩져 가녀리게 보이는 얼굴이 유달리도 하얗고 아름다웠다.
“…….”
그 얼굴을 본 황태자는, 수줍기라도 한 듯 해일의 시선을 피하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
황태자는 그 말을 뱉은 뒤, 잠시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큼큼 두어 번 목을 가다듬었다.
“정말로 이젠 괜찮습니다.”
목소리는 아까보다도 차분해졌지만, 기묘하게도 그의 귓바퀴는 발갛게 익어 있었다.
해일은 그런 황태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의 상처를 이해한다는 주제넘은 말은 하지 않겠어요.”
“…….”
“하지만, 그대는 아르테스의 법도에 따라, 장차 나의 오른팔이 될 인물.”
황태자가 손을 뻗어 해일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나는 나의 사람에게 가혹한 군주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또, ‘위험할 수도 있다.’는 가정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배척하는 짓 또한 하고 싶지 않다.
‘황족이기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취급을 받으며…… 나를 위해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독극물이 올라온 다과상을 받기라도 하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궁인들이 죽어 갔던가.
‘정작 나는 죽지 않았는데…….’
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취지는 좋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을 막는 것 자체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위해 죄 없는 사람들까지 생때같은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것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학살과, 진상품이라는 이름을 달고 올라와 원숭이처럼 재롱을 떠는 아이들을 보고 싶지도 않아요.
황태자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앞으로는 내가 그대를 지키겠습니다. 폭군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는 아버지 같은 삶을 살지 않을 거라고 맹세할게요.
그 중얼거림을 들은 해일은, 안심한 것처럼 눈을 감더니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야 안심하셨구나.”
황태자는 그런 해일을 보며 키득거리며 웃고는, 이내 조심스럽게 팔을 벌려 그를 안아 들었다.
“……생각보다 가볍네.”
기사이기도 하고, 뼈대가 시원시원하고 곧아서 조금 더 체중이 나갈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조금 더 마른 편이었던 모양이다.
“……이젠 내가 더 크려나?”
황태자는 품에 안긴 해일을 내려다보다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양 뺨을 화르르 붉혔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이상한 생각…….”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침대로 다가가 해일을 바르게 눕혀 주었다.
“…….”
해일을 침대에 눕혀 준 그가 침대맡에 선 채로 멈칫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해일의 손을 들어 올려, 제 손바닥과 해일의 손바닥을 대어 보았다.
황태자의 손끝이 해일의 손끝 위로 삐죽 튀어나왔다.
황태자, 이데아 아르테스는 그걸 보고는 ‘내가 정말 어른이 된 거구나.’라고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