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공평한 기회 (4)
연극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일을 수습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오르가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르가, 시신을 수습할 사람을 불러 줄 수 있을까?”
“네, 단장님.”
오르가는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한쪽 구석에 서 있던 시종에게로 다가갔다. 그 뒤 린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왜 이렇게 불편한 표정이지?’
내가 의아해하며 린을 바라보자,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죄송해요. 도마호르 자작 영식을 지키지 못했어요.”
……그, 린. 네가 심성이 고와서 도마호르 자작 영식을 걱정했다는 건 잘 알겠어. 하지만 그런 걸로 이상하게 죄책감 갖지 마. 정령사는 만능이 아니야…….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너는 충분히 잘해 줬어. 잘못이 있다면 그 침입자를 설득하지 못한 나한테 있겠지. 그 누구도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
“단장님…….”
황태자가 옆에서 내 말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멜리온 영애, 당신이 우리 모두를 구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린은 황태자의 칭찬에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아, 저, 저는……. 저는 해일 단장의 명령을…….”
“네 공로야.”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린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네가 피해를 줄여 준 거야. 너는 잘했어.”
“다, 단장니이임……. 흐어어엉…….”
그 한마디를 듣자마자 린의 두 눈에서 눈물이 퐁퐁 솟아났다. 린은 아이처럼 훌쩍거리며 ‘긴장했어요.’, ‘혼날 줄 알았어요.’ 같은 말을 연달아 내뱉었다. 그 모습이 귀엽고 장해 보였는지, 린의 주변으로 슬금슬금 사람이 모여들었다.
“고마워요! 멜리온 영애!”
“정말 대단했어요! 정령술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대단한 건가요?”
“나도 이참에 정령술이나 배워 볼까?”
“엘프 핏줄이 아니면 못 배우지 않아?”
“아니야, 하급 정령은 다룰 수 있댔어.”
어느새 린은 모여든 사람에게 둘러싸인 상태가 되었다. 나는 흐뭇하게 웃는 얼굴로 뒷걸음질 쳐서 오르가의 곁으로 이동했다.
“멜리온 영애, 전부터 생각했는데……. 제복을 입은 모습이 정말 멋있었어요!”
“저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면 멜리온 영애처럼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멜리온 영애, 혹시 아직 약혼자가 없으시다면, 저희 아들은…….”
“멜리온 영애, 예전부터 쭉 당신을…….”
완전히 린이 아이돌이 되어 버렸네.
‘아이돌이 될 만하지. 존경할 만한 사람이야.’
하지만 오르가도 린이 만인의 아이돌이 되는 걸 바랄까?!
나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팔꿈치를 들어 오르가를 툭 건드렸다.
“오르가.”
“네?”
나는 린을 둘러싼 인파를 슬쩍 턱짓으로 가리켰다.
“뭐 하고 있어? 네 약혼자가 구혼 받고 있잖아.”
“윽, 단장님!”
오르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약혼자라니요? 저희는 친구예요.’ 같은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으으…….”
몇 초간 앓는 소리를 내던 오르가가 성큼성큼 걸어 인파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린.”
“오르가?”
오르가가 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만 사건 조사하고, 장례 절차 도우러 가야지. 유해를 수습하려면 네가 도와줘야 하잖아.”
“아, 응!”
린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밀어진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더니 그대로 오르가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풋풋하다 풋풋해…….’
역시 연애는 남이 하는 걸 구경해야 제일 재미있다니까.
내가 하는 건 귀찮을 것……,
“해일 경.”
“네, 전하.”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황태자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황태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내게 말을 붙였다.
“폐하께 상황을 설명드리고 왔습니다. 내빈분들의 안정을 위해 일정을 내일로 늦추겠다고 하시더군요.”
황태자는 조금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오늘 저녁 일정이 비어 있는 상태인데…….”
“네, 전하.”
“같이 차라도 한잔할까요?”
응? 차를 마시자고? 대체 왜?
‘황태자가 나를 황태자파로 영입시키려고 하는 건가?’
나를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제안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당차게 역으로 제안을 건넸다.
“술은 어떠십니까?”
“술이요?”
“네. 스물이 되신 기념이기도 하고, 아까 일로 전하께서도 놀라셨을 테니 긴장을 푸실 수 있게 술을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조, 좋아요!”
제안을 들은 황태자는 양 볼을 붉히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는 좀 흥분한 것 같았다.
* * *
으슥한 숲속. 시종복을 입은 남성이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으흑, 끅, 흐어엉…….”
그의 곁에는 다비의 모습을 한 칼서스가 서 있었다.
“얼굴에 남은 흉터는 치료하지 않으마.”
칼서스는 울고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당분간은 불편할 테지만, 그 흉터 덕분에 남은 평생 동안 얼굴을 숨기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화상을 입어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 반쪽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꼭 갚겠습니다!”
“굳이 그럴 것까지야…….”
남자가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표하자, 칼서스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단순히 귀족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려 했을 뿐이다. 우리의 행동을 과하게 미화시켜 해석하지 말거라.”
“하지만 그게 바로 선의 아닙니까.”
일그러진 화상 자국 아래로, 맑은 눈동자가 칼서스를 직시했다. 그는 자신의 의견에 강한 확신을 품고 있는 듯했다.
“제가 배운 건 없지만, 두 분이 하고자 하는 것만큼은 이해했습니다.”
“…….”
“저와 같은 피해자가 또다시 생기는 걸 걱정하신 거지요?”
남자의 입꼬리에 배시시 미소가 걸렸다.
“저는 두 분에게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두 분에게 구원받겠지요.”
“…….”
“그리고 우리 더비히의 사람들은 그걸 선의라고 부릅니다.”
잠시 침묵하던 칼서스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구나.”
“저희 더비히에서는 그게 미덕이니까요.”
“무슨 말을 못 하겠군.”
칼서스는 투덜거리면서도 미리 준비해 두었던 금화 세 닢을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그 정도면 다른 곳에 정착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고마운 줄 알면 조용히, 평온하게 살아가거라.”
“네! 감사합니다!”
남자는 거듭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금화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칼서스는 그런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약조는 받았으나, 인간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러니 적어도 몇 년은 감시해야 한다. 감시가 끝난 뒤에도 생존 여부에 대해서는 주기적으로 관찰을…….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수상쩍은 대화가 들려왔다.
“해일……?”
칼서스가 상념에서 빠져나오며 대화에 집중했다.
[폐하께 상황을 설명드리고 왔습니다. 내빈분들의 안정을 위해 일정을 내일로 늦추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오늘 저녁 일정이 비어 있는 상태인데…….]
[같이 차라도 한잔할까요?]
칼서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잔뜩 구겼다.
“빌어먹을 꼬맹이가, 감히…….”
감히, 주제도 모르고 해일에게 추파를…….
[술은 어떠십니까?]
[술이요?]
[네. 스물이 되신 기념이기도 하고, 아까 일로 전하께서도 놀라셨을 테니 긴장을 푸실 수 있게 술을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조, 좋아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일은 황태자의 흑심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히려 저 말은 나서서 상황을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꼴이 아닌가.
칼서스는 갑갑해하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고 소리쳤다.
“저를 꼬드기려는 줄도 모르고……. 저 순진한 놈이……!”
그사이 황태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조용한 곳이 그곳밖에 없어서…….]
칼서스가 인상을 구긴 채로 소리쳤다.
“헛소리, 황태자궁을 제외하고도 온실이 두 채가 있을 텐데, 왜 방으로 부른단 말이냐!”
해일이 황태자에게 대답했다.
[그럼 잠시 부하들과 인사만 하고 오겠습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그 뒤로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머릿속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서스, 왜 그렇게 화를 내요.]
“그놈이 널 꼬드기려 하니 그렇지.”
[전하가 저를 꼬드길 이유가 어디 있어요. 제가 트레클리프 공자니까 친분을 다지려고 하시는 거겠죠.]
칼서스가 미간을 찡그린 채로 읊조렸다.
“……본인이 황제가 되면 트레클리프 공작가가 오른팔이 될 텐데, 무엇 하러 수고스럽게 그런단 말이냐.”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래서 이제부터 알아보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술을 권한 거였군.”
[술이 들어가면 사람은 좀 솔직해지니까요.]
해일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아이처럼 헤헤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제가 먼저 취할 것 같으면 칼서스가 소리 질러서 깨워 줘야 해요.]
“너! 설마 네 주량도 모르고……!”
[그럼 이만 다시 들어가 볼게요. 칼서스가 형이니까 잘 감시해 줘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해일은 황태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칼서스는 속이 끓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이…… 눈치 없는 자식!”
칼서스는 드디어 인간이 화병으로 죽는 이유를 체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