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수상하고 아름다운 가정 교사 (2)
“사교계에서 추는 춤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뉩니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듣기 아주 좋아서, 웬만한 귀족가의 장남들보다도 더 ‘귀족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비가 검지와 중지를 들어 손가락으로 숫자 2를 표시했다.
“하나는 왈츠,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발레의 파드되입니다.”
길쭉하고 모양이 예쁜 중지가 접히자, 검지 하나만이 펴진 채 남았다.
“둘 중 기본이 되는 것은 왈츠입니다. 발레는 사교의 목적보다는 공연 감상의 이유가 더 깊어서 배우지 않아도 괜찮으실 겁니다.”
“그렇군요.”
다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교육실에 마련된 무대 부분으로 올라갔다. 그런 뒤 그가 내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입장할 때는 남성이 왼쪽, 여성이 오른쪽에 서게 됩니다.”
곧 등허리와 오른쪽 팔꿈치에 가벼운 손길이 닿았다.
“가슴을 들어 올린다는 감각으로 허리를 펴 주시고……. 네, 이번엔 오른손 손바닥이 하늘을 보게 팔꿈치를 굽혀 볼까요?”
다비는 남을 가르치는 데 제법 익숙한 것 같았다. 그 자연스러운 손길에 나는 그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자세를 잡으며 질문을 던졌다.
“여성분이 제 손 위에 손을 얹으시는 거죠?”
“맞습니다.”
대답이 돌아온 직후 오른손 위에 다비의 왼손이 올라왔다. 나보다 한 마디 정도 큰 손이지만, 그의 손은 백옥을 깎아 만든 것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그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칼서스 생각이 났다.
“입장한 뒤에는 파트너와 마주 보고 서서 인사를 합니다. 왼발을 뒤로 빼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세요.”
“이렇게 하면 되나요?”
“네, 잘하셨습니다.”
마주 보고 인사를 하느라 반보 뒤로 물러나 있던 다비가 성큼 다가왔다.
“그 뒤엔 왼손을 높이 들어서 파트너의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파트너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아 주시면 됩니다.”
다비는 그렇게 말하며 내 오른손을 본인의 허리에 감아 주었다.칼서스를 제외한 타인과 스킨십을 하는 건 거의 처음이라, 본능적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여성 파트너는 해일의 오른 어깨에 손을 얹을 거예요.”
“……그, 그렇군요.”
“이 상태에서…….”
부드러운 손길이 허리에 닿았나 싶더니, 이윽고 아랫배가 맞닿았다. 옷을 입고 있음에도, 배를 붙이는 동작만으로도 한순간에 야릇한 분위기가 되어서인지 굉장히 낯 뜨거운 동작을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배를 붙이고 서서……. 해일, 어깨가 올라가 있군요. 귀와 어깨 사이 간격을 넓혀 볼까요? 어깨 근육으로 팔을 들어 올려야 합니다.”
“아…….”
다비의 손끝이 귓가에 닿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가 말한 대로 어깨를 내리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죠. 잘했어요.”
그러자 아이를 어르는 듯한 칭찬이 되돌아왔다. 그 칭찬을 듣자, 더욱더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말투가 묘하게…… 칼서스랑 비슷해서 더 기분이 이상해…….’
꼭 눈앞에 있는 게 다비가 아니라 칼서스인 것처럼 느껴져서일까. 금방이라도 키스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정신 나간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스텝으로 넘어가 보죠.”
“……네.”
나는 멋쩍게 대답하며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머리를 굴렸다. 그렇지 않으면 차마 다비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칼서스는 내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지금 내가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도, 내가 이렇게 쪽팔려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을까?
‘다 알고 비웃고 있는 건 아니겠지?’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자, 다비가 즐거워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엇……!”
“해일.”
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제게 집중하세요.”
“네, 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얼굴에 이어 귓가와 목덜미까지 홧홧해졌다. 다비는 숙맥처럼 어물거리는 나를 웃으면서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별다른 말 없이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그 점이 조금 더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 * *
나는 교육실의 창가에 앉아 멍하니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다비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칼서스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기묘하게도 생김새는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다비는 칼서스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많았다.
‘……심란하네.’
칼서스에게 화를 내고 뛰쳐나온 뒤로 벌써 2주 정도가 지났다. 그건 내가 홧김에 트레클리프 공작저로 뛰쳐 와서 스파이 노릇을 한 지도 2주가 되었다는 뜻이다.
‘칼서스는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듣고 느낄 수 있으니까, 내가 뭘 하려는지 대강 눈치를 챘겠지.’
이전에 말했듯, 가일이 죽으면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주변 왕국들은 제국에게 점령당해 왕국으로 격하당한 상황으로도 충분히 분함을 느끼고 있을 텐데, 식민 지배를 당하며 생긴 고통과 원한까지 실시간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중일 테니까.
‘그걸 누르고 있는 게, 가일이라는 존재가 가져다주는 공포심이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일이 가진 ‘영웅’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생기는 효과.
‘상징을 대체할 다른 심볼이 있으면 가일을 밀어내도 주변 소국이 뭉쳐 전쟁을 벌이는 일은 없을 거야.’
나도 한국인으로 태어난지라, 점령당한 국가가 들고 일어나 제국의 모가지를 날려 버리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만……. 독립운동은 성공하지 못하면 쿠데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에, 식민국은 지금 이상으로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다.
‘혁명으로 얼마나 피를 흘릴지 아니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는 거겠지. 식민국에게 갈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내부에서 먼저 손을 써 둬야 하는데……. 그 방법이란 걸 혼자서는 생각해 내기가 어렵단 말이지.’
……내가 이렇게 혼자서 머리를 쥐어짜 내고 있다는 사실을 칼서스는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칼서스가 뭘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나는 손가락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칼서스 그 자식은 있어도 없어도 신경이 쓰이네, 얄미워 진짜.”
저절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나도 칼서스 생각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굳이 칼서스와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놈이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상태인지를 체크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럼 저번처럼 싸우게 되는 상황도 안 생길 텐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즈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비 카스타입니다.”
“들어오세요.”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자, 다비가 문을 열고 들어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나도 창가에서 일어나 다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비가 한차례 쏟아진 뒤의 잔디밭에서나 맡을 수 있을 법한 눅눅한 향기가 확 느껴졌다.
“어…….”
“왜 그러시죠?”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눈을 굴리며 티가 나지 않게 몇 차례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정말 비에 흠뻑 젖은 땅 냄새가 맞았다.
‘다비는 보송보송해 보이는데……. 그리고 최근엔 비도 많이 안 왔잖아. 그런데 왜 이런 향기가 나지?’
내가 의아해하고 있자, 다비가 평온한 얼굴로 말을 붙였다.
“저번에 배운 스텝을 다시 복습해 볼까요?”
“네…….”
나는 내 생각에 골몰한 채로 멍하니 다비의 뒤를 따라 걷다가, 무언가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어, 아앗!”
“해일?”
내가 휘청거리자 앞에 있던 다비가 팔을 벌려 나를 받아 내었다. 나는 졸지에 다비의 품에 푹 안긴 꼴이 되었다.
‘맞다. 사교댄스를 연습하는 부분은 다른 곳보다 조금 높았지…….’
민망해 죽겠네…….
다비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얼빠진 짓을 하게 되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멋쩍은 마음에 웅얼웅얼 변명을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다비……. 오늘 컨디션이 좀 별로인가 봐요.”
“저는 괜찮습니다. 컨디션이 별로면 스텝 연습 말고 다른 걸 할까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작은 소리로 대답하며 중심을 잡기 위해 다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눅눅한 냄새가 안 나네?’
나는 중심을 잡고 일어나는 대신, 조금 더 고개를 숙여서 다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어 보았다. 약간 뜨겁게 느껴지는 목덜미에서는 엷게 담배를 태운 듯한 매캐한 냄새가 풍겨 왔다.
“……해일?”
다비는 내가 자신의 목덜미에 고개를 박자, 당황스러워하며 내 등을 토닥거렸다. 내가 어지럼증을 느껴서 축 늘어진 걸로 착각한 것 같았다.
나는 의아하게 질문을 던졌다.
“다비…… 혹시 연초 같은 거 피워요?”
“네? 피우지 않습…….”
다비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다가, 중간에 말을 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순식간에 그의 하얀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라 홍시처럼 변했다.
“……왜 그래요?”
“아…… 아니, 그…….”
딱 봐도 지나치게 당황한 듯한 모습. 평소의 온화하고 귀족적이던 분위기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는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 과일 향기?’
나는 다시금 벌겋게 달아오른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정말 그의 몸에서는 상큼한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짜야. 갑자기 다른 향기가 나. 라임 같은 향기인데…….’
뭔가…… 이상하게 친숙한 느낌이…….
향기에 집중하며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머릿속에 [행복]이라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꼭 블루투스 기능으로 생각을 공유한 것 같은…….
……언젠가 칼서스에게 만년필을 물려받았을 때, 느껴 보았던 그 기분이었다.
삽시간에 피가 식었다.
“…….”
“다비……,”
“…….”
“……가 아니라.”
나는 악귀 같은 표정으로 망할 도마뱀 새끼의 머리채를 쥐었다.
“칼서스, 너 이 새끼!”
“윽!”
“또 나를 속였겠다!”
어이없게도, 머리채를 잡힌 칼서스는 얼굴을 붉힌 채로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칼서스가 웃음을 터트린 이유를 금세 눈치챘다.
-세계수는 용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
-언젠가 그대가 세계수로써 날 돌보고 싶어지는 날이 오면, 그때 부탁을 해 보도록 하지.
……내가 그를 허락했기 때문에, 그의 감정이 공유된 것이다.
그 사실이 내 얼굴을 홧홧하게 달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