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수상하고 아름다운 가정 교사 (1)
점심 무렵, 방에서 제국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던 내게 찾아온 집사가 말했다.
“오늘 가주님께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 하십니다.”
“……아버지가요?”
주 6일은 황궁에서 살고, 일주일에 하루만 집에 돌아와서 집무실에 틀어박히는 그 새끼가? 나랑 밥을 먹으려고 한다고?
기억을 잃은 척을 시작한 뒤로 나를 투명 인간 취급했던 그 가일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숨기며,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바라신다면 그래야지요.”
“그럼 가주님께 공자님이 수락하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전해 주세요.”
나는 대답을 마친 뒤 집사를 향해 생긋 웃어 주었다.
원작의 해일은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중요시한 캐릭터. 그러니 전혀 다른 인물로 보이기 위해서는 살가운 척을 할 필요가 있었다.
내 표정을 본 집사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와…… 귀엽…… 큼.”
“……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침이 나와서…….”
집사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내게 정중하게 경례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대의 하루에 영광이 있기를.”
“공자님께서도 무탈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사를 한 집사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조용해진 방 안에서 나는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남남처럼 지내던 놈이 갑자기 부르다니……. 뭔가 심각한 일이 있기라도 한 건가?’
원작에선 언급이 별로 없었던 해일의 어머니한테서 전언이 왔다거나, 아니면 황제가 날 호출했다거나.
그런 일이 생긴 건가?
‘아무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겠어.’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슨 소리를 들어도 놀라지 말자.’ 하고 다짐했다.
물론, 식사 자리에서 그 다짐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 흩날리게 되었다.
* * *
“사교계에 얼굴을 비춰야 한다.”
“……예?”
가일은 무심한 얼굴로 스테이크를 한 점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입에 넣은 음식물을 느긋하게 씹어 삼킨 가일이 말했다.
“곧 황태자 전하의 탄신일이 다가온다.”
응? 지금 5월 말이잖아. 황태자 생일은 6월 22일 아니었어?
한 달이나 남았는데 왜 ‘곧’이야?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가일이 나이프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억을 잃었다 하였지.”
“아, 네.”
“예법은 기억이 나느냐?”
예법이라…….
‘만났을 때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살짝 숙인다.’
헤어질 때는 ‘그대의 하루에 영광이 있기를’이라고 인사해야 하고, 인사를 먼저 받았다면 ‘무탈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인사해야 한다.
‘이런 일상 예법은 기억하고 있는데, 사교계에서 사용하는 예법은 기억에 없네.’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일부분만 기억이 납니다.”
가일은 내 대답을 듣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축복하는 성스러운 자리이다. 그런 곳에서 내 자식 새끼라는 놈이 헛짓거리를 하게 둘 수는 없지.”
“…….”
“가정 교사를 불러 줄 테니, 한 달 내로 예법을 다시 배우거라. 전하의 탄신일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너는 물론이고 가정 교사까지 땅에 묻어 버릴 줄 알아.”
“…….”
더럽게 살벌하네…….
그래도 의도는 알 것 같다.
‘가문의 명예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
사교계는 어디까지나 귀족들끼리의 모임.
거기에 어울리기 위해서는 혈통을 증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위 말하는 ‘품위 유지’ 또한 아주 중요한 요소로 취급되었다.
‘격 떨어지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순간, 사교계에 다시는 발을 디딜 수 없게 되기도 하고…….’
나는 와인 잔을 들어 가볍게 목을 축이며 생각했다.
‘귀족들의 파벌도 파악해야 하고, 정보망도 필요하니……. 사교계에 적응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야.’
나는 생각을 마치고, 가일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네 모가지를 따기 위해서인데, 당연히 예법 정도야 배울 수 있지.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 예법과 사교댄스 등을 배울 수 있도록 마련된 널찍한 교육실에서 가정 교사를 기다리게 된 것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교육실의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아 간단한 인적 정보가 적힌 서류를 팔락팔락 넘겼다.
‘북부의 한랭-고산지대에서 살던 귀족으로…… 카스타 백작가의 서자구나.’
서자여도 귀족의 피가 섞였다는 인증만 받을 수 있으면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다고 했었지.
‘영지를 계승받을 권리도 없고, 공식적으로 귀족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니…… 가정 교사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는 거구나.’
보통은 귀족인 형제나, 은퇴한 부모님이 다달이 품위 유지비를 보내 주니 직업을 가질 생각을 안 할 텐데…….
집안이랑 문제가 있는 건가?
‘이름이…… 다비 카스타. 그래도 카스타의 성씨를 사용하고 있는 걸 보면 나름 백작가랑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다음 페이지를 확인하려고 종이를 넘긴 순간, 똑똑, 하고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가정 교사로 발탁된 다비 카스타라고 합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아, 들어오세요.”
나는 종이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 했다.
“만나서 반…….”
하지만 인사는 끝맺어지지 못했다. 가정 교사의 지나치게 아름다운 용모 때문이었다.
긴 백발을 등허리까지 기른 그는 머리를 깔끔하게 하나로 올려 묶었는데, 그 덕분에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이 도드라져 보였다. 눈매는 약간 사나운 듯했으나, 속눈썹이 길고 풍성해 차분한 느낌이 더해져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그가 황금처럼 선명한 눈동자로 나를 직시하더니,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미쳤다.’
북부 사람들이 신비롭게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내가 넋을 놓고 빤히 바라보자, 카스타 영식이 의아해하며 질문했다.
“……뭔가 이상한가요?”
“아, 아뇨! 훤칠하고 멋있으셔서요! 그래서 그만 넋을 놓고 봐 버렸네요.”
“네? 아하하…….”
와, 칼서스랑 비견되는 미인은 처음 봐서 너무 놀랐네. 역시 지나친 미인은 심장에 해로운 것 같아.
카스타 영식이 수줍어하는 것처럼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더니,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트레클리프 공자님께 그런 칭찬을 듣다니, 부끄러워지네요.”
“저, 저요? 제가 왜요?”
카스타 영식이 대답했다.
“트레클리프 공자님은 사교계에서 미남이라고 손꼽히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제가요?”
“네.”
아…… 하긴, 해일이 미남으로 묘사되긴 했지. 칼서스 때문에 잊고 있었네.
나는 어벙해진 표정을 갈무리하며 차분하게 웃어 보였다.
“저보다 카스타 영식이 더 멋있으신데요.”
“영광입니다.”
카스타 영식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편하게 다비라고 불러 주세요.”
“그럼 다비도 저를 편하게 해일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 말을 듣자 카스타 영식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사라지고, 곤란해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그 표정을 확인한 나는 너스레를 떨 듯이 쾌활한 어조로 그를 얼렀다.
“둘만 있으니 괜찮잖아요. 편하게 불러 줘요.”
그러자 긴장이 풀렸는지, 카스타 영식…… 아니, 다비가 뺨을 사르르 붉히며 눈웃음을 쳤다.
“……네. 해일.”
이야…… 조각이다……. 조각이 볼 붉히면서 웃는다…….
심장에는 해롭지만 눈에는 이롭구나……. 역시 미인이 최고야…….
다시금 넋을 놓고 미인을 구경하는 사이, 한 번 더 노크 소리가 울렸다.
“공자님. 차를 들여도 괜찮을까요?”
“아, 부탁드려요.”
방 안으로 들어온 어린 하녀는 테이블 위에 나와 다비의 앞에 잔을 하나씩 올린 뒤, 미리 우려낸 홍차를 따라 주었다.
나는 그때까지 다비의 얼굴을 구경하며 넋을 놓고 있었다. 잠시 뒤, 하녀가 다음 순서로 우려낸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으려 한 때였다.
“아, 설탕은 제 것에만 부탁드립니다.”
“네?”
다비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트레클리프 공자님은 단 것을 즐기지 않으시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공자님을 보필하게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만 실례를…….”
하녀는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지른 줄 알고 당혹스러워하며 울먹거렸다.
나는 빠르게 그녀를 다독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미리 말하지 않은 탓이니까요.”
하녀는 그 말에 안심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들어가 보세요. 그대의 하루에 영광이 있기를.”
“감사합니다, 공자님! 더 열심히 보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무리하지는 않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녀는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는, 쟁반을 챙겨 방을 나섰다.
나는 홍차가 담긴 잔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단 걸 안 좋아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원작에서 나오는 해일은 단 음식을 딱히 가리지 않았는데.’
면접 볼 때 집사한테 이야기를 듣기라도 했나? 고민하고 있자 맞은편에서 다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세가 아주 바르시군요. 걷는 법이나 서 있는 법은 따로 배우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 네.”
다비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사교댄스에 관한 예법을 배워 볼까요?”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머릿속을 맴돌던 의구심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칼서스랑 나란히 세워 두면 장관이겠는데…….’
수상하기는 개뿔이. 이런 미모를 가진 사람이 고작 나를 두고 개수작을 부릴 리가 없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다비를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