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죽여도 내가 죽여 (1)
“목에 난 상처는 깔끔하게 다 나았네요.”
린이 온화하게 웃으며 내 목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광대버섯 먹은 멧돼지’라고 불렀던 게 무색할 정도로 의젓한 모습이었다.
“이제 기억만 돌아오면 완벽할 텐데.”
“…….”
“아직도 떠오르는 게 없으세요?”
“조금씩은 돌아오고 있지만, 그렇게 많은 게 떠오르진 않는 것 같아.”
대답을 들은 린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런가요’ 하고 중얼거렸다.
‘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저 망할 우울증 드래곤이 가이딩을 못 받고 방치되어 있잖아. 그게 훨씬 큰 문제야. 저 새끼가 빵이었으면 진즉 곰팡이가 슬었을 거라고!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고민했다.
‘대체 왜 가이딩이 안 되는 거지?’
손잡기부터 포옹에, 가벼운 뽀뽀와 키스…….
하다못해 거의 잘 뻔한 적도 있었다.
‘린이랑 오르가가 감시한 덕분에 성사는 못 했지만, 하여튼 칼서스가 날 한참이나 물고 빤 건 사실이야.’
가이딩의 원리가 ‘접촉’이라면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가이딩이 되었어야 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내가 끙끙 고민하고 있자, 칼서스가 다가와 은근슬쩍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순조롭게 낫고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군.”
올려다본 그의 얼굴엔 웃음기가 만연했다.
웃는 얼굴이 예뻐서 내 눈에는 좋긴 한데, 이 새끼야……, 네가 지금 웃을 처지냐?
‘네가 지금 며칠이나 가이딩을 못 받았는지 알기나 해?!’
내가 카일로스 백작저에서 눈을 뜬 지 10일이 됐으니, 기절해 있던 시간까지 합하면 거진 보름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저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왜 그렇게 속상한 표정이야?”
“……기억이 안 돌아와서요.”
“그것보단 나한테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만.”
“칼서스한테 화난 거 아니에요.”
내가 까칠하게 대꾸하자, 린과 오르가가 칼서스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단장님. 참지 마시고 그냥 한 대 갈겨 버리세요.”
“맞아요. 저놈은 무려 열세 번이나 단장님을 덮쳤다고요. 인두로 혀를 지져도 모자를 판에, 왜 화를 참으려고 하세요?”
“얘들아 말 좀 곱게 하자…….”
그리고 억지로 한 거 아니야…….
따지자면 내가 오냐오냐해서 버릇이 나빠진 거에 해당되거든…….
‘생각할수록 열받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가이딩이 안 되지?
‘아니면 내가 부상을 당한 상태라서 그런 건가?’
내가 더 힘들어할까 봐, 칼서스가 일부러 가이딩이 되지 않게 조치를 취한 걸지도 몰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아픈데도 꾹 참고 괜찮은 척을 하는 건데.’
지금 칼서스가 그런 상태면, 난 정말 어떡해야 하는 거지?
“…….”
그 직후, 칼서스와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칼서스는 애당초 죽고 싶어 했어.’
그렇기에 둥지에 침입한 나에게 목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칼서스는, 지금…….
“어, 어?”
“단장님?!”
……죽고 싶어 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갑작스럽게 두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꼴사납게도, 망할 도마뱀의 걱정을 하다가 울어 버린 것이다.
“해일, 왜 우는 거지?”
칼서스가 손을 내밀어 내 뺨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걱정이 물씬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나는 그런 칼서스를 쏘아보며 훌쩍거렸다.
‘너한테 설명해 줄 수 있겠냐?’
기억을 잃은 척을 하고 있는데, 가이딩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즉,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밀려오는 무력감에 숨이 턱 틀어막혔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렇다면 이건 더 이상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이 아니다.
‘칼서스의 곁에 남을 구실이나 만들어 두는 게 최선이겠지.’
그럼 적어도 칼서스의 상태를 계속 살필 수는 있을 테니까.
나는 코를 훌쩍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단장님,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저희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요?”
“그건 아니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문제야. 도망쳐 온 뒤로 그저 베풀어지는 호의를 받고만 있잖아.”
“…….”
“잘난 것처럼 단장님 소리를 듣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어. 검을 쓰는 법도 잊었는데 내가 어떻게 단장이라고 불릴 수 있겠어?”
이렇게 말하면 절대로 단장 직위에 복귀시키지 못하겠지. 그리고 만에 하나 복귀하게 되더라도 문책은 피할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해서 트레클리프 공작가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도 내가 여기로 도망쳐 온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어.”
“그건…….”
“아버지가 날 죽이려고 했다며?”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트레클리프 가로 돌려보내지도 못하겠지. 완벽해.
나는 자조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힘없이 말했다.
“부모에게까지 버림받은 데다 쓸모도 없어진 사람을 누가 원하겠어. 나한테 남은 건 해일이라는 이름뿐이야.”
그 말을 들은 린과 오르가가 벌컥 소리를 내질렀다.
“단장님, 그렇지 않아요!”
“저희는 단장님이 있어서 기쁠 따름이에요. 단장님께선 필사적으로 저희를 지켜 주셨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이제 여기 없잖니.”
나는 기가 죽은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너희를 구해 줬던 해일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나야.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아, 말하고 보니 진짜 울컥하네.
내가 소설 속 캐릭터에 빙의된 것도 짜증 나는데,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잖아.
‘가만히 둥지에 있게 내버려 뒀으면 이럴 일도 없었는데, 짜증 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이 더 많아졌다.
칼서스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즈음이었다.
“내가 가일을 죽이면 해결이 되는 일이군.”
“……네?”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칼서스가 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일이 사라지면 너는 트레클리프 가문의 가주가 될 수 있다. 네게 기억이 없더라도 집사나 행정관이 있으니 업무는 처리하는 데 지장이 없을 거다.”
“아니, 잠깐.”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말아 다오.”
칼서스가 새우등을 한 채 침대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나와 시선을 맞췄다.
“첫 번째로 가일은 은혜도 모르는 금수 새끼이고, 두 번째로 그 자식은 너를 죽이려 했던 놈이며, 세 번째로 나의 형제들을 모두 도륙한 원수이기도 하다.”
“…….”
“그 자식을 영웅이라고 추앙하는 건 인간들뿐이다. 나는 그 자식을 증오해.”
그 분노 섞인 중얼거림에 순식간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나는 얼이 빠져 입을 헤벌린 채로 칼서스를 올려다보았다.
‘이, 이게 아닌데.’
나는 네 곁에 남으려고 이런 말을 꺼낸 거야. 그런데 왜 네가 갑자기 가일하고 싸우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데?
‘가이딩도 못 받았으면서, 또 권능을 쓰려고?’
왜 이렇게 네 몸을 함부로 다루는 거야?
정말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
순식간에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의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칼서스의 소매를 붙들었다.
“칼서스, 저랑 둘이서 이야기 좀 해요.”
“단장!”
“그 자식이 또 추근거리면 어쩌시려고요?”
“그깟 입술이야 내어 주면 그만이지.”
단호한 대답에 세 사람의 입이 다물렸다.
나는 칼서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따라와요.”
“…….”
“좋은 말로 할 때.”
나는 방에서 벗어나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별관의 뒤쪽에 마련된 고즈넉한 정원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 칼서스와 눈을 맞췄다.
“칼서스.”
“그래.”
분노와 두려움을 억누른 탓에, 약간 낮아진 목소리가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르테스 제국은 주변 소국을 잡아먹고 몸뚱이를 불린 국가예요.”
“알고 있다.”
“민족의 전통이나 정치 방식을 그나마 최대한 존중해 주는 형식으로 정복한 탓에, 쿠데타 세력이 적기는 해요. 하지만 아르테스 제국에 반감을 갖는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요.”
“이해하고 있어.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거지?”
나는 인상을 구기며 대답했다.
“지난 20년간 제국에서 왕국으로 추락한 나라의 국민들이 불만을 표하지 않는 건…….”
“…….”
“가일 트레클리프 딘이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쓸모없는 변명이자,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왜냐면 가일은 죽어 마땅한 살인자가 맞으니까. 지금 내가 가일을 죽여선 안 된다는 헛소리를 내뱉고 있는 건, 그저 칼서스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칼서스는 내 바람과 정반대의 대답을 내뱉었다.
“그것 또한 알고 있다.”
“알고 있다면서 어떻게 가일을 죽이겠다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전쟁이 일어나든 말든, 나와 무슨 연관이란 말이냐.”
이 멍청한 새끼야.
전쟁이 아니라, 가일과 싸우면서 다칠 너를 걱정하는 거야, 진짜 모르겠어?
나는 찌푸린 시선으로 칼서스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칼서스가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묻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질문하세요.”
얼마나 더 이 의미 없는 입씨름을 반복해야 할까. 얼마나 노력해야 내가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줄까.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나를 바라보던 칼서스가 감정 한 줌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네게 있어서 타인의 생존이 그렇게나 중요한 요소인가? 기억을 잃은 척을 그만둘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