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번견 (5)
예이트 셴이 카일로스 백작저에 도착한 건 내가 존엄을 잃은 지 일주일 정도가 되었을 즈음이었다.
예이트는 유리온실 안에서 가볍게 차를 마시고 있던 우리에게 찾아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손에는 종이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왔어? 유리온실로 바로 왔네? 멀리 와서 힘들 텐데 손님용 방에서 기다리지.”
“그럴 수는 없지. 오랜만에 뵙는 단장님이잖아. 단장님, 상처는 좀 어떠세요?”
“나는 괜찮아요. 예이트야말로 수고 많았어요.”
내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예이트는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환히 웃으며 상자를 건넸다.
“카일로스 지역 특산물인 사과로 만든 파이를 가져와 봤습니다. 올해 사과가 아주 맛있다는 모양이에요.”
녀석, 병문안 오는 길에 선물을 사 왔구나. 착하기도 하지…….
내가 흐뭇하게 웃으며 종이 상자를 받아 든 때였다.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칼서스가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해일은 단 걸 싫어한다.”
그 말을 들은 린이 활화산처럼 분노를 터트렸다.
“끼어들지 마, 도마뱀 새끼야! 거절해도 해일 단장이 거절해야지 왜 네가 나서!”
“버릇없는 꼬맹이가…….”
이제는 조금 익숙하기까지 한 싸움의 서막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워하는 예이트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며 웃었다.
‘미안하다. 쟤들이 좀 많이 지랄 맞지……?’
쟤들은 원래 그래.
싸우기 위해 태어난 건가 싶기도 해.
‘그래도 그렇지……. 선물 사다 준 걸로도 난리라니.’
정도라는 걸 알고 싸워야 할 거 아냐. 선물 가져온 사람 민망하게 둘 다 왜 그래?
나는 싸우고 있는 린과 칼서스를 향해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그만들 싸워요. 대체 왜 하루가 멀다 하고 그렇게 툭탁거리는 거예요…….”
“하지만 단장, 저 자식이 먼저…….”
“쓰읍.”
이 녀석이. 너 올해 스물셋이잖아.
저쪽은 수백 년 묵은 할배라고! 장유유서도 몰라?!
나는 엄한 말투로 린을 다그쳤다.
“웃어른을 저 자식이라고 부르면 돼요, 안 돼요?”
“…….”
린은 나에게 혼났다는 사실이 충격적인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재차 대답을 추궁했다.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그렇지.”
린이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자, 내 옆에 달라붙어 있던 칼서스가 히죽거렸다.
‘이게 진짜…… 내가 네 편 들어 준 줄 알아?!’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이번엔 칼서스에게 일갈했다.
“칼서스.”
“으, 으응?”
“손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굴어야죠. 꼭 그렇게 유치하게 굴어야겠어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하세요.”
“……유의하도록 하지.”
칼서스 또한 내게 혼났다는 사실에 금세 시무룩해져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대화를 나눌 만한 분위기가 되었다.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는, 테이블에서 다섯 발짝 거리에 서 있던 하녀를 불렀다.
“저, 비키 양?”
“네, 네?!”
“들은 것처럼, 저는 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이트가 저를 위해 사 온 파이를 거절하는 것도 마음에 걸려서 말인데…….”
“네, 네!”
나는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하녀에게 일부러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 의미는 없고, 그냥 긴장을 풀어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행동이었다.
“단 음식을 좋아하는 사용인들이 있으면 불러 주겠어요? 다 같이 나눠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아…….”
“부탁할게요.”
“그, 금방 불러오겠습니다!”
하녀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곤, 뛰어나가듯 온실을 벗어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흘긋 보고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숫기가 없으신 분이네.”
그러자 방금까지 시무룩해져 있던 칼서스가 내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바라본 칼서스의 미간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해일.”
“응?”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연인 사이이다.”
“네…… 그렇죠?”
네가 친 구라대로라면 그런 설정이 되어 있었지.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야?
나는 의아해하며 칼서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칼서스가 툴툴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다른 사람을 홀리다니. 이건 질투를 해 달라는 의미인가?”
“제가요?”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황당해하며 대꾸했다.
“제가 언제요?!”
“방금 비키라는 하녀를 홀렸잖는가.”
“아니, 그냥 간식 좀 나눠 먹자고 한 건데……. 그게 어떻게 사람을 홀린 게 되나요?”
황당하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칼서스는 부득불 자신의 말이 맞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네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데 누군들 안 반하겠어. 그대는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좀 알아차릴 필요가 있을 것 같군.”
“아니, 칼서스가 바로 옆에 있는데 누가 저한테 반하겠어요.”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대답하자, 온실 안에 있는 모든 인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
“…….”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왜 대답이 없어요? 맞는 말이잖아요. 여기서 칼서스가 제일 아름답다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 아닌가요?”
잠깐의 공백이 지나가고, 린이 슬쩍 입을 열었다.
“단장, 진짜 그 용이랑 결혼할 건 아니지?”
“응? 잘 모르겠는데, 그건 왜?”
“……단장 진짜 자각이 없구나.”
린이 감탄하듯 내게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죄인이네.”
“죄인이야.”
오르가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단장이 원랜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남을 홀리고 다니는 타입이었다, 이거지?”
“가일 단장님 밑에서 구르면서 성격이 나빠진 거였구나……. 아버지를 닮아서 원래 성격이 나쁜 게 아니었다니…….”
그 말을 얌전히 듣고만 있던 칼서스가 까칠하게 말을 내뱉었다.
“해일은 가일과 전혀 닮지 않았다. 너희가 처신을 잘못해서 해일이 까칠하게 굴었던 거겠지.”
“저 새끼 또 저러네.”
“내버려 둬, 오래 살아서 노망나셨단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의 향연에 따라가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다.
“아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단장님 얘기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걸 모르니까 유죄라는 거예요.”
이 자식들이! 하다 하다 나를 왕따를 시키네.
너희만 이해하고 넘어가면 어떡해. 나도 이해시켜 줘!
하지만 내가 아무리 캐물어도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가 왜 ‘유죄 인간’이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하루를 마무리해야 했다.
* * *
하루 종일 억울함을 성토하던 해일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칼서스는 제 곁에 곤히 누워 잠이 든 해일을 내려다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맹랑한 녀석.”
그의 손끝이 해일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쓸어 올렸다.
“기억을 잃었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다니.”
칼서스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걸렸다. 제 눈앞에서 뻔한 사기극을 벌였음에도, 해일이 밉지 않고 마냥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세계수와 용들은 서로 없이는 살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서로의 상태도, 생각도, 처한 상황도 상세하게 느낄 수 있지.’
그런 칼서스가 느낀 바에 따르면, 지금의 해일은 지극히 ‘정상’인 상태에 해당했다.
‘가일 때문에 다쳤던 목도 이젠 거의 다 아물었다. 후유증이라 할 것도 남지 않았지.’
하지만 해일은 다른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칼서스의 거짓말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기까지 했다. 칼서스가 용이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만큼 철저한 거짓말이었다.
칼서스가 고개를 숙여 해일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해야 했던 건진 모르겠지만…….”
거짓말을 해 가면서까지 내 곁에 남으려 한다는 건 느껴지더군.
“나를 걱정하는 소리가 온종일 머리를 울려서,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느라 곤혹이었어.”
이마에 닿았던 입술이 눈가와 코끝을 지나, 마지막으로 입술에 닿았다. 곧 혀가 입술을 열고 입 안을 헤집는 노골적인 소리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칼서스의 손끝이 해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부드러운 실크 한 겹 아래로 뻗은 늘씬한 허리가 한 팔에 쏙 들어왔다.
“음…….”
잠에 든 해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발의 미인은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다시 평온을 찾고 칼서스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곧 해일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해일이 잠들어 있음에도, 가이딩이 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잠결에도 나를 거절하지 않는군.’
잠든 순간마저도 나를 위해 가이딩을 해 주고 싶어 한다는 의미겠지. 그 사실에 감동과 행복이 함께 밀려왔다.
칼서스는 만족할 만치 그의 입술을 맛본 뒤에 입술을 떼어 내었다. 뜨거운 숨결 사이로 은실이 길게 늘어졌다.
“……가이딩은 이쪽에서 거절할 수도 있어. 쌍방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지.”
칼서스는 잠든 해일에게 충고하듯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애쓰는 네 모습이 너무 귀여운 탓이야.”
네가 이다지도 귀엽지 않았으면, 내가 이렇게 장난을 칠 일도 없었어.
그러니까 조금만 더 내 장난에 놀아나 다오.
조각 같은 미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