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번견 (1)
‘어휴 진짜, 저것도 친구라고…….’
너는 용으로 태어난 덕분에 남의 눈치를 본 적이 없다 이거지?
하, 그럼 지금부터라도 눈치를 보는 연습을 하길 바라. 나라는 갑과 살아가기 위해서는 눈치를 좀 봐야 할 테니까 말이야.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열심히 눈빛으로 칼서스에게 항의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갑작스럽게 목에 무언가가 닿은 느낌이 들더니, 억센 양손이 내 목을 틀어쥐었다.
“커헉!”
“해일!”
숨이 막힌다, 는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뒤에서 가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사이좋아 보이는구나.”
저 미친 새끼가, 친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목을 틀어쥔 가일의 손을 마구잡이로 할퀴며 저항했다. 하지만 가일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끅, 끄흑…….”
“내 앞에서 감히 드래곤에게 목숨을 구걸하다니……. 이 아비가 무섭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단장!”
“해일 단장님!”
그 꼴을 본 린과 오르가…… 그리고 이름 모를 다른 기사들이 가일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린을 말리고 있던 오르가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가일 단장님,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배신자를 처단하고 있다.”
“배신자라니요! 저희를 구하기 위해서 그러신 거잖습니까! 목숨을 빚져 놓고 대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한 소리를 하실 수 있으십니까!”
오르가가 화끈하게 가일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덩치 좋은 사내의 주먹질에 얻어맞은 가일의 몸이 약간 기우뚱했다. 그 덕분에 나도 숨을 한 모금 들이켤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색색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미친 새끼, 원작의 해일이 왜 이 새끼가 전쟁터에서 뒈지길 바랐나 했는데……. 진짜 미친 새끼잖아…….’
친구가 죽어 가는 모습을 목도한 칼서스가 희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해일!”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이 자식의 목을 아예 꺾어 놓겠다!”
가일은 그런 칼서스를 협박하듯 내 목을 쥔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그러자 가일의 팔이며 손을 할퀴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숨…… 막혀…….’
시발, 가일 이 개새끼야.
용 살해자라며. 그런데 왜 애꿎은 사람을 잡고 지랄이야!
“사람……은…… 이지, 마…….”
사람은 죽이지 말아야 할 거 아니야! 어?! 용 살해자면 저기 가서 칼서스랑 정정당당히 싸우라고!
그런데 용 살해자라는 놈이 추접스럽게 인질극 따위를 벌이다니.
아버지로서도 기사로서도 최악이다. 미친놈아.
‘가일 이 개새끼, 꼭 뒤통수를 후려 버릴 거야…….’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의식이 흐려졌다.
* * *
해일이 기절하기 직전, 애절한 시선이 칼서스를 향했다. 그가 벌겋게 변한 얼굴로 힘겹게 웅얼거렸다.
“사람……은…… 이지, 마…….”
그 말을 남기고 해일의 눈빛이 흐려지더니, 이윽고 몸이 축 늘어졌다. 그 꼴을 지켜보던 칼서스가 해일을 향해 중얼거렸다.
“사람은 죽이지 말라고……?”
그런 말이…… 어떻게 지금 이 상황에, 목이 졸리고 있는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올 수 있단 말인가.
칼서스가 신음처럼 읊조렸다.
“끝끝내, 마지막까지…… 타인만을 생각하는구나.”
자신을 깎아 타인을 살리는 행위는, 결국 스스로의 파멸만을 안겨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는 기어코…….
칼서스의 표정에 괴로움이 깃들었다. 동시에 해일이 기절하는 모습을 본 린의 잇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단장!!”
“이 미친 새끼가!!”
가일을 붙들고 있던 오르가가 다시금 주먹을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가일의 콧대가 부러져 피가 흘렀지만, 그럼에도 그는 즐겁다는 듯 키득거렸다.
“내 아들을 꽤 많이 좋아하는 것 같구나. 칼서스 데포트.”
“…….”
“이 희멀건 놈이 죽는 게 그리도 마음이 아프더냐? 그렇다면 이리 와서 네 목을 내놓으면 된다.”
가일이 두툼한 손으로 기절한 해일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칼서스와 해일을 싸잡아 조롱하는 행위였다. 단장이 모욕당하는 모습을 본 린과 오르가가 분노했다.
“가일, 이 미친놈이……!”
“감히 단장님을!”
린의 잇새에서 이가 갈리는 부드득 소리가 튀었다. 그녀가 매서운 얼굴로 칼서스를 돌아보며 외쳤다.
“칼서스 데포트!”
“쓸데없는 말을 할 거라면 죽이겠다.”
“쓸데없는 말 아니야!”
아름다운 남자의 시선은 올곧게 해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본 린은 확신을 얻었다.
“협조해라! 단장을 살려야 해!”
“……그쪽이라면 어울려 주지.”
형제를 모두 앗아 간 인간들과 손을 잡다니. 불쾌해 마지않는 짓이지만…….
“해일을 위해서.”
지금 당장 해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불쾌함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하리라.
대답을 들은 린이 오른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엘프의 피를 계승한 자가 명한다! 테라시아, 지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위풍당당한 외침이 울려 퍼진 직후, 하늘에 거뭇하게 끼어 있던 먹구름이 한 방향으로 회전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여든 구름은 곧 거대한 매가 되어 날갯짓을 시작했다.
린이 소리쳤다.
“테라시아! 폭풍으로 일대를 뒤집어 버려!”
[계승자의 명을 받듭니다.]
린이 맹렬한 기세로 마나를 쏟아 내자, 그에 맞춰 매가 무서운 속도로 땅을 향해 하강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땅에 부딪친 매가 다시 구름이 되어 퍼졌다. 퍼진 구름이 ‘지지직’ 하고 스파크 튀는 소리를 내며 가일의 주변을 뒤덮었다.
“시야를 막는다고 해서 내가 검술을 펼칠 수 없을 것 같나?!”
가일이 짜증을 내며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자, 그곳을 기점으로 전류가 튀었다. 놀란 가일이 부릅뜬 눈으로 제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플레이트 아머가 피뢰침 역할을 하도록, 일부러 뇌전을 다루는 정령을 불러낸 건가!’
꼼짝없이 구름 속에 갇히게 된 가일이 분노로 그르렁거리며 소리쳤다.
“네놈! 황명에 거스르겠다는 거냐!”
“황명은 어디까지나 해일 단장의 생환을 위해서 내려진 거였어! 황명을 어기고 있는 건, 가일 당신이라고!”
“감히!”
“나는 당신을 따르는 기사가 아니야! 당신의 명령은 듣지 않아!”
린이 표독스러울 정도로 꿋꿋한 얼굴로 내밀었던 오른손을 쥐었다. 그러자 흩어졌던 구름이 가일을 기점으로 휘몰아치며 모여들었다.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황제 폐하와 해일 단장, 단 두 사람뿐이야!”
내질러진 비명을 들은 가일의 표정이 완전히 구겨졌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스멀스멀 오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테라시아의 뇌전을 막기 위해서 오러 서클을 개방한 것이다.
“이 개자식들……. 다들 수치도 모르고 용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라니.”
피처럼 붉은 오러가 넘실거리며 가일의 몸을 뒤덮었다. 가일은 그 직후 해일을 내던지고 먹구름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손아귀에 들린 신검, 그람이 맹렬하게 린을 향해 휘둘러졌다.
“용과 함께 죽어라! 제국의 명예를 위해!”
휘둘러진 검에 린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빛이 터져 나오며 칼서스가 본체로 돌아갔다. 웅대한 용으로 변한 칼서스가 제 몸으로 린을 향하던 검날을 막아 냈다.
[정녕 돌아 버린 게냐! 피아도 구분하지 못하는 게야?!]
“용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기사는 필요 없다!”
[미치광이 같으니!]
“제국을 빛낼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오명을 뒤집어쓸 것이다!”
자세를 재정비한 가일이 이번에는 칼서스를 노리고 오러를 두른 검을 휘둘렀다. 그 틈을 타 전투에서 빠져나온 린이 황급히 해일의 상태를 확인했다.
“해일 단장, 제발, 제발…….”
그녀의 뒤를 이어 달려온 오르가가 린에게 물었다.
“단장은 어때?”
“……숨소리가 너무 약해.”
린이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푸르스름하게 변한 해일의 목을 내려다보았다.
“뼈가 부러진 건가? 아니면 기도가 부은 걸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회복 계통의 정령하고도 계약을 해 두었을 텐데. 멍청한 과거의 나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무력감에 잡아먹힌 린의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계약자. 용에게서의 전언입니다.]
“……뭐?”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리에 린이 고개를 들고 테라시아를 바라보았다. 테라시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곧 권능을 사용할 것이니, 해일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라. 해일의 위치는 파악할 수 있으니 어디라도 상관없다. 또한 해일은 위중한 상태가 아니다. 이번만큼은 나를 신뢰하라. 용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
[그러니 지금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지요.]
그 말을 듣자마자 오르가가 자신의 품을 뒤적거려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그가 분노와 흥분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어.”
“정말? 어디로 연결되는 스크롤인데?!”
“……카일로스 백작저로.”
그 말을 들은 린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오르가가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네가 고초를 좀 겪겠지만, 뭐 어쩌겠어. 단장을 구하는 게 우선이지.”
“…….”
“아니야?”
오르가가 질문을 던지자, 린이 얼굴을 마구잡이로 구기더니 끙끙 앓았다.
“……가자! 가야지! 어쩌겠어!”
“좋아. 네가 가겠다고 한 거야!”
대답이 돌아오자, 오르가가 단검을 꺼내 양피지로 된 스크롤을 힘껏 찢어 버렸다.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세 사람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 직후 세상을 뒤덮어 버릴 듯한 기세로 불기둥이 솟구쳐 일대를 휩쓸었다.
그날, 칼서스의 권능으로 인해 데포트 산맥의 절반이 사라졌다.
놀랍게도, 그런 재앙 속에서도 마치 누군가의 자비처럼 기사단원과 마탑의 마법사들은 모두 살아서 제국의 수도로 귀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