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붉은 수사자 (5)
가일은 잔뜩 얼어 있는 나를 보며 이를 드러내 보였다. 웃는 것 같기도 했고, 먹잇감을 보고 즐거워하는 짐승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어 보일 표정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린의 부축을 받으며 적토마-같은 말-의 위에서 내려오자 가일이 성큼 다가와 말을 붙였다.
“꽤나 흥미로운 사건을 겪었더구나.”
“…….”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가일이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아귀가 내 턱을 강하게 틀어쥐더니, 내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덕분에 목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윽!”
턱을 부술 셈이야?! 이 미친 새끼야, 얘 네 아들이잖아!
게다가 친자가 맞다고 신전에서 꽝꽝 도장까지 찍어 준 애잖아?!
‘사람 죽일 일 있어?!’
내가 고통스러워하건 말건, 가일은 키득키득 웃으며 내 뺨을 으스러트릴 기세로 꾹꾹 눌러 댔다.
“잘했다. 기사로서의 자질은 영 마뜩잖다고 생각했는데, 반반한 얼굴로라도 이 아비에게 도움을 주는구나.”
이 시발, 기사로서의 자질이 영 X같았으면 기사 말고 다른 직업군으로 키웠어야 할 거 아냐.
자질이 뭐 같은데도 기사로 키워 놓은 건 너거든?! 싹수가 별로니 어쩌니 하기 전에 네 안목부터 다시 갈고닦든가 해!
‘그리고 난 입대하기 싫다고! 자질이 없으면 전역시켜 줘!’
짜증이 난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가일을 노려보자, 가일이 껄껄 소리를 내며 웃더니 내 턱을 놓아주었다. 나는 아려 오는 턱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미친놈과 거리를 벌려 섰다. 목이 아파서 그런지, 기침이 콜록거리며 새어 나왔다.
“그래도 한 곳이나마 쓸 만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 원 참…….”
“…….”
“너는 먼저 기사단으로 돌아가 있거라. 용은 내가 사냥하마.”
“……하.”
……진짜 존나 싫은데, 여기서 싫다고 하면 탈영으로 취급되나요?
‘그리고 진짜 탈영에 해당되면, 개작두로 썰리는 엔딩이 되는 거지?’
여긴 전근대 시대고, 상명하복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계급제 사회니까.
‘젠장, 난 그냥 조용하게 소시민의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인데…….’
대체 왜 나한테 찾아와서 이러시는 건가요…….
나를 가만히 둬 주세요……. 마리모처럼 있는 듯 없는 듯하게 취급해 달란 말이야…….
나는 암울한 표정으로 가일을 노려보다가, 이내 목을 큼큼 두어 번 가다듬었다.
‘모르겠다 시발. 진지한 척 구라 좀 까면 되겠지.’
<군대 가기 vs 아빠한테 거짓말하기>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99.999%의 시민이 후자를 고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99.999%의 평범한 시민 중 하나일 뿐이야.
그래, 이건 당연한 일이야.
당연한 일!
나는 정신 승리……. 아니 합리적인 계산을 마친 뒤 표정을 굳혔다.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는 척을 한 뒤, 무거운 목소리로 가일에게 말을 붙였다.
“……위험합니다.”
“뭐라고?”
가일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나는 면목이 없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마지막 용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저를 탈환해 가셔도, 제게 걸어 둔 권능으로 위치를 추적해 와 재차 잡아갈 거예요. 어쩌면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르죠.”
“…….”
“저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습니다. 희생하는 건 저 하나로 족해요.”
중얼거림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나는 파리하게 질린 안색들을 훑어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하나만 여기에 남으면 다 해결되는 일입니다. 용도 저를 제외한 인간에게는 관심이 사라진 모양이에요.”
그쯤 이야기하니 가까이로 다가왔던 마법사 몇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그 반응을 확인한 뒤, 슬쩍 린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너도 칼서스 그 사기 캐가 손짓 한 번으로 널 무력화시켰던 거 기억하고 있지?’
린은 내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그걸 ‘동의’의 의미로 생각하고 다시 가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단장 직위는 린 멜리온에게 물려주면…….”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뒤쪽에 서 있던 린이 달려들어 내 옷자락을 와락 부여잡았다.
“싫어!”
당황한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린을 내려다보았다. 린의 하얀 얼굴 위에 어느새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단장……. 혼자서 뭐든 다 책임지려고 하지 마! 우리가 있는데 왜 뭐든 혼자 하려고 하는 거야……!”
검은 머리칼에 남색 눈을 가진 기사가 나서서 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린, 진정 좀 해. 단장이 가일 단장님하고 대화 중이잖아.”
“비켜, 오르가 이 겁쟁이 새끼야!”
방금까지 찔찔거리던 린이 악귀 같은 표정을 짓고는 오르가라고 불린 사내의 명치를 후려쳤다.
주먹에 얻어맞은 오르가가 ‘커헉’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와……. 작아도 기사는 기사구나…….’
주먹 한 방에 저렇게 덩치 좋은 남자가 픽 쓰러지냐…….
나는 까불지 말아야지.
놀라서 뻣뻣하게 굳어 있는 사이, 린이 내 소매를 다시금 잡아끌었다.
“단장! 왜 단장이 희생해야 하는 거야? 영웅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런 거야?”
“린……, 그게 아니라…….”
“그런 거면 영웅이 무슨 소용이야?! 눈부신 명예가 무슨 소용이냐고! 아들 하나 지키지 못하잖아!”
“말 좀…….”
내가 말하겠다잖아! 내가! 왜 내가 입을 열 틈을 안 주는 거야?!
설마, 이 녀석…….
‘단장 직위에 앉기 싫어서 이러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필사적으로 날 복귀시키려고 하는 거야?!
“나는 단장의 단원이야, 내가 단장이 되는 일 따위는 싫어. 단장. 돌아가자, 이만 가자…….”
“너…….”
너 인마, 역시 단장 직위가 얼마나 바쁜지 알고 있어서 날 희생시키려고 하는 거지?!
야, 이 속 시커먼 자식아!
‘귀염둥이 캐릭터라고만 생각했는데, 순 악마네 악마! 어떻게 남을 재입대시킬 수가 있어!’
내가 황망해하고 있자, 가일이 성큼성큼 걸어 나오더니 린의 팔뚝을 붙잡고 옆으로 확 밀쳐 냈다.
“비켜라 계집, 방해된다.”
“윽!”
가일의 굵직한 손가락에 잡힌 린의 표정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그 꼴을 보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미쳤냐?! 왜 네 반쪽만 한 애를 밀치고 지랄이야!’
너 이 미친 사디스트 새끼!
왜 자질 없는 애를 기사로 만들어 놨나 했더니, 사람 괴롭히는 게 취미라 그랬구나?!
‘야, 인마 아무리 그래도 너보다 스무 살이나 어린 애한테 손찌검하는 건 아니지! 나이를 생각해 새끼야!’
꼰대 기질이 발동한 탓에, 나는 그만 홧김에 가일의 손을 잡아채 버리고야 말았다. 가일이 나를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며 물었다.
“뭐 하자는 거지?”
……나도 몰라, 미친놈아.
나는 버퍼링이 걸린 스마트폰처럼 잠시 머뭇거리다가, 급하게 떠올려 낸 변명을 입에 올렸다.
“……제 부하에게 손대지 마십시오. 린 멜리온은 어디까지나 제2기사단의 단원. 제1기사단의 단장이라 하더라도 그녀에게 사사롭게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애틋하구나.”
“부하니까요.”
그 말에 납득이라도 했는지 가일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주변을 흘긋 둘러보자, 많은 사람들이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내가 개소리를 했다고 지적하지 않았어……! 다행이야, 정에 호소하자는 작전이 먹힌 거구나!’
나는 작전이 통해서 기쁜 나머지, 약간 자신만만해져서는 주제도 모르고 가일의 어깨를 손으로 떠밀었다.
“여기서 떠들 시간 없습니다. 빨리 돌아가십시오.”
“나는 용을 잡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는다.”
“당신에게는 무리라니까요!”
그 말을 들은 가일이 온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리며 그르렁거렸다. 그 꼴이 꼭 광견병에 걸린 짐승 같았다.
“네가 뭘 안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뭘 알긴, 내가 이 소설을 몇 번 정독했는지 알아?!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 인마!
나는 화가 난 가일에게 호기롭게 소리쳤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칼서스 데포트는 아버지가 꺾을 수 없는 용이에요!”
왜냐면 걔는 네가 꺾기도 전에 이미 꺾여 있던 새끼거든!
그건 내가 제일 잘 알아! 내가 봤어!
‘그러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좀 가! 내 낙원에서 꺼져! 칼서스랑 오순도순 살게 내버려 두라고!’
가일은 내가 자신에게 대들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이를 갈았다.
“이……!”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정원이 왜 소란스럽나 했더니…….”
“이 목소리는…….”
“불청객이 와 있었군그래.”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저 능글거림!
‘칼서스, 야 임마! 왜 이렇게 늦었어!’
빛무리에 휩싸인 아름다운 엘프가 고고하게 손을 휘두르며 허공에서 나타났다. 나는 드러내 놓고 반가워하지 못하는 괴상한 낯으로 칼서스를 바라보았다.
‘시발! 집주인아, 얘들 다 돌려보내 줘! 내 평생직장을 잃을 수는 없어!’
반가워하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칼서스가 돌연 멋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네 부하에게 손댈 일 없어.”
“칼서스…….”
그거 말고, 이 새끼야. 쟤들 돌려보내라고.
수신 에러가 나도 정도가 있지, 저 새끼는 왜 저렇게 눈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