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드래곤의 항우울제가 되었다-14화 (14/101)

14.

붉은 수사자 (4)

간단한 전략 회의가 끝난 뒤, 가일은 소수 정예를 차출해 데포트 산맥으로 출진했다. 산맥의 가장자리에 닿았을 무렵, 마탑 출신의 마법사가 곤혹스러운 낯으로 말했다.

“마나가 감지되지 않습니다. 권능으로 술식의 흔적을 흩어 놓은 것 같습니다.”

가일이 무심하게 질문했다.

“꼬리를 잡을 수는 있겠는가?”

“그것이, 저도 잘…….”

마법사는 이렇게 넓은 반경을 일일이 조사하기는 어렵다는 말을 덧붙이더니, 멋쩍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가일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쯧, 탐지 마법이 주력이라기에 데려왔더니…….”

힐난을 들은 마법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린이 마법사의 앞에 끼어들며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네가?”

가일은 린이 못 미덥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린은 그런 가일을 경멸하는 눈으로 노려보다가, 말없이 후드를 눌러쓰고 말을 몰아 일행의 선두로 나아갔다.

“엘프의 피를 계승한 자가 명한다.”

린이 오른손을 내밀어 마나를 불러일으키자, 마나 코어로부터 막대한 양의 마나가 쏟아져 나왔다. 쏟아져 나온 마나가 일대의 땅으로 스며들자, 웅장한 땅울림이 일었다.

마나를 쏟아 낸 린이 재차 오른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히포리눔, 계승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자 선두를 달려 나가는 린의 옆으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피어오른 흙과 모래는 곧 말의 모습을 이루더니 린의 곁에서 힘차게 발을 구르며 보폭을 맞춰 달렸다.

린이 곁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일대를 샅샅이 살펴 줘. 조금이라도 용의 흔적이 느껴지면 바로 알려 주고. 마나는 얼마든지 써도 괜찮으니, 네 휘하의 정령들도 사용해.”

[그리하겠습니다.]

히포리눔이라 불린 정령은 간결한 대답을 남기고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땅의 여기저기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더니, 개나 고양이 따위의 모양을 한 노움들이 솟구쳐 올랐다.

수많은 정령들을 본 가일이 짧게 감탄을 터트렸다.

“상당한 양의 마나군.”

가일이 무심한 눈으로 정령의 수를 살폈다. 대략 서른 마리에서 쉰 마리 정도가 되는 정령이 모인 것 같았다.

‘이 정도의 마나 소모량에도 끄떡없다니, 실력이 나쁘지 않군. 데포트의 용에게 순식간에 패배했다기에 그저 그런 녀석이라고 생각했거늘…….’

가일이 비릿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는 녀석을 왜 부단장으로 꼽았나 했더니……. 엘프에 비견되는 마나 코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나.”

이걸 보면 내 아들도 영 글러 먹은 녀석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가일은 즐겁다는 듯 웃으며 후미의 기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선두에 있는 린 멜리온이 향하는 방향으로 따라 달리라는 내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에서 사라졌던 히포리눔이 돌아왔다. 그 즉시 린이 말의 고삐를 놓고 히포리눔의 위로 뛰어올랐다.

등 위에 린을 앉힌 히포리눔이 말했다.

[용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린이 물었다.

“어디서?”

[이 산의 반대편, 그리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간 위치에……. 아티팩트 비슷한 것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자연적인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해집니다. 공간 왜곡 술식이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오가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린이 슬쩍 고개를 돌려 가일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자 가일이 눈짓으로 안내하라는 신호를 던졌다.

신호를 받은 린이 정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 위치로 안내해!”

* * *

<슈덴베르트력 3월 14일>

지금 시각은 오전 9시다.

왜 아침 댓바람부터 일기를 쓰게 됐느냐면, 이 망할 도마뱀 새끼가 내 침대로 기어들어 왔기 때문이다.

한 대 쥐어 패고 설명을 듣자 하니, 새벽에 갑자기 발작 같은 것이 일어나 찾아왔다는 것 같다.

아니, 발작이 일어났으면 순순히 날 깨워서 가이딩을 해 달라고 부탁할 것이지…….

대체 왜 남의 웃옷을 벗겨 놓고 더듬거리고 있느냔 말이다.

이 우울증 드래곤은 동의 없는 스킨십이 범죄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걸까?

아무리 여기가 헌법도 없는 봉건주의 국가라지만, 적어도 도덕과 양심이라는 개념은 있을 텐데……. 칼서스는 용이라 해당 사항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요약하자면, 아침 댓바람부터 칼서스와 신나게 주둥이를 비볐다는 소리다.

이 망할 도마뱀은 몇 번의 가이딩 끝에 이상한 결론을 얻은 건지, 이젠 바로 주둥이부터 들이미는 습관이 생겼다.

강아지도 저 새끼만큼 양심이 없지는 않을 텐데. <기다려> 훈련이라도 시도해 봐야 할 것 같다.

참고로 칼서스는 가이딩을 받고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네가 좋아할 만한 책을 좀 사 올게.’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이 우울증 드래곤을 정말 어째야 할까.

글자를 쓰던 손이 뚝 멈춰 섰다.

나는 심란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일기야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쓰는 게 맞으니 담백하게 적었지만…….

사실 지금 내 기분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발작이 일어났다는 거 보면, 저번에 린 때문에 능력을 쓴 여파가 남은 것 같은데…….’

하루에 최소 두 번, 많으면 다섯 번까지 가이딩을 해 주고 있다. 그런 생활을 며칠이나 지속했으니, 계산해 보자면 가이딩을 한 횟수가 꽤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상태가 많이 나아져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걸로는 부족했던 건가?’

아니면 린에게 사용한 권능이 생각보다 더 마나 하트에 부담을 주었다거나? 그렇다면 앞으로 칼서스는 몇 주나 더 요양을 해야 할 텐데…….

‘가볍게 권능을 사용하는 횟수도 줄여 봐야 할까? 목욕이나 식사를 권능으로 해결하는 것도 어쩌면 은근하게 부담이 됐는지도 몰라.’

똑똑.

‘아니면 내가 예상한 것보다 기존에 마나 하트가 더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거나…….’

쿵쿵, 쿵쿵쿵!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뭔가를 두드리거나, 아니면 힘차게 발을 구르는 소리 같은데.

이런 소리는 층간 소음이 만연한 한국에서나 들어 봤지, 여기서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칼서스가 돌아온 건가?’

나는 들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확 젖혔다. 그러자 커튼 너머에 있던 아름다운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린?”

내가 당황스러워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린은 기세 좋게 주먹을 휘둘러 유리창을 와장창 깨트렸다.

나는 얼굴로 날아오는 유리 조각을 막기 위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린이 내밀어진 손을 붙잡으며 반갑게 소리쳤다.

“단장, 구하러 왔어!”

야, 이 또라이 새끼야! 왜 가만히 있는 창문을 깨고 난리야!

‘애초에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 거지?!’

칼서스 이 새끼, 둥지를 날림으로 지어 둔 건가?! 부실 공사야?!

하지만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유리 조각이 계속해서 얼굴로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린은 내가 곤혹스러워하는 줄도 모르는지, 내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단장,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빨리 올라타!”

“잠, 깐……!”

“망할 용이 알아채기 전에 얼른 가야 해! 다들 기다리고 있어!”

말라 보이는 체구와는 다르게, 손을 잡아끄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얼떨결에 짐짝처럼 끌려가 말의 등 위에 올라타게 되었다.

‘안 돼! 내 평생직장!’

돌아가면 군대에 입대해야 하잖아!

한국에서도 난치병 환자라고 면제받았던 군대를 왜 여기까지 와서 가야 해?!

‘절대 안 갈 거야! 싫어! 나는 천성이 여려서 군대 같은 거랑 안 어울린단 말이야! 인간 살려!’

하지만 린은 반항할 틈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는지, 곧바로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화아악!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달리고 있는 자동차 창문을 연 것처럼 ‘훙훙’ 하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나는 기겁하며 고개를 숙여 말의 목덜미에 납작 엎드렸다.

‘이 말 왜 이렇게 빨라, 적토마냐?!’

자동차에 버금갈 정도인 것 같은데, 이 세계관의 말은 대체 무슨 마개조를 거친 거야?!

‘잠깐, 애초에 서재는 3층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말이 3층 창문 너머에서 등장할 수가 있지?’

……이거 무슨 괴담이야? 나 지금 괴담 속 주인공이 된 거야?

대체 어떻게 하면 말이 공중을 달릴 수 있는 건데?

내가 몰아치는 바람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할 무렵, 린이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왔어, 해일 단장!”

그 말이 사실인 듯,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던 말의 발굽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귀를 때리는 바람 소리도 점차 느릿해졌다.

나는 그러고 나서야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

목적지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건 수십의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그 중심에 팔짱을 끼고 선 붉은 머리칼의 사내였다.

붉은 머리칼의 남성은 사자 갈기처럼 이리저리 뻗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듯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을 마주한 순간, 생각난 인물이 있었다.

‘붉은 기사, 가일…….’

보기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저 분위기. 그가 바로 주인공 해일의 친부, 가일 트레클리프 딘이 틀림없었다.

‘시발…… X됐다.’

나 진짜 이대로 입대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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