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햇살 같은 구원자 (4)
무심코 버릇대로 입술을 맞댄 순간,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아, 미친. X됐다.’
남들 보는 앞에서 버릇처럼 주둥이부터 맞대 버렸잖아.
씨발. 어떡하지. 방금 내가…… 주인공의 가오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은데.
그것도 물에 푹 퍼져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너덜너덜해진 휴지 조각으로…….
‘가일이 알면 내 목을 참수하겠다면서 길길이 날뛰겠네…….’
호적에서 파이는 정도로 끝나면 좋겠다…….
‘해일 트레클리프 서’가 아니라 ‘해일 서’도 그렇게 나쁜 어감은 아니……,
‘아니다. 더 이상 기사가 아니니까 뒤에 붙는 성씨도 압수당하겠구나.’
뭐야, 그러면 그냥 해일이 되겠…….
“훌쩍…….”
아, 젠장! 미친! 시발!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눈물까지 터져 버리는 건데!
‘먼치킨 주인공을 코찔찔이 울보로 만들어 버리다니, 최악이야!’
나가 죽어! 대체 어디까지 망가질 셈이야!
다 커서 애처럼 울면 기분 좋냐?!
나는 완전히 멘탈이 나간 채로, 고개를 푹 숙여 칼서스의 어깻죽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마 찔찔거리고 있는 꼴을 주인공의 동료들에게 보여 줄 수 없어서였다.
나는 비굴하게 칼서스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카, 칼서스……, 나 하나면 충분하잖아. 응?”
“…….”
“그냥…… 그냥 가자.”
어차피 세계수니 나발이니 하는 능력은 나한테밖에 없는 거잖아? 너한테 다른 인간은 별 의미 없는 미생물이나 비슷한 거지, 그렇지?
‘그럼 그냥 무시해 버리고, 사이좋게 둥지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이대로 있으면 내가 ‘쪽팔려서 접싯물에 코 박고 뒈진 최초의 인간’ 타이틀을 딸 것 같거든.
‘너도 가이딩 해 줄 수 있는 인간 잃기는 싫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그만 화내고 가자고!
싸움 같은 거 안 해도 우리 잘 먹고 잘 살 수 있잖아!
칼서스는 훌쩍훌쩍 우는 나를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뭐가 ‘그렇군’이야, 씨발!
너 지금 나 놀려?!
내가 벌컥 화를 내려던 찰나, 칼서스의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단단하고 너른 손바닥이 내 등을 다정스레 다독였다.
“엇…….”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만 돌아가야지.”
아,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진작 진정하고 돌아갈 생각이나 할 것이지.
‘나이를 처먹었으면 나이 어린 애들이 하는 헛소리는 적당히 흘려들어야 하는 거야. 어른이 어린애랑 똑같이 싸우는 거 되게 꼴불견이고 못 할 짓이거든?’
저기 있는 애는 스물세 살인데, 그런 애랑 진지하게 싸우고 싶어?
네가 스무 살이야? 어?
‘다 늙어서는 채신머리없이 뭐 하는 거야.’
나는 짜증과 불만을 잔뜩 담은 눈으로 위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도리어 칼서스의 입가에 피어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변태 새끼…….”
“칭찬 고맙군.”
칼서스는 웃으며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 꼴을 본 린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질문했다.
“자, 잠깐…… 둥지로 돌아간단 소리야?”
“용에게 그곳 말고 돌아갈 곳이 어디에 있겠나.”
하긴, 세계수가 사라진 세상에서 용이 돌아갈 곳이 둥지 말고 더 어디 있겠어.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린을 돌아보았다. 린은 그런 나와 칼서스를 번갈아 보며 재차 물었다.
“……해일 단장을 데리고 가는 거야?”
“당연하지.”
칼서스는 예쁘게 눈웃음을 치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참고로, 해일을 인간들에게 돌려보낼 생각은 없다. 이 녀석은 이제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할 테니까.”
그 대꾸에 린이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칼서스가 권능을 사용했다. 그러자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이윽고 눈에 보이는 장소가 수도 외곽의 골목에서 둥지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 * *
해일과 광룡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골목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골목에 남겨진 린은 텅 빈 눈앞을 몇 초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달려가 부축을 해 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린이 중얼거렸다.
“해일 단장이…….”
“린…….”
“단장이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잡힌 거야…….”
린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어느새 흘러나왔는지 모를 눈물이 그녀의 갸름한 뺨을 타고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우리, 우리를 무사히 돌려보내려고, 광룡하고 거래를 한 거였어. 그래서 탈출하는 길에 함정이 발동하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우리가 무사히…….”
“린, 진정해.”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비명 소리 같은 고함이 골목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주저앉아 있던 린이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멀거니 서 있던 두 사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희도 단장이 울면서 광룡한테 비는 꼴을 봤잖아! 제발 우리만큼은 살려 달라고 말하는 거 다 봤잖아!”
“…….”
“그런데도 지금 그딴 소리가 나와?! 너희가 그러고도 자랑스러운 제국의 기사야?! 뒤에서 입 다물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한 주제에 어딜 감히 나한테 진정하라 마라야!”
싸늘한 일갈에 덩치 좋은 기사들의 입이 꾹 다물렸다.
린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닦아 내면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닦아 내면 닦아 낼수록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나와 발그레한 뺨을 엉망으로 물들일 뿐이었다.
린은 비탄에 빠져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 가일 단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존심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던 놈이야……. 평생을 소나무처럼 우직하게 살았던 놈이라고…….”
“…….”
“그런 놈이 광룡의 놀잇감으로 전락했다니, 내가 그 꼴을 보고 어떻게……. 어떻게…….”
린은 태어나 처음 울음을 터트린 아이처럼 서럽게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다 우리 때문이야, 우리가 해일 단장한테 너무 의지해 버린 거라고……. 혼자 가겠다는 걸 말렸어야 했는데…….”
붉은 머리칼 위로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린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훌쩍였다.
“우리가 단장의 인생을 망친 거나 다름없어……. 우리가 잘못 판단해서 단장이 저런 꼴이 된 거야…….”
그 말이 기점이라도 된 것처럼,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선 셋은 비를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한참이나 비를 맞고 있던 덩치 좋은 갈색 머리의 기사, 예이트 셴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수수하고 단정하게 생긴 외모와 다르게, 눈에 띄게 독특한 잿빛의 눈이 희번덕 빛났다.
“아직 기회는 있어.”
“…….”
예이트가 말을 고르는 것처럼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한마디를 던졌다.
“가일 단장님께…… 부탁해 보자.”
그 말을 들은 흑발의 기사, 오르가 카일로스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해일은 가일 단장님의 아들이잖아. 나이가 들어서 기량이 떨어지셨다고는 해도 그분만큼 뛰어난 기사는 찾기 힘들어. 게다가 해일 단장은 그분의 유일한 후계자잖아?”
그는 카일로스 백작가의 삼남으로, 귀족의 섭리를 잘 아는 자였다. 오르가가 스스로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예이트의 말에 힘을 실었다.
“귀족 가문에서 장남이란 곧 가문의 기둥이나 다름없어. 가일 단장님도 해일 단장이 생존해 계신다는 걸 알면 우리를 도와주실 거야.”
린은 그 말을 듣고도 희망을 느끼지 않았는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틀렸어…….”
“린?”
“가일 단장은 우리를 도와주실 생각이 없어……”
“……네가 그걸 어떻게 확신해?”
오르가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되묻자, 린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사실, 내가 그 빌어먹을 새끼한테 이미 물어봤거든…….”
“…….”
“우리가 돌아오고 첫 번째로 열렸던 사교 파티에서……. 내가 그날 술김에 해일 단장을 구하러 가자고 떼를 썼는데…….”
기억을 더듬어 가는 린의 얼굴이 점점 더 파랗게 질려 갔다.
“그때…….”
두려운 기억을 일부러 파헤치는 듯, 린의 표정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사자 갈기처럼 제멋대로 뻗친 붉은 머리칼과, 붉은 눈을 가진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일, 그는 피를 뒤집어쓴 것 같은 붉은 제복을 갖춰 입고는 굶주린 수 사자처럼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린을 내려다보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2기사단의 부단장인가.
그는 제 아들을 구하러 가자는 말을 듣고도, 이렇다 할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생판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무심한 태도에 본능적으로 거북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가일은 차분하게 샴페인 한 잔을 비우더니, 작은 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더랬다.
-쓸모없는 것 같으니. 세계수도 없는 용 하나를 잡아 죽이지 못했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걸 그랬어.
그건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해일 단장을 구하는 데, 인력을 들이는 게 낭비라는 대답을…… 들었어…….”
린은 그날의 기억을 되짚으며,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그자는 해일의 아비가 아니라, 해일이라는 장기 말을 쥔 미치광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자가 장기 말의 생존을 알았다고 해서, 뒤늦게나마 그를 구하려 들까?
장담컨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