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햇살 같은 구원자 (1)
인간이 둥지에 찾아온 날 이후로, 나는 매일 아침마다 인간을 만나 포옹이나 키스 따위를 통해 가이딩을 받았다. 그 대가로 나는 가벼운 권능을 사용해 인간을 보송보송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는데, 가이딩을 받을 수 있는 덕분인지 부담은 그리 크지 않았다.
‘실험을 해 본 결과, 차도가 더 명확하게 느껴지는 쪽은 키스였지.’
하지만 효과가 두드러지게 좋은 만큼 인간이 느끼는 부담도 큰 탓에, 키스를 통한 가이딩은 자주 요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생각한 것보다는 잘 버텨 주고 있는 편이다. 용케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어.’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처음 손을 잡은 순간 목숨을 끊으려 들었을 텐데. 기이하게도 이 인간은 밀물 같은 우울감에도 생존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지.’
도리어 감정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중심을 잡고 있다고 말하는 쪽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이 인간의 정신은 기이할 정도로 강직하고 단단한 것 같았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칼서스가 제 옆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해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아귀에는 방금까지 칼서스가 쥐고 있던 술잔이 고스란히 들려 있었다. 해일은 한 손으로 책을 한 장 넘기며, 빼앗은 술을 가볍게 홀짝였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까지 당차고 겁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한낱 인간이 드래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술잔을 빼앗더니, 그걸 본인이 죄 마셔 버리기까지 하다니. 누가 이 광경을 믿을 수 있을까.
고작 육칠십 년을 살다 갈 인간이, 수천 년을 사는 드래곤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심지어는 걱정하고, 기어오르기까지 한다니. 보통의 인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짓이었다.
칼서스가 고요한 눈으로 해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트레클리프 가문이라면 그 빌어먹을 <붉은 기사> 가일의 후손일 텐데.’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나.
햇살처럼 포근한 색의 머리칼이나, 바다처럼 파란 눈, 조금은 맹하게 느껴질 정도로 순한 성격까지.
그 어느 부분도 ‘우락부락하고 험상궂으며 예의나 도덕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던’ 가일과 닮지 않았다.
아니, 가일의 단점을 모조리 장점으로 바꿔 놓은 사람만 같았다.
‘어머니를 닮은 건가?’
모계를 통해 귀족적인 외모와 다정하면서도 사려 깊은 성정을 물려받아서 해일이 이렇게 이타적인 존재로 자라난 걸까?
‘그렇다 치기엔……. 영 귀족 세상에서 살아온 녀석 같지가 않단 말이지.’
지나치게 순박한 사고방식하며, 실리를 따지지 않고 타인을 도우려 하는 태도나, 거절을 잘 못 하는 점까지.
그건 귀족보단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평민에 더 가까운 성격이라 할 수 있었다.
칼서스가 해일을 관찰하듯 내려다보다가, 이내 한마디를 툭 건넸다.
“해일.”
“네?”
“키스할까.”
“아? 네.”
한마디를 던지자, 해일은 이유를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칼서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칼서스는 포근한 향을 풍기는 몸을 품으로 당겨 오며, 부드러운 입술을 달게 받아 삼켰다.
해일은 거절하지 않고 칼서스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휩쓸렸다.
‘무르고 순진하다.’
이용당하기 딱 좋을 만큼.
‘이래서야 평생 다른 귀족에게 이용만 당할 텐데…….’
칼서스는 조금 심란한 마음으로 해일과 혀를 얽었다. 그러자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햇볕처럼 따스한 감정이 밀려들어 왔다. 그 부드러움에 마음이 녹아내린 칼서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대가를 요구해 주겠지?’
인간은 물욕이 강하고, 이기적인 종족이니까. 암만 순한 해일이라고 해도 언젠간 바라는 것이 한두 개는 생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러니 지금은…….’
이 달콤한 과실을 맘껏 즐기는 것에 집중하는 게 좋겠지.
칼서스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입술을 깊게 맞물고는, 해일의 혀를 성급하게 빨아 당겼다.
그와의 가이딩은 폭풍우 치는 바다 같은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혀 주는 동시에, 발끝까지 저릿하게 만들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 * *
‘……대체 언제까지 책만 읽을 생각이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요구해 오리라 생각했으나…….
해일은 칼서스의 바람과는 다르게 몇 주가 지나도록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다.
‘양심이 찔리는군.’
칼서스 자신의 몸은 해일의 가이딩 덕분에 조금씩 차도를 보이고 있는데, 정작 그 부담을 나눠지고 있는 해일에게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니?
거의 자존심이 상할 지경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뭐라도 바라는 걸 말해 줄 거라고 여겼건만…….’
이래서야 정말로 내가 해일을 일방적으로 이용하는 꼴이 될 뿐이 아니던가. 칼서스는 해일이 없는 새벽 시간대를 틈타 브랜디를 홀짝이며 머리를 굴렸다.
‘아니면 내 쪽에서 먼저 질문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그래, 상대방이 용이기 때문에 선뜻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용이라서 인간의 문화를 잘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보기와는 다르게 나를 무서워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해가 뜨면 해일에게 물어봐야겠군.’
혹시 필요한 게 없느냐고.
* * *
같이 지낸 지 2주 하고도 며칠이 더 지난 아침.
칼서스가 가벼운 포옹으로 가이딩을 받으며 뭔가 필요한 게 없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 질문에 얼떨떨한 마음으로 대꾸했다.
“딱히…… 없는데요?”
네가 방도 주고,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게 해 줬잖아.
외려 갑인 내가 해 주는 게 별로 없어서 미안할 지경인데, 왜 또 뭘 해 주려고 해?
“아직 방에 양피지도 많고, 잉크도 세 병이나 남았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말 더 필요한 건 없는데?
내가 의아하다는 듯 칼서스를 올려다보자, 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질문했다.
“……금 같은 건 필요 없나?”
“칼서스 씨랑 둘이 사는데 금이 왜 필요해요?”
“……그럼, 성검은?”
“이미 하나 있어요. 발키리라고……. 아, 칼서스 씨가 쓰고 싶으면 써도 괜찮아요. 걔가 주인을 가리고 그러는 애는 아니라.”
정확히는 내 게 아니라 해일이 아버지인 가일한테 물려받은 성검이긴 하지만. 내 방 귀퉁이에 처박아 두고 있으니 내 거라고 해도 무관하겠지?
그리고 의식주를 을인 칼서스가 해결해 주고 있는데, 갑으로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생활비 대신 성검을 공유하는 정도면 나한테도 남는 장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칼서스가 당황한 투로 질문을 덧붙였다.
“그럼, 갖고 싶다거나, 가 보고 싶은 곳은? 그것마저도 없는가?”
“그건…….”
으음…… 자꾸 뭔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네.
나한테 뭘 더 주고 싶어 하는 건가? 혹시 기부가 취향이야? 취향 한번 멋있네. 이게 바로 천 년을 사는 종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건가.
‘그럼 뭔가 부탁을 하는 쪽이 좋겠는데…….’
딱히 바라는 게 없어서 뭐가 좋을지 모르겠네.
사소한 거라서 들어주기 어렵지 않으면서도, 칼서스가 보람을 느낄 만한 게 뭐가 있으려나…….
나는 칼서스의 어깨에 고개를 얹어 놓은 채로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그러고 있으려니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다.
“아, 먹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칼서스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그게 뭐지?”
나는 칼서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흑빵이 먹어 보고 싶어요.”
질문을 들은 칼서스가 당황한 것처럼 날 내려다보았다.
나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다시 요구했다.
“흑빵이요.”
“……그걸, 왜?”
왜냐고?
작중에서 존나 맛없는 빵으로 소개됐었거든.
‘그렇게까지 맛없다고 묘사해 놓으니까, 도리어 궁금해지잖아?’
해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잘못 만든 발사미코와, 만든 다음 일주일쯤 방치해 둔 밀 빵을 섞어 놓은 맛>이라던데.
‘진짜 그런 맛인지, 아니면 해일이 개국공신 공작가의 귀하디귀한 도련님으로 자라서 맛없었던 건지 확인해 보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이런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표정의 칼서스를 올려다보며 수줍은 척 배시시 웃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평생 귀족 가문에서 자라서 평범한 음식을 먹어 본 경험이 없어요.”
“…….”
“그리고 평범한 음식이라고 하면 대체로 흑빵을 먼저 떠올리니까, 흑빵을 먹어 보고 싶다고 한 건데…….”
“…….”
“……너무 이상한 소원인가?”
칼서스의 표정에서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라는 대답이 읽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거 말곤 바라는 게 별로 없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소원으로 많은 돈이나 보석을 요구했겠지만……. 앞에서 이미 말했듯 내 취미는 ‘웹소설 읽으면서 사이버-반찬 투정 하기’였다.
‘책 읽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원래 책 놓을 책장이랑 책만 있으면 행복한 인간들이라고.’
그리고 그 책이라면 이미 칼서스 서재에 넘쳐 나는데, 더 뭐가 필요하겠어.
“어, 으음…… 이게 이상하면, 서재에 사다리 하나 놓아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위쪽에 꽂혀 있는 책도 좀 둘러보고 싶어서…….”
“…….”
“아, 이것도 이상한가……?”
“…….”
한참 동안 말없이 날 내려다보던 칼서스가 이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더니 어이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