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128화
“안녕하세요……?”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인영에 수겸은 반사적으로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눈알을 굴렸다.
가게 안에 있는 두 사람은 중년의 여성과 남성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어지는 유찬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저희 부모님이세요.”
“아, 아! 안녕하세요!”
그제야 번개처럼 번뜩 기억이 났다. 데뷔 쇼케이스에서 부모님을 초대하여 인사를 드렸었다. 수겸은 조금 전 인사를 건넸던 것도 잊고 다시금 허리를 굽혔다.
“어서 와요, 오느라 힘들지 않았어요?”
“허, 억, 네넵. 전혀요!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수겸은 유찬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에 얼른 도리질을 쳤다. 그러자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 인자하게 웃어 보이셨다.
“들어와요.”
“네, 감사합니다…….”
유찬 아버지의 말씀에 수겸은 감사 인사를 하며 안쪽 자리로 향했다. 수겸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사실 수겸은 어른들을 대하기 어려워했다. 부모님이 안 계셔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수겸의 성격 자체가 어른들에게 친근하게 구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유찬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미리 언질을 좀 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사전에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아직 식사 전이죠?”
“네? 네…….”
“조금만 기다려요, 얼른 준비할게요. 여보, 불 가져와요.”
“네, 지금 갑니다.”
그녀의 말에 유찬의 아버지가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고깃불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반찬을 가져오겠다며 그녀와 함께 자리를 비웠다.
두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틈을 타 수겸이 주먹으로 유찬의 허벅지를 콩 때렸다.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빈손으로 왔잖아.”
“괜찮아요.”
“너야 괜찮겠지, 나는 안 괜찮다고.”
수겸은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으려 조심하며 유찬을 타박했다. 그러자 유찬은 뭐가 좋은지 평소 그답지 않게 헤벌쭉 웃었다.
그 모습에 순간 울컥하던 것도 잊고 수겸은 멍하니 유찬을 바라보았다.
누군들 안 그러겠느냐마는 특히 유찬은 웃을 때 정말 예뻤다. 웃기 전이 봉우리라면 웃을 때는 활짝 핀 백합이었다.
“미리 말하면 안 오겠다고 할 것 같아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그야…… 그랬겠지…….”
수겸은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금세 수긍했다.
만약 유찬이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이 자리를 피하려고 했을 터였다.
같은 그룹 내 멤버의 부모님과 밥을 먹는 게 그리 어렵고 대단한 일이 아닐 텐데, 수겸은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불편했다.
아마 수겸과 유찬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일 터였다. 유찬이 수겸을 좋아하고, 수겸 역시 유찬을 좋아하고 있는 상황이니 부모님을 뵙기에 양심에 쿡쿡 찔렸다.
유찬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어린애인데, 그런 유찬을 좋아한다는 게 유찬의 부모님께는 죄송스러웠다.
이런 수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찬은 여전히 예쁘게도 웃고 있었다. 그러다 유찬이 살짝 수겸의 얼굴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고는 귀엣말을 했다.
“형 꼭 애인 부모님을 만나러 온 사람 같아요.”
놀란 수겸이 유찬을 바라보자, 유찬은 해사하게도 웃었다. 그 미소에 수겸만 어쩔 줄 몰라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고기 익는 동안 다른 반찬 좀 들어요.”
그때 유찬의 부모님께서 반찬을 가지고 나타나셨다. 샐러드, 잡채, 어묵볶음, 감자조림, 멸치볶음, 계란말이, 김치, 양념게장 등 다양한 반찬이 상을 가득 채웠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도 상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헉, 제가 할게요!”
“아니에요. 앉아서 먹어요.”
유찬의 아버지가 고기를 구우려고 해서 수겸이 화들짝 놀라 나서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고집스레, 그러나 다정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결국 수겸은 도로 자리에 앉아 눈치를 살폈다.
“정말 괜찮아요. 편히 먹어요.”
“두 분은 안 드세요……?”
“우리는 아까 먹었어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신경 쓰지 말라고 한들, 도무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수겸은 난감했다.
힐끔 유찬을 보자, 유찬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수겸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수저를 들었다. 여전히 불편한 마음이었기에 음식의 맛을 온전히 느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반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맛있었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헉, 네. 맛있어요!”
수겸은 다소 과장스러울 정도로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곤 이내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생각에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유찬의 부모님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에요.”
그녀의 말에 수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잘 익은 고기를 유찬의 아버지가 집게로 집어 수겸의 앞에 놓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수겸은 얼른 감사 인사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고기를 먹었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고기지만,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이 좋았다.
“맛있어요?”
“네, 네! 정말 맛있어요.”
“많이 먹어요.”
유찬의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었다.
수겸은 얼른 젓가락을 움직여 고기를 집어 먹었다. 그렇게 한참 식사가 이어졌다. 계속해서 구워지는 고기에 수겸의 위장도 한계에 임박했을 때, 유찬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유찬이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유찬이를 잘 챙겨줬다고……. 고마워요.”
“헉, 아니에요. 오히려 유찬이가 절 많이 도와줬어요.”
그녀의 말에 수겸은 도리질을 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수겸은 자신이 유찬을 도와줬다기보다는 유찬이가 자신을 챙겨준 게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가 활짝 웃었다. 웃는 얼굴이 유찬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그 모습에 수겸이 새삼 넋을 놓고 있던 참이었다.
“유찬아, 안쪽 냉장고에 과일 깎아둔 거 가져올래?”
“제가 갈게요!”
“아니에요, 가게에 냉장고가 많아서 헷갈릴 거예요. 유찬아, 네가 좀 다녀와 줘.”
“알았어요.”
유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겸은 다시금 처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먹는 동안 두 분이 많이 편해졌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찬이 옆에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수겸은 톡 건드리면 당장 깨져 버릴 것처럼 얼어붙었다.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뭐 한 것도 없는…….”
그녀의 말에 수겸은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미소에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 알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는 탓이었다.
“알고 있어요.”
“네? 어떤…….”
“유찬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수겸은 반응할 말도 잊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러자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금 고개를 들어 웃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유찬이가 중학생 때였는데…… 유찬이한테는 괜찮다고 했어요.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러면서도 내심 마음속으로는 생각했어요. ‘아직 어리니까, 뭘 모르니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이렇게요.”
“…….”
수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그녀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어준 덕분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결국 받아들여야만 했어요.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우리도 이렇게 답답한데 유찬이 본인은 얼마나 힘들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저 우리 유찬이에게 착하고 좋은 사람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유찬이가 수겸 씨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이제 더는 유찬이가 외롭지 않은 것 같아서…… 고마워요.”
“아, 아니에요. 제가 뭘 한 게 아니라…….”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충분히 불편해할 수 있잖아요. 같은 그룹 내에 ……그,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조심스럽게 ‘그런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데서 그동안 그녀가 겪어왔을 혼란스러움이 잘 전해졌다. 수겸은 가슴 한편이 아렸다.
“부담스러운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아니, 분명 그럴 테지만 수겸 씨.”
“네, 말씀하세요.”
그녀가 수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러더니 간절함이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유찬이 좀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