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126화
“뭘 그렇게 놀라?”
“하, 하지만…….”
선욱의 물음에도 수겸은 더듬거리며 커다란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그가 한 말을 몇 번이나 곱씹어보아도, 여전히 제 것이 아닌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었다.
“솔로 준비하자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수겸은 여전히 얼떨떨해서 말끝을 흐렸다.
선욱은 그런 수겸의 반응이 마냥 귀여운 듯 가볍게 웃었다. 평소의 수겸이라면 뭘 모르는 자신이 봐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선욱의 눈빛에 민망해할 터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겸이 너 정도면 충분히 솔로 활동할 만하지. 노래도 되고, 팬덤 탄탄하고. 대중들의 관심도 높은 편이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선욱의 말에도 수겸은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듯했다. 답답한 목에 연신 마른침을 삼키다가,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수겸아, 왜 그래?”
“저, 저는 계속 유피트 활동을 하고 싶어요. 물론 다른 멤버들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일단 저는 그래요. 물론 솔로 활동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유피트를 버리고 솔로로 나오고 싶지는 않아요.”
수겸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가수로서 그룹에서는 다 보여줄 수 없는 기량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솔로 활동을 왜 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유피트라는 팀을 버리고 솔로 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수겸아.”
“네……. 죄송해요.”
“아니야, 죄송할 것 없어. 그리고 솔로 활동은 유피트를 나오라는 뜻이 아니었어. 디지털 싱글로 음원 내서 활동 잠깐 하자는 거지. 뭐, 조금 더 나중에는 정식으로 음반 내서 활동하는 거고.”
“아, 아! 그 말이셨군요.”
“……그럼.”
선욱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수겸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수겸의 반응에 선욱은 옅게 웃었다.
솔직한 말로는 솔로 활동에 대한 수겸의 생각을 떠보려고 했던 것도 있었다. 수겸이 솔로 활동에 욕심이 있다면, 유피트 활동을 줄이고 솔로 활동에 주력하려고 했다. 수겸이 다른 멤버들과 붙어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으니까.
유치한 발상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그만큼 수겸이 좋은 걸 어떻게 하겠는가. 선욱은 밀려드는 아쉬움에 수겸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한편, 수겸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유피트 활동을 완전히 접고 솔로로 나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수겸에게는 유피트가 더 소중했다. 솔직한 말로 솔로 활동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지만 유피트 활동은 그렇지 않았다. 멤버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수겸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중했다.
“솔로 활동은 언제부터 해요……?”
“정규 1집 낸 다음에. 콘서트에서 맛보기로 보여줘도 될 것 같고.”
“와아, 설레요!”
수겸은 반짝 눈을 빛냈다.
벌써 머릿속으로는 솔로 활동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곡을 할지, 어떤 콘셉트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솔로 활동에 큰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솔로 활동을 하다 보면 그룹 활동에서는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가수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수겸에게는 크나큰 기대와 설렘으로 다가왔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음식을 먹는 수겸의 손길이 느릿해졌다. 대신 수겸은 머릿속으로 솔로 활동을 하는 제 모습을 마음껏 그려보았다.
“수겸아, 그렇게 좋아?”
“아, 그, 그게…….”
“괜찮아, 솔직히 말해도 돼.”
선욱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수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사실…… 솔로 활동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솔로로 무대를 채우면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까지 다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아무래도 가수들은 그런 게 중요하지. 매번 똑같은 모습을 보여줘서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맞아요, 그래서 그래요.”
“알았어. 아무튼, 밥은 마저 먹자. 잘 먹어야 뭘 하더라도 잘할 수 있지.”
“네!”
수겸은 힘차게 대꾸한 뒤 다시금 식사를 이어나갔다. 여전히 마음은 콩 밭에 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래지 않아 식사가 끝났다.
수겸은 그릇을 들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기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얼핏 보기에도 무지막지하게 비싸 보이는 그릇이기 때문이었다.
“앉아 있어.”
“하지만…….”
“괜찮아, 앉아 있어.”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선욱의 말에 수겸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의자에 앉았다.
선욱은 수겸이 들고 있던 접시와 제 몫의 접시를 챙겨 싱크대로 향했다. 쏴아아 시원하게도 나오는 물줄기로 애벌 설거지를 한 선욱이 싱크대 하단의 커다란 식기세척기에 접시를 정렬하여 넣었다.
사실 수겸은 그게 식기세척기인 줄도 몰랐다. 선욱이 문을 열고 접시를 넣고 나서야 식기세척기라는 걸 깨달았다.
뭐가 됐든 참 좋은 집이라고 생각하며 수겸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잘 먹었습니다.”
꾸벅 수겸이 인사하자, 선욱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더니 수겸을 거실로 이끌고 가 소파에 앉혔다.
“디저트 가져올 테니까, 영화라도 한 편 보면서 먹자.”
“헉, 저 때문에 쉬지도 못하시는 거 아니에요?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나는 수겸이 네가 있어주는 게 더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 말 할 거 없어.”
선욱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미소에 한 점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수겸은 민망함에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도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사양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수겸은 소파에 앉아서 선욱이 사라진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각도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솟구치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놀란 수겸이 토끼 눈을 뜨는데, 선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부스럭거렸다.
잠시 후, 그릇 하나를 쟁반에 받쳐 든 선욱이 도로 거실로 나왔다. 하얀색 자그마한 그릇 안에는 겉면이 짙은 갈색빛으로 잘 익은 디저트가 담겨 있었다.
자주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수겸은 이 디저트가 크림 브륄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이걸 집에서 해 먹을 수 있다는 점에 놀라기는 했다.
“대박,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어.”
선욱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겸은 자그마한 스푼으로 톡톡 윗면을 깨뜨렸다. 잘 구워진 윗면의 설탕 코팅이 쩌적 갈라졌다. 조심스럽게 한 스푼 떠서 입안에 넣어보니, 바삭한 설탕 코팅과 부드러운 커스타드 크림의 조화가 훌륭했다.
“그렇게 맛있어?”
“네! 진짜 맛있어요. 이사님,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온몸을 강타하는 달콤한 맛에 부르르 몸까지 떨던 수겸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선욱은 그런 수겸이 귀여워서 크림 브륄레만큼이나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함께 본 영화는 나온 지 몇 년 된 히어로물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보지 않았다고 해서 이참에 같이 보게 되었다. 기대와는 달리 썩 재미있지는 않았다.
배가 불러서인지, 아니면 영화가 재미가 없어서인지 졸음이 밀려들었다. 수겸은 애써 눈을 부릅떠 보았지만,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하고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수겸의 상태를 알아차린 선욱이 수겸의 머리통을 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허, 억, 괜찮아요.”
놀란 수겸이 놀란 닭처럼 퍼드덕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눈꺼풀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시금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병든 닭이 되어 헤드뱅잉이라도 하듯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어대었다.
“수겸아, 기대. 괜찮으니까.”
“……감사합니다.”
수겸은 재차 이어지는 배려에 결국 못 이기는 척 슬쩍 선욱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의 너른 어깨가 수겸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안정감 있게 받쳐주었다.
배도 부르겠다, 몸도 편하겠다, 밀려드는 잠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정신을 차려보려고 했지만, 기어코 밀려드는 잠과 싸워 이기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결국 수겸의 눈꺼풀이 내려앉고, 길고 긴 속눈썹이 엇갈리며 닫혔다.
오래지 않아 쌕쌕, 호흡마저 규칙적으로 느려졌다.
선욱은 수겸이 제게 기대 잠이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꾸만 마지막 남은 이성이 본능에 묻히려고 하고 있었다.
선욱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낮게 읊조렸다.
“……이걸 정말 잡아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