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125화
수겸이 어쩔 줄 몰라 커다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으려니, 선욱이 씩 웃었다.
“왜 그렇게 눈치를 봐?”
“제가요? 아, 아닌데요?”
선욱의 말에 수겸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으며 발뺌했다. 티 나는 거짓말이 분명한 말에도 선욱은 마냥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럼 내가 잘못 봤나 보네.”
“그, 그러게요. 그랬나 봐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수겸이 말을 더듬었다. 그 행동에도 선욱은 그저 즐겁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사실 선욱은 수겸을 조금 더 몰아세울 수도 있지만 다행히 선을 지킬 이성이 남아 있었다.
언젠가 이 이성이 다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고 있지만, 아직은 그래, 아직은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선욱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점심 먹자. 해줄게.”
“이사님이요?”
선욱의 말에 수겸은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이 되었다.
역시 부러 화제를 돌릴 기회를 주니, 언제 당황했냐는 듯 반응하는 게 꽤 귀여웠다. 선욱은 마음만 먹으면 수겸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꽤 오랜 시간 가만히 수겸을 바라보기만 했다.
물론 최근에는 그답지 않게 조급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건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변수들이 꽤 커져서였다. 유피트의 다른 멤버들이 선욱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래서 숙소를 옮기는 수고로운 짓까지 하고 말았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아예 수겸을 멤버들과 갈라놓고 싶었지만, 그것은 수겸이 원하는 길이 아닐 테니 참았다.
숙소를 옮긴 것이 당시에는 수고롭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꽤 흡족했다. 비록 수겸과 같은 집은 아니지만, 그와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심신에 안정이 생겼으니까.
“응. 뭐 먹고 싶어? 양식, 한식 종류는 어지간하면 다 할 수 있어.”
“와, 이사님이 요리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가요.”
“그럼 마음껏 구경해. 우선 먹고 싶은 음식부터 말하고.”
“음…… 저는 뭐든 좋은데…….”
“그럼 양식, 한식 중에서 고르기만 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럼 양식이요!”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수겸이 눈을 반짝 빛내며 대꾸했다. 선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양식이라, 알았어. 가자.”
수겸은 고갯짓하는 선욱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선욱의 목적지가 부엌임은 뻔했다. 비록 펜트하우스지만 건물 자체는 같기에 대충 구조는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머지않아 도착한 곳은 부엌이었다. 그런데 수겸이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
싱크대만 두고 보더라도 벽 쪽에 하나, 아일랜드 식탁 쪽에도 하나가 있었다. 게다가 한쪽 벽은 온통 냉장고로 채워져 있었다.
“헉, 이게 다 냉장고예요?”
“응, 맞아.”
혹시나 싶어 물었는데 맞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수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사실 그간 수겸은 본인 숙소의 양문형 냉장고도 혼자 사는 제게는 과분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선욱은 혼자 4개의 냉장고를 쓰고 있다니, 충격적일 정도였다.
“구경해도 돼요?”
“하하, 마음대로 해.”
수겸의 순수한 질문에 선욱이 소리 내어 웃었다. 표정에서부터 기대감이 느껴지는 얼굴을 보니 선욱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헉, 그거 같아요. 왜 그 프로그램 있잖아요. 연예인들 냉장고 들여다보는 프로그램.”
“알지.”
“그거 보면 진짜 연예인들 사는 거 신기하더라고요. 막 오만 게 다 나와요. 트러플? 그런 것도 집에 있던데. 캐비어랑.”
“수겸이도 연예인이잖아.”
“그런데 저는 그런 거 안 먹잖아요. 사실 저는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요. 취향이 아니더라고요. 전에 이겸이가 감자튀김에 트러플 오일을 뿌려줬는데, 오일 안 묻은 것만 골라 먹어서 이겸이가 새로 튀겨줬어요.”
“흐음, 오케이. 그럼 트러플은 빼고 할게.”
“헉, 그, 그게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감사합니다.”
트러플을 빼달라는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고 말아서 수겸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숙소 같이 쓸 때는 이겸이가 밥해줬지?”
“네. 사실 지금도 그래요. 이겸이가 반찬 해서 갖다 주거든요. 이번에도 진미채볶음이랑, 어묵볶음, 그리고 계란장조림 해서 가져다줬어요.”
“……숙소에 자주 오나 봐?”
“네, 아무래도 근처다 보니까 자주 오더라고요. 올 때마다 맛있는 거 해서 와요. 아니면 와서 해주거나.”
“……그래.”
선욱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기 위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그러고는 파스타에 들어갈 재료들을 손질했다.
“와, 이사님 한니발 같아요.”
“……어?”
능숙하게 칼질을 하던 선욱이 멈칫했다. 수겸은 해맑은 표정으로 선욱을 바라보았다.
“아, 이사님 한니발 몰라요? 저도 사실 잘 알지는 못하는데, 솔이가 보던 미드예요. 거기서 한니발이라는 사람이 요리를 되게 잘하거든요. 저도 요리하는 장면만 봤어요.”
수겸은 선욱이 정말 한니발을 모른다고 생각해서 친절하게 한니발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수겸의 생각과는 달리 선욱은 한니발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니발이 요리를 잘하기는 한다. 요리 재료가 인육이라는 점이 문제기는 하지만. 아무튼, 수겸은 제대로 드라마를 본 게 아니어서인지 이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동경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일 터였다.
뭐, 결과적으로는 선욱 자신도 수겸을 어떻게 요리해서 잡아먹을까 생각하고 있으니 한니발과 영 다르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선욱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앨범 준비는 어때? 힘들지?”
“솔직히 말씀드려도 돼요?”
“당연하지.”
“조오오오오그음 힘들어요. 많이는 아니고요, 아주 조금이요.”
수겸은 선욱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비록 선욱이 편하다고는 하지만, 일단은 그도 이사님인데 너무 대놓고 힘든 티를 내는 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당연히 선욱은 이미 수겸의 생각을 다 알아차린 후였다.
“아무래도 수록곡이 많으니 힘들지? 게다가 콘서트까지 준비해야 하고.”
“좀 그렇긴 해요. 그래도 진짜 행복해요. 콘서트라니.”
“다행이다, 행복하다니.”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수겸의 얼굴을 본 선욱은 말로는 다행이라고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편치 않았다.
욕심 같아서는 수겸을 아무도 못 보는 곳에 가두어두고 자신만 보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수겸은 연예인으로서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니, 제 욕심을 애써 누그러뜨려야만 했다. 그 간극에서 오는 괴리감이 가끔은 선욱을 괴롭게 했다.
선욱은 복잡한 머릿속을 달래려 요리에 집중했다.
한편, 선욱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수겸은 선욱이 요리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요리하는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한 번에 파스타 면을 삶으면서 베이컨과 방울토마토 등 각종 재료를 정갈하게 손질하고, 또 다른 팬에서는 두툼한 스테이크를 구웠다.
“수겸이는 스테이크 미디움 좋아하지?”
“네! 전 너무 안 익은 건 좀 그래요. 그냥 구워 먹을 때는 덜 익은 것도 좋지만.”
재잘재잘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말해주는 수겸 때문에 선욱은 자연스레 번지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빠르게 요리를 마쳤다.
“와아, 대박. 레스토랑에 온 것 같아요.”
수겸은 눈앞에 펼쳐진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며 중얼거렸다. 샐러드와 파스타, 스테이크 식전 스프까지 모두 다 맛있어 보였다.
선욱은 수겸의 몫인 스테이크를 제 앞으로 가져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었다.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또 우아해 보이기까지 해서 수겸은 혀를 내둘렀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어.”
“넵! 와, 맛있어요. 헉, 이것도, 이것도, 와, 다 맛있어요.”
수겸은 눈을 빛내며 이것저것 먹어보더니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사실 수겸이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음식을 해 먹인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선욱이었다. 하지만 만일 수겸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자신이 해준 음식을 먹고 저렇게 반응한다고 하면, 그것도 꽤 기분이 좋았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수겸의 반응은 요리해 준 사람을 흐뭇하게 했다.
하물며 지금은 심지어 말하는 대상이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수겸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더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처럼 기쁜 와중에도 이런 감정을 그동안 이겸만 느껴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심기가 불편해졌다.
한참이나 어린애를 두고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꼈지만, 별수 없었다. 좋아하는 감정 앞에서는 한없이 유치해지는 것이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선욱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유치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선욱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수겸은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더니, 들고 있던 포크마저 떨어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