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124화 (126/143)

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124화

* * *

“으어어…… 죽겠다.”

수겸은 죽는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꼬물꼬물거렸다.

요 며칠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공식적으로는 <그리다>의 활동과 리얼 버라이어티 방송이 끝났으니 전보다 더 한가해질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유는 곧바로 정규 1집 준비에 들어선 탓이었다.

미니 앨범에 비해 정규 앨범은 수록곡이 더 많았다. 재진의 욕심과 유피트의 욕심이 많아 수록곡만 15곡이 되고 말았다. 그중 편곡된 곡을 빼더라도, 새로 녹음해야 할 순수 수록곡만 13곡이었다. 다른 가수들의 정규 앨범과 비교해도 많은 편이었다.

그런 와중에 재진이 이번에 들어갈 곡 중 하나는 유피트가 직접 가사를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창작 쪽으로는 영 재능이 없음에도, 수겸은 재진의 현란한 말솜씨에 넘어가 알았다고 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주기적으로 공식 팬카페 활동을 비롯한 SNS 활동을 했고, 팬들과 1:1 소통을 할 수 있는 ‘거품’도 시작했다. 라이브 방송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앓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수겸은 어젯밤 늦게까지 달달 외우느라 침대 한편에 있는 가사 종이를 갈무리해서 치운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오늘은 재진의 작업실이라든가, 연습실이라든가 하는 곳으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집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노래를 외우고, 가사를 쓰면 될 것 같았다. 물론 중간중간 ‘거품’도 하고.

“와, 정말 돈이 좋긴 좋다.”

욕실로 들어간 수겸은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 고급스러운 욕실 인테리어의 새삼 감탄했다. 신인 아이돌이 혼자 쓰기에는 영 사치스러운 욕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이사님이 무리해서 해준 숙소가 아니라 충분히 여유가 돼서 해준 것이라는 걸 알기에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간단히 샤워만 할 생각이었기에 욕조에 들어가는 대신 샤워 부스로 향했다.

시간이 흐른 후, 쏴아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샤워기 밑에서 개운하게 샤워를 마친 수겸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어라, 내 핸드폰.”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진동 소리는 확실히 들리는데, 정작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수겸은 집이 넓으면 이런 게 불편하구나 생각하며 쫑긋 귀를 세우고 진동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찾았다!”

겨우 휴대폰을 찾은 수겸은 쾌재를 불렀다. 소파 팔걸이에 있었다. 아까 씻으러 나오면서 방에서 들고 나온 휴대폰을 여기다 올려두었던 게 생각났다.

액정 화면에는 ‘이사님’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상대를 확인한 수겸은 전화가 끊어질까 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그렇게 급하게 받아?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전화가 끊어질까 봐 그랬어요.”

-그럼 다시 걸면 되지.

“그래도요. 안 받으면 걱정하실 수도 있잖아요.”

-하하, 맞아. 안 그래도 내려가 보려던 참이었어.

수겸의 말에 선욱이 능글맞게 대꾸했다. 수겸은 그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활짝 웃었다.

-수겸아, 지금 뭐 해?

“저…… 딱히 뭐 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럼 이후 스케줄은?

“……그것도 딱히 있지는 않아요.”

잠시 생각에 잠긴 수겸이 솔직히 대꾸했다. 물론 집에서 이것저것 할 일이 있기는 하지만, 스케줄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었으니까.

-그러면 잠깐 만날까?

“네, 어디로 갈까요?”

수겸은 선욱의 말에 질문을 되돌리면서도 당연히 지하 주차장에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욱과 만날 때면 늘 차를 타고 나가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선욱의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보는 건 어때? 많이 불편해?

“어…… 아뇨, 뭐 많이 불편할 것까지야…….”

-그럼 올라와.

이사님의 집에서 만난다니, 물론 편할 리는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많이 불편하다고 대답하기도 뭐해서 돌려서 표현했다. 그러자 선욱은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오라고 말했다.

그제야 수겸은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지만,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네. 올라갈게요.”

결국 수겸은 선욱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수겸은 전화를 끊고 얼른 옷방으로 향했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제 옷장에 있는 옷은 그게 그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잡히는 대로 꺼내 입었다.

하얀색 박시한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수겸은 외투를 걸쳐야 할까 싶어 핸드폰으로 날씨를 확인하다가, 어차피 엘리베이터만 타면 도착할 곳이라는 생각에 외투는 입지 않기로 했다.

“빈손으로 가도 되나…….”

금세 준비를 마치고 문밖에 나선 수겸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고민에 잠겼다. 갑작스러운 초대이기는 했지만, 남의 집에 가는데 아무것도 없이 가기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이사님이었다. 이사님이 제집에 빈손으로 왔다고 책 잡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수겸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대신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단지 밖으로 나가면 코앞에 편의점이 있어서였다.

어느덧 계절상으로 봄이 되었지만, 아직 추위가 온전히 물러가지는 않았다. 수겸은 이럴 줄 알았으면 외투를 걸치고 나올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코를 훌쩍거리면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을 한 바퀴 빙 돈 수겸은 마땅한 선물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비타민 음료 한 박스를 골랐다. 그리고 그걸 소중히 들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수겸은 꼭대기 층을 누른 뒤 추운 몸을 녹이려 발을 동동거렸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어? 이사님!”

엘리베이터 앞에는 선욱이 서 있었다. 그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에 수겸은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선욱이 수겸의 팔을 가볍게 잡아끌어 제 쪽으로 당겼다.

“오다가 길 잃어버린 줄 알았어.”

“밖에서 기다리실 줄은 몰랐어요. 죄송해요.”

“아니야, 괜찮아. 몸이 왜 이렇게 차가워? 아…… 이거 사러 다녀왔어?”

선욱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수겸의 손에 들린 봉지를 보고는 다정하게 웃었다.

수겸은 이사님께 드리기에는 너무 약소한 선물인 것 같아 민망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선욱은 기쁜 듯 환하게 웃으며 수겸의 손에서 봉지를 가져갔다.

“잘 먹을게. 고마워.”

“다음에는 더 좋은 거 사 올게요.”

“다음에도 우리 집에 온다는 거네?”

“아, 아…… 그게 물론 초대해 주시면요!”

수겸이 당황한 듯 덧붙이자, 선욱은 눈꼬리를 곱게 접어가며 웃었다. 그러고는 수겸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

자신의 숙소도 충분히 좋다 못해 과하다고 생각하던 수겸이었지만, 선욱의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물론 선욱의 집이 더 넓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단순히 면적만 넓은 게 아니라 층고도 까마득하게 높았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집이지만, 곳곳에 걸린 미술품들은 집과 잘 어울리면서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몸 좀 녹이자.”

“네, 어어…….”

선욱은 수겸의 대답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수겸을 한 품에 안았다.

그의 품 안에 와락 안긴 수겸은 놀란 눈을 끔뻑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와 키스를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장소가 차 안이었기 때문인지 이렇게 몸을 밀착한 적은 없어서였다. 설명할 수 없는 민망함과 괜스레 콩콩 뛰는 가슴에 수겸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안 와서 걱정했어.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죄송해요. 그렇게 기다리실 줄은 몰랐어요.”

“괜찮아. 왔으니 됐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자, 선욱은 흔쾌히 괜찮다고 말하며 수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수겸은 저도 모르게 기분 좋게 웃었다.

“점심은 먹었어?”

“아뇨, 눈떠보니 지금이라…….”

선욱이 내내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게 된 수겸은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수겸이 그런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괜히 바닥만 보고 있는데, 선욱이 가볍게 수겸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촉,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에 놀란 수겸이 고개를 들었다.

찰나였지만 여전히 그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입술을 만지는데, 선욱이 수겸을 보며 느른하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 가득 수겸이 담겨 있었다.

그제야 이곳이 오롯이 그의 공간이라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수겸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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