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110화
* * *
단단한 것을 느끼고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것도 받으라고.’
차이겸이 제 것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했던 말이었다. 느껴지는 크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걸 받으라니, 차이겸은 양심이 있는 걸까?
그리고 수겸이 비즈니스를 위해 팬들이 지정해 준 수 역할에 몰입하기는 했지만, 왜 실제로 자신이 받는 역할인 것인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한참 후, 수겸은 조심스레 이겸의 승모근에 묻고 있던 입술을 떼었다.
‘헉, 진짜 키스 마크가 생기잖아!’
수겸은 이겸의 살갗에 핀 붉은 울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이겸이 남기라고, 그리고 자기가 다 책임진다고 했으니 수겸이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선명하게 뭔 짓을 한 게 틀림없는 자국이 남았으니 앞날이 걱정되었다.
“능력껏 잘 가려. 알았지?”
“알았어.”
걱정스러운 수겸과 달리 이겸은 담담하기만 했다. 무슨 생각이 있으니 이러는 것일 테지만, 태평해 보이기까지 해서 걱정이 되었다.
이겸은 자연스럽게 바지 주머니 양쪽에 손을 넣었다. 그러고는 베란다를 벗어났다. 수겸은 물끄러미 이겸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수겸은 이겸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었다. 풀어야 할 게 있어서였다.
차이겸은 저걸 풀 때 무슨 생각을 할까. 설마…… 내 생각을 하나?
화르륵. 순식간에 수겸의 뺨이 새빨갛게 익었다. 자기가 생각해 놓고 깜짝 놀라 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고 있으려니, 차이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생각 해?”
“아, 아무 생각도 안 해!”
“그래?”
“그, 그럼!”
수겸이 더듬거리며 대꾸하자, 차이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다고 받아들였다기보다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물러선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따가 호박죽 끓여줄게.”
“어?”
“새알심 넣어서.”
“갑자기?”
“싫어?”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조금 전까지 키스를 하고, 키스 마크를 남기고, 아주…… 물고빨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호박죽을 해준다니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당황한 수겸과 달리 정작 차이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부엌을 가로질러 나갔다.
* * *
차이겸은 정말로 호박죽을 끓여주었다. 이겸의 부름에 부엌에 가보니 식탁 위에 호박죽이 소담스럽게 담겨 있었다. 새알심이 동동 뜬 노란빛의 호박죽은 먹음직스러웠다. 수겸은 군침을 삼키다가 조리대를 기웃거렸다.
“뭐 찾아?”
“설탕.”
“식탁에 갖다 놨어.”
“아, 땡큐.”
이겸의 말에 수겸은 냉큼 식탁에 앉았다. 그러는 사이 다른 멤버들도 한 명씩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수겸은 숟가락을 들고 눈을 빛내며 호박죽을 노려보았다. 고양이 혀인 수겸에게 막 끓인 죽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안 뜨거워.”
“정말?”
이겸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겸은 숟가락으로 살살 죽을 휘저어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올 줄 알았는데, 웬걸. 먹기 좋은 온도로 식어 있었다.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수겸을 위해 죽이 적당히 식은 뒤에 부른 모양이었다. 사소하지만 다정한 이겸의 배려에 수겸이 씩 미소 지었다.
수겸은 설탕을 수북하게 떠서 죽에 넣었다. 하얀 눈이 쌓인 것 같은 호박죽을 살살 저어 한입 가득 먹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번지자, 절로 행복에 겨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형, 눈은 좀 괜찮아요?”
“응, 좀 불편하기는 한데 아프지는 않아.”
유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수겸이 밝게 대꾸했다. 그러자 유찬이 다행이라는 듯 옅게 웃었다.
다들 자신 때문에 많이 놀라기는 한 모양이었다. 미안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꺼뜨리는데, 난데없는 초인종 소리가 들려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올 사람 없을 텐데.”
“민성이 형 아닐까?”
수겸의 물음에 태원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긴, 민성은 유피트 데뷔가 확정된 후부터는 시시때때로 숙소를 급습하고는 했다. 최근 들어서는 그런 일이 없기는 했지만, 한동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숙소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늘 조마조마하게 살아야 했다.
“제가 나갈게요.”
“아니야, 내가 불렀으니까 내가 갈게.”
“어? 누구를?”
유찬의 말에 이겸이 유찬을 앉혔다. 수겸은 이겸이 불렀다는 사람이 누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민성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겸이 불렀다고 하니 의아했다.
수겸은 호기심 섞인 눈으로 멀어지는 이겸의 뒤를 좇다가 다시금 호박죽을 떠먹었다.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오래지 않아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헉, 이사님!”
“이거 받아. 죽 먹은 다음에 먹어.”
돌아보니, 선욱이 서 있었다. 선욱은 수겸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아이스크림 종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매장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먹고 싶을 때마다 편의점에서 파는 걸로 마음을 달랬던 브랜드이기에 수겸은 냉큼 감사 인사를 했다.
“앉아 있어. 내가 냉동실에 넣을게.”
이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수겸을 앉혀둔 채, 대신 아이스크림을 건네받았다.
“이사님도 드세요.”
“나는 밥 먹었어.”
한솔의 말에 선욱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면서도 빈자리에 앉았다. 그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앉아만 있을게. 수겸아, 눈은 좀 어때?”
“괜찮아요. 이제 아프지는 않아요. 조금 불편하기는 한데…….”
“다행이네. 혹시 활동하기 어려우면 말해. 이참에 쉬자.”
“아니에요. 이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죠! 팬들도 걱정할 텐데!”
선욱의 말에 수겸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선욱은 아쉽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수겸은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호박죽을 떠먹었다.
“덥네.”
“그래? 너 내내 불 앞에 있었어서 그런가 보다.”
이겸의 혼잣말에 수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고개를 쭉 빼고 벽에 붙은 보일러 조작판을 확인하니 실내 온도는 25도였다. 제게는 딱 좋은 실내 온도였지만, 죽을 끓이느라 계속 불 앞을 지켰을 이겸에게는 더울 수 있겠다 싶었다.
“옷 좀 벗을게.”
“어, 그래…… 아니, 잠깐, 이겸아?”
옷을 벗겠다는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수겸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멈칫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미 이겸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던진 후였다. 안에는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반팔을 입고 있었다.
“……이, 입어, 얼른.”
수겸은 이겸의 어깨에 살짝 드러난 울혈에 기겁했다. 그러나 안절부절못하는 수겸과 달리 이겸은 무슨 생각에선지 여유로워 보였다.
“싫어, 더워.”
“아, 아니, 이, 이사님도 계시고…….”
“뭐 다 벗고 있는 것도 아니고, 괜찮으시죠?”
이겸의 물음에 선욱은 그를 위아래로 살짝 훑어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덥다는데, 뭐.”
선욱이 느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수겸은 눈치를 살피며 선욱과 이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수겸은 급한 마음에 두 명을 보기 바빴지만, 그곳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태원과 한솔, 유찬까지 있었다.
즉,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는 뜻이었다.
“……모기 물렸네.”
잠자코 있던 한솔이 제 어깨를 가리키며 차이겸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목소리에 수겸은 흠칫 얼어붙었다.
“아, 어. 그러게, 물렸네.”
차이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지만, 수겸은 심장이 두근거려 미칠 노릇이었다.
“숙소에 모기가 있던가?”
“어, 있더라고.”
한솔이 이겸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묻는데, 이겸은 뻔뻔하게도 대꾸했다.
도대체 이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수겸은 어쩔 줄 모르며 숟가락만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왜 안 먹어? 먹어.”
차이겸, 저 정신 나간 놈이……!
수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걸어오는 차이겸을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며 따져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밌네.”
선욱은 밑도 끝도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너무나 스산했기에 찔리는 게 많은 수겸은 마른침을 삼켰다.
“모기가 있다고.”
“네. 컸어요. 아니, 작은 건가.”
선욱의 물음에 이겸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면서 시선은 수겸을 보고 있었다. 수겸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내일 송화한테 잘 가려달라고 해야겠네. 사람들 오해하겠다.”
“그러게요, 하필 위치가 오해 사기 좋은 곳이라.”
선욱의 말에 이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날카로운 공기가 공간 안을 난자하는 듯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