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104화
“그렇네. 가둬놓으면 딱이겠다.”
“그치, 그치?”
“응.”
“…….”
수겸은 어째선지 서늘한 느낌을 주는 태원의 대답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뭐, 설마 태원이 자신을 가둬서 묶어두기야 하겠는가.
“형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하니까 진심 같잖아.”
“……하하, 설마.”
“그렇지? 하하, 그럴 리가 없지.”
어쩐지 안 그래도 낮은 태원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게 들리지만, 기분 탓이리라 생각한 수겸은 애써 웃어넘겼다.
“나 먼저 들어갈게.”
“어, 알았어.”
수겸은 태원에게 인사를 건넨 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던 중 복도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빠르게 미간을 좁혔다가,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오랜만이에요, 수겸 씨.”
“아,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를 건네오는 이는 신명현이었다. 수겸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구겨지는 미간을 애써 폈다. 다행히 신명현은 수겸의 표정이 어두워졌던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해맑게 말을 걸어왔다.
“연락이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겨우 연락을 받나 했는데, 웬 남자가 받더니 ‘연락하지 마십시오’ 이러더라고요. 걱정했어요.”
“헉, 그랬어요?”
이번만큼은 상대가 신명현인 것도 잊고 대화에 빠져든 수겸이었다.
휴대폰을 압수해 간 사람이 이사님이니, 아마 전화를 받은 사람 역시 이사님일 터였다. 이사님이 신명현의 전화를 받고,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해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휴대폰을 회사에 뺏겼구나, 싶기는 하더라고요. 이래서는 같이 밥도 못 먹잖아요. 아쉽다, 정말.”
“그러게요…….”
콩알만큼도 아쉽지 않았지만, 신명현이 하도 아쉬워하는 기색이기에 사회성 있는 수겸은 대충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러자 신명현은 수겸이 정말 아쉬워한다고 생각했는지 무언가 고민에 잠긴 듯한 얼굴이 되었다.
“저 서브폰 있는데, 빌려 드릴까요?”
“네?!”
“에이, 뭘 그렇게 놀라요. 수겸 씨는 서브폰 없…… 아, 없겠구나. 그러니까 연락이 안 됐지, 맞아.”
신명현은 새삼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생에서부터 내려온 원한 때문에 신명현이 영 곱게 보이지 않는 수겸은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다 서브폰 있어요. 회사에 뺏겨도 괜찮게.”
“아……. 저는 그런 거 없어요.”
“와, 수겸 씨 진짜 순진하구나. 하긴, 그렇게 생기기는 했어.”
“…….”
수겸은 신명현의 말에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순진하게 생겼다는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도 모르겠고, 설령 칭찬이라 할지라도 그 말을 들어 기분 좋아할 타입은 아니었다.
“아무튼, 서브 폰 필요해요? 그럼 빌려줄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휴대폰 없이 안 답답해요?”
“별로……. 아, 쿡힘덤 못 하는 게 좀 아쉽기는 하지만…….”
“오, 수겸 씨도 그 게임 해요? 나도 하는데. 나중에 닉네임 좀 알려줘요.”
“네, 뭐……. 휴대폰 찾으면요.”
“앗싸, 친구 생겼다.”
해맑게 웃으며 기뻐하는 신명현을 가만히 보던 수겸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전생에는 둘도 없는 개색기였던 신명현인데, 이번 생에서는 의외로 유찬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지 않아서였다.
물론 자신의 디펜스가 큰 도움이 되어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유찬을 향한 신명현의 관심이 사그라든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수겸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듯한 신명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사실 신명현은 블랙A의 센터인 만큼 비주얼 하나는 독보적이었다. 물론 수겸의 눈에는 차이겸이 조금 더 잘생긴 것 같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는 길게 뻗은 다리 하며 딱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까지, 피지컬 역시 끝내주었다. 역시 이것 또한 차이겸이 조금 더 나은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멀쩡하게 생긴 놈이 전생에는 왜 그랬나 싶어 또다시 열이 받으려던 찰나였다.
“저요, 수겸 씨가 마음에 들어요.”
“네?”
“수겸 씨랑 친해지고 싶어요.”
“어…….”
“수겸 씨도 저랑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엥? 누가요? 제가요? 님이랑요?
수겸은 난생처음 듣는 소리에 당황하여 커다란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명현은 정말 즐거운 눈치였다. 황당함에 얼을 타고 있을 때였다.
“송수겸.”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수겸이 힐끔 뒤를 돌아보자, 태원이 굳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수겸은 방금 전에 헤어졌지만, 신명현 앞이라 그런지 새삼 더욱 반가운 태원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수겸을 미소를 앞에 두고도 태원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자신이 뭐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싶어 수겸이 제 행동을 돌아볼 때였다.
“민성이 형이 빨리 들어오래.”
“아, 정말? 형한테 연락했어?”
“응.”
하긴, 화장실에 가겠다고 나와서 한참 동안 거울을 보다가 태원과 이야기도 나누고, 이제는 신명현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하기는 했다.
수겸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명현을 향해 대충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했다.
“그럼 이만, 저는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네…… 어어, 형, 천천히 가. 천천히.”
예의상 신명현에게 대꾸하려고 하는데, 태원이 수겸의 손을 잡더니 빠르게 걸었다. 덕분에 수겸은 신명현에게 대충 하려던 인사도 끝맺지 못했다. 상대가 신명현이니 딱히 아쉬울 것은 없었지만, 이렇게 걷다가 발이 꼬여 넘어질까 봐 긴장되었다.
“……하, 수겸아, 너 진짜 저 사람한테 관심 있어?”
“어?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대기실 앞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수겸을 끌고 온 태원이 깊은 한숨 끝에 물었다. 당연히 수겸은 질색하며 도리질까지 쳐대었다. 다른 놈도 아닌 신명현에게 관심이 있다니, 이게 무슨 끔찍한 소리란 말인가.
“그런데 왜 저렇게 저 사람이랑 반갑게 인사를 나눠?”
“반갑기는 무슨, 전혀 아니거든.”
“저 자식은 좋아죽던데?”
“그거야 저 자식이 이상한 놈이라 그런 거고. 나는 아니야.”
생각해 보면 태원은 수겸이 있는 방향에서 왔으니, 수겸을 등지고 있는 상황이라 신명현의 표정은 보았어도 수겸의 얼굴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제야 태원이 왜 그런 오해를 했는지 이해가 가기는 했지만, 신명현에게 깊은 악감정이 있는 수겸으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그런 자식을 좋아해. 저 자식이 전생에 어떻게 했는데.”
“내 말이 그 말이야. 저 새끼가 유찬이한테 어떻게 했는데, 너는 저 새끼랑 그렇게 즐겁게……! 저 새끼를 좋아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없는 거잖아.”
“아, 아니야! 그런 거! 날 뭘로 보는 거야?!”
수겸은 냅다 급발진하는 태원의 팔을 다급하게 붙들었다. 억울해 미칠 노릇이었다. 설마하니, 자신이 신명현 같은 쓰레기를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나도 눈이 있어, 저런 놈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런데 왜 넌 저 자식한테 잘해줘?”
“아, 내가 언제! 잘해준 적 없거든? 그리고 저 자식이 아무리 전생에 개자식이었다고 한들, 그걸 기억도 못 하는 놈한테 내가 뭐라고 그래? 그냥 예의상 인사하면 받아주고 하는 거지, 뭐.”
수겸은 말할수록 더욱 억울해지는 기분이라 가슴까지 쳤다.
“인간이 사회생활은 해야 할 거 아냐! 전생의 이유로 현생의 사회생활조차 안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질투 난단 말이야!”
“뭐?”
“질투 난다고!”
태원의 말에 수겸은 할 말을 잃었다. 결국 태원이 이렇게 길길이 뛰고 난리를 피우는 이유가 질투라는 단순한 원인 때문이었다. 상상도 못 한 이유에 수겸은 멍하니 입술을 달싹거렸다.
“네가 다른 놈이랑 대화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질투가 나……. 알아, 나도 내가 미친놈인 거.”
“그, 그렇다고 미친놈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고…….”
수겸은 태원의 자책에 손사래를 쳤다. 그가 스스로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튼, 나는 저 자식한테 요만큼의 감정도 없어. 그러니까 형이 질투할 필요도, 저런 놈을 신경 쓸 이유도 없어.”
“……그런데 저 자식은 왜 지금은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데?”
“어?”
“설마, 너 몰랐어?”
태원의 말에 놀란 수겸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태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 반응에 수겸은 얼른 자신을 대할 때 신명현을 생각해 보았다.
신명현은 굳이 수겸만 보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는 척을 해왔다. 게다가 연락처를 주고받자느니, 밥을 먹자느니 쓰잘데기 없는 말을 매번 했다. 그리고 수겸이 무슨 말만 하면 별것도 아닌 것에 생글생글 웃어대었다.
설마 그 모든 게…….
수겸은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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