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99화
수겸은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차마 멤버들이 있을 방에 들어갈 자신이 없어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쯤에야 겨우 거실 바닥에 누워 눈을 붙였지만, 그마저도 선잠에 불과했다.
아침잠이 많은 터라 평소였으면 늦게 잔 만큼 일어나기가 더 힘들었을 테지만, 오늘은 누가 깨우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숙소는 아직 고요했다. 시간을 보니 6시도 채 되기 전이었다.
수겸은 몽롱한 상태로 샤워를 했다.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쏟아지는 물을 맞으면서도 개운하다는 감각은 없었다. 그 때문에 샤워는 평소보다 길어졌다.
샤워를 마친 수겸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욕실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다. 문 앞에 이겸이 서 있기 때문이었다.
“어, 어어…… 기다렸어? 미안, 너무 오래 걸렸지…….”
수겸은 당황하여 횡설수설 사과를 건네었다. 젖은 머리를 닦는 것도 잊어버려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겸을 밀어내고 욕실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는 수겸은 우물쭈물하며 차이겸의 눈치를 살폈다.
“저…… 비켜주면 안 될까?”
“…….”
차이겸은 아무 말도 없이 옆으로 한 발자국 비켜주었다. 수겸은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에, 이겸이 만들어준 틈으로 나섰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 방으로 향하던 수겸은 오래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차이겸이 수겸의 손을 잡아챈 탓이었다.
“어, 어……?”
“머리 말려줄게.”
“아, 안 그래도 되는데…….”
“너 머리 잘 안 말리잖아.”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겸은 젖은 머리를 바짝 말리는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두피 쪽 위주로만 대충 말리고 나머지는 자연의 섭리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랐다.
문제는 수겸은 탈색 모발이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물기를 잘 흡수하지 않아서, 늘 머리가 마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우물쭈물하는 와중에 이겸이 수겸이 들고 있던 젖은 수건 대신 새로 보송보송한 수건을 가져와 수겸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수겸이 슬쩍슬쩍 올려다볼 때면 머리를 말려주는 데에 집중한 차이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특별한 스킨십을 한 것도 아니고,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민망해졌다. 수겸은 가슴이 찌릿찌릿한 것 같기도 하고 손이 간질간질한 것도 같아서 괜스레 두 손을 잡고 꼬물거렸다.
“됐다, 이제 드라이기로 말리자.”
“내, 내가 할게…….”
“됐어.”
수겸으로선 나름 용기를 낸 거절이었지만, 차이겸은 수겸의 거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수겸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차이겸을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차이겸이 드라이를 켜자 위잉 하는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따스한 바람이 수겸의 머리를 간지럽혔다. 차이겸은 수겸의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바람이 잘 통하게 해주었다.
“머릿결 엉망이다, 너.”
“……나도 알거든.”
난데없는 차이겸의 타박에 수겸이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선명한 분홍색 머리를 위해 탈색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검은색으로 염색을 했지만, 탈색을 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았기에 머리털은 여전히 개털이었다. 탈색 때문에 상한 머릿결이 늘 불만인 수겸이기에 당연히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차이겸은 수겸의 대답이 뭐가 우스운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드라이기 소리에 묻혀 그의 웃음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맞은편에 놓인 거울을 통해 그의 웃음이 훤히 보였다.
차이겸은 다정한 손길로 꼼꼼하게 수겸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수겸은 거울을 통해 차이겸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매일 보는 얼굴이 뭐 그리 새삼스러운지 유난히 잘생기게 보였다.
“한숨도 못 잤네.”
“어? 어떻게 알았어?”
“네가 이 시간에 자발적으로 일어날 리가 없으니까.”
“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수겸이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간파한 차이겸이 대단했다. 수겸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젖은 머리가 점점 말라갈수록, 수겸은 이 시간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뜻이었으니까.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단순히 머리를 말리는 지금뿐만 아니라, 그냥 영영 숨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미안…….”
수겸은 윙윙 시끄럽게 울어대는 드라이기 소리에 기대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겸이 미간을 좁혔다.
“뭐? 안 들려?”
역시나 차이겸은 수겸의 말이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겸은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사과를 하고 싶은데, 그 사과 때문에 차이겸과의 사이가 어색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얄팍하고도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안도하는 이유는 역시나 자신이 이기적인 탓일 터였다.
수겸은 못난 스스로를 탓하면서 다시 말해주는 대신 굳게 입을 다물었다.
“뭐라 그랬어?”
차이겸은 이상함을 느꼈는지 드라이기까지 끄고 되물었다. 수겸은 고집스럽게 입술을 내리다물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 안 할 거야?”
“…….”
“하, 미치겠다.”
이겸의 혼잣말에 움찔한 것은 사실이었다. 겁이 났다거나 걱정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혼잣말에는 숨길 수 없는 속상한 감정이 묻어나서였다.
겨우 제 말 한마디를 듣지 못한 것 때문에 속상한 걸까? 차이겸은 제 말 한마디가 그렇게나 중요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수겸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수겸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답답한 호흡을 골랐다.
“송수겸.”
“……응.”
“나는 네가 이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내 욕심인 거 아는데, 그냥 옆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안 돼. 욕심이 자꾸 커져. 부담을 주고 싶은 건 아니야. 나 때문에 네가 부담스러워하는 건 싫어. 그런데…… 모르겠어. 나도.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겸은 차분히 제 감정을 꺼내놓았다. 수겸은 거울에 비친 차이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는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수겸 역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마음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감정을 덜어줄 수 있는 것 역시 아니었지만, 차이겸이 저렇게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으니 속이 상했다.
“네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 그런데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너를 너무 좋아하니까.”
“…….”
“마냥 배려하고, 마냥 이해해 주기에는 나도 이기적인가 봐.”
이겸의 자조적인 말에 수겸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기적이라니,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수겸은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네가 이기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전혀 안 그래. 너는 매번 나한테 잘해주고…….”
“그야 너를 좋아하니까. 내가 좋아하는 너에게 잘해주고 싶고, 또 너한테 잘 보이고 싶으니까. 결국은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이겸의 말에 수겸은 무어라 대꾸할 말을 잃었다. 당연히 그에게 실망했다거나, 서운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겸의 진심이 더 절절히 느껴져서였다.
“나는…… 그러니까 나는…….”
“말하기 힘들면 하지 마.”
“미안해.”
오히려 말하지 말라는 이겸의 말을 들으니, 수겸은 이 말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겸은 한없이 솔직하게 제 감정을 표현해 주는데, 자신이 뭐라고 하찮은 감정을 숨긴단 말인가.
“뭐가 미안해?”
“그냥, 다…….”
‘너를 이용한 것도, 네 감정을 몰라준 것도.’
수겸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목이 메었다.
그때, 이겸이 수겸의 조그마한 머리통에 커다란 손을 올렸다. 다정하고도 따스한 손길에 수겸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이겸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없이 서글프고 괴로워 보이기만 했다.
“너한테는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인데, 그거.”
“아…….”
“꼭 거절당하는 것 같잖아.”
이겸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욕실을 나섰다.
멀어지는 이겸을 보자 수겸은 가슴이 덜컹했다. 그런 게 아니었다. 물론 이겸의 마음을 받아들여 연애를 시작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이겸의 감정을 거절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수겸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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