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85화
수겸은 한솔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혹시나 싶기는 했지만, 전생에 있었던 폭행 사건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에 확신이 생긴 탓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자, 한솔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한편 화가 났다. 내가 뭐라고, 한솔에게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 때문에 한솔이 본인의 미래를 망친단 말인가.
“……그러지 마.”
“형……?”
수겸이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그러자 한솔이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반응을 했다.
수겸은 터지는 한숨을 애써 억누르며 겨우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너 스스로를 망치지 마. 그러면 안 돼.”
“…….”
“내가 뭐라고 그래, 얼마나 힘들게 데뷔했는데. 그러지 마,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형은 나한테 정말 소중해. 형이 뭐라고 그러냐고? 하루 종일 형 생각밖에 못 해. 형이 없는 순간을 상상할 수 없어.”
한솔은 숨도 쉬지 않고 울분을 토하듯 말을 쏟아냈다.
수겸은 혼란스러웠다. 물론 한솔이 자신에게 고백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한솔뿐만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 그리고 이사님까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고백을 받았어도, 진지하게 그 마음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고백을 받은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해서, 어떻게 하면 눈앞에 닥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생각하느라 그들의 감정의 무게를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미안해.”
“뭐가? 뭐가 미안한데?”
“그냥,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 같아서. 변명하자면…… 혼란스러웠어. 내가 처한 상황이,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진지하게 네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어. 미안.”
수겸은 솔직하게 떠오르는 대로 제 마음을 고했다. 수겸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차마 한솔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였다.
“형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이해해. 당황스러웠을 거고, 걱정도 됐을 거야. 내가 형이었어도 그랬을 테니까. 그러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그러나 수겸의 걱정과 달리 한솔은 그마저도 모두 이해해 주었다.
너그러운 말에 수겸은 두근거리는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어떻게 그걸 이해할 수 있는지, 고맙고 감동이었다.
“형을 좋아해서, 언제까지고 그 마음을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고백한 거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형이 부담감을 느끼고, 힘들어하기를 원하지는 않아. 그러니까 형이 사과할 것 없어.”
한솔은 수겸을 달래주듯 다정하게 말했다. 그 감정이 어찌나 따스한지 수겸의 가슴에도 훈풍이 불어왔다.
“가자. 다들 기다리겠다.”
“……응.”
수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조심스레 한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해사하게도 웃고 있었다. 정말 조금도 서운하거나, 섭섭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따스한 감정과 사랑만이 가득했다.
그렇기에 고마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미안하기는 했다.
내가 저 넘치는 감정을 받아도 될까, 그의 사랑을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일까?
마음 한구석에 떠오르는 생각에 수겸은 양심이 콕콕 찔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슴 한편에 가시지 않은 복잡한 감정을 품에 안은 채, 수겸은 한솔과 함께 나란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까 제작진들이 했던 모난 말에 받은 상처는 지금 당장 나눈 대화가 가져다준 혼란스러움이 워낙 커서 묻혔다.
“둘이 어디 갔다 와?”
한솔과 대기실에 들어가자마자 태원이 수상쩍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비록 말로는 ‘어디 갔다 와?’라고 물었지만, 그 질문 안에는 ‘둘이 어디서 뭘 하다가 같이 들어와?’라는 꽤 불만 섞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아, 그게 복도에서…….”
“데이트하다 왔어.”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말을 하려던 수겸은 한솔의 말에 놀라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멤버들뿐만 아니라 송화 누나와 민성이 형을 비롯한 스태프까지 다 있는 자리인데,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싶어 깜짝 놀랐다.
“야야, 정한솔 줄 서. 수겸이랑 데이트하는 건 내가 먼저 줄 서놨으니까.”
“그래, 알았다.”
그러나 놀란 수겸과 달리 송화와 민성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두 사람 다 한솔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두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스태프들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유피트의 멤버들만 빼고 말이다.
태원과 이겸, 유찬은 굳은 표정으로 한솔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한솔은 오히려 그들의 눈빛에 기분이 좋아진 듯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수겸이 괜스레 눈치가 보여서 멤버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는데, 때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등장한 사람은 아까 복도에서 수겸을 놓고서 음담패설을 하던 제작진 중 한 명이었다.
“유피트 촬영 들어갈게요.”
그는 툭 제 할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수겸과 눈이 마주쳤다. 수겸은 저도 모르게 반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섰다.
‘아아. 잘 빨게 생긴 애?’
복도에서 들은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수겸은 창백해진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그는 나가고 없는데, 그가 있던 자리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겸이 형, 괜찮아요?”
“어, 어? 어어……. 괜찮아.”
유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수겸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를 따라 대기실을 벗어나 촬영장으로 향했다.
* * *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유피트는 커다란 백팩을 하나씩 메고 그 안에 힌트 종이를 조각조각 나눠 가졌다. 패널들은 제한된 시간 안에 유피트 멤버들을 모두 잡아 힌트 종이를 구해야 했고, 유피트는 최대한 도망을 쳐서 패널들에게 힌트 종이를 빼앗기지 않아야 했다.
자신의 하찮은 체력과 느려 터진 달리기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수겸은 고라니처럼 꽥꽥 소리를 지르며 도망 다니기 바빴다.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아니, 저 친구 왜 저렇게 소리를 질러!”
“으아아아아, 오지 마세요, 오지 마세요, 으아아아아아!”
“저기요, 수겸 씨, 수겸 씨! 진정하시고…….”
“으, 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아하하하학, 하하하하학! 수겸 씨 진짜 웃긴다, 왜 저래, 진짜!”
수겸의 비명에 패널들은 당황하기도 하고, 진정을 시켜보려고도 하고, 웃기도 했다.
용케 이리저리 도망 다니던 수겸은 마침내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는 얼른 백팩을 벗어 앞으로 메고 가방을 열 수 없게끔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동수야, 동수야! 수겸 씨 잡아. 얼른!”
“으아아아, 잡지 마세요, 잡지 마세요!”
“아니, 잡아야 해요. 뭘 잡지 말래!”
“으아아아아아, 그래도 잡지 마세요, 아아아아!”
“아하하하하, 수겸 씨 진짜 웃긴다.”
지친 수겸을 중심으로 패널들 세 명이 점차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위험을 느낀 수겸이 급한 마음에 시선 끝에 보이는 유찬을 발견하고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유찬아! 살려줘!”
유찬 역시 패널 한 명을 따돌리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그는 수겸의 말을 듣더니 곧장 패널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유찬의 등장에 수겸을 노리던 패널들은 유찬으로 목표물을 바꾸었고, 수겸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도망쳤다.
멀어진 수겸이 힐끔 돌아보니 처음 유찬을 쫓던 패널에 수겸을 노리던 패널 세 명까지 총 네 명의 공격을 받은 유찬은 기어코 잡혀 가방을 털리고 있었다.
“허억, 유찬아 미안, 으아아아아!”
그러나 수겸의 사과가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나타난 또다른 패널이 수겸을 와락 양팔로 끌어안았다.
“지민아, 빨리! 수겸 씨 가방 열어! 내가 잡고 있을 테니까!”
결국 수겸은 유찬의 희생이 무색하게도 초 단위로 잡혀 가방이 털리고 말았다.
수겸이 허망히 쪼그려 앉아 활짝 벌어진 힌트 가방을 보며 시무룩하게 있자, 유찬이 와서 수겸의 동그란 정수리에 커다란 손을 올렸다.
“괜찮아요, 잘했어요.”
“으헝, 너무 금방 잡혔어. 억울해.”
유찬의 위로에 수겸은 그의 다리를 와락 끌어안고는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자 유찬이 수겸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이후로 한솔과 태원이 순서대로 잡혔다. 태원을 잡을 때는 전체 일곱 명의 패널 중 다섯 명이 동시에 달려들기도 했다. 태원은 5 대 1로 싸우다가 기어코 잡히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차이겸은 기나긴 다리로 이리저리 잘 도망 다녔고, 결국 유일하게 잡히지 않고 힌트 가방을 지켜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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