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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84화 (86/143)

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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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에 도착한 유피트는 제작진에게 인사하고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수겸은 들썩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촬영이 시작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특성상 촬영은 예고 없이 늦어졌다. 아마 패널들이 이전 단계 미션을 클리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기다림은 십 분, 이십 분, 점차 늘어났다. 처음에는 좀이 쑤셔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기도 했고, 좁은 대기실 안에서 나름대로 몸을 움직여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촬영을 앞두고 한껏 긴장했던 몸은 저도 모르게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으으, 졸려.”

기약 없는 기다림에 졸음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무거워진 눈두덩이를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누르며 애써 졸음을 참던 수겸은 이내 벌떡 일어났다. 잠이라도 깰 요량으로 화장실에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은 탓이었다.

음악 방송 때문에 방송국에 올 일은 많았지만, 그 외 다른 이유로 방문한 경험은 거의 없었기에 예능 촬영국은 수겸에게 미로와 다를 바 없었다.

물어볼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낯선 곳이었다. 수겸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화장실로 향하는데,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다가오는 한솔이 보였다.

간밤의 기억에 수겸의 낯이 삽시간에 발갛게 익었다. 얼른 그를 피해 돌아가야겠다 마음먹은 수겸은 급히 코너를 꺾었다. 다행히 한솔은 수겸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때 제작진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긴 복도를 지나쳤다. 그중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뭔가 떠오른 듯 같이 걷던 상대의 팔을 툭 쳤다.

“야, 오늘 온 애 봤냐?”

“누구?”

“머리 분홍색.”

연예인 중에 머리 색이 분홍색인 사람이 수겸 한 명뿐이겠느냐마는, 수겸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느꼈다.

타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직업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대화를 듣게 된 것은 처음이기에 수겸은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서 숨을 죽였다.

“아아. 잘 빨게 생긴 애?”

“미친 새끼, 말하는 거 봐라.”

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에 수겸은 사지가 뻣뻣하게 굳었다. 수겸은 한솔을 피해 모퉁이에 숨어 있었기에, 그들 시야에 수겸은 보이지 않은 듯했다.

그들은 계속 걸어가며 큭큭거리며 수겸을 대상으로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잘 빠는 건 모르겠고, 꼴리기는 하더라. 실실 웃으면서 눈치 보는 게 뭐 남자 새끼가 그렇게 생겼냐?”

“뭐, 호르몬 같은 거 맞지 않겠냐?”

“아, 여성 호르몬?”

“그렇겠지, 딱 보면 각 나오잖아.”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지만, 그들의 대화가 수겸에게는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쿵쾅쿵쾅, 가슴이 뛰었다.

그때, 수겸의 머릿속에 번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 길 끝에 한솔이 있었다. 한솔이 그들의 대화를 듣는다면…….

순간 뒷덜미가 선뜩해졌다. 그와 동시에 전생에서 한솔이 폭행 사건에 휘말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봤던 CCTV 배경이 이곳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때가 생각났다.

수겸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냅다 모퉁이 밖으로 뛰쳐나가 복도에 섰다. 그러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한솔아!!!”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수겸의 목소리에 앞서 걷던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내 두 사람은 수겸을 보더니 놀란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찔리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직까지 저 멀리 있던 한솔은 수겸의 부름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활짝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수겸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한솔은 저들의 대화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만약 수겸이 그대로 넋을 놓고 있었다면 두 사람은 계속해서 수겸을 상대로 음담패설을 하며 걸어갔을 것이고, 저쪽 편에서 걸어오던 한솔의 귀에도 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 생각을 하자, 수겸은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수겸이 부르르 몸을 떠는 사이,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갔다.

한솔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밝은 얼굴로 수겸의 앞에 다가와 섰다.

“형, 왜 나와 있어?”

“어, 그게…….”

“나 보고 싶어서 나왔구나? 그러니까 그렇게 부르지.”

“어? 어, 맞아.”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다는 말할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수겸은 넋이 나가 있었다.

나름 기지를 발휘해서 두 사람과 한솔이 마주치는 것을 막았다고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두 사람의 대화가 수겸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사실 전생에서 남자병에 걸린 이유 중 하나도 이와 비슷한 일들 때문이었다.

수겸은 외모 때문에 갖은 루머와 악플에 시달렸다. 이번 생에서는 그걸 감수해서라도 예쁜 얼굴을 써먹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코앞에서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저건 단순한 루머 정도가 아니라, 성희롱이었다. 쉽사리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형, 왜 그래?”

한솔 역시 이상함을 느낀 듯했다. 그는 자못 진지해진 얼굴로 수겸의 표정을 살폈다. 그제야 수겸은 아차 싶어서 애써 웃었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은 무슨……. 그냥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아닌 거 같은데. 그냥 피곤한 얼굴이 아니잖아, 지금.”

“아니래도. 잠을 설쳐서 그래. 아까 송화 누나랑 하는 대화 너도 들었을 거 아냐.”

“……진짜야?”

“응, 진짜.”

수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반응에 여전히 한솔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우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수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도를 걷는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자리했다. 한솔은 한솔대로 수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고, 수겸은 수겸대로 아까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한참 걷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대기실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여전히 수겸은 아까 들은 말 때문에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그것과 별개로 한솔에게 주의를 줄 필요는 있겠다 싶었다.

오늘이야 타이밍이 맞아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자신이 끼어들어 해결을 했다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었다. 언젠가 오늘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한솔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른다는 게 두려웠다.

어쩌면 전생에 한솔이 스태프를 폭행했던 게 이런 일 때문은 아닐까 싶어 걱정이 되었다.

“있잖아, 솔아.”

“응.”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응, 말해. 괜찮으니까.”

수겸은 한참 주저하다가 한솔의 채근에 결국 입을 열었다. 수겸의 두 눈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폭력은 안 돼. 알았지?”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하는 거야?”

“그냥…….”

“전생에서 내가 사람을 때렸다는 이야기는 전에 해서 알고 있어. 아직도 이해는 안 가지만, 나름대로 머릿속 한편에 생각하고는 있어. 혹시나 나 때문에 유피트에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까.”

한솔의 진지한 말에 수겸은 안도했다. 그래도 한솔이 폭행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조심하고 있었다는 하니 위안이 되었다.

물론 현생에서 한솔의 입장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신경 쓴다는 게 억울하고 힘들 수도 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생각도 없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그러나 이런 수겸의 생각은 섣부른 착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몇 번을 고민해도 결론은 같아. 그럴 만했으니까 그랬을 거야. 아무 이유 없이 내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솔아.”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어떤 일이면 내가 사람을 때릴 만큼 화가 날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더니 답은 하나야. 누군가 형을 욕한다면, 형을 다치게 하고 아프게 한다면. 그러면 그럴 거야. 참을 수 없을 테니까.”

한솔의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수겸은 그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불안한 예감이 현실이 될 것 같아서였다.

“최대한 조심하겠지만…… 약속할 수는 없어. 누군가 형을 욕한다면, 그걸 참을 자신이 없어. 미안해.”

짧은 사과를 덧붙인 한솔은 굳은 표정이었다. 다짐과도 같은 말에 수겸은 선뜻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렸다.

그때 한솔이 입을 열었다.

“……전생의 나도 그랬을 거야.”

“…….”

“나는, 내가 잘 알아. 그러니까 알 수 있어. 전생의 내가 왜 그랬을지. 누군가 형을 욕되게 했다면, 참지 않았을 거야. 지금의 나도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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