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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83화 (85/143)

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83화

수겸은 사고까지 얼어붙은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런데 수겸이야 그게 닿은 입장이니 어쩔 줄 모르고 얼어붙어 있다고 치고, 물건의 주인공인 한솔은 왜 가만히 있느냔 말이다.

명상을 해서라도 그걸 가라앉히든가, 아니면 황급히 일어나서 그걸 멀찍이 떨어뜨려 주든가 해야 할 것 아닌가.

“야, 정한솔.”

“응?”

“너…… 왜 가만히 있냐.”

민망한 것은 민망한 것이지만, 가만히 있는 한솔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진 수겸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물론 한솔도 너무 당황해서 얼어붙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현실을 인지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나? 왜?”

“아, 아니…… 그, 그게…… 닿고 있잖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한솔의 대답에 수겸은 설마 자신이 착각한 것인가 싶어 자신감이 없어졌다. 그에 따라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분명 닿았는데, 한솔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설마 모르는 건가, 정말?

“아…… 응.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라고? 야, 인마! 그게 닿았으면 얼른 떼야지, 뭐 하는 거야!”

“고민하고 있었어.”

한솔이 하도 진지하게 대답하니까 수겸은 울컥 치밀었던 화도 일순간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무슨 고민?”

“선 김에 기회다 하고 이대로 밀고 들어갈까, 아니면 실수인 척 밀고 들어갈까.”

“야이, 미친놈아!”

수겸이 질색하며 한솔의 가슴팍을 또다시 찰싹 때렸다. 안 그렇게 봤는데, 한솔 이 어린 자식이 느물거리는 게 백 년 묵은 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얼른 놔, 이 자식아!”

수겸이 씩씩거리며 한솔을 뿌리쳤다. 그러자 한솔은 아쉽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수겸을 놓아주었다. 한솔에게서 놓여나자마자 발딱 일어난 수겸은 아직도 그것의 촉감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배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너, 빨리 네 자리로 돌아가!”

“억울해. 형이 먼저 유혹해 놓고.”

수겸의 말에 한솔은 누운 몸을 일으켜 앉더니, 입술을 댓 발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 말에 기가 찬 수겸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내가 뭘 유혹해, 짜샤!”

“같이 자자며!”

“잠, 잠 말이다, 잠! 슬립!”

“누가 잠자자는 걸 그렇게 말해! 그런 얼굴로, 그런 목소리로, 그런 말투로!”

“내 얼굴이 뭐가 어땠는데, 목소리가 뭐, 말투가 뭐!”

“엄청나게 야했거든.”

“뭐, 뭐? 야해?! 이게 아주, 형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수겸은 기가 막혀 말을 더듬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어이가 없고, 동시에 뻔뻔하기만 한 한솔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이제껏 자신이 알던 한솔은 다 허상이었나 싶을 지경이었다.

“너, 너 언제부터 이랬어? 원래 이런 애 아니었잖아!”

“이런 애가 어떤 앤데?”

“어…… 그, 그렇게 밝히는……?”

한솔의 물음에 수겸은 콕 집어 대답하려다가 이내 민망함에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정작 수겸을 이렇게 민망하게 만든 한솔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한솔은 해사하게 웃더니, 이내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형 한정으로는 엄청 밝혀. 밝히다 못해 문란해. 형 한정으로 그래.”

한 번도 한솔에게 이런 말을 들어볼 것이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수겸이기에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수겸은 충격에 저절로 떡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충격받지 마. 조금 더 기다릴게. 형이 어느 정도 될 때까지. 귀여워 죽겠어, 진짜.”

한솔은 큭큭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수겸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 주더니 방을 나섰다.

수겸은 홀로 방 안에 굳은 듯 멈춰 섰다. 그가 한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나 형 한정으로는 엄청 밝혀. 밝히다 못해 문란해.’

‘나 형 한정으로는 엄청 밝혀. 밝히다 못해 문란해.’

‘나 형 한정으로는 엄청 밝혀. 밝히다 못해 문란해.’

* * *

간밤에 있었던 여러 일 때문에 수겸은 잠을 설쳤다. 밤새 태원과 한솔이 헐벗고 달려드는 바람에 기겁하며 도망 다니는 꿈까지 꿨다.

“우리 수겸이 유리알 같은 피부가 오늘따라 푸석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기분 탓인가?”

송화가 수겸의 안색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에 괜스레 머쓱해진 수겸은 뺨을 긁적거렸다.

“잠을 설쳐서요…….”

“잠을? 왜? 무슨 일 있어?”

수겸의 말에 송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러자 멤버들 역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수겸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시선을 느낀 수겸은 뺨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간밤에 꾼 야릇한 꿈이 생각난 탓이었다.

“하하, 아, 아뇨. 일은요, 무슨……. 그냥 너무 피곤했나 봐요. 그런 거 있잖아요.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잠을 잘 못 자는 거.”

“아, 알지, 알지. 헉, 우리 수겸이 그 정도로 힘들어? 안 되는데!”

“힘들지는 않아요, 괜찮아요.”

송화의 걱정에 수겸이 도리질을 치며 부정했다. 여전히 송화는 울 듯한 표정으로 수겸을 바라보았지만, 수겸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수겸이 이제 슬슬 탈색해야겠다. 뿌리 올라오려고 하네.”

헤어 스타일링을 담당하는 지연이 끌끌 혀를 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에 피로로 눈을 감고 있던 수겸이 얼른 눈을 떠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핑크색 머리 사이로 검은색 뿌리가 조금 올라와 있었다.

“으으, 탈색하기 싫은데!”

수겸은 두피가 화끈거리는 탈색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그러자 지연이 안타깝다는 듯 수겸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쯤 되면 알아서 분홍색 머리로 자라야 하는 거 아니에요?”

대상을 알 수 없는 원망이 터져 나왔다. 지연은 그 말이 우스운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이사님한테 다음 콘셉트는 흑발 하자고 졸라봐.”

“그래야겠어요, 진짜.”

“헐, 우리 수겸이 흑발 다시 보는 거야? 연습생 때나 겨우 볼 수 있었던 전설의 흑발? 그 청초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는 거라고?!”

지연의 말에 수겸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마자 송화가 불쑥 끼어들어 주접을 떨었다.

송화는 수겸의 어떤 모습이든 다 좋아했지만, 그중에서도 검은 머리 수겸은 전설이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는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송화는 수겸이 머리를 하는 내내 옆에서 갖은 찬사를 보냈다. 머쓱하게 할 수 있는 감사 인사마저 바닥나 더는 없을 때에야 겨우 스타일링이 끝이 났다.

수겸은 서둘러 숍을 벗어나 대기하고 있던 밴에 몸을 실었다.

유피트는 이번에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 깜짝 게스트로 출연할 예정이었다. 한 회차 내내 등장하는 것은 아니었고, 예능 프로그램 패널들이 수행해야 하는 미션의 힌트를 주는 역할이었다.

수겸은 심심할 때면 너튜브로 이 예능 프로그램의 클립 영상을 보고는 했기에, 자신이 이 방송에 출연하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촬영장으로 향하는데, 수겸이 설레어하는 모습을 백미러로 보던 민성이 입을 열었다.

“수겸이 좋겠다? 지금 촬영하는 거, 네가 좋아하던 프로그램이잖아.”

“맞아요! 완전 좋아요! 다음에는 게스트로 제대로 나가고 싶어요. 형이 좀 어떻게 해주면 안 돼요?”

“그걸 왜 나한테 해달래? 나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에이, 형 힘 있는 거 다 알거든요!”

수겸은 민성의 말에 불만 어린 표정으로 눈을 치뜨고 대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성은 DP엔터테인먼트에 들어오기 전부터 방송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워낙 성격이 좋고 마당발이라 아는 사람도 많았다. 이 사실을 수겸 역시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있었다.

“참 나, 너네가 잘해야 나도 영업할 명분이 있지.”

“에이, 우리 잘하잖아요.”

“송수겸, 언제 저렇게 여우가 됐대?”

수겸이 너스레를 떨자, 민성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수겸이 샐쭉 웃었다.

“저 원래 여우잖아요, 몰랐어요?”

“꼬시지 마라, 여우야. 그런 건 팬들한테나 해. 나는 안 넘어간다.”

“쳇, 아쉬워라.”

“나는 넘어가.”

민성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킬킬거리는데, 내내 무표정으로 조용히 있던 차이겸이 불쑥 끼어들었다. 놀란 수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데, 이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민성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뭐야. 공식이라고 받아주는 거야? 야, 카메라 없다. 굳이 그럴 거 없어. 짜식, 쓸데없이 프로페셔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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