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74화
수겸이 넋이 나가 네 사람을 바라보는 사이에도 휴대폰은 쉬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눈빛이 ‘전화 받지 마’라고 말하는 듯했지만, 소속사 최고 권력자인 이사님의 전화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럴 만한 합리적인 이유도 없었고.
“여, 여보세요……?”
결국 수겸은 멤버들의 눈치를 살피며 전화를 받았다.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에 화상이라도 입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수겸아, 목소리가 왜 그래?
“…….”
-무슨 일 있어?
선욱은 수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무언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이유야 명확했다. 네 사람이 수겸 앞에서 서슬 퍼렇게 눈알을 부라리며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바로 전에 고백 아닌 고백까지 한 상대들이 말이다.
하지만 입이 찢어져도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아, 아니. 정말 입이 찢어진다면 하겠지만. 아픈 건 싫으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쨌든 실제로 입이 찢어질 일은 없으니까 수겸은 거짓을 말했다.
-무슨 일 있네. 말 안 하면 내가 지금 간다?
“……아, 아무 일도 없다니까요.”
-지금 출발할게.
“자, 잠시만요…… 이사님, 이사님?!”
수겸은 끊긴 휴대폰에 대고 허망하게 외쳤다. 그 짧은 통화에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도 신기한데, 그 때문에 소속사 이사라는 사람이 당장 달려오겠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설령 애인이라고 해도 이 늦은 시간에 바로 달려온다고 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반쯤 넋이 나간 수겸은 한동안 멀뚱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그가 오면 지금의 똥 같은 상황은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렇게 된다면 나을 터였다. 그제야 수겸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사님 오신대.”
“……지금?”
“응, 지금.”
그러니까 이제 그만 꺼져줘.
하지 못한 말이 입술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차이겸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 수겸은,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냉큼 비켜줄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네 사람은 가만히 서서 제자리에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영문 모를 대화까지 나누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됐네.”
“그러게. 이참에 정리할 건 확실히 해야지.”
“맞아.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최 대화의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왠지 자신에게 좋은 뉘앙스는 아니었기에 수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정리하겠다고.”
태원의 대답에 수겸이 마른침을 삼키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뭘 정리해? 잠깐, 대답은 해주고 가! 그게 무슨 뜻인데, 뭔데, 뭐냐고!”
네 사람은 조금 전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수겸의 방을 나갔다.
당장에 수겸의 바지라도 벗길 기세였던 놈들이 제 발로 물러나 준 것은 참 고마운 일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물러나니 찜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겸은 다급하게 네 사람을 불렀지만, 그들 중 누구도 멈춰 서지 않았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기라도 하는 듯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수겸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수겸은 얼른 멤버들을 따라 거실로 나갔다.
“뭐야, 뭔데!”
길쭉한 인영 네 개가 수겸이 냅다 내지른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흉흉하기까지 해서 수겸은 이내 제 행동을 후회했다.
“왜, 왜들…… 그러냐고……. 영문 모를 말을 하니까 궁금하잖아…….”
꼬리를 내린 수겸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한솔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단, 평소의 그가 보여주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환한 웃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정말 알고 싶어?”
“……어.”
한솔의 물음에 수겸은 마른침을 삼킨 후에 겨우 대답했다.
사실 그 짧은 답을 하기까지 마음속에서는 숱한 번뇌가 일었다. 그 다정하고 따뜻한 한솔이 저런 식으로 물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진실을 알기 두려워진 탓이었다. 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그만큼 그가 한 ‘정말 알고 싶어?’의 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네 명이냐, 다섯 명이냐의 차이야.”
“어?”
“당사자가 하지 않은 말을 내가 다 할 수는 없으니까, 이 정도만 말할게.”
한솔의 말에 수겸은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들은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모르긴 해도 네 명은 아마 멤버들을 의미하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왜 다섯이냔 말이다.
물론 유피트 멤버가 자신까지 합치면 다섯 명이기는 하지만, 문맥상 그 다섯 명에 자신이 끼는 건 이상했다.
그렇다면 설마…….
“이사님…… 을 말하는 거야?”
수겸은 번뜩 머릿속에 스치는 불안한 생각을 조심스럽게 입에 올렸다가 이내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하, 그럴 리가 없지.”
“…….”
“……그럴 리가 있어, 설마?”
“…….”
“에이, 아니지?”
“…….”
“아, 대답 좀 하라고!”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 이렇게 불안할 줄이야. 수겸은 초조한 마음에 대답을 채근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되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이사님이 자신을 좋아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멤버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 역시 말도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뭐, 그래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멤버들한테는 의도치 않게 플러팅을 날리기는 했다. 멤버들이 그걸 오해해서 제게 호감을 느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수겸의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지만 굳이 굳이 이유를 덧붙이자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합리화를 할 수는 있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사님은 달랐다.
그 잘난 이사님이 뭐가 아쉬워서, 자신 같은 뭣도 없는 생초짜인 신인 아이돌을 좋아한단 말인가. 그것도 자기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가수를 말이다. 심지어 성별마저 같은데.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아니지. 이사님이 날 왜 좋아해.”
“형을 좋아할 이유를 대자면 수만 가지도 댈 수 있어요.”
기가 찬다는 듯한 자조적인 수겸의 말에 유찬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수겸은 예상 못한 그의 즉답에 솔직히 말해서 속도 없이 감동받았다.
여전히 그의 고백이 당황스럽고 난감하기 짝이 없기는 하지만, 누군가에게 ‘당신을 좋아할 이유가 수만 가지는 돼요’라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찡하게 울리기는 했다.
설령 그 상대에게 호감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감정에 동요가 일 터였다. 수겸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일렁거리는 가슴을 달랬다.
“어, 어쨌든 난 이사님이 나를 조, 좋…… 크흠, 흠, 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럴 리 없어.”
“뭐, 그러든가. 나야 좋지.”
차이겸이 대수롭지 않게 끼어들어 대답했다.
이겸이 만약 조금 더 진지하게 대답했다면 차라리 수겸으로서도 부정하기 더 쉬웠을 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이사님의 마음을 넘기려고 하자, 더 마음에 걸렸다.
수겸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초조하게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곧 이사님이 도착할 시간이 된 탓이었다.
물론 이사님이 정말로 자신을 좋아할 리는 없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한 명도 아닌 네 명에게 고백 아닌 고백을 받은 상황이었으니까.
당연히 멤버들과 감정적인 발전을 한다거나, 연애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그들의 고백을 진지하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나서 좋을 것은 없었다.
튀자. 튀어야겠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수겸은 곧바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지체없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굴러다니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지갑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휴대폰에 연동된 카드가 있으니 어떻게든 될 터였다.
“어디 가?”
“어디든. 나를 찾지 마. 걱정 마. 스케줄 펑크는 내지 않을 테니까.”
태원의 물음에 수겸은 빠르게 대꾸하고는 대충 신발을 구겨 신었다. 그러나 수겸이 벌컥 현관문을 열어젖히려던 순간, 문이 알아서 열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밖에서 문을 연 것이었다. 그리고 문을 연 상대는…….
“이, 이사님…….”
수겸은 지금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보고는 뒷걸음질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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