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73화
* * *
10분 전.
숙소 안에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수겸은 일찌감치 해맑은 표정으로 제 방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는 참이었다. 수겸을 제외한 남은 네 명의 멤버만 거실에 앉아 제각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태원이 형, 어디 가?”
“어? 나 그냥, 아니, 정한솔. 네가 그걸 왜 궁금해하냐?”
“아니, 뭐. 궁금해하면 안 돼?”
“그건 아니지만…….”
태원이 정색하자 한솔은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여전히 눈만은 뚫어져라 태원의 행동을 주시했다. 마치 그를 감시하기라도 하듯.
그때, 이번에는 소파 한 귀퉁이에 앉아 있던 유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유찬과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이겸이 유찬의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가려고?”
“방에요.”
“우리 방은 저쪽이잖아.”
유찬의 말에 이겸이 제 방 쪽으로 턱짓했다. 그 행동이 불쾌한 것인지, 아니면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유찬의 얼굴이 굳었다. 유찬이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수겸이 형 방에 가려고요.”
“왜?”
“제가 그 이유를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응, 있어.”
“그래요? 이유가 뭔데요?”
이겸의 말에 유찬이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러나 이겸은 싸늘하게 굳은 채, 유찬을 응시하는 눈을 떼지 않았다.
“네 대답에 따라 내 행동도 달라지게 될 테니까.”
“…….”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수겸이가 알게 하지 말고. 애 걱정할라.”
태원이 팽팽해진 분위기에 말을 얹었다. 평소 유들유들한 성격을 자랑하는 태원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사실 평소와 달리 날카로운 이가 태원만은 아니었다. 네 사람 모두가 그랬다.
사실 방 안에 얌전히 있는 눈치 없는 수겸이 거실에 있는 넷의 분위기를 알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원이 수겸을 거론한 이유는 흥분한 이들을 효과적으로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 그 외에 달리 없어서였다.
태원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으니, 이 부분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맞았음은 금세 증명되었다. 유찬과 이겸이 여전히 서늘한 시선이기는 했지만, 더 이상의 언쟁은 오가지 않았으니까.
둘이 입을 다문 덕분에 거실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자리했다. 네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을 지켰다. 그 답답하고도 무거운 적요는 꽤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거야?”
한솔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말에 세 사람이 한솔을 바라보았다. 일제히 시선을 받은 한솔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을 이었다.
“바보 같잖아. 이렇게 시간만 허비하는 게.”
“…….”
“보아하니 다들 자기 마음은 아는 것 같은데, 대체 언제까지 우리끼리만 되지도 않는 기 싸움이나 하면서 이러고 있을 거냐고.”
그의 말에 태원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이겸은 주먹을 그러쥐었으며, 유찬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솔의 말뜻을 이해한 탓이었다.
한솔은 단순히 지금 네 사람이 서로를 견제하며 거실에 꼼짝없이 앉아 있는 이 상황을 자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제각기 수겸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며 자기들끼리만 기 싸움을 하던 것을 가리킨 것이었다.
잠시 네 사람 사이에 종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침묵이 내리깔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잠시였다.
곧 네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수겸이 있는 방문 쪽을 향해 곧은 시선을 보냈다.
* * *
다시 현재.
수겸은 급한 마음에 침대 위에 널브러진 이불을 들어 온몸을 둘둘 감쌌다. 물론 겨우 이불 한 장으로 광기에 둘러싸인 네 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간절히 몸에 이불을 두른 수겸은 빼꼼 얼굴만 내민 채 바쁘게 눈알을 굴리며 네 사람의 상태를 확인했다. 얼핏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만, 다들 눈빛이 미묘하게 돌아 있다는 사실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수겸은 본능이 일러주는 대로 촉각을 곤두세우고는 네 사람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더 다가오기만 해봐. 가만 안 둬, 진짜.”
뭘 어떻게 가만 안 두겠다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면서 제 딴에는 할 수 있는 최대의 위협을 했다. 별 소용은 없어 보였지만.
“내, 내 말을 들어봐. 나는 그냥 우리 그룹을 성공시키려고 어그로를 끈 거야. 내 캐릭터를 받아들인 거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까지 네가 한 게 전부 다 어그로를 끌기 위해 한 행동이라 이거지? 사심 없이?”
“어, 어어. 그렇지.”
차이겸의 차분한 물음에 수겸은 재빨리 대답했다. 인정하자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그간의 행동이 떠오르면서 대단한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지만, 이놈들에게 구멍이 헐리느니 차라리 쓰레기가 되는 게 나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겸의 대답에 네 사람이 주춤했다. 그들은 제각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수겸은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네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상황이 영 거시기하긴 하지만, 네 사람이 ‘아하하, 오해였구나’ 하고 돌아서 주기를 바라며.
“……설령 그렇더라도 상관없어요.”
침묵 끝에 유찬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충격에 빠진 수겸은 입을 떡 벌렸다.
상관없다니? 상관이 없으면 안 되지, 인마! 누구 마음대로 상관이 없어?!
생각나는 말은 많은데 워낙 당황스러워서 그런지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없었다. 그저 넋이 빠진 표정으로 유찬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제 마음은 진심이니까.”
“어…… 어어……?”
생각지도 않은 유찬의 말에 수겸이 얼이 빠져 되물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고백을 한다고? 여기서? 지금? 같은 멤버 사이에?!
수겸이 멍청히 유찬의 말을 되짚어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한솔이 입을 열었다.
“나도, 나도 그래. 수백 번, 수천 번 고민했어. 대체 내 마음이 뭔지. 숱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야. 그러니까 형의 행동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괜찮아.”
“뭐……?”
“미치지 않고서야 가벼운 마음으로 같은 그룹 멤버한테 이러지 않아. 충분히 고민했고, 생각했고, 내 감정에 앓았어. 그러니까 수겸이 너도 진지하게 들어줘.”
한솔에 이어 태원까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제 수겸은 눈 둘 곳도 없이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방황했다. 그러다가 차이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감정을 알 수 없는 묘한 눈으로 수겸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겸은 기대 반, 불안 반이 섞인 눈으로 차이겸을 바라보았다. 아니라고,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돌아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 반과, 저 인간마저 진심이니 어쩌니 하면서 들이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교차했다.
그리고 그것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차이겸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좋아해.”
“에……?”
“네가 뭘 해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너를 좋아한다고.”
“……뭐?”
“그러니까 상관없어. 네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행동했었는지는.”
묵직하고 진지한 차이겸의 말에 수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차이겸이 저런 말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 혼란스러웠고, 도대체 그렇다면 차이겸은 언제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알고 싶지는 않았다. 알게 되면 그와의 관계는 이전과 같아질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고민해. 이제까지 별생각 없이 했던 행동이라면 이제는 고민해.”
차이겸의 말은 최후통첩과도 같았다. 수겸은 그의 말에 입술만 달싹거렸다. 무어라 반박하기는 해야 하는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수겸은 평소 자신의 편을 가장 잘 들어주는 유찬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고백을 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저 유찬이라면 자신을 이 위기에서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었다.
하지만 수겸의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유찬은 전에 없이 진지한, 결연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선을 다해서 형을 유혹해 볼게요.”
유찬에게서 들어볼 것이라 상상도 못 했던 말에 수겸이 기겁하며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그때 수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수겸은 네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이사님]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본 수겸의 낯에 깊은 안도감이 어렸다. 수겸은 이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하게 네 사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전화 왔어, 전화! 이사님한테 전화 왔다고. 그러니까 나중에 얘기…….”
소속사 최고 권력자인 이사님이라는 말에 네 사람이 꼬리를 내리고 얌전해질 줄 알았던 수겸은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는 네 사람의 기류를 느꼈다.
“이…… 이사님 전화라니까?”
‘이사님’이라는 말에 네 사람이 더 돌아버린 걸 알 리 없는 수겸의 허망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가 금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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