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61화
수겸은 얌전히 있다가 천천히 주방 쪽을 향해 두어 발자국을 뗐다. 그의 행동이 의아한지 차이겸이 미간을 좁혔다.
“어디 가?”
“접시 찾으러.”
이겸의 물음에 수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 대답에 차이겸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접시? 접시는 왜?”
“코 박으러.”
“…….”
차이겸은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겸은 진지했다. 접싯물에 코라도 박고 죽어야 이 수치심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헛소리하지 말고.”
“진심이야.”
“그럼 더더욱 안 돼.”
차이겸은 행여나 수겸이 정말 접시를 찾으러 가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수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 세게 쥔 것은 아니었기에 수겸은 그가 제 손목을 잡든 말든 내버려 두었다.
사실 지금은 그가 자신의 팔을 잡든 깨물든, 뭐든 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만큼 쪽팔림이 더 강했다.
“……꼭 대답해야 하니?”
“하기 싫어?”
“응.”
“왜?”
“쪽팔리거든.”
“그럼 말해.”
“아니, 내가 쪽팔리다고, 이 짜식아!”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리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차이겸은 자비가 없었다. 그래, 저 새끼가 그러면 그렇지. 수겸은 차이겸을 보며 으득 이를 갈았다.차이겸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수겸의 속을 벅벅 긁었다.
수겸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태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평소였다면 수겸의 애절한 눈빛에 태원이 이겸을 말려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태원은 굳은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단호한 모습에 마지막 희망까지 잃어버린 수겸은 냅다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벌렁 드러누워 늘씬한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적거렸다.
“아, 몰라! 배 째! 배 째! 내가 왜 말해야 하는데! 싫어, 안 해! 됐어! 집어치워! ……요.”
한껏 땡깡을 부려대던 수겸은 이 자리에 유피트 멤버들만 있는 게 아니라, 이사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뒤늦게 ‘요’자를 붙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선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옅게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니 화가 나지는 않은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수겸은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꼭 들으셔야겠어요……?”
수겸의 물음에 선욱을 비롯한 멤버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이 결연하기까지 해서 다시금 울컥 원망의 마음이 일었다.
도대체 왜 남의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수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힐끔힐끔 멤버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이라도 누구 한 명이라도 말려준다면,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겸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그러니까……. 근데 말해도 안 믿어주실 거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수겸은 뒷말을 삼키며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그러자 한솔이 다가오더니 수겸과 마주 앉아 눈을 맞추었다.
“형.”
“으, 응?”
“형이 하는 말이라면 다 믿어줄 테니까 말해도 돼.”
“…….”
“그냥 하는 말 아니야. 진심이야.”
한솔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수겸은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보여주는 무한한 신뢰감 앞에서 제 불신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수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저들이 믿어주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자신은 말을 하면 되는 거고,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그건 그들의 문제였다.
“그러니까…….”
고민 끝에 수겸이 운을 떼자, 모두의 시선이 수겸을 향했다. 수겸은 그들의 시선에 순간적으로 어찔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한 번 죽었었어.”
“…….”
수겸의 말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무슨 헛소리냐며 헛웃음이 터질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반응이었기에 수겸은 적잖이 당황했다.
“……왜 안 놀라?”
“계속 말해요.”
수겸의 물음에 유찬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수겸은 바싹 마른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러나 수겸이 그러기 무섭게 유찬이 손을 뻗어 입술을 쓸어주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수겸이 토끼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자, 유찬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 깨물지 마요.”
“어…… 어어…….”
당황한 수겸이 얼을 타는데, 유찬이 수겸을 진득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해요.”
“아, 알았어. 그게…… 전생이었는데, 유피트로 데뷔하고 난 후의 일이었어. 그때 나는…… PC방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PC방 아르바이트?”
태원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물론 그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유피트가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흥하지는 않았지만, 꽤 성공적으로 데뷔를 마친 신인 아이돌이었다. 난데없이 방송 일이 아닌 PC방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하니 놀랄 만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게 놀랄 만한 사건이라 한들, 전생에 한 번 죽었다는 이야기보다 놀랄 일인가 싶기는 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수겸이 네가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이번에는 선욱이 물었다. 수겸은 그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선욱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은 덤이었다.
“그게 사연이 좀 있었는데…….”
“무슨 사연?”
이번에는 한솔이 물었다. 수겸은 대답을 하려다가 괜스레 죄라도 지은 것처럼 미안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유피트가 해체됐어.”
“……뭐?”
아픈 기억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아픈 모양이다. 수겸은 이미 전생이 되어버린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가슴이 욱신거리고 눈가가 따끔거렸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깊게 심호흡을 해야 했다.
“유피트가 해체되었다고…….”
“왜요?”
유찬의 물음에 수겸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왜였을까, 그 이유를 선뜻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유찬이 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차마 말할 수는 없었기에 수겸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왜 해체됐냐고, 우리가 뭐 사고 쳤어?”
불쑥 터져 나온 이겸의 물음에 수겸은 유찬의 경고도 잊고 또다시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차이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소 화가 나기까지 한 표정으로 수겸을 보고 있었다.
“그야 네가 연애를……!”
“어……?”
홧김에 냅다 소리를 지르던 수겸은 이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차이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수겸을 바라보았다.
“내가 연애를 했다고……?”
“어, 그것도 아주 난리를…….”
차마 섹스 스캔들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던 수겸이 최대한 순화시켜 말했다. 그러자 여전히 차이겸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연애를……? 누, 누구랑……?”
“아, 몰라! 겁나 예쁜 여자였다, 왜!”
“그럴 리가.”
“뭔 그럴 리가야. 그렇다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뭐?!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차이겸의 말에 수겸이 눈을 희번덕 떴다. 전생에서의 차이겸의 섹스 스캔들이 생각난 탓에 한껏 예민해진 탓이었다.
“아, 아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겁나 예쁜 여자일 리가 없다고.”
“뭔 소리야. 겁나 예쁜 여자면 당연히 좋아하지. 아무튼, 넌 아니라고 하지만 진짜 그랬어.”
재차 못을 박는 수겸의 말에도 이겸은 고개를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그럼 고작 열애설 때문에 유피트가 해체되었다는 거야?”
“아, 그, 그건 아니고…….”
선욱의 말에 수겸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그가 짚어준 대로였다. 설령 아이돌 멤버가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멤버만 빠지거나 하면 될 일이지 해체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수겸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번에는 한솔을 바라보았다.
“왜, 나야? 내가 뭐 잘못했어?”
수겸의 시선을 눈치챈 한솔이 손을 들어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반응에 수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 내가 뭘? 뭘 어쨌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한솔의 반응에 수겸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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