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57화
촬영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대표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민성을 통해 곧바로 연락이 왔다. 밤늦은 시간이었기에 오늘은 우선 쉬고 내일 이야기하자고 하셨다.
논의가 내일로 미뤄진 덕분에 유피트는 곧장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숙소로 향하는 차 안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그 중심에 있는 수겸은 침묵이 견딜 수 없이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차라리 고요한 지금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처럼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시끄러운 거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는 제게 그리 좋은 이야기가 오갈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수겸은 눈치를 살피며 숙소로 들어갔다.
멤버들과 함께 걷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그들 사이에 섞이지 않고 겉돌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촬영이 엎어지게 된 이유가 바로 수겸 자신이었다. 더구나 그 근간에는 ‘회귀’라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깔려 있었다.
사실 현 상황에 수겸이 많이 얽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수겸이 죄를 지은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수겸은 살금살금 걸으며 최대한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자 했다. 그런다고 그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둑 걸음으로 방으로 향하던 수겸은 누군가에게 팔이 잡히는 바람에 멈춰 서게 되었다.
“왜, 왜 그래?”
“형, 잠시만요.”
수겸을 붙잡은 이는 다름 아닌 유찬이었다. 유찬은 한껏 굳은 표정이었다. 수겸은 그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유찬과의 대화가 즐거웠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대화를 하기도 전에 불편함이 울컥 치밀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 나 피곤한데…….”
수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거절이었다. 유찬이 이쯤에서 물러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찬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잠깐이면 돼요.”
“지, 진짜 피곤한데…….”
“오래 안 걸려요.”
소심하게나마 한 번 더 거절 의견을 피력해 보았지만, 수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수겸은 그에게 이끌려 베란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베란다 특유의 냉기가 훅 끼쳤다. 수겸은 오싹함에 잘게 몸을 떨었다. 유찬은 힐끔 수겸을 보더니 외투를 벗어 주었다.
“아냐, 괜찮아.”
“춥잖아요, 입어요.”
“너도 춥잖아.”
“저는 괜찮아요.”
“……고마워.”
단호한 유찬의 말에 수겸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그가 건네는 외투를 걸쳤다. 유찬의 체온이 남아 있는 옷이라 그런지, 그가 자신을 껴안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왠지 기분이 묘했다.
“있잖아요. 형.”
“어?”
“아까 뭐였어요?”
“뭐, 뭐가?”
훅 들어온 질문에 수겸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른 척 되물었지만, 사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무속인분이 하신 말씀이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는데 형은 알아들은 것 같아서.”
유찬의 말에 수겸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비연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이 사람은 너와 달라.’
‘달라. 이 사람은 지금은 살아 있잖아. 이유는 나도 몰라. 하지만 영영 죽어버린 너희와는 달라. 그러니까 이 사람을 건드려서는 안 돼.’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수겸은 일단 잡아떼기로 했다. 유찬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결국 수겸은 아무것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분은 분명 그랬어요. 이 사람은 너와 다르다고. 지금은 살아 있다고.”
“…….”
“‘지금은’이 대체 무슨 뜻이에요?”
유찬은 날카롭게 핵심을 파고들었다. 수겸 역시 비연이 했던 말 중에 가장 찔렸던 대목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지금은’ 살아 있다는 것. 과거에 자신이 죽었지만 현재는 살아 있기에 ‘지금은’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글쎄. 모, 모르겠는데.”
수겸은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수겸 스스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을 유찬이 믿어줄 리 없다는 것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도저히 사실을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사실대로 말해줘요.”
“……그, 그게…….”
역시나 유찬은 수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간파해 내었다. 덕분에 수겸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답안을 떠올려 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말이 되는 게 없었다. 눈치 빠른 유찬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 내가 왜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데?”
결국 수겸이 택한 것은 반문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대답을 회피하는 것.
생각해 보면 유찬에게 꼭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자, 수겸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유찬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팀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것이라면.
“형.”
“……마,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묻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다소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히 전한 수겸은 몸을 틀었다.
“나는 추워서 먼저 들어갈게. 옷 빌려줘서 고마웠어.”
차마 유찬의 눈을 볼 수 없는 수겸은 그에게 외투를 돌려주고는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얼핏 오도카니 서 있는 유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양심이 쿡쿡 찔렸지만, 지금 와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겸은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섰다. 유찬과 같은 방을 쓰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방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편히 마음을 놓기에는 또 다른 복병이 방 안에 버티고 있었다.
“형.”
“하, 한솔아.”
한솔이 마치 수겸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서 있었다. 겨우 유찬에게서 도망친 수겸 입장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겸은 당혹감에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형, 이야기 좀 해.”
“이야기……? 나 피곤한데…….”
한솔의 말에 수겸은 유찬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비록 유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한솔에게는 먹히길 바랐다.
물론 수겸의 바람은 이번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잠깐이면 돼.”
“으, 으응.”
부드럽기만 하던 평소 한솔의 모습과는 다른 단호함에 수겸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대신 만약 한솔이 아까 유찬처럼 진실에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려 한다면, 유찬에게 했던 것처럼 끊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아까 밖에서 고양이를 보고 놀랐어. 그런데 형은 다른 걸 본 모양이야. 그렇지?”
“어…… 그게…….”
“그러니까 그렇게 소리를 지른 거겠지. 떠는 것도 그랬고. 지난번 촬영에서 형이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을 때랑 똑같은 반응이었어.”
“어, 뭐…… 뭘 보긴 했지.”
추궁하는 듯 물어보는 한솔의 말에 수겸은 두루뭉술하게 대꾸했다.
사실 귀신을 보았다는 것까지는 거짓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까 제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귀신을 보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만했으니까.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무속인분이 왔을 때 하신 말이 이해되지 않아서 그래.”
“…….”
하지만 한솔의 의문은 단순히 귀신을 보았느냐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수겸은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
“뭔가 있었잖아. 그러니까 무속인분이 그런 말을 한 거 아니야? 지금은 살아 있다고. 그 말은 예전에는 살아 있지 않았다는 거잖아.”
“…….”
그는 비연의 말뜻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수겸은 방금 전 유찬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당당하게 나가자고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 한솔의 눈치를 살폈다. 그만큼 한솔의 기세가 무서워서였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 나도 아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래. 형, 혹시 예전에 죽었었어?”
한솔이 단순히 제게 있었던 일을 모두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하는 것이라면 모른 척 잡아뗐을 텐데, 미묘하게 질문의 포인트가 달랐다. ‘예, 아니오’ 둘 중 하나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당황한 수겸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수겸의 답을 기다리던 한솔이 무언가 알아차린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한솔이 날카롭게 정곡을 찔렀다.
“……다시 물어볼게. 형, 죽었던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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