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51화
수겸은 벌게진 얼굴을 감추려 차이겸을 따돌리기라도 하듯 후다닥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러곤 복도를 내달려 숙소에 들어섰다.
“어디 갔다 와?”
“어, 그냥…….”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한솔은 수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딱히 지은 죄도 없는데 왠지 화가 난 듯한 한솔의 반응에 수겸은 슬슬 눈치를 살폈다.
“……솔아, 화났어?”
“화는 무슨. 내가 재진이 형 스케줄을 착각한 게 생각나서 데리러 갔더니, 형이 없더라고. 그래서 물어봤어.”
한솔은 화가 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말을 하는 목소리마저 불만이 가득한 것 같았다. 수겸은 애꿎은 인형만 조물딱거렸다.
“인형 뽑기 했어?”
“어? 어어…….”
“이겸이 형이랑?”
“어? 어떻게 알았어?”
그의 물음에 수겸은 놀라서 되물었다. 동그래진 눈을 끔뻑거리던 찰나, 때마침 이겸이 들어왔다. 숙소에 들어선 차이겸은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수겸과 한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왜, 무슨 일이야?”
“어? 딱히…….”
수겸 역시 한솔의 태도가 의아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겸과 한솔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수겸이 제아무리 눈치가 없기로 유명한 편이라고 해도 이렇게 드러내 놓고 이상한 기운을 풍기는데 알아차리지 못할 리는 없었다.
수겸은 본능적으로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슬쩍슬쩍 게걸음을 걸으며 두 사람 사이를 벗어났다. 다행히 두 사람은 수겸이 멀어지는 동안 붙잡지 않았다.
어느 정도 두 사람과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한 수겸은 조금 전보다 속도를 올려서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왜 그렇게 쫓기듯 들어와?”
“그러게. 내 말이 그 말이야.”
방에 들어오자 태원이 의아한 듯 물었다. 수겸은 자신이 생각해도 저지른 잘못도 없는데 쫓기듯 들어온 게 이해가 되지 않아 자조적으로 대꾸했다.
“그건 차이겸이 뽑아준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태원이 눈짓으로 수겸의 손에 들린 인형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방금 한솔 역시 인형을 보고서 이겸이 형이 뽑아준 거냐고 물었다. 수겸은 태원과 한솔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물어본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너네 목격담 떴더라. 데이트한다고 난리도 아니던데.”
“헉, 진짜?”
“어.”
평소와 달리 태원의 목소리도 묘하게 무뚝뚝한 구석이 있었다. 그가 왜 그러는지 궁금하면서도 도대체 목격담이 어떻게 떴길래 데이트한다고 난리도 아니라는 건지 의아했다.
수겸은 힐끔 태원의 눈치를 살피면서 휴대폰을 꺼내 서칭을 시작했다. 그리 열심히 찾지도 않았는데 커뮤니티에는 수겸과 이겸의 목격담이 몇 개나 나왔다. 목격담의 대부분이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데이트라는 글귀를 보자,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이겸이 한 말이 떠올랐다.
‘데이트면 키스를 하든가, 섹…….’
그 생각을 하니 또다시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도대체 차이겸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물론 별생각 없이 한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차이겸은 전생에서도 가끔 툭툭 의미 모를 말을 내던지고는 했으니까.
수겸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설명하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동안 태원은 수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수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왜 그렇게 봐?”
“얼굴이 빨개졌길래. 무슨 생각 하길래 그러나 싶어서.”
“어, 어? 따…… 딱히 별생각 안 했어.”
“……그래.”
태원의 말을 듣고 나서야 수겸은 주섬주섬 외투를 벗어 대충 이층침대 사다리에 걸쳐놓고는 침대에 누웠다.
그때 방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한솔이 들어왔다. 한솔은 힐끔 수겸을 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 그답지 않은 행동에 놀란 수겸은 서운하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했다.
“솔아, 왜 그래?”
“내가 뭐…….”
“나 서운할라 그래.”
수겸의 말에 한솔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당황한 듯 손까지 내저었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근데 왜 그러는데! 내 눈도 안 보고, 목소리도 뚱하고.”
“아니, 나는 형이랑 같이 점심 먹으러 간 건데 형이 없어서…… 그냥 내가 혼자 그런 거야. 미안해, 형을 서운하게 해서.”
한솔의 말을 듣자, 그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었다. 한솔은 재진의 일정을 잘못 알려준 것이 미안해서 자신을 만나러 회사까지 왔는데 그게 어그러진 게 속상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한솔의 마음이 마냥 귀엽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런 거였어? 내가 눈치가 없었네, 미안해. 신경 써줘서 고마워.”
수겸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말했다. 그러자 한솔은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수겸은 그런 한솔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려 주었다.
“역시 우리 솔이밖에 없다니까.”
찡긋 눈웃음까지 친 수겸은 편해진 마음으로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러고는 이겸이 뽑아준 인형을 침대 한 귀퉁이에 잘 앉혀놓았다. 워낙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아서인지 자꾸만 옆으로 쓰러졌지만 말이다.
수겸은 옆으로 누워 인형과 눈을 맞추었다. 기분 탓인지 인형이 움직일 것만 같았다. 물론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하루 동안 벌어진 여러 일이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얕은 잠이 그림자처럼 슬그머니 다가왔다. 수겸은 무거워지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겸은 징징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 때문에 눈을 떴다. 수겸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손의 감각만으로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겸아, 자고 있었어?
“으어어…… 네에…….”
단 두 마디였는데도 수겸은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상대는 선욱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선욱이라는 걸 깨달은 수겸은 한층 편안해진 마음으로 투정 부리듯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졸려요…… 졸려…….”
-많이 졸려?
“네에…….”
-에이, 그럼 오늘 못 만나겠네. 맛있는 거 사 주려고 했는데.
선욱의 말에 수겸의 감긴 눈이 반쯤 뜨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선욱이 맛있는 걸 사 준다고 하는 말은 흘려 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우, 코스 요리, 회 정식, 호텔 뷔페 등 이제까지 선욱이 먹여준 음식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맛있는 거 뭐요?”
-우리 수겸이 먹고 싶은 거.
“그럼 제가 설레잖아요.”
수겸의 말에 수화기 너머로 듣기 좋은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수겸은 그 목소리가 좋아서 덩달아 소리 없이 웃었다.
-설레라고 한 말이야. 얼른 나와.
“에에, 지금요?”
-응. 내려와.
놀란 수겸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잘못 들었나 싶어 제 귀를 의심하려는 찰나, 휴대폰을 통해 또다시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지하 주차장이니까 내려와. 여기가…… E구역이네. 지하 1층이야.
마치 선욱은 수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말했다. 수겸은 적잖이 놀라면서도 반사적으로 일어나 외투를 챙겨 들었다.
-뛰지 말고 천천히 내려와. 넘어질라.
“네! 알았어요!”
다정한 걱정에 수겸은 쾌활하게 대꾸했다. 수겸은 외투를 꿰입으며 방을 나섰다. 마침 거실에 있던 유찬이 놀란 눈으로 수겸을 보았다.
“형, 어디 가요?”
“어어, 이사님이 밥 먹자고 하셔서.”
“……이사님이요?”
“응! 아, 우리 멤버들 것도 사달라고 할게!”
다소 실망한 듯한 유찬의 목소리에 수겸이 얼른 덧붙였다. 혼자만 맛있는 걸 먹으러 간다고 서운해한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러나 수겸의 말에도 유찬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수겸은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유찬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금방 다녀올게.”
“낮에는 이겸이 형이랑 데이트하고, 저녁에는 이사님이랑 저녁 먹고. 바쁘네요, 형은.”
유찬은 머리를 살짝 뒤로 빼며 수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면서 서운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처음에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던 수겸이 이내 큰 눈을 곱게 접으며 웃어 보였다.
“어어? 아, 뭐야. 질투하는 거야? 우리 유찬이 딱 기다려. 형이 하루 종일 데이트해 줄 테니까.”
“……정말요?”
“그럼 당연하지. 우리 유찬이랑은 하루 종일도 부족하지.”
“……다녀와요.”
“응, 갔다 올게.”
마지못해 보내주는 느낌이기는 했지만, 유찬은 수겸을 향해 희미하게나마 웃어주었다. 수겸은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되어 환하게 웃었다.
수겸은 유찬을 지나쳐 바쁘게 현관으로 향해 신발 대충 신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바닥에 콩콩 신발 코를 부딪치며 신발을 잘 신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수겸은 아직도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해서, 그대로 급히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수겸의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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