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49화
신나는 마음으로 아니, 사실은 별생각 없이 작곡가 재진을 만나러 갔던 수겸은 굳게 잠긴 재진의 방 앞에서 절망했다.
분명 아침에 한솔이 재진을 오늘 만나야 한다고 했기에 처음에는 재진이 근처에 있을 줄 알았다. 잠깐 외출하느라 문을 잠가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수겸의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재진에게 전화를 해보니, 딱히 연락이 없어서 당일치기로 지방에 내려갔다고 했다.
졸지에 본의 아니게 바람 아닌 바람을 맞게 된 수겸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왕 나온 김에 재진과 점심도 같이 먹을 생각이었는데, 당초 계획이 모두 어그러지게 생겼다.
“솔이가 내일 바쁘다고 했는데, 날짜를 착각했나 보네.”
아쉽긴 하지만 별수 없었다. 숙소가 주 서식지인 수겸의 입장으로서는 일없이 집에서 나온 게 다소 억울하기는 했지만, 없는 약속을 급히 만들 만큼 발이 넓은 편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숙소로 돌아갈 요량으로 돌아설 때였다.
“뭐 하냐?”
귀에 익은 목소리에 돌아보았더니, 차이겸이 서 있었다. 약속이 깨어져 갈 곳이 없는 차에 그를 만난 수겸은 반가움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 차이겸! 아, 혹시 너도 재진이 형 보러 왔어? 근데 형 지금 지방이래.”
“……어, 그래?”
“응. 너도 다음에 와야겠다.”
“……어, 뭐. 그렇네.”
재진의 부재로 꽤 시무룩해진 수겸과 달리, 차이겸은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그리 아쉬운 것 같지는 않았다. 수겸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이겸을 보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차이겸, 너 그럼 지금 딱히 할 거 없지?”
“어…… 그건 왜?”
이겸의 대답에 수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앗싸, 럭키. 잘됐다.
“오, 진짜? 잘됐다. 기왕 나왔는데 바로 숙소로 들어가자니 왠지 억울해서. 밥이라도 먹고 들어가자고.”
“그래, 알았어.”
“앗싸!”
수겸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집이 가장 좋은 ‘I’ 타입인 수겸으로서는 큰마음 먹고 나왔는데,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만큼 서운하고 억울한 일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차이겸을 만나 시간을 때우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우리 뭐 먹을까? 아, 그거 검색해 보자.”
“뭐?”
“맛집 해시태그!”
이겸의 물음에 해맑게 대꾸한 수겸은 얼른 파란 새가 그려진 SNS에 ‘#수겸아_안먹으면널잡아먹어’를 검색해 보았다. 수많은 맛집 리스트가 나왔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허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수제 버거도 좋고, 파스타도 좋고……. 화덕 피자도 맛있겠다. 오므라이스 전문점도 있어. 한식 종류도 맛있겠다.”
수많은 맛집 리스트 중에서도 가장 시선을 끄는 음식을 줄줄 읊었다. 차이겸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기는 게 없나 싶어서 다시금 해시태그가 걸린 글을 찾아보려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다 좋아. 그러니까 너 먹고 싶은 곳으로 가.”
“에, 진짜?”
“어, 진짜.”
돌림 노래처럼 돌아오는 대답에 수겸은 흡족하게 웃었다. 하긴, 이래저래 편식을 하는 자신과 달리 차이겸은 편식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파프리카를 싫어한다고는 하지만, 딱히 파프리카가 들어간 음식이 많은 게 아니라서 크게 고민할 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헉, 돈가스 먹자! 여기 돈가스 엄청 두툼해.”
수겸은 이겸에게 돈가스 사진을 들이밀었다. 거의 주먹만 한 두께의 돈가스가 먹음직스러웠다. 마침 위치도 회사와 그리 멀지는 않았다.
“지하철 타고는 사십 분……. 택시 타면 이십 분 정도 걸리네.”
“택시 타. 내가 낼게.”
“헉, 진짜? 짱 좋아.”
수겸은 활짝 웃더니, 얼른 이겸의 옆에 붙어 섰다. 그러자, 이겸이 힐끔 수겸을 보더니 앞장서 걸었다. 수겸은 쭐레쭐레 이겸을 따랐다.
* * *
오래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돈가스집에 도착했다. 수겸은 두툼한 돈가스와 냉 메밀국수 세트를 시켰고, 차이겸은 돈가스에 우동이 나오는 정식을 시켰다.
“와아, 맛있겠다.”
수겸은 기쁜 마음으로 도톰한 돈가스를 한 조각 베어 물었다. 육즙이 가득한 돈가스는 두툼한 두께에서도 촉촉한 식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함께 나온 양배추 샐러드 역시 산뜻하니 맛있었다.
“내 팬들 맛잘알!”
아이 입맛이라 불리는 수겸의 입맛에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행복에 겨운 수겸이 냉 메밀국수 국물도 시원하게 들이켰다.
“어, 근데 넌 왜 안 먹어?”
수겸이 정신없이 먹는 와중에 이겸은 수겸이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옅게 띤 미소를 보아하니 기분이 좋은 것 같기는 했지만, 이 맛있는 걸 눈앞에 두고 먹지 않고 있으니 걱정이 되기는 했다.
“먹고 있어.”
“먹고 있기는! 손도 안 댔는데.”
“댔어.”
“아, 뭐야!”
차이겸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젓가락으로 애꿎은 돈가스를 쿡 찔렀다. 수겸은 기가 차서 발끈했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와 반대로 수겸은 불만스럽게 눈매를 찡그렸다가, 이내 눈앞의 돈가스에 잠시 솟았던 짜증은 사르르 녹아내렸다.
“역시 우리 올빗이들……. 내 취향 제일 잘 아신다니까.”
“네 취향은 모르기가 힘들어.”
“뭐지,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은 무슨 뜻이야. 그만큼 네가 단순하다는…….”
“야!”
수겸은 언성을 높였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모자도 쓰고 마스크도 써서 얼굴을 꽁꽁 가리고 들어왔는데, 괜스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짓을 할 필요는 없었다.
차이겸은 수겸이 사람들 때문에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조용히 웃었다. 결국 수겸은 씩씩거리면서 돈가스와 냉 메밀국수를 싹싹 비웠다.
“으아아, 배부르다. 잘 먹었어!”
수겸은 아까의 짜증도 잊고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선지 차이겸은 택시비도 자기가 냈는데, 밥도 자기가 사줬다. 덕분에 수겸의 기분은 한층 더 좋아졌다.
“오, 오락실이다. 들어갈래?”
워낙 배가 불러서 움직이면서 소화를 시킬 필요가 있었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오락실에서 얼마나 활동이 되겠냐마는 지금은 그런 걸 따지기에는 배가 불러도 너무 불렀다.
“알았어.”
차이겸은 순순히 수겸의 말에 동의했다. 수겸은 그런 이겸을 데리고 오락실로 들어왔다. 사방에서 뿅뿅거리는 게임 전자음이 들렸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수겸은 얼른 오천 원짜리를 동전으로 바꿔 왔다.
“그렇게 많이 바꿔?”
“에, 오락실에서 오천 원은 껌값이야. 초 단위로 사라진다고.”
“네가 못해서 그런 건 아니고?”
“아니거든!”
발끈한 수겸은 가장 먼저, 그나마 활동량이 있는 총싸움 게임 앞으로 향했다. 좀비를 잡는 게임이었는데, 이전에도 몇 번 해본 적 있었다.
“너 이거 할 줄 알아?”
“그냥 총 쏘면 되는 거 아냐?”
“어, 맞아. 그냥 다 쏴버려.”
이겸의 답에 살벌하게 대꾸한 수겸은 바꿔 온 오백 원짜리 동전을 쓱 넣었다. 동전을 넣자마자 게임이 시작되었다.
“으아아, 좀비, 으아, 좀비, 너무 싫어!”
“대체 그렇게 싫어하면서 이 게임을 왜 하는 거야?”
“싫으니까 죽이는 거지!”
나름 합리적인 대답에 차이겸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총을 쏘았다. 나름 경력이 있는 수겸과 처음이지만 동체 시력과 순발력이 좋은 이겸 덕분에 두 사람은 몇 번 죽지도 않고 금세 1단계 보스를 만났다.
“으아, 죽는다, 나 죽는다!”
“죽지 마.”
“죽지 말라고 한들 그게 뜻대로 되는…… 아, 죽었다.”
수겸은 착잡해하며 동전을 밀어 넣었다. 수겸이 막 부활하는 사이에 이번에는 차이겸이 죽었다.
“야, 너는 왜 죽어?”
“그러는 너는 왜 죽냐?”
보스 전까지는 제법 잘 해내던 두 사람은 아웅다웅하며 금세 오천 원을 탕진하고 말았다. 화면 가득 ‘GAME OVER’라고 적힌 글귀를 바라보던 수겸의 눈매가 팔자로 축 처졌다.
“힝, 죽었어.”
“돈 더 바꾸자.”
“님 아까 저한테 뭐라고 하셨죠? 그렇게 많이 바꾸냐고 묻지 않으셨나요?”
“바꿔온다.”
차이겸은 불리해지자, 제 할 말만 하고는 동전을 바꾸러 갔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수겸은 작게 주먹질을 했다.
“바꿔 왔어.”
“히익, 얼마를 바꿔 온 거야?!”
“이만 원.”
“뭐야……. 나보고 오천 원 많이 바꿨다고 한 인간 어디 갔어?”
수겸은 투덜거리면서도 이겸이 쥐여 주는 오백 원짜리를 받았다. 두둑하게 동전을 채운 수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중에서 인형 뽑기 앞에 멈춰 섰다. 이등신짜리 인형이었는데, 머리 색은 분홍색에 파란 눈동자가 눈에 띄는 꽤 귀여운 인형이 가득 든 인형 뽑기 기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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