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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48화 (49/143)

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48화

“야아, 그렇다고 그렇게 당황하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잖아!”

수겸은 민망함을 달래려 부러 더 과장되게 말했다. 그러나 한번 붉어진 유찬의 얼굴은 하얘질 줄을 몰랐다. 본래의 피부색이 워낙 하얘서 그런지 지금 그의 얼굴은 유난히 빨간 것 같았다.

“너 얼굴 터지겠어!”

“미안해요, 기대돼서 그랬어요.”

“에?”

그의 말에 수겸은 할 말을 잃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안하다는 말은 뭐며, 기대가 된다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왜 기대가 돼?”

“그런 말을 형한테 들을 줄 몰랐거든요.”

여전히 영문 모를 말이었다. 수겸이 그가 한 말뜻을 이해하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유찬이 빙긋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기대할게요.”

“어어?”

유찬은 되묻는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제 방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수겸은 홀로 거실에 누워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언제까지 누워만 있을 거야?”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하던 태원이 수겸을 보고 끌끌 혀를 찼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수겸은 숙소에 도착해서 멤버들이 옷도 갈아입고 샤워도 하는 등 바쁘게 움직일 때 혼자 벌렁 드러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뇌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드러눕기를 택했다. 결국 계속 멍하니 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데, 부엌에서 태원이 나왔다.

“내내 누워만 있고 뭐 하는 거야?”

“취미 생활.”

“취미 생활?”

“응, 누워 있는 게 내 취미 생활이야.”

“……정말 가성비 좋은 취미 생활이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시답지 않은 대화가 잠시 오갔다. 영양가 없는 대화였지만, 태원과의 대화는 그 자체만으로 수겸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수겸은 킥킥대며 웃었다.

“얼른 씻어. 그래야 자지.”

“안 씻고 자면 안 돼?”

“그렇게 묻는다면 또 뭐, 안 될 건 없지만…….”

수겸의 물음에 태원은 어물어물 할 말을 잃었다. 안 씻고 자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 방에 가서라도 누워. 허리 아파.”

“으음, 싫어. 씻을래.”

수겸은 변덕을 부렸다. 그 말에 태원이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히며 혀를 찼지만, 수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초에 수겸은 씻지 않고 잘 생각은 없었다. 메이크업도 지워야 했고, 그냥 자기에는 이래저래 찜찜한 탓이었다. 다만, 워낙 움직이기가 싫어서 말이 되는 대로 튀어 나갔던 것뿐이었다.

“그럼 얼른 씻어.”

“형이 씻겨주라.”

“진짜 씻겨주기 전에 얼른 가서 씻어라.”

“씻겨줘! 씻겨줘!”

수겸은 장난스럽게 떼를 썼다. 물론 진심으로 태원에게 씻겨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항상 그래왔듯 태원에게 장난을 치려고 한 말이었다.

“어, 어어?! 뭐, 뭐야! 내려줘!”

그러니까 태원이 누워 있던 수겸을 번쩍 들어 옮기는 것은 예상에 없던 내용이었다. 수겸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태원은 수겸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으아아, 뭐 하는 거야?!”

태원은 기어코 수겸을 욕실에 데려다 놓고야 말았다. 씻겨달라고 떼를 쓰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진짜로 욕실에 자신을 옮겨 놓을 줄은 몰랐기에, 수겸은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벗어.”

“어?”

수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태원이 형이 제게 벗으라고 한 게 맞나? 정말로? 당황한 수겸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태원을 바라보았다.

“벗으라고.”

“형, 왜 그래?!”

잘못 들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태원은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그걸로 모자라서 한 발자국씩 거리를 좁혀오는 게, 정말 당장이라도 수겸의 옷을 벗기기라도 할 기세였다.

“씻겨달라며.”

“으아아, 당연히 장난이지! 설마 진심이겠어? 아니, 형은 날 씻겨주고 싶어?”

“뭐, 못할 거야 없지.”

“아니, 못한다고 해야지! 얼른 나가! 얼른!”

수겸은 진지한 태원의 말에 질색하며 얼른 태원을 욕실 밖으로 쫓아내었다. 수겸이 민다고 쉽사리 밀릴 리 없는 그였지만, 다행히 아예 힘을 주며 버티지는 않았다. 힘겹기는 했지만, 기어코 태원을 쫓아낸 수겸은 그제야 진땀을 닦았다.

* * *

“일어나.”

“싫어…….”

“내 하루 일과에 너 깨우는 거 있는 거 알아, 몰라.”

“몰라아…….”

아침마다 반복되는 이겸과의 말씨름이 오늘도 반복되었다. 이겸은 한 끼라도 안 먹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잠이 더 소중한 수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얼른 일어나.”

이겸은 기어코 수겸에게서 이불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누운 수겸을 일으켜 앉혔다. 제 몸인데 이겸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에 불만을 느끼려던 찰나,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난다는 사실에 수겸의 감긴 눈이 번쩍 뜨였다.

“이거 무슨 냄새야?”

“핫케이크.”

“대박!”

수겸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이겸의 말대로 도톰한 핫케이크가 접시에 몇 장씩 쌓여 있었다. 소시지와 베이컨, 리코타 치즈 샐러드까지 준비된 완벽한 한 상이었다.

수겸은 전에 없이 환하게 웃으며 식탁에 앉았다. 커다란 글라스에 가득 담긴 오렌지 주스부터 꼴깍꼴깍 들이켠 수겸은 핫케이크를 앞접시에 덜어갔다. 메이플 시럽을 듬뿍 뿌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으으으음, 맛있어.”

수겸은 몸을 부르르 떨 만큼 행복에 겨워했다. 그 모습을 보는 이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는 조용히 수겸의 앞접시에 샐러드를 덜어주었다.

쓴 풀을 싫어하는 수겸의 취향에 맞추기라도 한 듯, 연하고 부드러운 베이비 잎과 과일로만 만든 샐러드였다. 거기에 더해 리코타 치즈까지 듬뿍 얹어 주었다.

“야채도 먹어.”

“야채 싫은데…….”

“치즈가 반이야.”

“그건 그래 보이네.”

이겸의 말에 수겸은 못 이기는 척 샐러드를 찍어 먹었다. 사실 수겸은 이겸이 만들어 주는 샐러드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풀이 쓰지도 않고, 과일도 듬뿍 들어가 있고, 좋아하는 리코타 치즈도 듬뿍 들어가서 샐러드치고는 꽤 맛있기까지 했다.

“형, 오늘 뭐 해요?”

신나게 아침을 먹던 수겸은 유찬의 물음에 오늘 자신의 스케줄을 고민해 보았다. 몇 번이고 점검한 후에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수겸은 입을 열었다.

“나? 오늘 뭐 없는 거 같은데…….”

“그럼 저랑 어디 좀 갈래요?”

“어? 어디?”

“그냥, 형이랑 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나랑?”

“네. 형이랑요.”

“어……. 그…….”

‘그래’라고 대답하려던 수겸의 말은 한솔의 말에 의해 끊기고 말았다.

“형 오늘 재진이 형 만나야 하잖아.”

“어, 어? 그랬나? 그냥 이번 주에 들르라고 했던 거 아니었어?”

재진은 회사에 소속된 전속 작곡가였다. 수겸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기는 했지만, 이번 주에 시간 될 때 오라고 했었다.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주말에는 재진이 회사에 안 나온다고 치더라도, 금요일 하루가 더 남아 있었다. 때문에 수겸은 유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진이 형 내일 바쁘대.”

“아, 진짜? 너한테 말했어?”

“응. 화요일이었나, 아무튼 연습실 가다가 우연히 마주쳤어.”

“헉, 그래? ……그렇대, 유찬아.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 같이 가자. 미안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좀처럼 멤버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거리를 두려던 유찬이 건넨 제안이기에 수겸은 그 제안을 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설령 오늘은 안 되더라도 이른 시일 내에 꼭 유찬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알았어요. 괜찮아요.”

유찬은 괜찮다고 말하며 웃었지만, 실망한 듯한 목소리만은 감추지 못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아팠다. 착잡한 마음에 수겸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유찬아, 내일 갈까, 내일?! 나 내일도 한가해! 내일모레도 한가하고! 아니면 유찬이 너 언제 괜찮아? 다른 날이라도 좋으니까 가자!”

“정말요?”

“그럼! 오늘만 날이야? 다른 날이라도 가면 되지! 물론 오늘 꼭 가야 하는 거라면 미안……. 그래도 다른 날이라도 가자, 응?”

수겸은 형으로서 막내인 유찬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유찬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일 갈까요?”

“응, 좋아! 내일 가자!”

수겸은 눈을 곱게 접으며 활짝 웃었다. 그제야 유찬 역시 그늘 하나 없이 맑게 웃었다. 수겸은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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