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45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수겸은 마네킹처럼 굳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태원 역시 아무 말도 못 하고 뻣뻣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어색함은 고요한 시간만큼 점점 커져만 갔다.
“둘이 뭐 해?!”
방에 있던 한솔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어보지 않았다면, 아마 내내 어색하게 굳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한솔의 등장 덕분에 두 사람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태원은 빙글 몸을 돌렸고, 그 바람에 태원을 깔고 있던 수겸은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야, 아야야야.”
“둘이 뭐냐고?”
“뭐긴 뭐야, 송수겸이 또 송수겸한 거지, 뭐.”
옆으로 벌렁 넘어진 수겸이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태원은 한솔의 추궁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뻔뻔하기까지 한 그의 대답에 한솔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분명 자신이 봤을 때는 자세가 묘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분위기마저도 요상하기 짝이 없었는데, 정작 태원이 하도 당당하게 나서니까 정말 별일이 아니었던 것인가 싶은 탓이었다.
“내가 뭐! 내가 뭐!”
옆에서 수겸이 바락바락 성을 내기는 했지만, 한솔은 그 모습을 보니까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만에 하나 정말 두 사람 사이에 뭐가 있었다면, 수겸이 저렇게 아무렇지 않아 보일 리 없을 터였다.
그제야 한솔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리질을 쳤다.
“어휴, 진짜. 적당히들 해. 깜짝 놀랐잖아.”
“놀라긴 왜 놀라?”
“둘이 잠이라도 자려는 줄 알았다, 왜.”
태원의 말에 한솔은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수겸이 입을 떡 벌렸다. 수겸은 충격에 빠진 듯 그대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린 수겸이 기겁하며 한솔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야이씨! 미쳤냐! 미쳤어?! 얘는 어린 게 못 하는 말이 없어! 잠을 자?! 뭐?! 누구랑?! 내가 태원이 형이랑?! 잠을?! 미쳤어? 어린 게 말이야, 이렇게 발랑 까져서는! 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지금 형 목소리가 제일 커. 그러니까 누가 듣는다면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형 때문이야, 형.”
한솔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수겸은 제 목소리가 컸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놀란 토끼 눈을 떴다.
“형만 조용하면 다 돼.”
“헉, 숙소에 유찬이 있어?”
“유찬이? 유찬이 있을걸? 아, 아니다. 연습실에 간다고 했던 것 같아.”
“다행이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한솔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이제까지 쩌렁쩌렁 온 숙소가 떠나가도록 떠들어댈 때는 언제고, 유찬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게 마냥 우스운 탓이었다.
“아니, 유찬이는 아직 어리고…… 이런 이야기 들으면 안 돼. 아기잖아.”
“물론 유찬이가 우리 중에 제일 어리긴 하지만 아기는 아니다, 형.”
“맞아, 아기까지는 아니지.”
수겸의 말에 한솔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하자 태원마저 한솔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러나 수겸은 여전히 제 생각을 굽힐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무튼…… 아무튼 그래. 유찬이는 지켜줘야 해.”
“유찬이만큼 어른스러운 애도 없어.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 유찬이랑 형이랑 나란히 세워놓고 누가 막내 같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형이 막내 같다고 할걸.”
“뭐가 어째?!”
한솔의 말은 수겸의 형으로서의 긍지를 건드렸다. 수겸은 씩씩거리며 한솔을 노려보았다. 그제야 한솔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솔직한 말로는 그마저도 우스웠다.
수겸에게도 나름의 형으로서 프라이드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했다.
“넌 방금 형으로서의 내 자존감을 짓밟았어.”
“미안, 그러려던 건 아닌…….”
“정한솔, 가만 안 둬. 내가 진짜 오늘 일은 일기에 써놓고 두고두고 곱씹으며 한을 풀 테니까.”
“……그 정도야? 아, 아니아니. 이게 아니지. 아무튼 미안해.”
“흥.”
수겸은 하찮은 협박 끝에 찬바람을 일으키며 벌떡 일어나 제 방으로 향했다. 그 방이 한솔과 함께 쓰는 방이라는 사실은 잊은 모양이었다.
한솔과 태원, 두 사람은 ‘쾅’ 소리가 나도록 닫힌 문을 바라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수겸이 이 모습을 볼 수 없어 다행이었다.
* * *
시간은 무섭게 휙휙 흘러, 유피트 버라이어티의 두 번째 촬영일이 되었다. 수겸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하고서 촬영장으로 향했다.
멤버들은 오늘 무슨 촬영인지를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전생의 경험이 있는 수겸은 오늘 어떤 촬영을 할지 알고 있었기에 마냥 들떴다.
“대체 어디를 가기에 아침부터 부르지?”
지난번보다 족히 두 시간은 이른 촬영에 태원이 피곤한 듯 중얼거렸다. 수겸 역시 이른 촬영 준비로 새벽부터 숍에 다녀오느라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솜사탕처럼 포근포근 부풀어 올랐다.
“어? 여기…….”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들어가던 차에, 창밖을 보던 한솔이 표지판을 발견했다. 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헐, 민성이 형. 우리 정말 저기 가는 거 맞아요?”
“물어보지 마라. 대답해 주지 말랬어.”
“아, 나 지금 표지판 봤단 말이에요. 어차피 다 알게 된 거 그냥 말해주면 안 돼요?”
“응, 안 돼.”
“대박, 완전 좋아.”
민성의 단호한 대답에도 한솔의 목소리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 역시 설렘이 주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겸은 그제야 동지가 생긴 기분이라 내심 흐뭇했다.
“왜, 어디 가는데 그래?”
앞 좌석에 앉은 이겸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한솔은 신이 난 목소리로 외치듯 대꾸했다.
“놀이동산!”
“진짜?”
“와, 진짜?”
“정말요?”
한솔의 대답에 이겸, 태원, 유찬이 동시에 되물었다. 그에 맞추어 수겸 역시 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정말, 정말?’ 하고 물어보았다.
“그렇다니까. 내가 표지판 봤어. 여기 완전 구불구불한 외길이라서 거기 말고는 다른 곳 갈 수도 없어. 와, 놀이공원 진짜 오랜만에 와.”
“나도, 나도.”
한솔의 말에 태원이 맞장구를 쳤다.
멤버들은 제각기 자신이 언제 마지막으로 놀이공원에 왔는지를 이야기했다. 누구는 고등학교 때 소풍이 마지막이었다고 하고, 누구는 중학생 때 수학여행이 마지막이었다고 하고, 누구는 몇 년 전에 친구들과 온 게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수겸은 마지막 방문이 언제인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먼 과거여서 말조차 얹지 못했다.
“환상의 나라, XX랜드로~”
마침내 주차장에 차를 대자, 한솔이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차에서 내렸다.
민성으로부터 놀이공원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커다란 나무 앞에서 촬영을 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멤버들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내부로 입장하고 나니,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제작진들이 금세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유피트의 스태프들도 도착해 있었다.
“자, 여기서 인사 멘트 하시고, 오늘은 놀이공원에서 노는 촬영으로 쭉 갈 거니까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요.”
“와, 대박.”
“네!”
“와아, 감사합니다.”
메인 PD의 말에 유피트는 하나같이 기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심지어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유찬마저도 설레 보여서, 보는 수겸을 흐뭇하게 했다.
“일단 오프닝 멘트 한 다음에, 저기서 각자 머리띠들 구매하셔서 착용하실게요. 놀이기구도 몇 군데 사전 협의해 두었으니까 꼭 탑승하셔야 할 것들 있거든요. 그건 이따 차근차근히 설명해 드릴 테니까, 우선은 오프닝만 잘 부탁드려요.”
“넵!”
작가의 말에 유피트는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중에서도 수겸의 목소리가 가장 밝았다. 비록 촬영이기는 했지만, 놀이공원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설렜다.
“자, 그럼 큐 들어갑니다.”
제작진의 말에 설렘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알록달록한 구슬 아이스크림처럼 동글동글 사방으로 굴러다녔다.
“What’s this planet?”
“안녕하세요, 우리는 유피트입니다!”
수십 번은 외쳤던 인사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쾌활했다. 멤버들은 저마다의 설렘을 담아 밝게 소개를 했다. 이어서 간단한 대화가 오가며 짧은 오프닝 촬영이 끝났다.
멤버들은 앞서 들은 설명대로 기념품숍에 가서 머리띠를 고르기 시작했다. 태원은 상어가 머리를 잡아먹는 듯한 머리띠를 골랐고, 이겸은 비교적 담백한 사막여우 귀가 달린 머리띠를 골랐다. 한솔은 하트가 달랑거리는 머리핀을 두 개 꽂았다. 유찬은 레서판다 인형이 달린 머리띠를 썼다.
수겸은 고민 끝에 파닥파닥 토끼 헤어밴드를 골랐다. 다소 과한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팬들은 분명 좋아할 터였다.
파닥파닥 토끼 헤어밴드는 기본적으로는 분홍색 귀가 아래로 축 처져 있지만, 헤어밴드에 달린 손잡이를 꾹 누르면 귀가 파닥거리며 바짝 섰다.
수겸은 양손으로 손잡이 끝을 번갈아 눌렀다. 그러자 귀 두 개가 파닥파닥 움직였다.
수겸은 귀를 파닥거리며 가장 가까이 있던 유찬에게로 다가갔다.
“유찬아, 나 잘 어울려?”
파닥파닥, 귀가 신나게 움직였다. 유찬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가, 이내 웃음기에 묻혀 곱게 접혔다.
“귀여워요,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유찬이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던 터라, 수겸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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