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44화
“무슨 일이야?”
그는 수겸에게 ‘무슨 일 있어?’라고 묻는 대신, ‘무슨 일이야?’라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음을 단정하는 말에 수겸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짓말하지 말고.”
단호한 선욱의 말에 수겸은 할 말을 잃었다.
수겸은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아이스 초코를 마시는 것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커다란 눈으로는 선욱의 눈치를 살피고 입은 바쁘게 빨대를 이용하여 아이스 초코를 빨아 마셨다.
선욱은 그 모습을 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반응에 수겸은 움찔하기는 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수겸아.”
“……넵.”
수겸은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자신도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선욱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냥 기뻐 보이는 미소라기보다는 걱정이 어린 미소였기에 수겸의 가슴이 따끔거렸다.
“걱정하게 좀 하지 마.”
“……넵.”
“속상하게도 하지 말고.”
“……네엡.”
비록 질질 늘어지는 대답이었지만, 그것이나마 듣고서야 선욱이 평소처럼 웃었다. 느른한 눈빛이라든가 호선을 그리는 입술까지 평소와 같았다. 여유가 묻어나는 익숙한 미소에 수겸 역시 답답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온 김에 밥이라도 먹고 가. 사 줄게.”
“아싸, 완전 좋아요.”
“먹고 싶은 거 있어?”
“혹시 가격 제한이 있을까요?”
수겸의 말에 선욱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이내 짓궂은 표정으로 수겸을 바라보았다.
“내가 우리 수겸이 밥 사 주면서 돈 아낄 사람으로 보여? 날 뭘로 보고. 서운하네.”
“에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만, 혹시! 아주 호오오옥시 그럴까 봐 여쭤봤어요. 그렇다면 저는 회가 먹고 싶습니다. 모둠회요. 아, 그런데 민성이 형이 저 기다린다고 했는데…….”
“민성이한테는 내가 연락할게. 오늘은 둘이 먹자.”
“넵!”
“그럼 가자.”
선욱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차 키를 잡아 들었다. 수겸은 앞서 걷는 그를 따랐다.
* * *
도착한 곳은 고급 일식집이었다. 수겸이 모둠회를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고급스러운 곳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겸은 가게 내부 인테리어를 훑어보며 혀를 내둘렀다. 개별 룸 형식의 일식당은 인테리어 역시 정갈하고 예뻤다.
선욱이 주문하는 특선 코스 가격은 인당 금액이 십만 원이 넘어갔다. 이제까지 한우를 먹느니 뭐니 하면서 선욱에게 많이 얻어먹기는 했지만, 단둘이 먹으면서 너무 많은 돈을 쓰게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양심이 콕콕 찔렸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법인 카드 아니고 개인 카드니까 걱정하지 마.”
이런 수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선욱이 선수를 쳤다. 그 말에 수겸은 거짓말처럼 안심이 되었다.
어떻게 법인 카드보다 개인 카드를 쓴다는 게 더 마음이 편한지,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그만큼 선욱이 부자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겸도 잘은 모르지만, 꽤 유명한 선욱의 집안은 대대로 철강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선욱은 철강 회사 운영에는 관심이 없어서, 엔터라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것이었다.
과거 선욱의 결단 덕분에 수겸은 지금 배곯지 않고 잘 먹고 잘살 수 있게 되었다.
수겸은 이렇게 생각하니 새삼 선욱에게 감사한 마음이 차올랐다.
이렇게 수겸이 선욱을 향한 감동에 빠져 있는 사이에 보는 것만으로 즐거운 다양한 음식들이 순차적으로 나왔다.
속이 풀리는 따뜻한 죽부터 상큼한 샐러드, 감칠 맛 나는 회무침과 신선한 해산물이 이어서 상을 장식했다.
하나하나 먹다 보니 주인공인 회가 커다란 배 모양의 나무 접시에 깔끔하게 썰려서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노릇하게 녹은 치즈가 올려진 랍스터도 나왔다.
“우와, 너무 맛있어요.”
수겸이 행복감에 젖어 탄성을 내질렀다. 선욱은 좋아하는 수겸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수겸아.”
“네!”
“많이 먹고 얼른 크자.”
“헉, 저 다 컸는데요?!”
“아냐, 더 커야 돼.”
선욱의 말에 수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제 키가 작다고 놀리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수겸이 바로 조금 전까지 느꼈던 선욱을 향한 고마움도 잊고 씩씩거리고 있으려니, 선욱이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얼른 커야 잡아먹지.”
“아, 다 컸다니까요?”
“아니야, 덜 컸어.”
“진짜 다 컸는데!”
“그럼 지금 잡아먹힐래?”
“아니, 절 왜 잡아먹어요?! 회나 드세요, 회!”
놀리는 게 틀림없는 말에 수겸은 씩씩거리며 젓가락을 놀려 잘 손질된 랍스터의 속살을 콕콕 집어 먹었다. 선욱의 묘한 미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 * *
“으아아아, 배불러 죽겠다.”
수겸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겨우 현관만 벗어나서는 드러누웠다. 워낙 메뉴가 많다 보니 조금씩 집어 먹었는데도 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수겸은 넘치는 포만감에 꼼짝하기 싫어 제자리에 풀썩 누워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어휴, 뭐 하냐?”
“보면 몰라? 누워 있잖아.”
수겸은 기가 차다는 듯 끌끌 혀를 차는 이겸을 노려보며 투덜거리듯 대꾸했다.
툴툴대는 반응에 이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사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어……. 그냥 별 이야기 안 했는데? 밥만 먹었어.”
“밥만 사 주면 다 좋지, 아주. 네가 무슨 애냐?”
“뭐? 왜 시비지?! 그리고 먹을 거 사 주는 사람이면 일단 한국인으로서 기본 도리가 있다는 뜻이거든!”
“얼씨구.”
“왜, 뭐!”
“하여간 송수겸. 마음에 안 들어.”
“뭐야, 웬 시비냐고! 나도 너 마음에 안 들어!”
“그러든가 말든가.”
차이겸은 수겸의 평화로운 가슴에 돌멩이를 있는 대로 던져놓고는 휙 제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기가 찬 수겸은 무어라 더 화를 내고 싶었지만, 이미 사라져 없는 이겸에게 차마 더 화를 낼 수가 없어 열만 뻗쳤다.
“아아아, 차이겨어엄!”
수겸은 미처 해소되지 못한 분노에 바닥에 누워 몸부림을 치며 절규했다.
하여간 저 인간은 재수가 없다. 그것도 아주 없다.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재수 없는 놈이었다.
“수겸이 왔어?”
발악하는 소리가 워낙 컸기 때문인지 태원이 방에서 나왔다. 그는 바닥에 벌렁 누워 있는 수겸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수겸의 옆에 따라 누웠다.
“혀엉, 차이겸이 시비 털었어. 쟤 진짜 짜증 나.”
“어이구, 그랬어? 뭐라고 시비를 걸었는데?”
“밥만 사 주면 다 좋냐고, 내가 마음에 안 든대.”
“냅둬, 쟤는 원래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잖아.”
“그건 그렇지만!”
“나는 너 마음에 들어, 수겸아.”
태원이 수겸을 달래주듯 덧붙였다. 그저 울컥한 제 성을 달래주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수겸은 그 말에 바르르 끓던 속이 금세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수겸은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나도 형이 마음에 들어. 아니,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좋아. 그것도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아주 좋아!”
“꼬시지 마. 설렌다.”
“오,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설레? 그럼 이거는? 이거는?”
태원에 말에 수겸은 킥킥 웃음을 터뜨리다가, 누워 있는 태원의 위에 얼른 올라탔다. 그러고는 태원의 위에서 그의 가슴팍이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장난을 쳐대었다.
“수겸아, 형 자극하지 마라.”
“왜?”
“그러다가 큰코다쳐.”
“사나이 송수겸, 그런 말에 쫄 만큼 나약하지 않다!”
“오호라, 그래?”
“그럼!”
수겸의 해맑은 대답에 태원의 눈빛이 기묘해졌다. 팬들이 붙여준 별명 중 하나인 육식동물에 걸맞는 눈빛 역시 사나워졌다.
그는 일순간 수겸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수겸의 허리를 느른하게 지분거렸다.
농밀한 손길에 놀란 수겸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와 함께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흣……!”
자신이 낸 소리인데도 깜짝 놀란 수겸은 얼른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견딜 수 없는 민망함에 얼굴이 새빨개진 수겸이 얼른 태원의 위에서 비키려고 했다.
그러나 태원은 수겸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더 집요한 손길로 수겸의 늘씬한 옆구리를 자극했다.
수겸은 또다시 신음을 흘릴까 봐 입술을 꼭 깨무는 걸로 모자라, 두 손으로 입을 빈틈없이 틀어막았다.
태원은 수겸의 옆구리에서 피아노라도 치듯 손가락을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의 손길에 수겸은 바르작거리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장난이 영원할 순 없었다. 태원의 손길을 피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던 수겸은 어느 한 지점에 엉덩이가 닿자 얼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불길함을 느낀 태원이 선수를 쳤지만, 수겸의 주둥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혀, 엉, 뭐, 뭐가 닿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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