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34화
“누구야?”
수겸은 이어폰을 뽑으며 물었다. 묻긴 했지만 아마 유찬이나 차이겸일 것이라 생각하기는 했다. 같이 방을 쓰는 태원이나 한솔이었으면 굳이 노크를 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고는 했으니까. 물론 수겸 역시 그랬고.
“저예요, 유찬이.”
“어어, 들어와.”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유찬이 아니면 이겸이라고 생각했는데, 문을 두드린 상대는 유찬이었다.
좀처럼 먼저 찾아오는 일이 없는 유찬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걱정이 앞섰다.
“무슨 일 있어?”
“그게 아니라……. 밖에 눈이 와서요.”
“정말? 어, 진짜네!”
유찬의 말에 얼른 창밖을 내다본 수겸은 펑펑 내리는 눈을 보고 얼굴이 환해졌다.
노래 감상에 어찌나 집중을 했으면, 창밖으로 눈 내리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유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리는 눈이 보였다.
이제 막 내리기 시작했는지 세상은 아직 눈으로 뒤덮이기 전이었다. 하지만 내리는 양을 보아서는 이대로 조금만 더 눈이 내리면 쌓일 터였다.
수겸은 눈 내리는 풍경을 조금 더 잘 보려고 창문가에 찰싹 붙었다. 그런 수겸을 보는 유찬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와, 예쁘다.”
“베란다에서 보면 더 잘 보여요. 거기서 보면 공원이 있잖아요. 공원에 있는 나무에는 눈이 금방 쌓이더라고요.”
“진짜? 가보자.”
유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겸은 얼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베란다로 향했다.
정말 유찬의 말대로 베란다에서 보는 풍경이 훨씬 더 예뻤다.
아직은 앙상한 나뭇가지였지만, 얕게 깔린 눈 덕분에 나무 색이 하얗게 변해가는 중이었다.
“좋다……. 어, 잠깐.”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수겸은 베란다 창문에 고정한 고개를 번쩍 쳐들고는 유찬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찬은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수겸을 보았다.
“유찬아.”
“네.”
“나를 부른 이유가 눈이 와서인 거야?”
생전 안 그러던 애가 먼저 노크까지 하며 방에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눈이 와서요’였다. 단순한 인사치레인 줄 알았는데, 손수 눈을 더 잘 볼 수 있는 곳까지 일러주었다.
설마설마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더니, 유찬은 민망한 듯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야? 유찬아, 내 말이 맞아?”
“……맞아요. 귀찮았다면 미안해요. 저는 그저 형이 눈 내리는 걸 좋아하니까…….”
“헉, 아냐! 귀찮기는. 오히려 감동이라서 그렇지. 내가 좋아하는 눈이 내린다고 직접 와서 소식까지 전해주고. 로맨틱하잖아.”
수겸은 유찬을 향한 고마움과 감동에 젖어 한껏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밀려드는 행복감만큼 미소 역시 평소보다 몇 배는 환했다.
“……정말요?”
“응, 정말. 연인 사이에서도 안 이럴 것 같은데. 고마워, 진짜. 감동이야.”
“…….”
유찬은 대답 대신 빙긋 웃기만 했다. 워낙 곱고 예쁘게 생긴 외모의 유찬인지라, 그가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수겸은 새삼 유찬의 미모에 감탄하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얼굴은 저렇게 고운 미모면서 피지컬은 또 어찌나 좋은지 팬들의 말에 따르면 반전 매력이 엄청났다.
“눈이 온다고 와서 말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 유찬이 너뿐이다, 진짜.”
“……저뿐이요?”
“응, 그럼. 유찬이 너뿐이지.”
되묻는 유찬의 말에 수겸은 한 번 더 유찬뿐이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이렇게 다정하고, 예쁘고, 몸까지 좋은 유찬이 전생에서는 웬 쓰레기 같은 놈을 만나 코가 꿰였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불쑥 열이 뻗쳤다.
수겸은 블랙A인지, 블랙B인지 하는 그룹의 신명현 놈을 떠올리며 뿌드득 이를 갈았다.
“형, 왜 그래요……?”
“갑자기 아주 빡치는 일이 생각나서.”
“무슨 일인데요? 왜요? 누가 뭐라 그랬어요?”
“아냐, 아무것도. 유찬이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수겸은 유찬이 이번 생에서만큼은 신명현 놈과 일말의 접점도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재빠르게 선을 그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너무 강했던지, 순간적으로 유찬이 서운할 정도로 선을 그어버린 것 같아 아차 싶었다.
“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유찬이 네 기분까지 같이 상할까 봐, 그래서 그런 거야.”
“…….”
“아무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아무나 만나지 마, 유찬아. 절대 아무나 만나면 안 돼.”
“갑자기요……?”
길게 풀어 설명해 봤자.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신명현 같은 쓰레기는 만나지 말란 의미였다. 그래서 수겸은 결론만 툭 잘라 말했다.
그런데 너무 툭 잘라 버린 탓인지 유찬은 이해가 전혀 안 되는 눈치였다.
“아니, 내 말은 유찬이 네가 이렇게 다정하고 멋진 사람인데 어디서 개떡 같은 거랑 연애한다고 하면 내가 너무 화가 날 것 같아서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개떡 같은 거요?”
“응, 개떡 같은 거. 그러니까 유찬아, 누가 너한테 작업 걸면 꼭 나한테 말해. 나한테 허락받고 만나. 알았어?”
유찬은 수겸의 말이 웃긴지 눈가까지 접어 가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이 또 어찌나 예쁜지 수겸은 그의 미소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애가 닳았다.
“알았지? 장난하는 거 아니야. 진심이야. 그러니까 누가 작업 걸어오면 꼭 나한테 말해. 꼭.”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
“그래, 그래. 착하다.”
수겸은 채근하던 답을 들은 기쁨에 취해 있느라, 유찬이 평소와는 달리 깍듯한 존댓말이 아니라 반말을 섞어 말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저보다 한참 큰 유찬을 기특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요, 만약에 반대일 때는 어떡해요?”
“반대일 때?”
“그러니까…… 제가 작업 걸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요. 그때도 형한테 말하면 돼요?”
“오호라, 기출 변형이군. 역시 우리 유찬이는 똑똑해. 셀프로 기출 변형 문제도 내서 풀려고 하고. 정답이야. 유찬이 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겨도 꼭 나한테 말해. 내가 그 사람이 어떤지 보고 허락해 주면 그때 만나. 알았지?”
잠시 고민에 잠겼던 수겸은 이윽고 흡족한 마음으로 유찬을 칭찬했다.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아는 유찬이 장했다.
“알았어요. 꼭 형한테 말할게.”
“좋아, 좋아.”
기어코 원하는 답을 듣고야 만 수겸이 손뼉까지 쳤다. 그제야 내내 마음에 쌓여 있던 시름이 한 겹 벗겨진 것 같았다.
수겸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눈은 소록소록 쌓이고 있었다.
* * *
수겸은 물론, 유피트 멤버 모두가 기다렸던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첫 녹화날이 되었다. 촬영 장소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한 카페였다.
기념비적인 첫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첫 녹화인 만큼, 멤버들 역시 제작진이 요구한 깔끔한 검은색 슈트를 입고 촬영에 임했다. 의상을 멋있게 차려입은 만큼 메이크업이나 헤어 역시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콘셉트로 준비했다.
“후하, 후하.”
수겸은 목에 멘 보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떨리는 가슴을 달랬다. 전생에서 이미 한 차례 해당 프로그램을 촬영했던 수겸으로서는 더더욱 긴장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촬영에서 무엇을 할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겸아, 떨려? 내 손 잡을래?”
“참 나, 형 손 잡으면 좀 나아져?”
“일단 잡아봐. 그럼 나아지는지 아닌지 알겠지.”
태원의 말에 수겸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슬그머니 그의 손을 잡았다. 밑져야 본전 아닌가, 손 좀 잡는다고 손이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뭐.
수겸이 조심스럽게 태원의 손을 잡자, 그는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를 껴왔다.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손을 잡게 되어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는 코앞에 닥친 촬영이 더 신경 쓰였다.
무엇을 촬영할지 모르는 멤버들은 촬영 장소가 장소인 만큼 간단한 토크 정도를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큐 시트에 적힌 질문만 눈이 빠지라고 보고 있는 걸 보면.
사실 큐 시트에 있는 질문은 오늘 촬영에서 유피트를 보다 효과적으로 낚을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 수겸은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멤버들이 가여울 따름이었다.
“자, 촬영 들어갈게요!”
메인 PD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수겸은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모든 걸 알고 보니, 이 인간들이 자신들을 놀려먹을 생각이 얼마나 만만이었는지 알게 된 탓이었다.
“What’s this planet?”
“안녕하세요, 우리는 유피트입니다!”
“여기가 어디죠?!”
“두둥, 지금 여기가 어딘지보다 우리가 왜 왔는지가 더 중요하죠.”
태원의 선창으로 멤버들이 뒤따라 인사를 건넸다. 멤버들은 어색해하면서도 사전에 숙지한 큐 시트의 멘트를 최선을 다해서 했다.
평소답지 않게 서로에게 존댓말을 건네는 모습은 수겸이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민망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큐 시트 대본이 적혀 있던 모니터에 이제까지는 없던 새로운 문구가 나타난 탓이었다.
태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적힌 글귀를 읽었다.
“유피트의 찐친 생활 제1화. ‘유피트를 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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