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17화
“……아. 연애관은 아닌가. 연애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럼 그냥 개방적인 성 사고방식……? 아무튼 그런 사고방식을 지녔을 줄은 몰랐거든.”
“잠깐, 잠깐. 스토옵, 스톱!”
수겸은 기겁하며 한솔의 말을 잘랐다.
뭐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졸지에 성에 대한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인간이 되어버린 수겸은 동그래진 눈으로 한솔을 쳐다보았다.
“내가 개방적인 성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아니야? 그게…… 개방적인 게 아니라고?”
“아니, 아니. 대체 그게 뭔데!”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수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그게 뭐기에 자신은 갑자기 개방적인 성 사고방식을 지닌 인간이 되어버린 것일까. 또 얼마나 개방적이라고 생각하기에 한솔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답할 수 없는 물음의 연속이었다.
“그야…… 섹…….”
“스토오옵! 그게 왜 여기서 나와!”
‘섹’ 다음에 이어질 말을 너무나 잘 알 것 같은 수겸이 빠르게 한솔의 말허리를 끊어내었다.
그 말이 왜 여기서 나오는지, 갑자기 그게 왜 한솔의 입에 담겼는지 마냥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럼…… 안 넣…… 고 그 전까지만 한 거야?”
“안 넣긴 뭘 안 넣어!”
갸아악, 너무나 뭐가 뭔지 알 것 같은 말에 수겸은 질색팔색하며 외쳤다.
그러자, 한솔의 낯이 더욱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럼 넣었어?”
“아니!”
아니, 이 어린놈의 쉬키가 자꾸 뭘 넣었대!
한솔과는 기껏해야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도, 수겸은 혼란스러운 상황이 오자 갑자기 꼰대가 되고 말았다.
“그럼 뭔데?!”
“아아악! 내가 묻고 싶거든! 도대체 이 대화 뭔데! 무슨 흐름이야?!”
수겸은 답답함에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절규하듯 외쳤다. 그런데 한솔의 표정을 보니 그 역시 수겸 못지않게 답답해서 미칠 노릇인 것 같았다.
수겸은 이마까지 빡빡 때려가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것인지,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반추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태원이 형과 장난을 쳤고, 솔이가 자기랑도 상황이 맞으면 그럴 거냐고 물어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유는 두 사람을 모두 좋아하니까라고 답했다.
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청렴하기 그지없는 대화에서 어느 부분이 섹으로 시작해서 스로 끝나는 말과 엮인단 말인가.
게다가 뭐? 개방적인 성 사고방식?
“야, 내가 뭘 했다고 개방적인 성 사고방식이래?”
“아, 상황이 맞으니까 그냥 태원이 형이랑 했다며!”
“어……?”
“나랑도 상황이 맞으면 할 거라며! 둘 다 좋아하니까!”
“어, 어……?”
수겸은 멍하게 되물었다.
분명 한솔이 하는 말은 자신이 아까 한 말이 맞았다. 글자만 놓고 보면 말이다. 그런데 결단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자신이 한 말이지만, 한 적 없는 의미가 포함되어 되돌아온 말에 수겸은 말 그대로 사고가 정지한 채 멀뚱히 한솔을 바라보았다.
한솔 역시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인 듯 붉어진 얼굴로 금발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렇게 1초, 2초, 3초. 각기 다른 답답함이 서로를 짓누르는 시간이 길어져갈 때쯤, 수겸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고리눈을 떴다.
“잠깐, 잠깐. 솔아, 너 설마…… 그…… 태원이 형이랑 내가…… 잤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형이 형 입으로 말했잖아. 잤다고.”
“야이 씨, 내가 언제!”
울컥 터지는 울화와 동시에 수겸의 손바닥이 한솔의 가슴팍을 향했다.
‘짝!’ 차진 마찰음과 함께 한솔은 갑자기 얻어맞은 제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의 표정에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뭐, 뭐야?”
“내가 형이랑 장난쳤다고 했지, 언제 잤다고 했어?”
“형이 언제 장난쳤다고 했어? 장난이라는 말 자체를 한 번도 안 했는데!”
한솔은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억울한 듯 외쳤다.
그의 말에 수겸은 얼른 항변할 내용을 떠올렸다. 그런데 곰곰이 기억을 뒤져 봐도 그의 말대로 자신은 ‘장난’이라는 말은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리게 된 수겸의 낯이 이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이제까지 한솔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억울한 와중에 민망한 탓이었다.
“야, 사람을 뭘로 보고! 나 동정이야!”
“…….”
너무나 억울하고 민망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순결함을 외친 수겸은 이내 얼른 입을 다물고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아무리 억울해서 그랬다지만, 굳이 동정이라고 외칠 것까지는 없었는데. 후회해 본들, 언제나 후회는 때가 늦은 후에 하기에 후회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5초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솔이 도톰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하지 말아주라. 내가 말실수한 거니까, 너는 그냥…….”
한솔의 성격상 분명 이 어색하고도 낯부끄러운 상황을 조금이라도 수습하기 위해서, 그리고 당장에라도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싶어 하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무슨 말이든 하려고 할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떤 말이든 간에 더 수치스러워지고 말 테니까.
“……그, 나, 나도 동정이긴 해.”
“아아아아악! 말하지 말라니까!”
수겸의 절규가 유피트의 숙소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 * *
“유찬아.”
수겸은 콧잔등을 긁으며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유찬에게 다가갔다.
유찬은 힐끔 수겸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은 수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한솔과 심각하게 얽힌 오해를 겨우 풀고 나니, 이제 남은 멤버들에게도 해명을 해야 할 차례가 오고야 말았다.
어째서 하나같이 다들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자신이 설마하니 태원과 잤을 리가 없지 않은가! 같은 멤버와! 그것도 숙소에서! 그룹 생활을 깽판치려는 의도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하니 솔이 말고도 차이겸과 유찬까지 오해를 한 모양이니 우선은 더 이상 오해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풀어야만 했다.
“괜한 기우일 수도 있는데, 아까 아침 먹으면서 내가 한 말 말이야.”
“말하지 말아요.”
유찬은 수겸이 운을 뗄 기회도 주지 않고 단박에 말을 끊었다.
어찌나 냉정하게 말을 끊는지 유찬의 표정을 보지 않았더라면 수겸은 상처를 받을 뻔했다.
그러나 정작 싸늘한 말을 한 유찬의 얼굴이 더 우울해 보였기에 수겸은 상처받을 기회마저 잃고 말았다.
“오해야, 그거.”
“……무슨 오해요?”
구구절절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본론부터 먼저 꺼내놓는 게 더 중요한 상황이었다. 그만큼 유찬은 깊게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다행히 유찬은 창밖만 바라보던 고개를 수겸을 향해 돌렸다. 그가 무슨 오해냐고 되물어준 덕분에 설명할 기회를 얻은 수겸은 안도하며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게…… 어, 그런 의미로 전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나랑 태원이 형은 어제 그냥 장난을 친 거야. 어제 형이 내 볼을 쿡쿡 찌르면서 장난쳤거든.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하다가 내가 형을 물어뜯고…… 그래서 목덜미가 그렇게 된 거야.”
“……정말요?”
“응. 정말이야.”
유찬의 물음에 수겸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야?’라고 화를 내며 아까 솔이에게 했던 것처럼 냅다 스매싱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건 분위기가 좀 풀리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러면 태원이 형이랑 아무 일도 없었던 거죠?”
“아무 일이 성적인 의미라면 요만큼도 없었어, 정말로.”
“아…… 다행이다.”
유찬은 커다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안도의 한숨까지 길게 토해내었다.
“야, 넌 나를 뭘로 보고!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멤버들 다 있는 숙소에서 같은 그룹 멤버랑 그런 짓을 하겠냐?”
수겸은 그제야 큰소리를 쳤다. 억울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하도 말도 안 되는 누명을 해명하고 있으려니 우습기까지 했다.
“……그렇죠.”
그런데 어째선지 유찬은 수겸의 설명을 듣고도 씁쓸해 보였다.
마냥 안심하고 좋아하거나, 혹은 말도 안 되는 오해가 풀렸으니 웃음을 터뜨릴 줄 알았던 수겸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당황했다.
“유찬아, 왜 그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오해해서 죄송해요.”
유찬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그의 눈빛은 더없이 쓸쓸해 보였다.
수겸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혹시나 남자를 좋아하는 그에게 자신의 말이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물론 유찬은 자신이 그의 성지향성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만, 충분히 자신이 한 말에 상처를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어…… 물론 멤버끼리 연애도 할 수 있고, 뭐 서로 좋아하면 진도도 나갈 수 있지.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도라는 게 있잖아. 혼자 사는 집도 아니고, 멤버들이랑 같이 사는 숙소인데 거기서 스킨십을 하는 건 말도 안 된다는 뜻이었어.”
수겸의 해명에 유찬은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아까처럼 씁쓸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어서 수겸은 덧붙인 자신의 말이 효과가 있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용기를 얻은 수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막말로 너랑 내가 사귈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사귀면 어? 뽀뽀도 하고, 어? 키스도 하고? 그 다음 것도 하고! 그럴 수 있지. 왜 안 되겠어. 그렇지만 때와 장소라는 건 가려야 한다, 이 말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당연하지!”
유찬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수겸은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홀로 속앓이를 했을 유찬을 생각하면 더한 말도 할 수 있었다.
“뭐, 남자끼리 사귀고 자는 게 별거야? 그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뭐가 문제야? 나도 뭐, 남자랑 사귀고 자고 그런 거 안 꺼려. 할 수 있지, 마음만 맞는다면 뭐가 문제야. 내 말은 때와 장소만 잘 가리자, 이 말이야.”
“형, 방금 그 말…… 진심이에요?”
“진심이고말고. 나는 거짓말은 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야.”
수겸은 유찬의 물음에 과장 섞인 몸짓까지 해 가며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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