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5화
무대의 여운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실수는커녕 목표 이상으로 잘해낸 무대였다. 그러나 긴 시간 소원하던 무대인 만큼 아쉬움이 남았다.
수겸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무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우, 춥다. 얼른 들어가자.”
매니저인 민성이 담요를 내밀었다. 수겸은 건네받은 담요를 대충 몸에 두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돌렸다.
대기실에 들어가니, 멤버들은 옹기종기 난로 앞에 모여 있었다.
수겸을 발견한 태원이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태원과 유찬이 한 발자국씩 옆으로 물러나 주며 수겸이 설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추운데 뭐 하다가 이제 와?”
태원의 말에 수겸은 대답 대신 조용히 웃었다. 새물거리는 웃음에 이번에는 태원이 조용해졌다. 뭐라 반응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괜스레 민망해진 수겸은 콧잔등을 쓸었다.
“민성이 형, 저희 마실 것 좀 사 주세요!”
“귀찮게 하지 말고 있는 거 먹어.”
“그럼 제가 사 올게요. 법카만 주세요.”
한솔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주세요’를 했다. 그러자 민성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참 나, 됐다. 내가 사 올 테니까 메뉴나 정해서 말해줘.”
“앗싸. 고마워요, 민성이 형!”
유들유들한 성격을 자랑하는 한솔은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그가 능청스럽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부탁을 하면 민성은 백이면 백 다 들어주었다.
한솔은 연습생 기간만 7년으로 멤버들 중 연습생 기간이 가장 길었다. 어린 나이부터 겪었을 치열한 경쟁에 삐뚤어질 만도 한데 지금 한솔에게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물론 수겸만 아는 미래에 유피트가 각종 병크에 휘말리면서 꽤 의외의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 생은 그러지 않도록 자신이 붙잡으리라고 수겸은 다짐했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는 라떼. 따뜻한 걸로.”
“나도 라떼 먹어야지.”
“저는 밀크티 따뜻할 걸로요.”
태원에 차이겸, 한솔과 유찬까지 순차적으로 먹고 싶은 메뉴를 말했다.
그때까지도 한솔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수겸은 네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걸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나는 아초!”
“아, 형! 따뜻한 것 좀 먹어. 그러다 탈 나.”
수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솔이 인상을 찌푸렸다.
수겸이 말한 아초는 아이스 초코였다. 대쪽 같은 음료 취향을 자랑하는 수겸은 PPL과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항상 아이스 초코만 마셨다.
그때 또 다른 매니저인 종우가 카메라를 들었다. 그는 가볍게 손짓하며 멤버들에게 촬영을 시작할 것이라는 사인을 주었다.
그가 지금 찍는 영상은 너튜브와 팬카페에 올라갈 비하인드 영상이었다.
“얼죽아 협회 회원의 의지를 꺾으려 하지 마.”
“어휴……. 나중에 감기 걸리면 가까이 올 생각 말아.”
“싫은데? 솔이 너한테 딱 붙어서 옮길 거야.”
카메라가 자신을 찍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수겸은 방금 한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한솔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몸을 바싹 붙였다.
한솔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러섰지만, 그럴수록 수겸은 더 찰싹 그의 옆에 붙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저보다 반 뼘은 더 큰 한솔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매달려서 한솔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붙어서 감기 옮겨야지.”
“와…… 진짜 미치겠다.”
“뭐 이런 걸로. 알았어, 알았어. 떨어지면 되잖아.”
“아우, 알았어. 형 마음대로 해.”
한솔의 말에 수겸은 토라진 듯 목소리로 대꾸하며 물러섰다. 그러자 한솔이 한발 물러나 주었다. 한솔에게 이긴 수겸은 생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은 카메라에 담겼다.
아마 편집이 들어가게 되면 방금 실제 벌어진 장면과 약간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큰 골격은 변하지 않을 터였다.
수겸은 한 건 해냈다는 사실에 내심 뿌듯해했다.
* * *
유피트 멤버들은 민성이 사 온 음료를 먹고 다시금 난로에서 몸을 녹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자정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지나면 유피트를 비롯하여 야외무대에 섰던 가수들 모두가 무대로 올라가 신년을 맞이하는 카운트다운을 할 터였다.
수겸은 그 전에 미리 화장실에 다녀올 요량으로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두툼한 롱 패딩를 발목부터 잠근 탓에 걷기가 힘든 탓이었다.
“어…… 유찬…….”
화장실로 향하던 중 유찬을 발견한 수겸이 반갑게 그를 부르려던 참이었다. 코너에서 웬 남자가 유찬을 따라 걸어 나왔다.
유찬과 키가 엇비슷한 검은색 머리의 남자를 본 수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남자는 유피트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블랙A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인 신명현이었다. 이내 수겸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저 새끼가……!
수겸이 그를 보고 격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생에 유찬이 아웃팅을 당하게 된 게 바로 저 자식 때문이었다.
구체적인 내막까지는 수겸도 잘 몰랐다. 어쨌거나 둘이 연애, 혹은 썸이 있었는데 신명현 저 새끼가 SNS에 두 사람의 사진을 올리고 말았다.
이것만으로도 답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신명현은 그 상황에 자신만 살자고 유찬을 미치광이 스토커로 몰아갔다.
그러나 당연히 실상은 달랐다. 유찬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건너건너 듣게 된 이야기에 따르면 애초에 먼저 유찬에게 접근한 쪽도 신명현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다른 멤버들의 병크가 차례로 터지며 유피트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결국 수겸이 전생에서 그 끔찍한 일들을 겪게 한 시발점이 바로 저 새끼였다.
수겸은 어금니를 사리물며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유찬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수겸은 해맑게 유찬의 이름을 불렀다.
수겸은 의도적으로 신명현과 유찬 사이로 끼어들어 유찬의 옆에 붙어 섰다. 유찬은 슬쩍 물러서며 수겸을 피하기는 했지만, 그럴수록 수겸은 더욱 바싹 유찬의 옆에 붙었다.
“너 찾고 있었는데, 잘됐다!”
“……저를요?”
“어어, 할 말이 있었거든. 어, 안녕하세요? 계신지 몰랐어요.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십쇼.”
수겸은 바로 옆에 있던 신명현에게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새해 인사를 하고 유찬의 팔을 잡아끌었다. 유찬은 얼결에 수겸에게 끌려 걸어 나왔다.
걷는 동안에도 유찬은 몇 번이나 수겸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수겸은 놓아주지 않았다. 혹여나 신명현이 다시 나타날까 봐 걱정이 된 탓이었다.
수겸은 신명현을 생각하니 또 열이 뻗쳤다.
생각해 보면 신명현은 블랙A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멤버였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태원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그에 비해 유찬은 아직 열아홉 살인 미성년자였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서야 갓 스무 살이 된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아직 한참 어린 유찬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당장에라도 신명현에게 가서 그 자식의 울대를 백서른세 번쯤은 연타로 치고 싶었다.
“형, 이것 좀 놓고…….”
“유찬아.”
유찬이 왜 이렇게 스킨십에 민감하게 구는지 수겸은 사실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유찬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들킬까 봐 오히려 더 스킨십을 피하고 불편해했던 것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자신의 성 지향성을 깨달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유피트에 들어온 이후 내내 겉돌고 마음을 열지 못하고 지낸 이유 역시 그 때문일 터였다.
어린 나이에 혼자 전전긍긍하며 마음고생을 했을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수겸은 울컥 치솟는 감정에 젖은 눈으로 유찬을 바라보았다.
“형, 울어요……?”
놀란 유찬의 물음에 수겸은 대답 대신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전생에서 그가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한 번도 그를 이렇게 안아주지 못했다.
그가 불편해서는 아니었다. 그보다 앞으로 유피트는 어떻게 될지,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될지만을 걱정하느라 정작 원치 않는 아웃팅으로 가장 힘들었을 유찬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그게 수겸에는 못내 미안함으로 남아 있었다.
“형……?”
“있잖아, 유찬아. 나는 무조건 네 편이야.”
놀란 듯한 그의 부름에 수겸은 더욱 그를 힘주어 안았다. 비록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있었지만, 말투만큼은 단호했다.
“형…….”
“지구가 두 쪽, 아니 서른두 쪽이 나도 그건 안 변해. 나는 무조건 유찬이 네 편이야.”
“왜,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수겸은 울음을 터뜨릴 듯한 그의 흔들리는 음성에 가슴 한편이 저릿했다.
“그냥……. 그냥 꼭 한번 말해주고 싶었어. 곧 성인이 될 너에게, 이 험한 세상을 어른이라는 이유로 온몸으로 버티고 싸워내야 할 너에게 절대 변하지 않을 네 편이 있다고,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
유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다부진 몸이 잘게 떨리는 것만은 느껴졌다. 수겸은 그런 유찬을 달래듯 그의 탄탄한 등을 토닥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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