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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3화 (4/143)

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3화

차이겸은 미간을 찌푸렸다. 수겸의 제안이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도 회귀 전에는 그렇게 싫어하던 건데 차이겸이라고 좋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연말 가요대전은 보통 가요 프로그램에 비해 시청률도 월등히 높은데 이 노다지를 그냥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기왕 어그로를 끌려면 동네 하천에서 끌 게 아니라, 청계천에서 끌어야 하는 법이었다.

“하자, 응? 어차피 안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동선만 약간 더 깊게 들어가는 것뿐인데.”

“……알았어.”

차이겸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가 썩 마뜩잖아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수겸은 긍정의 답변을 듣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그럼 우리 연습하자! 얼른.”

“형, 진짜 괜찮아? 크게 넘어진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당연하지.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한솔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수겸은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에게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들 수겸이 넘어졌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수겸은 멀쩡하다 못해 자신이 넘어졌는지 말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계단에서 구르기 전의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이번 생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으니 무시해도 될 것 같았다.

현재 수겸의 컨디션은 말 그대로 날아갈 것 같았다. 아프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새 몸을 얻은 것처럼 쌩쌩했다.

뭐, 굳이 따지자면 순식간에 무려 5년은 어려졌으니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자, 그럼 다들 준비하시고 음악갑니다!”

수겸은 활기차게 외치며 노트북으로 가요대전을 위해 편곡된 음악을 재생시켰다.

여전히 멤버들의 얼굴에는 걱정이 어려 있기는 했지만, 음악이 나오자 멤버들 모두 자연스럽게 미리 맞춰둔 안무를 시작했다.

수겸 역시 음악을 틀자마자 얼른 멤버들 사이에서 자신의 안무 대열을 찾아 들어갔다.

다행히 몸이 안무를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5년 만인데도 수겸의 춤은 어색함이 없었다.

* * *

찬바람이 ‘휘이이이’하는 살벌한 소리를 내며 대기실을 강타했다. 차디찬 바람이 대기실 안으로 들이치자, 대기하던 유피트의 스태프들은 비명을 질러대었다.

핑크색 담요로 온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 수겸 역시 강추위에 속수무책으로 바들바들 떨었다.

“태원이 형, 나 코 없어졌나 봐줘.”

수겸은 추워서 떠는 와중에도 옆에 있는 태원에게 장난을 쳤다.

연습생 때부터 수겸은 태원과 친했다. 친형처럼 챙겨주는 태원과 시답잖은 말장난을 하는 게 힘겨운 연습생 시절 유일한 낙이었을 정도로.

“어어, 저기 네 코 날아간다.”

“아, 진짜!”

태원의 말에 수겸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때렸다. 먼저 장난을 친 쪽은 자신이었지만, 그걸 또 저렇게 자연스럽게 받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게 정말 그의 말대로 코가 날아갈 것 같은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는 탓이었다.

수겸은 핫팩을 쥐고 있던 손으로 코를 만졌다. 끔찍한 추위에 코끝의 감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유피트가 서야 할 무대는 야외였다.

그나마 리허설 때는 햇살이 드는 낮이라 괜찮았지만, 가요대전은 해가 다 진 밤부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낮보다 배는 춥게 느껴졌다.

물론 나름대로 천막도 있고, 대형 난로도 설치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날이 심하게 추웠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날씨에 야외무대를 강행하는 방송사를 욕했을 것이다. 그러나 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게 된 수겸에게 추운 날씨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와, 진짜 좋다.”

“이렇게 추운데도 좋다는 말이 나와?”

수겸의 말에 태원은 기가 막힌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겸은 원래 추위를 많이 탔다. 그리 춥지 않은 날에도 둘둘 싸매고 다닐 정도로 추위에 취약했는데, 오늘은 냉동 창고와 다를 바 없는 추위에도 좋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의아할 만도 했다.

하지만 수겸은 정말 행복했다.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을 줄 알았다. 이제 무대란 제게 머나먼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금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그토록 친하게 지냈던 태원과 함께.

새삼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제게 있을 수 있는지. 모든 게 끝인 줄로만 알았던 제게 이토록 과분한 기회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아직도 꿈만 같았다.

“좋잖아. 연말에 이렇게 무대를 할 수 있다는 게. 나는 형이랑 같이 무대를 서는 게 진짜, 지인짜, 지이인짜로 좋아.”

“야야, 닭살 돋게 왜 그래? 장난치지 마. 안 그래도 추워서 벌써 닭살 돋았으니까.”

태원은 수겸의 말에 과장스럽게 제 팔을 쓸었다.

그의 반응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수겸은 본래 낯간지러운 말 같은 것은 못 하는 성격이었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모두 다 수겸에게는 마냥 어렵기만 했다.

하지만 수겸은 다시 태어나며 새로이 마음을 가졌다. 다시 얻은 삶에서까지 찰랑찰랑 넘치는 감정을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 못한 말이 얼마나 긴 후회로 남는지 이미 처절하게 깨달았으니까.

수겸은 태원을 향해 싱긋 웃었다.

“장난치는 거 아니야. 이런 걸로 왜 장난을 쳐. 나 정말 형이랑 이렇게 같이 있는 게 너무 좋아서 믿기지 않을 정도야. 내가 진짜 좋아하는 형이랑 같이 무대를 한다는 게 꿈만 같아.”

“……뭐야, 진짜.”

태원은 갑작스러운 수겸의 말에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수겸은 그의 반응을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태원이 참 별것도 아닌 것에 민망해한다고 생각하면서.

덕분에 둘 사이에 평소의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 자리했다.

수겸은 태원이 왜 이렇게까지 민망해하는 것인지 고민하며 머쓱한 시간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야야, 차이겸, 차이겸!”

수겸은 마침 대기실로 들어오는 차이겸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그를 불렀다. 지금 수겸에게 있어 차이겸은 태원과의 어색한 침묵에서 벗어나기에 좋은 먹잇감이었다.

발목까지 오는 긴 롱 패딩에 담요를 몇 겹이나 둘둘 감싼 수겸이 펭귄처럼 아장아장 걸어 차이겸에게 다가갔다.

안 그래도 머리가 핑크색인 수겸인데 담요까지 핑크빛이다 보니 거대한 분홍색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왜 불렀는데.”

차이겸의 목소리는 마냥 반갑게 그를 부른 수겸과 상반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저 틱틱거리는 말투가 거슬려서 말도 섞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어차피 무대 위 이벤트로 대차게 어그로를 끌기로 다짐까지 한 마당에 거리낄 게 없었다. 게다가 제 역할인 ‘수’ 이미지를 잘 받아들이려면 앞으로 차이겸과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좋았다.

작정하고 커플링을 받기로 다짐한 순간부터 차이겸의 말투쯤은 신경 쓸 거리도 되지 않았다.

“잘해보자고 불렀지.”

“뭐?”

놀란 듯 언성까지 높이며 되묻는 차이겸 때문에 수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따 무대에서 잘해보자는 말이 그렇게 이상한가?

“왜 그렇게 놀라?”

“…….”

수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데도 차이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간을 좁히며 입을 꾹 다무는 녀석을 보며 수겸은 내심 끌끌 혀를 찼다. 하여간 맞춰주기 힘든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

차이겸 저 녀석이 진입 장벽이 좀 높기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꽤 다정하고 괜찮은 녀석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수겸은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잘 부탁한다는 말이야. 우리 겸겸 커플이잖아.”

“…….”

공식 커플링인 ‘겸겸 커플’까지 언급해 가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는데 차이겸은 이번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반응에 민망해진 수겸은 저도 모르게 잘 세팅된 머리를 긁적거리려다 매섭게 노려보는 헤어 스타일리스트 누나의 눈빛을 감지하고는 얼른 손을 내렸다.

“유피트 준비할게요.”

“넵!”

때마침 가요대전 무대 스태프가 유피트의 대기실 천막으로 들어섰다. 민망한 상황을 벗어나게 된 수겸이 반가움에 크게 대꾸했다.

수겸은 둘둘 감싸고 있던 밍크 담요를 풀고 안에 입고 있던 롱 패딩마저 벗은 다음 빠른 걸음으로 대기실을 나섰다.

무대에서는 앞 순서인 발라드 듀엣이 노래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들 다음으로는 본무대에서 걸그룹 멤버들의 콜라보레이션 공연이 있을 예정이었다. 본무대의 공연 장면은 스크린으로 생중계가 될 터였다.

그 바로 다음 차례가 유피트였다.

차례를 기다리는 잠깐 사이, 수겸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동동거리며 제자리에서 뛰었다.

수겸의 무대 의상은 깊게 파인 하얀색 실크 블라우스 위에 빨간색 타탄 무늬 슈트를 위아래로 갖춰 입은 게 다였다.

“야, 송수겸. 붙어.”

차이겸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는 수겸의 팔을 잡아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수겸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고리눈을 떴다가, 이내 아까 자신이 한 말이 효과가 있었구나 싶어 입술을 샐그러뜨리며 웃었다.

“고마워.”

수겸은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맞닿은 곳을 중심으로 온기가 조금씩 피어올랐다. 그렇게 온기가 조금씩 퍼져 나갈 때쯤.

“유피트, 올라가세요!”

가요대전 스태프의 큐 사인이 떨어졌다.

수겸은 귓가에서 달랑거리고 있던 인이어를 귀에 꽂았다.

이제 수겸이 그토록 원했던 무대가 다시 시작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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