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돌의 공식 수가 되겠습니다 2화
* * *
음악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많이 들어본 음악이었는데, 수겸은 머리가 하도 아파서인지 들리는 음악의 제목이 무엇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입안으로는 흥얼거리게 되었다.
머리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거짓말처럼 노래의 제목이 떠올랐다.
유피트의 데뷔곡이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노래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오려던 찰나.
“수겸이 형 일어났어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아니, 익숙하다 못해 눈물겹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잊겠는가, 유피트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고, 또 자신을 친동생처럼 따랐던 한솔의 목소리를.
수겸은 이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술을 진탕 먹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은 전직 아이돌.
이 비극적인 삶을 위로해 주려 죽음 직후에 가장 찬란했던 순간의 기억을 되살려 준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수겸아, 눈 좀 떠봐.”
이 목소리는 리더인 태원이 형의 목소리였다. 팬들이 암반수 목소리라고 할 만큼 굵은 저음의 목소리였다. 수겸은 단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반가움에 웃었다.
“어어, 얘 다친 모양인데? 그것도 머리를 다쳤나 봐. 실실 웃어.”
태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때까지도 수겸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니, 뜰 수 없었다.
반갑고 소중한 목소리가 눈을 뜨면 모두 없어질까 봐.
죽음이 데려간 무(無)의 세계로 내던져지고 말까 봐.
“민성이 형, 수겸이 형 병원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에는 막내 유찬의 목소리였다.
멤버들에게 내내 마음을 열지 않은 듯, 겉도는 것처럼 보이기만 해서 유난히 눈에 밟혔던 유찬이. 그리고 결국에는 수겸의 가슴에 두고두고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고야 만 아픈 손가락.
그를 떠올리자, 수겸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슬퍼졌다. 감은 눈 사이로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얘 우는데……?”
마지막으로 들린 목소리는 차이겸이었다. 동갑인 탓에 소속사에서 공식으로 ‘겸겸 커플’로 떠밀어 버려 커플링의 상대가 되었던 멤버였다.
유피트의 모든 멤버들의 목소리가 다 들렸다.
눈을 뜨면 아무도 없을까 봐 두려운데, 또 견딜 수 없이 눈을 뜨고 싶었다.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그들이 보일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비참하게 죽은 자신을 위로하려는 하늘의 마지막 선물이라면, 얼굴까지는 보여주지 않을까.
길고 긴 고민 끝에 수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맺혔던 눈물이 얼굴의 굴곡을 따라 흘러내렸다.
“어어, 일어났다! 형 괜찮아?”
막 시야에 들어온 한솔이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눈을 떠도 사라지지 않았다. 외려 실재(實在)하는 것처럼 생생했다.
“어어, 수겸이 형……?”
수겸이 떨리는 손을 천천히 한솔에게 뻗었다.
한솔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밝은 갈색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하얀 뺨은 땀에 젖어 있었다. 손끝에 닿는 체온과 축축한 촉감에 수겸은 흠칫 놀랐다. 단순히 청각과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마저도 진짜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수겸아, 병원 좀 다녀오자. 넘어지면서 머리 부딪친 거 아닌지 걱정돼.”
“태원이 형…….”
이어지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태원이 심각한 얼굴로 수겸을 보고 있었다. 그는 바쁜 시선으로 수겸의 몸을 구석구석 살피듯 쳐다보았다.
“아프지는 않아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유찬마저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선을 살짝 돌려 유찬을 보자, 수겸은 저도 모르게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맺힌 눈물을 서둘러 훔치는데, 불쑥 눈앞에 수건이 들이밀어졌다.
“남자 새끼가 넘어졌다고 질질 짜긴. 닦아.”
수겸은 수건을 건네받는 대신 차이겸을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 이겸뿐만이 아니었다. 태원이 형, 차이겸, 한솔이, 유찬이까지. 모두의 얼굴을 눈에 새기듯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꿈일까? 꿈이겠지. 아니면 환상이거나. 하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진짜일지도 몰라.
이 모든 게 곧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애달팠다.
“수겸아, 괜찮냐? 아파? 이거 몇 개로 보여?”
이번에는 매니저 민성이 형까지 나타났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수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게 다 꿈이고, 환상에 불과할 텐데 지금 자신이 있는 공간마저도 너무나 익숙하고 실감 났다. 약간은 퀘퀘한 냄새가 나고, 한쪽 벽면이 거울로 가득한 이곳은 소속사 지하에 있던 안무 연습실이었다.
“너무 생생하잖아…….”
삶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넘어가기에는 모든 게 진짜 같았다.
수겸은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삼키려 애썼다.
울지 말자, 이건 다 가짜야. 곧 사라져 버릴 허상에 불과하다고.
“형, 일단 병원부터 갔다 오자. 못 일어나겠어? 내가 부축해 줄까?”
다정한 한솔의 말에 수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순간을 조금 더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다른 곳으로 향하는 순간, 모든 게 없던 일이 되어버릴까 무서웠다.
“어휴, 울지 좀 마라. 아프면 얼른 병원 가고, 그만 울어.”
차이겸은 핀잔을 주면서도 수건으로 수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 손길이 예상외로 무척 다정해서 가슴 한편이 찌르르 울렸다.
수겸은 사실 차이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공식 커플로 밀어주었으니 어쩔 수 없이 데뷔 초반에는 그와 자주 붙어 있었지만, 그의 툭툭 던지는 까칠한 말투가 거북했다.
이후 팬들 사이에서 수겸을 수로 둔 다른 커플링이 흥하면서 수겸은 자연스럽게 다른 멤버들과 엮이느라 차이겸과는 이전처럼 붙어 있지 않게 되었다.
왜 몰랐을까, 생각해 보면 말투만 그랬을 뿐 차이겸은 늘 제게 다정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무작정 그를 불편하게 여기고 피하려고만 했던 과거의 행동이 후회되었다.
“어……?”
차이겸이 수건으로 제 얼굴을 닦아주는 걸 가만히 받고 있던 수겸은 수건에 적힌 글씨를 보고 흠칫했다.
<2021년 10월 6일 유피트(U-PITE) 데뷔 축하해>
연습생 때부터 응원해 주었던 소규모의 팬들이 데뷔 기념으로 만들어주었던 수건이었다.
이 순간이 내내 환상이라고만, 단순히 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 모든 게 진짜가 아닐까 하는 가슴 벅찬 기대감이 생겼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바라고 바라던 대로 정말 한 번 더 기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한솔아, 오늘이 며칠이지?”
“에……? 오늘은 12월 29일이잖아. 형, 정말 괜찮은 거야?”
“그러니까 2021년 12월 29일 말하는 거 맞지? 그치?”
당황한 한솔의 물음에도 수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솔뿐만 아니라 멤버들 모두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수겸을 보고 있었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한솔아, 대답해 줘, 얼른.”
“어어, 맞긴 한데…….”
마침내 한솔에게서 대답을 받아낸 수겸은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재빠르게 손등으로 훔쳤다.
정말로 제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생겼다. 5년 전, 데뷔 초로 되돌아왔다.
“어어, 수겸아, 왜 그래?”
수겸은 오른쪽 뺨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놀란 태원이 기겁했지만 수겸은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왼쪽 뺨까지 꼬집었다.
금세 하얀 뺨이 붉어지며 뺨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파왔다.
그래, 아팠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상황이 꿈은 아니었다.
왜 영화나 소설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으면 뺨을 꼬집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혹시나 모든 게 꿈일까 봐, 벅차는 행복감에 고양되었는데 모든 게 꿈이라 허무하게 흩어질까 봐, 제 뺨을 꼬집어서라도 현실인 걸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돌아왔다.
5년 전, 유피트의 데뷔 초 시절로.
현실을 받아들인 수겸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2021년 12월 29일에 연습실에서 뭘 했더라.
미니 1집 활동은 끝났을 무렵이었고, 아직 미니 2집이 나오기까지 약간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기는 연말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유찬아, 오늘이 12월 29일이니까 우리는 지금 가요대전 무대를 연습하고 있었던 거겠네? 내 말이 맞지?”
“어, 어…… 네, 맞아요.”
유찬은 당황한 듯했지만, 수겸이 원하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수겸의 예상이 맞았다. 지금은 코앞으로 다가온 연말 가요대전 무대를 연습하던 중이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수겸은 다짐했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예쁜 멤버든, 공식 수든 뭐든 다 잘할 수 있다고.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얻었다. 그러니 이제 그 다짐을 실행해야 할 차례였다.
대중들이 좋아하고, 팬들이 사랑하는 제 모습이 예쁘장한 공식 수라면 그 캐릭터, 얼마든지 받아주겠어.
“야, 차이겸.”
“어, 왜? 아프냐?”
굳게 마음을 다진 수겸이 차이겸을 불렀다. 틱틱거리는 말투였지만 걱정이 담긴 그의 답변에 수겸은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우리, 그거 하자.”
“뭐? 그거라니…… 아, 설마.”
“어, 그래. 그거 하자고.”
수겸의 말에 차이겸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럴 만도 했다. 본래의 5년 전 수겸은 죽어도 싫다고 피하고 피해서 기어코 하지 않았던 것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그걸 하고야 말겠다.
자신들의 팬은 물론, 가수 팬덤이라면 필수로 시청하는 연말 가요대전 무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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