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수라더니! 외전
룬명 지음
외전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 많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원래 시끄러웠던 집이 더욱 시끄러워진 것 같았다.
메이브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는지,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와 티 테이블 의자에 앉아 다비드와 같이 차를 마시고 있는 메이브를 보며 안도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많이 걱정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메이브는 그것이 너무 죄스러웠다. 원래의 부모님과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부모님이 되었는데, 그것을 고개 돌리고 몸을 돌려 그에 대한 걱정과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메이브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조용히 일어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것이 전부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로선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의 아들 몸에 들어와 죄송하다는, 이 말은 죽을 때까지 절대 하지 못할 터였다. 메이브는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멈추었다.
하지만 공작의 모습을 전부 벗어던진 것처럼,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의 아버지는 그저 자신의 앞에 있는 메이브를 품에 끌어안았다.
“건강하게 돌아왔으니 되었다.”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말투였지만,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메이브는 움찔, 떨리는 손을 들어 끌어안아 준 아버지의 등을 감싸 안았다.
말없이 등을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에게서 수많은 말과 감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고, 혼자서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메이브는 그 모든 감정이 자신이 아닌, 원래의 메이브에게 갔어야 하는 것을 알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꼭, 원래 메이브의 소중한 것을 자신이 훔쳐가 버린 것 같았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는지 죽었는지, 아니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메이브는 자신을 안아 주고 있는 아버지에게 죄스러우면서도, 원래의 메이브가 영영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조금 행복해졌는데, 앞으로도 행복해지고 싶기에 욕심을 내고 싶었다.
“이제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 아버지가 메이브의 귓가에 피곤한 듯 투박한 말을 꺼냈다.
“힘든 일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말하거라. 네가 성인이라 해도, 내가 죽기 전까지는 내 그늘이 너를 지켜 줄 테니.”
그 따듯함에 메이브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바보 같았던 것은 자신이었다. 모든 것을 혼자 생각하면서, 이상한 길로 향했으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아버지를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이제는 힘들고 지쳤을 때 자신을 지켜 주고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다.
***
어머니께는 비밀로 하자는 말을 끝으로 아버지가 나가자, 방 안은 고요했다. 아니, 눈가가 붉어진 메이브가 어색하게 볼을 긁으며 다비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일주일간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그의 감정을 끊임없이 느꼈던 메이브는 자신이 다비드에게 고백하고 나서의 상황이 이제야 확 와닿는 기분이 들었다.
다비드의 두 눈을 보는 것도 왜인지 너무 부끄러웠다. 메이브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다비드를 힐끔 보며 입을 열었다.
“그…….”
메이브가 다비드에게 입을 열려는 순간, 방문이 열리며 시종이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도련님!”
소리치면서 들어왔던 시종이 메이브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다비드를 보자, 놀란 표정으로 메이브와 다비드를 쳐다보고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죄…… 죄송합니다.”
당황해하며 나가는 시종의 모습에 메이브가 멍한 얼굴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으나, 반년 만에 돌아온 메이브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몸은 괜찮았는지 걱정이 들었던 시종이 급하게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도련님의 허락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걸려 한동안 벌로 마구간 청소를 했다는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겁니까?”
다비드는 한눈에도 기품 있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담겨 있는 향긋한 차를 머금고 천천히 마셨다. 그 모습이 마치 조각상이 차를 마시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메이브는 두 손을 무릎에 내리고 잠시 고민했다.
말없이 고민하다가 다비드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고 느꼈을 때, 메이브는 바보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출발해도 상관없어요.”
메이브는, 다비드가 혹시 자신이 가지 않겠다고 말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으나, 가는 것과 가지 않는 것은 다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메이브는 다비드와 함께 간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걱정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콘라드는 보고 가고 싶어요.”
메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비드를 오롯이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 비치는 다비드의 모습은 어쩐지 만족스러운 듯도 했다.
“예.”
또한, 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다비드의 모습이 나른해 보이기도 했다.
메이브는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마지막에 보았던 콘라드를 떠올렸다. 자신의 위치를 말하지 않아서 그렇게 다쳤을 것이 분명했던 그를 말이다.
지금은 치료를 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건강한 몸으로 다시 검을 들 그 모습을 떠올리니 메이브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지금 그자를 보러 가죠.”
“네?”
“그자를 보고 나면 출발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난 다비드가 메이브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빨리 자신과 여행을 떠나자고 말하는 것 같아, 메이브는 멍하니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고민을 하는 것보다 몸이 더 빨리 움직였다. 메이브는 다비드가 내밀어 주는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고 웃었다.
“좋아요.”
메이브는 한편으로 반년이 지나서 돌아온 자신이 다시 떠난다고 했을 때, 쉬이 허락을 해 줄까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다비드가 당황하는 것도, 그것을 걱정하는 것 같은 표정도 짓지 않았기에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메이브는 자리에서 일어나도 손을 놓아주지 않는 다비드의 손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가 잡고 있는 손을 살짝 고쳐 잡았다.
손 마디마디에 그의 단단한 마디가 들어오며 깍지가 끼어졌을 때, 메이브는 이제 다비드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앞으로 먼저 걷는 다비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메이브는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저택의 구석, 일하는 시종과 기사들이 묵는 숙소 앞까지 도착했다.
다비드는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메이브가 주춤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니 침대 누워 있는 콘라드의 모습이 보였다.
상처가 생각보다 심했는지, 온몸에 붕대를 두르지 않은 곳이 없는 그의 모습에 메이브는 떨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다비드의 손에 힘이 풀어지고 놓아주는 그를 한번 쳐다본 메이브는 몸을 돌려 콘라드가 누워 있는 침대 앞에서 멈추어 섰다.
“……몸, 괜찮은 거겠죠?”
치료를 받고 있으니 건강할 것이 분명한데도,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모습이 너무 크게 다쳐서 앞으로 움직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하지만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의 옆으로 다가와 넓은 듯, 작아 보이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예, 이곳의 의원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다시 건강해진다고 하더군요.”
다비드의 말에 메이브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콘라드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눈을 뜨고서 괜찮은지, 그동안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것이 더더욱 무서웠다. 그가 자신을 원망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으로 메이브는 콘라드가 눈을 뜬 것을 보지 말자고 혼자 생각했다.
“이제 됐어요.”
“예?”
“이제 가요.”
메이브가 콘라드를 보던 시선을 돌리며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그런 메이브를 다비드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분명 콘라드가 어떻게 되었는지, 몸은 괜찮은지, 다시 검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인지 묻던 모습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만 보고 일어난 메이브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가 뭡니까?”
분명 콘라드는 깨어나도 메이브를 원망하지 않을 거였다. 마지막에 그를 데리고 왔던 종의 말을 들었을 때는 그 안 좋은 몸으로 잠시 정신을 차린 콘라드는 분명, 메이브가 괜찮은지 물었다고 했다.
“……그가 저를 원망할 것 같아서요.”
머뭇거리던 메이브가 작게 웅얼거리자, 다비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메이브의 어깨를 붙잡아 그의 몸을 다시 콘라드를 향하게 돌렸다.
“저자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 때문에 저렇게 다쳤어요. 그런데 어떻게 원망을…….”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도 당신을 걱정한 자입니다. 당신의 몸이 괜찮은지, 다치지 않았는지. 자신의 몸보다 당신을 걱정한 자가 메이브 님을 원망할 것 같습니까?”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그 말에 메이브는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깊게 잠들어 있는 콘라드를 쳐다보았다.
자신 때문에 저렇게 크게 다치고서도 원망하지 않는 그에게 너무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메이브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콘라드의 두 손을 붙잡았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콘라드…….”
우물거리며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는 메이브를 지켜보던 다비드는 콘라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메이브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 때문에…… 이렇게 다치게 해서 미안해요.”
메이브는 한숨을 작게 내쉬면서 콘라드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천천히 돌려 다비드를 보았다.
“이제 가요.”
“……그가 일어나는 건 안 보고 가시는 겁니까?”
곧 있으면 콘라드가 깨어날 것을 알고 있던 다비드가 메이브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면서도 다비드는 콘라드의 눈이 떠지고 있는 것을 메이브에게 말하지 않았다.
“저를 원망하지 않는다 해도, 제가 너무 미안한 걸요.”
메이브는 그런 다비드에게 고개를 작게 흔들면서 그의 몸을 지나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비드는 잠시 콘라드가 두 눈을 뜨고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쳐다보았다.
결국, 메이브를 부르지 못한 콘라드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는 걸 마지막으로 다비드 역시 몸을 돌려 방에서 빠져나왔다.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메이브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다비드는 걸음을 재촉해 그의 옆에 마주 섰다.
솔직히 다비드에게는 메이브가 콘라드를 보지 않는 것도 괜찮았다. 그와 이야기하고 나서 떠나기 싫다고 하는 것보다는, 그에게 죄스러운 기분이 남아서 이곳에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이 좋으니까 말이다.
“아…… 그런데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네?”
“당신이 저와 같이 간다고 하면 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다비드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메이브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메이브가 다비드를 쳐다보았으나, 다비드는 끝끝내 그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비드는 메이브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저희 영지에 갔다가, 함께 살 오두막을 찾으러 가는 것 괜찮습니까?”
메이브는 다비드의 말이 마치 신혼집을 찾자고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열이 올라가는 기분에 푹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대답했다.
“네…….”
그런 메이브의 모습에 다비드는 낮게 소리를 내고 웃으며 귀엽다는 듯, 어깨를 감쌌던 손을 들어 메이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따듯한 손길과 다정함에 메이브는 안정감이 들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솔직히 메이브는 다비드가 허락을 받았다고 했으나, 부모님이 허락해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메이브를 바라보았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메이브는 얼떨떨한 심정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번 품에 안았다. 마지막에 어머니를 안았을 때, 어머니는 그저 메이브에게 ‘행복해야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메이브는 그 말에 자신이 빠진 상태로 부모님과 다비드가 서로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메이브는 그에 대해 묻기보다는 입구에 서 있는 마차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다비드가 그런 메이브의 맞은편에 착석과 함께 멈추어 있던 마차가 빠르게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행하는 건…… 정말 처음인 것 같아요.”
메이브가 우물쭈물하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말했다. 전에는 도망을 가느라 이런 풍경조차 볼 시간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었기에 메이브는 자신의 뜨듯한 뒷덜미를 손으로 문질렀다.
“원래는.”
그런 메이브를 가만히 바라보던 다비드는 눈빛을 반짝이며 그에게 말했다.
“신전에서 벗어난 후 메이브, 당신을 만나면 함께 여행을 가려고 했습니다.”
다비드의 말에 메이브가 눈을 크게 뜨며 창밖의 풍경을 보던 시선을 다비드에게 돌렸다. 그리고 입을 벌렸다가 천천히 다물었다.
“제가 보는 것을, 당신과 보며 당신과 함께 즐기고 싶었습니다.”
무심한 듯 내뱉는 그 말에 진득하게 배어 있는 감정이 느껴졌다. 메이브는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로 열이 들뜨는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저희에게 시간은 많으니, 앞으로 더 좋은 거, 즐거운 것을 같이 보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네.”
“만약 힘들거나 지치면, 망설이지 말고 제게 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좋은 거지, 제가 메이브 님을 힘들게 하는 것은 싫으니까요.”
다비드의 말은 모든 것을 메이브에게 맞춘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메이브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을 살짝 벌렸다. 손가락 틈 사이로 보이는 다비드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 메이브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열이 오르는 얼굴이 붉어졌을 게 분명했다. 메이브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두 손을 서서히 내려놓았다.
“말씀해 주실 거죠?”
“네…….”
“싫은 게 있다면, 고민하지 말고 꼭 제게 말씀해 주세요.”
다비드는 몇 번이고 메이브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메이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그의 덤덤한 듯 말하는 목소리에서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메이브는 알 수 있었다. 메이브는 다리를 살짝 꼬고 앉아 무릎에 손을 올리고 있는 다비드를 쳐다보며 조금씩 등받이에 기대어 고개를 돌렸다.
마차 창문이 열려 있기에, 빠르게 달리는 만큼 선선한 바람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메이브는 그 바람에 자신의 뜨듯한 얼굴이 식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꼭…… 말할게요.”
이제는 다비드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메이브가 했던 거짓말은 그저 작은 거짓말이었으나, 그렇다 해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더 이상 다비드와 불안한 일은 겪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이 도망갈 일도 없을 것이고, 그의 말대로 이곳에서 가 보지 못한 곳을 여행하면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보는 것을 함께 보고, 그가 먹는 것을 함께 먹으며, 같이 걸어가고 즐기며 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메이브는 어쩌면 그게 자신이 바라고 바라던 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에녹 영지에서 실베스타 영지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비드가 메이브를 만나기 위해 미친 듯이 에녹 영지로 오는 것은 4일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다비드는 메이브가 힘든 것을 원치 않았기에 마차가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쉴 때는 쉬고, 마을마다 멈춰서 그날 묵으며 몸의 피로를 풀고 출발했다.
그러다 보니 에녹 영지에서 실베스타 영지까지 도착하는 데는 무려 9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메이브 님, 그러다가 다치겠습니다.”
다비드는 창문턱에 두 손을 올리고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는 메이브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메이브는 그의 말에도 고개를 작게 흔들며 창밖을 보고 있는 시선을 떨어트리지 못했다.
실베스타 영지가 산림이 우거진 곳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건 소설에서도 나왔었고, 다비드의 성 자체도 산림 속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마차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메이브는 창밖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도 하늘을 가릴 정도로 크게 자란 나무 때문인지, 아니면 코끝을 스치는 시원한 숲의 향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난 곳을 스치며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곳에 들어와 다시는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메이브.”
결국, 메이브가 저렇게 서 있다가 다칠 거라 염려한 다비드가 조금 굳어진 목소리로 메이브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메이브가 몸을 살짝 굳혔다. 그리고 천천히 창밖으로 나갈 것 같은 몸을 뒤로 물리며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다비드 님이 살았던 곳이 어떤지 궁금해서…….”
변명도 이렇게 하는 게 무안해서, 메이브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조금 기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메이브의 모습에 있지도 않은 귀가 보이는 것 같았다.
다비드는 그에 작게 웃었다. 살짝 굳어져 있던 목소리도, 걱정에 딱딱해진 표정도 금세 풀어졌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가야 돼요.”
크게 덜컹거리는 마차에 메이브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이 기울어졌다. 다비드가 손을 뻗어 그런 메이브의 몸을 손으로 잡았다.
“이런.”
낮게 혀를 차는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다비드는 덜컹거리는 마차가 흔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이브의 시선이 다비드를 따라가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메이브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메이브가 갑자기 자신의 옆에 앉는 다비드를 멍하니 쳐다보자, 다비드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혹시, 넘어지면 다치니까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안에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져 다칠 수 있는 메이브에 대한 걱정이 다분하게 배어 있었다. 메이브는 그런 다비드의 감정을 느끼며 말없이 한참 동안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다비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아, 고요한 마차에는 서로의 숨소리와 이따금씩 들리는 덜컹거리는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메이브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이렇게 마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 것도, 그리고 지금 그의 어깨에 기대어 가는 것도 말이다.
“다비드 님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메이브는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다비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비드의 시선이 메이브의 얼굴에 닿았을 때, 메이브는 눈을 사르륵 접으며 그에게 웃어 주었다.
솔직히 메이브는 궁금했다. 그가 지금까지 보았던 ‘마이 홀’ 속에서의 다비드의 모습과 지금 메이브가 보고 있는 다비드의 모습이 너무도 달랐으니까.
메이브는 그것을 생각하며 서서히 손을 뻗어 다비드의 볼을 툭, 건드려 보았다. 하지만 금세 다비드의 손에 붙잡혀 그의 입술에 문질러지는 자신의 손등을 보고 작게 웃었다.
“제가 궁금합니까?”
메이브는 어쩐지, 그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느꼈다. 그러고 보니 메이브는 지금까지 다비드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메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메이브,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사람일 겁니다.”
다비드의 말에 메이브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다비드는 그 말이 자신을 가리키는 완벽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점차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며 다비드는 가라앉은 눈으로 순한 메이브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메이브는 아마 평생토록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자가 얼마나 저 안에 어둡고 무거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이다.
다비드는 처음에 자신의 악몽에 찾아온 메이브를 찾고 싶었다. 복수? 그런 것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복수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비드는 그 한편의 꿈에서 자신을 깔고 뭉갰던 자를 오히려 자신이 깔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피곤해 보였던 두 눈에 담겼던 열기를, 그 안에 오롯이 자신을 쳐다보던 그 음탕한 시선 속에 느껴지는 열기가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다비드는 그렇기에 메이브의 시선에 오롯이 자신을 보고, 그의 손과 몸, 목소리까지도 모두 다 갖고 싶었다.
그의 두 눈을 가리고 그의 귀를 틀어막아, 다비드는 자신이 보여 주고 싶은 것, 그가 듣고 싶은 것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다 눈이 멀고, 귀가 멀어 길을 잃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 잃어버린 길에 서 있는 건 오롯이 자신일 뿐이라고, 그 무거운 감정은 언제나 다비드의 몸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도, 다비드는 눈앞에 있는 메이브를 어디론가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어딘가로 떠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다비드는 자신의 무거운 감정을 눌러 담고 그것을 숨기며 메이브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비드 님이 무서운 사람이라고요?”
메이브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어깨를 살짝 떨고 위로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가 다비드의 시선에 가득 채워졌다.
메이브는 한참을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러면 저는, 생각보다 악랄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유약한 사람일 겁니다.”
다비드는 메이브의 말을 들으며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뒤로 넘겼다. 메이브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다비드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그렇게 보이나요?”
메이브는 다비드의 눈에 자신의 심성이 약하고 여린 성격으로 보이는지에 대해 잠시 떠올렸지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메이브를 지켜보는 다비드는 그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다비드 님이 그렇게 보인다면…… 그런 거겠죠.”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메이브는 두 눈을 살짝 감았다. 다비드는 한참 동안, 메이브가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메이브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마 메이브는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유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람을 원망조차 하지 못해서, 외려 자신을 원망하는 약한 사람이었다.
자신조차 힘들면서,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며 자신의 몸을 챙기라 말할 때면, 그는 자신이 멍청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 안에서 다른 누군가를 챙기려 하는 것이 뻔히 보였기에, 다비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메이브 님.”
잠이 들어 듣지 못할 메이브의 이름을 부르며 다비드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환한 대낮이었으나,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에 주변이 어둡게 보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환한 빛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을 때, 다비드는 그제야 실베스타 영지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다비드는 고개를 숙여 메이브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어깨에서 떨어트리며 보다가 그가 편히 잘 수 있게 무릎을 내주었다.
“앞으로는 제 곁에서 떠나지 마세요.”
다비드는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메이브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눈을 감아 더 이상은 내뱉지 않을 말을 했다.
‘당신이 떠난다면, 정말 저는 미쳐 버릴 테니까.’
그때가 되면, 아마 그 미쳐 버린 아더와 비슷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손끝에 닿는 따듯한 체온을 느끼며 다비드는 메이브의 어깨를 부드럽게 툭, 툭 두드렸다. 조금 더 편하게, 깊게 잠잘 수 있도록.
***
메이브가 깨어난 것은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저물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눈을 뜬 메이브는 흐릿한 시선에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야 부드러운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메이브의 눈이 커지며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잘 주무셨습니까?”
메이브는 자신의 방에서 깨어난 모습처럼, 근처에 있는 다비드를 볼 수 있었다. 무언가 바쁜 것인지, 한 손에 서류를 들고 있던 그가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메이브의 곁으로 다가온 다비드는 그의 옆자리에 차분히 앉아 메이브를 바라보았다.
“메이브 님?”
“여기는…….”
잠이 덜 깬 메이브가 비몽사몽 상태로 다비드의 흐릿한 얼굴을 보며 물었다.
“마차에서 깊게 잠들어, 먼저 제 방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다비드의 방이라는 말에 메이브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다비드와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의 취향인 것인지, 방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아니,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고 가구만 채워진 것 같았다. 화려함은 보이지 않았고, 그저 편안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방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비드의 품에 기댔다.
익숙한 듯이 손을 벌린 다비드가 메이브의 몸을 끌어안자, 메이브는 긴장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인사드려야 하는데…….”
머뭇거리며 말한 그 말에 결국 다비드는 웃음을 띠었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말이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걱정이니 말이다.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의 등을 두드렸다.
“좋아하실 겁니다.”
“…….”
“들어올 때, 당신이 자고 있어서 아쉬워하셨으니까요.”
“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저보다 더 많이 좋아하실 테니 말입니다.”
얼떨떨한 기분에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 것이 분명했다. 메이브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웃는 다비드를 보며 그게 확실하다고 장담했다.
곧 다비드가 반쯤 안았던 자신의 몸을 끌어안더니 한 번에 일으켜 안는 것에 놀란 메이브가 두 손으로 다비드의 목과 어깨를 힘주어 붙잡았다.
다비드는 무겁지도 않은지, 메이브의 몸을 달랑 들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메이브는 당황했다.
떨어질까 무서워 다비드의 어깨를 한 손으로 꼬옥 붙잡으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헝클려졌을 것이 분명한 머리를 넘기며 손 빗질을 했다.
“저, 전 아직…… 준비가……!”
메이브가 당황한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다비드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다비드는 그런 그에게 부드럽게 웃어 줄 뿐,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메이브의 애달픈 목소리만 복도에 퍼졌지만, 다비드는 멈추지 않고 걸어 한 방문 앞에서 멈추었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메이브가 다비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부모님을 만나기 전에 품에서 내려 주겠지 싶었다. 하지만 달깍,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을 때 메이브는 헛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들어 올리려 하자, 다비드는 메이브의 머리를 부드럽게 잡고 눌러 그가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일어나서,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덤덤한 다비드의 목소리와 함께, 어이없다는 듯한 낮은 탄식이 같이 들려왔다.
“얼굴을 그렇게 가리고서 말이냐.”
헛웃음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비드의 목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조금 더 잘 익은 것 같다고 메이브는 생각했다. 아니, 사람인데 잘 익었다는 표현이 맞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다비드는 메이브를 조심스럽게 고쳐 안았다.
“제 것입니다.”
낮은 감정이 진득하게 묻어난 목소리에 실베스타 백작은 어이없는 듯 자신의 아들을 쳐다보았다.
“본다고 해서 닳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닳습니다.”
메이브는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지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백작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우직하고 자신의 감정을 그다지 드러내지 않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품에 안고 있는 자가 그런 아들을 다르게 만든 것 같았다.
어쩌면 목석같고, 어쩌면 사람이 아닌 조각과도 같다 생각했던 아들이기에, 백작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을 저렇게 바꾼 자가 누구인지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차에서 내리고 품에 안은 누군가를 데리고 왔을 때부터 백작은 눈앞에 있는 이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얼굴까지 옷으로 꽁꽁 감추고 들어온 다비드의 행동에 지금 저 머리카락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허어.”
결국 백작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메이브는 그에 고개를 들고 백작에게 인사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고개를 다시 힘주어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다비드의 힘에 메이브는 움찔움찔, 몸만 작게 움직일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인사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비드가 덤덤하게 하는 말에 메이브는 할 말이 많은데 한순간에 사라진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 말을 앞에서 들은 백작은 너무 웃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크게 웃었다.
“하하…… 그래, 네가 무언가를 원하니 내게 왔을 테지.”
백작은 다비드의 품에 안겨 있는 메이브의 얼굴을 보는 걸 포기하고 무뚝뚝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에 다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 안에 숨겨진 많은 감정들에, 백작은 다비드가 말을 꺼낼 때까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출가하려고 합니다.”
무심하게 뱉은 그 말에 백작은 다비드의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곤 마음이 변치 않을 것 같은 진지한 표정에 그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러면서 품에 단단히 안아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메이브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다비드에게 입을 열었다.
“돌아온다고 하면 받아 주지 않을 게다.”
다비드도, 백작도 다시 돌아온다 하면 받아 줄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비드는 그 말에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몸을 살짝 숙였다.
“한 번씩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때는 네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게냐?”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작은 그렇게 말하는 다비드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강인하게 키우겠다고 생각한 아들이었다.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도록 키우려 했고, 그렇게 자란 아이었다.
그런 아들이 성인이 되자 무섭게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도 알았고, 결국 그 집념의 끝에서 찾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품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에 백작은 그저 다비드의 모습과 그 품에 안겨 있는 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찾아와라. 그렇게 매정하지는 않으니.”
덤덤하게 내뱉는 그 말과 함께 다비드가 말없이 몸을 숙여 인사하고 방 밖으로 나갔을 때, 백작은 홀로 남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사진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그렇지 않소.”
슬픈 목소리로 내뱉은 그 말은 방 안의 적막감 속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
“다…… 다비드 님.”
“예?”
“인사도 못 했는데.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품에 안겨 있던 메이브가 고개를 들고 다비드에게 따지듯이 말했지만, 다비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에 답답한 것은 메이브였다. 멀끔하게 실베스타 백작을 만나 첫인상을 좋게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인사조차 하지 못했고, 그보다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이제 내려 주세요.”
메이브가 입을 삐쭉 내밀며 툴툴거리듯 말했으나, 다비드는 그를 내려 주지 않았다.
“다비드 님!”
메이브가 작게 소리치자 다비드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어머니께도 인사드려야죠.”
“…….”
메이브는 아까 그게 인사드린 것이 맞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할 말이 사라지는 기분에 그저 한숨만 내쉬고 다비드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저 내려 주세요.”
“예.”
“……정말이죠?”
“내려 드릴 겁니다.”
웃음기가 짙게 묻어 있는 목소리에 메이브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에 힘을 풀어 축 늘어진 채로 다비드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뵈러 간다는 말과는 다르게, 야심한 밤에 저택에서 빠져나오는 다비드의 행동에 메이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기에,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한참을 걸었을까, 저택을 벗어나 숲속으로 걸음을 옮기는 다비드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던 메이브는 그저 참아야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비드가 그를 품에서 내려 주었다.
“다비드 님?”
메이브가 의아하게 다비드를 불렀을 때, 그는 천천히 자신을 보고 있는 메이브의 몸을 돌렸다.
메이브는 어두운 시야에 눈살을 찌푸리며 눈앞에 있는 것을 보려고 했다.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아 따로 사는 것인지 묻고 싶었으나, 점차 어둠이 익숙해지고 눈앞이 보였을 때 메이브는 말하고자 했던 것을 눌러 담고 입을 다물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덤덤하게 내뱉는 다비드의 목소리가 고요한 숲을 울리며 퍼져 나갔다. 메이브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작은 무덤을 내려다보았다. 관리가 잘된 무덤은, 오늘도 누군가가 다녀간 것처럼 꽃이 하나 놓여 있었다.
메이브는 그제야 저택에서 나와 이곳으로 다비드가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너무 오랜만에 이곳으로 찾아왔습니다.”
그 무뚝뚝하고 덤덤한 목소리가 외려 더 슬퍼 보이는 것을 그가 알고 있을까.
메이브는 무덤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소설을 읽었을 때, 다비드의 과거가 나오지 않아서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집이 조금은 삭막하게 느껴졌던 것도, 무뚝뚝한 다비드의 성격도, 무심한 듯 아들의 걱정이 묻어났던 백작의 말과 목소리도 메이브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에녹…… 메이브라고 해요.”
메이브는 손을 뻗어 깨끗한 비석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깨끗하게 관리가 되었다고 해도, 시간이 흘러 깨진 흔적이 남아 있는 비석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 다비드 님이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메이브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고 있었다. 이제는 보지 못하는 자신의 부모님의 얼굴을 메이브는 떠올렸다. 하지만 누군가가 지우개로 지워 버린 것처럼 얼굴조차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그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며 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정말…… 친절하고 다정하게 자랐어요.”
입을 달싹이며 말하는 메이브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사람에게서 떠나서, 잠시 그를 상처 입히게 만든 것 같아요.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하며 메이브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천천히 들어 올리곤 웃었다.
그리고 울듯이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면서 차가운 비석을 쓰다듬었다.
“앞으로…… 다비드 님과 함께 걸어가려고 해요. 같이 보고…… 같이 먹고…… 평범한 일상을 지내려고요.”
메이브는 이제 앞으로 펼쳐질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살짝 웃고 있는지, 아니면 울고 있는지, 흐릿한 눈앞에 다비드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메이브는 손을 뻗어 다비드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의 손끝에 걸리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 부드러우면서도 투박함이 배어 있어 메이브는 살포시 웃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저희를 지켜봐 주세요.”
이미 떠나간 사람이 남아 있는지, 아니면 저 멀리 여행을 하며 여전히 지켜보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메이브는 꼭 지켜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풀잎이 짓눌려 생긴 얼룩을 손바닥으로 툭툭 털어 내며 몸을 돌려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그는, 너무도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메이브의 말에 감동한 것 같기도 했고, 너무 기뻐 보이기도 했다.
메이브는 이야기를 끝내는 다비드의 품에 다시 안겨 숲속에서 벗어나는 길에, 어쩐지 너무도 따듯한 바람이 자신의 얼굴을 쓸고 지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아니,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껴질 정도로 바쁜 하루하루였다. 저택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다비드는 백작님께 말했던 것처럼 곧장 출가를 했다. 짐은 언제 챙겼는지 물을 새도 없이 마차를 타고 가는 길에, 그렇게 힘들게 와서 별로 있지도 않고 가도 되는지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너무나 행복하게 웃는 그 얼굴에 메이브는 하려던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다비드의 품에 기대어 안겼다.
그러면 어떻고, 이러면 어떨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떠나는 길이 유난히 길다고도 느끼면서 가볍다고도 느껴졌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도착한 곳은 한적한 숲속이었다.
이미 다비드가 자리를 보았던 건지, 아니면 신전에서 말했던 그 말을 떠올리며 그날 그곳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이미 만들어 놓은 곳일지도 몰랐다.
“여기예요?”
메이브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살기에는 적당해 보이는 통나무로 만든 오두막과 그 앞은 이미 땅을 갈았는지 작은 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에 하얀색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그 뒤로는 나무가 빼곡하게 자리 잡았다.
밤이 되면 무서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다비드와 함께 내렸던 마차가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까?”
다정한 그 목소리에 메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정원을 지나 오두막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나무로 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이대로 살 수 있다 할 정도로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오두막이라고, 나무로 된 가구들로 채워져 있는 집 안을 보며 메이브는 작게 웃었다.
곳곳에 있는 문을 열고 살펴보니, 오두막은 방 하나과 욕실 하나, 그리고 커다란 거실이 끝이었다.
메이브는 방이 한 개라는 사실에 다비드가 어떤 마음으로 이 집을 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고자 했으리라.
“마음에 듭니까?”
느릿하게 묻는 말에 메이브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 안으로 들어오고, 한눈에도 따듯해 보이는 집 안 풍경은 확실히 마음에 들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혹시 다비드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왔다가 나간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너무요!”
메이브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양 볼을 불그스름하게 붉히며 말했다.
“그때 말했던 것처럼, 근처에 호수도 있습니다.”
“호수요?”
“낚시도 하고 싶고, 그곳에서 수영도 하고 싶다 하지 않았습니까?”
“네, 정말…….”
메이브가 환한 얼굴로 웃으며 말하자 다비드는 그런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근처에 있는 땅을 전부 사들였습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다른 사람은 없으니, 호수까지 아무것도 입지 않고 간다 해도 만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네?”
메이브는 무언가 잘못 들은 사람처럼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다비드가 한 말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하다가 놀라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근처에 있는 땅을 다 샀다고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는 숨겨지지 않았다. 메이브는 무슨 그런 돈지랄을 할 수 있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금세 속으로 삼켰다.
그러곤 그만큼 다비드가 돈이 많은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어쩌면, 다비드보다 가문이 더 좋은 자신이 돈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아직 그런 큰돈을 써 본 적이 없는 메이브는 호수에서 수영하고 싶고, 오두막에 살고 싶다는 자신의 말에 이 근처에 있는 모든 땅을 샀다는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정말 그 부지만 샀을 수도 있지만, 벌거벗고 다녀도 상관없다는 그 말 때문에 메이브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은 땅을 다비드가 샀을 듯싶었다.
“메이브 님이 벗은 모습을 다른 자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까요.”
무심하게 내뱉는 그 말에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그 상황을 질투하는 것처럼 보였다. 메이브는 바보처럼 다비드를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에요. 다정하게 속삭이듯 말하는 그 말에도 다비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라는 게 있으니까요.”
메이브는 어쩐지, 시간이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비드의 질투가 익숙해지는 것을 느꼈다. 메이브는 작게 소리를 내며 다시 한번 웃고는 손을 뻗어 다비드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럼, 저희 수영하러 가요.”
메이브가 먼저 밖으로 걸어가며 다비드의 손을 이끌었다. 그에 다비드가 걸음을 옮겨 따라왔다.
길을 모르는 메이브가 앞장서서 걷는 것을 보면서,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할 때면 다비드가 이따금 옳은 길을 말해 주었다.
그렇게 걷고 걸어 호수에 도착했을 때, 메이브는 두 눈을 빛내며 투명한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신전에서 보았던 커다란 호수보다 더 깨끗했고, 주변의 나무가 호수 물에 비쳐서 더욱 신비로워 보였다.
밤에 별과 달이 비추는 것을 보는 것도 몽환적일 것 같다고 생각하며 메이브는 호수 앞에 멈추어 섰다. 다비드가 한참을 앞에 서 있는 메이브를 의아하게 보며 그를 쳐다보려 했다.
그러자 메이브는 두 팔을 뻗어 다비드의 가슴을 밀어 그를 호수에 빠트리려고 했다.
“어……!”
하지만 메이브의 생각보다 먼저 다비드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미는 메이브의 양손을 붙잡았다.
분명, 중심을 잡고 버텼다면 호수로 넘어지지 않았을 다비드는 당황해하며 비틀거리는 메이브의 몸을 끌어안고 호수에 함께 빠졌다.
투명하다고 낮은 줄 알았던 호수는 생각보다 깊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두 눈을 크게 뜨고 메이브는 눈앞에 자신을 안고 있는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연분홍색 머리카락이 물길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고, 그의 두 눈에 자신의 모습이 채워진 것이 보였다.
깨끗하다 보니, 안의 돌과 물고기까지 보였다. 메이브는 작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러다 입에서 공기 방울이 물 위로 올라가는 것에 놀라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하지만 다비드의 손에 붙잡혀 움직이지 못했다.
메이브가 숨이 모자라다고 생각했을 때, 다비드의 얼굴이 슬며시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맞닿고 그의 숨이 나누어졌을 때, 메이브는 바보처럼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푸하……!”
물에 빠져 있었던 얼굴을 밖으로 빼낸 메이브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같이 나온 다비드의 얼굴을 보며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에 달라붙은 연한 머리카락이 진하게 보였다. 메이브는 혹시 다비드가 찝찝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손을 뻗어 다비드의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메이브 님.”
“네?”
“메이브.”
메이브는 자신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는 다비드의 손에 얼굴을 기대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행복합니까?”
무심하게 묻는 그 말은 이 순간이 행복한지, 아니면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한지 두 가지를 묻는 것 같았다.
메이브는 얼굴을 감싼 다비드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덧대어 잡으며 웃었다.
“다비드 님과 함께여서요.”
메이브는 어쩌면 이 순간이 빨리 찾아올 수도 있었는데, 자신의 잘못으로 너무 늦게 되돌아왔다고 생각했다.
“…….”
다비드는 메이브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메이브의 몸을 끌어안아 줄 뿐이었다. 말이 없는 행동뿐이었지만, 그 안에서 메이브는 다비드의 감정과 행복이 전부 느껴졌다.
메이브는 물기가 묻어 있는 다비드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그의 어깨에 기대어 안겨 있으니, 다비드가 천천히 호수에서 빠져나왔다.
“아…… 저희 수영 안 해요?”
메이브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메이브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저희에게 시간은 많으니까, 지금은 밥을 먹도록 하죠.”
다비드의 말이 맞았다. 급하게 이곳에 오면서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다비드의 말에 메이브는 자신의 배가 고프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아이처럼 다비드의 품에 안긴 채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면서 점점 멀어지는 호수를 쳐다보던 메이브는 조금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비드의 말대로 앞으로 남은 게 시간이었다. 오늘 밤에 가도 되는 것이고, 다음 날 일어나서 가도 되는 것이니 말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 오두막에 금세 도착했다. 어쩌면, 메이브는 자신이 돌고 돌아 호수에 갔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다비드 님.”
“예?”
“요리할 수 있어요?”
오두막 앞에 메이브를 내려 주고, 문 앞에 놓여 있던 식재료를 들어 올리는 그를 쳐다보던 메이브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다비드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품에 들고 있는 재료를 내려다보았을 때, 메이브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완벽한 사람이라고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얼굴 좋고, 몸 좋고, 성격까지 좋은데, 요리까지 잘했다면 그건 신이 그를 만들 때 사심을 넣은 걸 터였다.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어요.”
메이브가 작게 웃으며 오두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호수에 빠졌다가 물도 제대로 짜지 않았던 옷 때문에 바닥에 물이 툭툭 떨어졌다. 메이브는 그대로 화장실로 걸어가 물에 젖은 옷을 전부 벗었다. 그리고 옷을 챙기지 않은 것을 떠올리며 반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다비드 님, 저 옷 좀 가져다주세요.”
메이브의 말에 다비드는 그에게 옷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옷은 들지 않고,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다가오는 다비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다비드는 반쯤 열려 있는 문을 열고 메이브의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어차피 저희만 있는데, 옷을 입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무심하게 하는 그 말에 메이브는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차린 메이브가 다비드에게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여기는 자신과 다비드밖에 없었다. 벌거벗든 지랄을 하든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벗고 있는데, 다비드는 멀끔한 차림에 더더욱 부끄러웠다.
“그러면 다비드 님도 벗어요.”
벗기 싫다고 하면 저만 벗고 있으라고요? 하면서 옷을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메이브가 생각한 것과 달리 다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물기 어린 머리를 전부 털어 준 뒤에, 자신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그러자 물기가 묻어 흐르고 있는 다비드의 몸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저 몸에 매달려 울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메이브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메이브 님.”
메이브는 자신이 부끄러워하는 것을 알고 꿀 떨어지게 이름을 부르는 다비드를 보자,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하든, 그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메이브는 다비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그래도 몸이 좋다는 생각이 더 컸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 얼굴과 그 몸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쿵 크게 뛰었다.
“열이 나는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아는 듯, 작은 웃음소리가 뒤섞여 묻는 다비드에게 메이브는 입을 살짝 내밀어 자신의 이마를 짚고 있는 그의 손을 떨어트렸다.
“요리할 거예요. 건드리지 마세요.”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다비드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메이브는 그의 몸을 벗어나 부엌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메이브를 껴안는 다비드의 행동에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가지 못했다.
“식사는 조금 있다가 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무심하게 묻는 목소리 뒤로, 메이브는 자신의 허벅지에 닿는 단단한 감촉을 느꼈다. 몸을 반쯤 돌려 바라본 다비드의 성기는 이미 발기할 대로 커져 있었다.
“…….”
메이브는 잠시 고민했다. 다비드의 품에 안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나, 그가 정말 빨리 자신을 놓아줄지에 대해서 말이다. 메이브는 배에서 일주일이 넘게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기에, 다비드의 마음이 더 조급할지도 모른다. 메이브는 하얗게 변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할 거면 밥부터 먹고!”
급하게 메이브가 소리쳤으나,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의 엉덩이와 다리를 붙잡고 안아 들었다. 메이브가 다급하게 다비드의 어깨와 등을 때렸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아니 외려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고 방 안으로 메이브를 안아 든 채 걸어갔다.
“자, 잠깐만요! 다비드 님……! 다비드!”
“이번에는 금방 끝날 겁니다.”
그 말을 무심하게 하며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 다비드의 행동에 방이 어둠으로 가득 채워졌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메이브가 다비드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을 때, 그는 눈앞에 보이는 듯 메이브의 몸을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았다.
“배…… 배고프다니까요!”
“하고서, 제가 든든한 걸 먹여 드리겠습니다.”
“으, 음식 못 하시잖아요!”
“제 종에게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준비하라고 말하겠습니다.”
“자, 잠깐……!”
급하게 메이브가 외치는 말은 결국 다비드의 입에 막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의 숨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물속에서 키스하면서 그의 숨이 넘어왔던 것처럼, 메이브의 입 안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메이브가 크게 뜬눈으로 다비드를 쳐다보았으나, 그보다 먼저 다비드의 단단한 손이 그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움찔, 몸을 떤 메이브가 손을 뻗어 자신의 허리를 매만지고 있는 다비드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다비드는 그것이 아무렇지 않은 듯, 봉긋하게 살짝 솟아 있는 메이브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비볐다.
메이브가 또다시 자신의 가슴을 만지는 다비드의 손을 밀어트리며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하지만 다비드는 메이브의 입술에 닿아 있던 자신의 입술을 떨어트리고는 그대로 메이브의 목선을 혀로 핥았다.
“아……!”
두 손을 막아도, 그의 얼굴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메이브가 가슴을 가렸던 손으로 다비드의 얼굴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자 자유로워진 다비드의 손이 다시 한번 가슴을 매만졌다. 메이브는 다비드의 손과 얼굴을 밀치며 손을 움직였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온몸이 매만져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메이브의 다리 사이로 들어온 다비드는 얼굴이 붉어진 채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메이브를 귀엽다는 듯이 보며 고개를 조금씩 숙였다.
“아……! 아흑!”
다비드의 입에 메이브의 말캉거리는 성기가 빨려 들어갔다. 놀라 메이브의 허벅지가 튕겨 올랐다. 메이브는 두 손으로 다비드의 머리를 붙잡아 밀어내려 했다. 그러자 다비드는 힘으로 버티며 그의 유두를 손톱으로 긁어내고, 다른 손으로는 물기가 묻어 있는 구멍을 살살 문질렀다.
자신이 아닌 알란의 것이 들어갔던 구멍은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다고, 처음인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다비드는 손가락으로 메이브의 구멍 주름 하나하나를 문지르며 꾹꾹 눌렀다. 메이브가 허리를 비틀며 가슴과 구멍에 있는 손을 치우려 할 때면 다비드가 성기를 다시 한번 힘 있게 빨아들였다.
결국 어느 하나도 제대로 막지 못한 메이브는 더운 숨을 헐떡이며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메이브가 버티다가 포기한 것을 눈치챈 다비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점점 단단해지는 메이브의 성기 뿌리부터 선단까지 혀로 감싸며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오므려진 다비드의 입술에서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 시작하는 성기에 메이브는 고개를 비틀고 허리를 튕겼다.
“흐…… 아…….”
예민한 곳곳을 혀로 핥고 안으로 빨아들이는 다비드의 행동에, 메이브는 꼭 자신의 몸이 자신의 몸 같지 않다고 느꼈다. 이러다가 성기가 똑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비드의 입 안으로 달려 들어가니까 말이다.
메이브의 손등에 핏줄이 도르라질 정도로 힘이 들어가 시트를 구기기 시작했다. 금세 쌀 것 같은 기분에 발가락 끝부터 오므려지기 시작했다. 메이브는 신음을 조금 삼키려 했으나, 다비드가 지분거렸던 구멍 안으로 그의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차라리 아프면 아프다고 그만하자고 말할 텐데, 이미 열기에 들뜬 몸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부드럽게 풀어 주고 있어서인지 아프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아프지는…….”
살짝 입을 벌린 다비드가 혀를 움직여 말할 때마다 그의 입 안에 들어가 있는 성기가 이리저리 부딪혀 흔들렸다.
“흐……아! 제…… 제 거…… 너…… 넣고 말하지! 아!”
입에 넣고 말하지 말라고 하려는 데도, 그 말조차 신음에 먹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메이브는 허벅지를 오므려 다비드의 얼굴을 압박했지만, 그의 손에 다리가 벌려지는 것에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싫습니까?”
그의 입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던 성기가 빠져나왔을 때, 거친 숨을 몰아쉬던 메이브는 다비드의 말에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으…….”
싫다고? 싫지 않았다. 다만, 싫은 것보다 이대로 휘둘리다 정말 언제 어디서 저렇게 다비드가 발정하면 도망가지 못하고 몸을 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멈추겠습니다.”
메이브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멈추자고 말하면 분명 다비드는 멈출 터였다. 그러면 나중에도 분명 그가 들어 줄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넘어가면 나중도 없을 것이기에 메이브는 멈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 메이브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워서? 아니, 그 정도로 이 몸도, 마음도 다비드를 원하고 있어서일지 몰랐다.
“메이브, 대답해 주셔야죠.”
이미 대답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다시 한번 묻는 다비드에 메이브는 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가 느릿하게 벌렸다.
“……멈추지…… 마.”
-요. 끝까지 내뱉지도 못하는 말은 결국, 다시 입술을 부딪치는 다비드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메이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비드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가 살짝 몸을 일으키는 것에 메이브의 몸도 자연스럽게 상체가 위로 들렸다.
메이브가 다비드를 보는 순간, 구멍에서 조심스레 움직이며 안을 늘리고 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아프면 말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메이브는 안을 휘저었던 손가락이 빠져나가며, 그 안을 가득 채우는 성기가 느껴졌다.
빠르다. 어쩌면 숨을 쉴 틈도 없이 움직이는 걸지 몰랐다. 그의 어깨를 긁고 그의 몸을 움켜쥐면서 메이브는 신음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뼈 마디마디가 벌어지고 속의 내벽이 조여지는 게 느껴졌다.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성기에 메이브는 자신의 성기가 딸려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빠르게 찾아오는 쾌감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 분, 어쩌면 몇십 분, 얼마나 지났는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들어갔다.
“흐…… 아흑!”
몇 번이나 쌌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 몸을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이는 다비드의 저 가라앉는 눈 때문에 홀린 것처럼 바라보기도 몇 번, 이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바라면서도 너무 커다래진 들뜬 열기에 쉬이 지나가지 않기를 바랐다. 메이브는 자신의 어깨와 허리를 움켜쥐는 손길에 허리를 작게 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멈추었던 숨을 토해 내고 자신의 몸 곳곳에 키스하는 다비드의 숨결과, 그의 입술이 내려앉을 때마다 간지럽다고도 느꼈다.
“하아…… 메이브.”
메이브가 가장 떨리는 것은, 저 가라앉고 숨이 차오른 목소리로 자신을 부를 때가 아닐까 싶었다.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고 탐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다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허벅지를 쓸어내리는 손길은 그곳에 촛불을 가져다 댄 것처럼 뜨거웠다.
자신을 배려하는 듯 빠르게 흔들다가도 느려지는 허리 짓에 미친 것처럼 몸을 떨기도 몇 번, 메이브는 결국 다비드의 품에 매달려 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성기를 안에 가득 채워서, 그와 자신의 몸이 꼭 붙어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행복하다, 아니 어쩌면 행복을 넘어선 쾌감에 정신이 멀어지는지도 몰랐다.
“정신 차려.”
낮게 우는 그 목소리는 메이브가 기절하는 것도 허용치 않았다. 벌어진 입술에 다비드의 입술이 닿고 온몸이 부서지듯 끌어안는 그의 두 팔에, 메이브는 손톱을 세워 다비드의 등과 어깨를 긁었다.
그의 단단하고 커다란 성기가 안으로 박혀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아랫배가 울리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곳까지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것에 메이브는 결국 쾌감에 울면서 그에게 매달렸다.
“쉬이…….”
메이브의 귓가에 낮게 속삭이듯 말하는 그 다정한 소리들이, 메이브의 정신을 아득히 멀어지게 만들었다가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다.
해가 지고 점점 어둠이 들어찼을 때, 방 안은 사물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던 다비드는 결국 안을 빠듯하게 채우고 있던 성기를 끄집어내며 메이브의 가슴 위로 진득한 정액을 뿌렸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을 쌌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메이브의 상체는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기에, 다비드의 정액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었다.
온몸에 힘이 빠진 메이브가 침대에 늘어져 누워 있자, 다비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불을 켰다. 환한 불빛에 눈이 멀 것처럼 시려 메이브는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사이에 수건을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가져왔는지 다비드가 끈적거리는 몸을 닦아 주는 게 느껴졌다.
“다……음은…… 안 할 거예요.”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메이브가 중얼거리는 말에 다비드는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라고 대답했으나 그게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메이브는 또다시 자신의 몸이 달랑 들리는 것을 느끼며 다비드의 품에 매달렸다.
열기에 집어삼켜진 것처럼 후끈한 공기가 맴도는 방에서 빠져나온 다비드는 그대로 부엌으로 향했다.
아까 말한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어디서 종이 듣고 있었는지 알 순 없었으나, 다비드의 말처럼 테이블에는 두 사람이 먹기에도 남을 음식이 가득 놓여 있었다.
“배고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정하게 말하는 다비드에 메이브는 왜인지 그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메이브는 힘없이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툭, 때렸다. 다비드가 느끼기에는 그저 두드렸다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를 안아 들어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처음 그를 만나 신전에서 생활했던 그때처럼, 메이브에게 음식을 먹여 주었다.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려 다비드가 먹여 주는 것을 계속 받아먹던 메이브는 결국 몰려오는 피로에 몸을 맡겼다.
“메이브.”
얼마 먹지도 못하고 금세 잠이 든 메이브의 어깨를 다비드가 살짝 흔들었지만, 고른 숨을 몰아쉬면서 깨어나지 않는 모습에 혀를 찼다. 다비드는 잠시 잠든 메이브를 바라보다가 그의 몸을 고쳐 안으며 이마에 작게 키스했다.
이날 다비드는 얼마 되지 않는 관계에 지쳐 쓰러진 메이브의 모습을 보며 체력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런 생각을 메이브가 알았다면 억울해했을 것이다. 일반인보다 체력이 좋다고 장담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일반인보다 괴물 같은 체력을 가지고 있는 다비드에게는 억울하다 말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을 터였다.
“좋은 꿈, 꿔요.”
무슨 악몽을 꾸는지, 살짝 일그러진 이마에 몇 번이고 키스한 다비드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메이브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꿈속에서도 다비드에게 먹히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
요리라고 말할 수도 없는 탄 음식을 만든 다비드의 모습에 메이브가 몇 번이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약간 토라진 듯한 모습에 달래기도 몇 번이었다.
메이브는 결국 테이블에 올라온 검은 숯덩이를 내려다보았다. 먹으면 쓰고 텁텁할 것이 분명했지만,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다비드의 손을 붙잡고 먹겠다고 말한 것은 메이브였다.
걱정 어린 시선으로 당장 숯덩이를 버리려는 다비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포크로 음식을 찍었다.
무엇을 만든 건지 알지 못하는 그것이 바사삭,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릇에 검은색 재를 떨어트렸다. 메이브가 그것을 입가에 가져가려 하자, 결국 다비드가 메이브의 손을 붙잡아 먹지 못하게 막았다.
“제가, 제가…… 다시 만들 겁니다.”
“네?”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 테니까, 그거 먹지 마.”
결국 다비드는 숯덩이가 꽂혀 있는 포크와 함께 음식이 담긴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모습이 울타리 밖으로 그것을 버리는 것 같았다. 결국 메이브는 다비드가 없는 곳에서 한바탕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비드는 콘라드와는 달랐다. 그도 음식을 못하고 다비드도 음식을 못하지만 말이다.
콘라드가 그래도 금세 요리를 배운 것과 달리, 신은 다비드에게 손재주는 주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왜냐면, 분명 하나같이 알려 주었는데도 다비드가 만드는 음식은 전부 숯덩이였다.
한번은 그가 만드는 걸 지켜보면서 뒤에서 알려 주며 음식을 만들었는데도, 속이 아예 안 익어 있거나, 갑자기 숯덩이가 되어 버린 음식이 메이브에겐 신기할 뿐이었다.
처음은 그가 혹시 괜찮은 음식을 만들었는데, 숨긴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지켜보았고, 한번은 늦은 밤 깨어났을 때 다비드가 혼자서 요리 연습을 하는 걸 보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메이브는 문을 열고 나가 요리였던 숯덩이를 땅에 묻고 있는 다비드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비드.”
작게 부르는 그의 이름에 다비드가 고개들 들어 자신을 바라보였다. 메이브는 살짝 미소 지으며 다비드에게 걸어갔다.
“다시 만들어 봐요. 이번에는 제가 도와줄게요.”
몇 번이고 도와주었지만,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처럼 말하는 메이브의 모습에 다비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풀이 죽은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하는 다비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자신보다 더 크고 멋있어 보였던 그가 음식 하나 못 한다고 저렇게 기가 죽을 거라 생각지는 못했다.
하지만 메이브는 놀란 표정을 금세 추스르며 그릇과 포크를 움켜쥔 채 서 있는 다비드의 품에 안겨 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요.”
메이브가 살짝 웃으며 속삭이는 말을 들은 다비드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슬픈 것처럼 우울한 목소리로 메이브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앞으로 더 잘 알려 드릴게요.”
다비드의 표정을 보지 못한 메이브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웃었고,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도 메이브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금세 풀이 죽은 표정으로 변했지만 말이다.
나중에 메이브는 이 사건이 다비드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다비드는 메이브를 붙잡을 때 음식을 만들어서 먹여 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메이브를 찾으면서 요리를 배웠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 후 메이브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 다비드에게 물었다. 그러자 다비드는 모든 것을 자신이 하게 되면 메이브가 싫어할까 싶어서 하나 정도는 못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고 대답했다.
메이브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보다, 자신을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을 했다는 것에 결국 웃을 수밖에 없는 해프닝으로 지나갔지만 말이다.
“하지만 저 거짓말하는 거 싫어해요.”
“앞으로 안 하겠습니다.”
메이브는 이날, 다비드에게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하지만 메이브가 눈치채지 않는 이상은 다비드가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다비드 역시 메이브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날이기도 했다. 그것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대신,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지만 말이다.
***
어느 날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오두막의 삶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때 같다.
메이브는 다비드가 숲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로 불을 때고, 호수에서 생선을 잡아 구워 먹는 것도, 그리고 어두운 밤에 다비드와 둘이 근처를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불편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음식 재료는 매일매일 누군가가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막상 오두막에 있는 메이브가 할 거라고는 별로 없었다.
놀거나 쉴 때 호숫가에 가는 것 빼고 메이브는 정원에 밭을 만들어 식물을 키우는 낙으로 살았다. 다비드가 어디서 무언가를 잡아 오고, 그와 함께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익숙해질 때였던 것 같다.
그때, 메이브는 이제는 흐릿해졌던 신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비드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다.
“메이브 님.”
“네?”
그날도 언제나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다비드가 잠든 얼굴을 쳐다보고 그의 이마에 작게 키스하면 그가 자신을 끌어안는, 늘 그런 하루 말이다.
다만, 다른 것은 다비드가 어디를 다녀와야 한다며 하루 정도 떠난 날이기도 했다. 심심하기도 했지만 밭에 물을 주며 쉬다 보니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그리고 그날 밤, 다비드가 돌아오자 메이브는 그의 이야기에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길고 긴,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신전에 대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메이브는 다비드가 에녹 공작에게 신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걸 그제야 다비드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다. 메이브가 작게 한숨을 쉬며 부모님은…… 하면서 걱정하자, 다비드는 고개를 흔들며 외려 메이브 님을 걱정했다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메이브가 그에 다비드에게 그 신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다비드는 가만히 메이브를 끌어안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
늘 그렇듯 나뭇가지를 줍고 있던 다비드에게 종이 다가와 에녹 공작이 전해 달라고 했다는 편지를 건네주기 전까지, 그날 하루는 여느 때와 똑같았다.
다비드는 종에게 받은 편지 봉투를 뜯어 편지를 꺼내 들었다.
「위치를 찾았다. 준비는 끝났고, 시일은 금일 1시.」
편지의 내용은 간략했지만,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비드는 그길로 오두막으로 걸어가 메이브의 이마에 작게 키스를 한 후, 할 일이 있어 잠시 다녀온다고 말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할 일이 있었으니까.
다비드는 그길로 배웅해 주는 메이브를 뒤로하고, 종이 준비해 놓은 말을 타고 급히 에녹가로 향했다.
메이브는 알지 못했으나, 다비드가 구해 놓은 오두막의 위치는 생각보다 에녹 영지와 가까웠다. 그에 급하게 말을 타고 에녹가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준비가 끝난 에녹 공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지는 않았군.”
그 말투가 조금은 아쉬워하는 듯했다. 다비드는 혼자 처리하려 했던 에녹 공작을 쳐다보며 몸을 숙여 인사했다.
“늦으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덤덤하게 내뱉는 말에 공작은 다비드를 한번 바라보다가 그에게 검을 하나 던져 주었다. 떨어트리지 않고 검을 잡은 다비드는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네곤 에녹 공작을 쳐다보았다.
공작은 몸을 돌려 큰 전쟁에 나아가듯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빠르게 출발하는 공작의 뒤를 따라 다비드 역시 자신의 말에 올라타 신속하게 따라갔다.
한참을 달렸을까, 다비드는 점차 익숙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이 참, 신기한 곳이더군.”
느릿하게 내뱉는 공작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뒤섞여 그 옆에 달리고 있던 다비드의 귓가에 들려왔다.
다비드는 살짝 고개를 돌려 빠르게 달리고 있는 공작을 한번 쳐다보다가 앞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어떤 영지에서도, 도착하는 데 하루가 안 걸린다는 거다.”
“……예?”
다비드는 그 말에 에녹 공작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뒤늦게야 깨달았다. 메이브를 찾으며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였으나, 이 신전은 찾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나서 다비드는 알았다. 실베스타 영지에서 그 신전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얼마 안 걸렸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에녹 영지에서 이 익숙한 곳까지 오는 것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실베스타 영지와 에녹 영지는 급히 달리고 달려도 5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이곳이 맞습니다.”
다비드는 자신이 보았던 신전의 입구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익숙하기 그지없는 곳인데도 그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 이유는 이곳을 떠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전의 입구가 많이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다.
꼭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말에서 내려 입구로 다가간 다비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 익숙한 복도를 걸었다. 그 뒤로 다른 이들이 따라오는 걸 느끼면서 다비드는 처음 머리 위에 물을 뿌렸던 그 공간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다비드는 저 분수에서 물을 온몸에 뿌렸었다. 옷이 달라붙는 것이 기분 나쁠 만큼 말이다. 그리고 메이브와 만났던 104번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자네가 말했던 곳이 맞는 건가?”
의아한 공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비드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곳은 다비드와 메이브가 지나친 그 신전이 맞았다. 하지만 깨끗하기만 했던 바닥의 돌이 부서져 있었고, 메이브와 함께 지냈던 방의 문패도 부서진 채였다.
문 또한 제대로 닫혀 있지 않았다. 다비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자욱하게 깔려 있는 곳은 1년이 아니라 몇십 년은 방치되었던 공간처럼 보였다.
“……성년식을 치른 건 분명 8개월 전일 텐데, 이곳은 꼭 몇십 년은 방치되었던 공간 같군.”
“이곳에서…….”
다비드는 구조가 달라지지 않은 방 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와…… 메이브 님이 함께 묵었었습니다.”
“…….”
기묘한 상황이었다. 모든 영지에서 채 하루를 가지 않아도 도착하는 기묘한 신전. 그곳에서 성년식을 치르는 교육을 일주일 동안 하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다시 도착하니 몇십 년, 어쩌면 몇백 년은 방치된 공간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다비드는 몸을 돌려 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도 이곳처럼 그런 건지, 깨어진 바닥을 밟으며 급히 뛰어 도착한 홀의 문은 안쪽으로 부서져 넘어가 있었다.
그 커다란 홀 안으로 들어온 다비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깨져 있었다. 바닥은 더러웠고, 유리 조각과 벽 조각이 뒤섞여 있었다. 다비드의 시선이 점차 내려왔을 때, 언제나 그 권력자였던 신관이 서 있던 위치를 바라보았다.
석상의 머리는 부서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만큼. 하지만 저 석상이 어떤 자세였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그것이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 생생한데, 그것이 거짓이라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간은 꼭 버려진 신전 같았다. 다비드는 이곳에서 가지 않았던 청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공작의 사병이 있는지 쥐 잡듯이 찾았으나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허.”
낮게 숨을 멈춘 다비드는 청탑의 문을 열고 인상을 찌푸렸다. 청탑에도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다니엘의 말과 알란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사람 하나가 겨우 몸을 웅크리고 있을 수 있는 작은 공간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알 수 없는 목줄이 천장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시간을 버티지 못해 바닥에 끊어진 목줄까지 떨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나무로 된 성기 모양의 무언가 또한 그 작은 공간 사이사이에 있었다. 그것이 지키지 못한 자를 괴롭혔던 물건임이 분명했다.
분명 그것을 알고 있고, 들었는데도, 이 공간 역시 방치된 지 오래 지난 곳 같았다. 다비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이 남는 곳에서 몸을 돌려 공작에게 걸어갔다.
“찾고자 하는 것은 찾았나?”
무심하게 묻는 것 같았으나, 그 안에 화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비드는 고개를 작게 흔들며 몸을 숙였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본다면, 지키지 못한 자가 신전에서 빠져나가고 난 뒤, 쟁취한 자가 왜 신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를 의심해 봐야 했다.
지키지 못한 자는 목줄을 걸고도 호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쟁취한 자가 왜 벗어나지 못했을까.
다비드는 오래되어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신전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불과 몇 달 전, 성년식을 치르고 교육을 한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왜 성년식마다 실종이 된 이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 왜 다니엘이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아등바등했을까.
다비드가 그날, 다니엘이 죽기 전에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 했던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답을 해 줄 사람은 사라졌다.
“이곳이 어떤 신을 모시는 신전인지는 알고 있나?”
에녹 공작이 부서진 벽을 매만지며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을 때, 다비드는 자신의 기억을 뒤져 곧 그 답을 찾아냈다.
“……음욕의 신 타니아였습니다.”
다비드의 대답에 헛웃음을 지은 공작은 자신의 사병을 다시 불러 모았다. 다비드가 그것을 의아하게 쳐다보자, 공작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며 신전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익숙하게 말에 올라타는 모습까지 지켜보던 다비드는 입을 열었다.
“알고 있는 것이 있으십니까?”
다니드의 물음에 말에 올라타 자리를 잡고 앉은 공작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음욕의 신 타니아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말 그대로 음욕의 신이 아닙니까?”
음욕의 신 타니아. 그 말 그대로 음욕으로 힘을 키우는 자일 거라고 다비드는 생각했다. 하지만 공작은 그런 다비드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에 와서는 음욕의 신이라 불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다른 이름이 있습니까?”
“타니아는 사람을 홀리는 유혹의 신이다.”
에녹 공작은 다비드를 보며 먼 옛날부터 이야기 형식으로 전해지던 것을 떠올렸다. 그 이야기는, 에녹 공작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들었다.
“사람을 홀려 문제를 주고 그 문제를 맞히지 못한다면 그자를 끌고 간다는 신이다.”
“…….”
다비드는 공작의 말을 들으며 그 문제가 어쩌면, 그 일주일의 교육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디에 신전이 있는지, 그 신을 어디서 모시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찾을 수 없다고 말했지.”
에녹 공작은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에서 사라진 사람도 우리는 찾을 수 없었다. 차라리 다른 신전이었다면 달랐겠지. 자네가 이곳을 무너트리고 싶은 것은 알지만, 이미 떠나가 버린 곳을 무너트린다 해도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세.”
에녹 공작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다비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녹 공작은 다비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신전을 무너트리고 싶었던 것은 공작이었다. 자신의 아들에게 안 좋은 기억을 심어 준 이곳을 없애 버리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 기묘한 공간을 찾았을 때, 에녹 공작은 설마 하는 생각이 있었다. 미신처럼 들었던 이야기였기에 믿지 않았다.
그 신을 모시는 자는 온 대륙을 찾는다 해도 찾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해 다비드가 이곳에서 묵었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만약 거짓이었다면 익숙하게 길을 찾지도 못할 만큼, 이곳은 이상하게도 작은 듯하면서 컸고, 쉬운 듯하면서 길이 교차되어 어려웠다.
“자네가 여기서 묵을 때 이곳은 이런 풍경이었나?”
“……아닙니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만약 이곳을 무너트린다면, 자네가 있었을 때와 달라질 것 같나?”
다비드도 그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도 반쯤 무너진 신전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 교육을 치를 때에는 신전이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였다. 만약 완전히 무너트려 터조차 없앤다 해도, 언제 사라졌냐는 듯이 다시 되돌아올 것 같았다.
“자네의 화를 안다네. 나 또한 그러니.”
“…….”
“하지만 인간으로서 가능한 것이 있고, 불가능한 것이 있지. 이번 문제는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세.”
“예.”
에녹 공작은 굳어져 있는 다비드를 보며 다른 이야기를 꺼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 이후의 일은 자신의 손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어떤 힘으로도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말이다.
에녹 공작은 조금 허무한 얼굴로 말 머리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했다. 그런 에녹 공작의 뒤를 보던 다비드 역시 한숨을 내쉬며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반쯤 무너진 신전을 돌아보고 말의 허리를 찼다.
서늘한 바람이 얼굴과 몸을 쓸고 지나갈 때, 왜인지 다비드는 자신의 귓가로 한 여성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다비드는 신전의 이야기를 메이브에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메이브 역시, 그의 말을 듣고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신전이 없어요?”
“있었습니다.”
“……사람이 없었고, 그곳은 방치된 지 오래라는 거죠?”
“예.”
“……그러면 만약 그곳에 남아 있던, 지키지 못한 자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연 메이브는 헛숨을 들이켜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다비드는 손을 뻗어 메이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알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지키지 못한 자는 모두 빠져나왔을 겁니다.”
“……아…….”
“다만, 문제를 일으켰던 쟁취한 자들은 그곳에 묶여 언젠가 자신을 빼내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겠죠.”
메이브는 그 말에 어쩌면 다니엘처럼 누군가가 돈으로 구해 줄 수도, 어쩌면 메이브에게 대했던 행동처럼 지키지 못한 자를 도와주는 척 빠져나올 거라는 것을 알았다.
메이브는 그제야 다니엘이 왜 그렇게 나오고 싶어 했는지, 왜 그렇게 다비드에게 소리를 치고 메이브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곳에서 도망쳐 나오고 싶어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메이브 님.”
“……네.”
“메이브 님이 그곳에 묶여 있는 것 같아서, 그곳을 무너트리고 싶었던 겁니다.”
메이브는 다비드의 말에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하지만 이미 그곳은 무너져 있으니, 메이브 님도 그곳에 대해 잊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비드는 가끔씩 밤에 메이브가 악몽을 꾼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기억에서 빠져나오라고, 그 신전을 없애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곳은 사실상 무너진 곳과 다름없었다. 어쩌면 매해 다시 언제 무너졌냐는 듯이 되돌아올지도 몰랐다.
“저는요…….”
메이브는 자신을 걱정하는 다비드를 쳐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곳에 대한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아요.”
“…….”
“그곳에서 다비드 님을 만났고, 결국 그 덕분에 당신과 함께할 수 있었던 걸요.”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곳, 어쩌면 끝나는 것도 그곳일지 몰랐다. 메이브는 그곳에 좋지 않은 기억이 있으나, 결국 지금을 생각한다면 메이브가 다비드를 만난 곳이었다.
메이브는 한편으로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비드를 만나게 해 준 신전이 고마웠다. 다른 이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그것은 다비드의 말 대로 그곳에서 힘들었던 이들은 모두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제게 그건 나쁜 기억이 아니에요.”
그곳에서 다비드와 생활했던 기억과, 그곳에서 힘들어했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잡아 주며, 위로해 주었던 것은 잊고 싶지 않았다.
결국 소설인 ‘마이 홀’에서 이야기가 시작이었던 그곳은 기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쩐지 이상했다. 성년식을 치르는 사람이 사라졌다면, 평민이면 몰라도 귀족의 자제가 사라졌을 때 찾지 않을 부모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 온갖 곳을 찾고 찾았을 텐데, 실종된 자들이 되돌아오지 않는 것도.
그 미쳐 버린 신전에서 이상한 교육을 하는 것 또한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쉬쉬하는 이야기로, 어떠면 괴담처럼 성년식을 치르는 사람들 중에 실종된 사람이 있다는 것뿐, 그것이 음욕의 신 타니아를 섬기는 신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아마 평생을 찾으려 해도 이제는 찾지 못할 공간일 것이다.
메이브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곳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그려질 정도로 기억에 남는데, 그곳에 몇십 년, 어쩌면 몇백 년간 버려진 공간으로 변했다는 게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비드의 진지한 표정과 그의 행동은 거짓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기에 메이브는 자신이 보지 않았으나 그의 말을 믿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메이브가 살짝 웃으며 하는 말에 다비드는 그저 그의 몸을 품에 끌어안았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종착지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는데, 시작된 곳을 갔을 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조금 허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끈을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메이브도, 다비드도 열심히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차라리 한편으로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 기묘한 곳이 원래부터 있던 곳이었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지금까지도 괴로워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메이브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다비드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전 당신을 만났다는 걸로 괜찮아요.”
“예.”
“……정말로요.”
우물거리며 말을 꺼내는 메이브에게 다비드는 몇 번이고 대답하며 그의 몸을 안고 있었다. 결국 한숨을 내쉰 메이브가 등을 물리며 다비드의 품에서 벗어나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다비드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메이브가 고개를 내밀어 그의 입술에 작게 키스하며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잖아요.”
무심한 듯 다정하게 내뱉는 메이브의 말에 결국 다비드가 헛웃음을 지으며, 메이브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조금 떨어졌던 입술을 잡아먹듯이 키스했다.
서로의 혀가 얽혀 오는 것을 느끼며, 메이브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고마워요.’
메이브는 정말, 그 신전의 주인이었던 타니아에게 감사했다.
만약 모든 것이 달랐다면 아니었을 테지만, 메이브는 그곳에서 다비드를 만나고 그와 함께 얽힌 것은 결국 모두 신전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그 신전의 주인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만약 신전이 아니었다면, 눈앞에 있는 다비드를 만날 일도, 그와 이렇게 사랑하게 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사랑해요, 다비드.”
속에 있는 모든 감정을 꺼내 풀어놓듯 메이브가 고백하자, 다비드는 작게 웃으며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저도 사랑합니다.”
***
꽃이 흩날리는 어느 날이었다. 다비드와 오두막에 함께 산 지 어느새 일 년이 지날 무렵.
다비드가 음식을 못 만드는 것이 거짓인 것을 알고 나서 그 뒤에 요리하는 것도 다비드의 몫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메이브가 숲에 펼쳐진 꽃밭에서 꽃을 하나둘 꺾어 예쁜 화관을 만들고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음식을 만들고 있던 다비드의 머리 위에 화관을 씌워 주며 메이브가 작게 웃었다.
“너무 어울리는데요?”
“그렇습니까?”
살짝 웃는 얼굴을 쳐다보며 메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브는 다비드의 머리색과 너무 잘 어울리는 화관에 웃었다.
그새 요리를 끝낸 그가 테이블에 다 만든 음식을 내려놓고 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무언가를 놓고 왔다고 생각하며 메이브는 수저를 테이블에 세팅했다.
나무 컵에 물을 따라 놓고 근처에 남아 있던 꽃을 화병에 담고 자리에 앉아 다비드를 기다렸다.
방에서 나온 다비드는 살짝 웃으며 메이브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맞은편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니라, 메이브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메이브가 멍하니 다비드를 내려다보았다.
“다비드 님?”
갑자기 다비드가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메이브는 혹시 다비드가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메이브가 몸을 숙이며 다비드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 다비드가 품 안에서 나무 상자를 꺼내 들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무심하게 내뱉는 말과 다르게, 그의 얼굴은 조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 상자를 열어 메이브에게 보여 주는 그 행동에, 메이브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투박해 보이는 상자와는 다르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반지와 귀걸이가 보였다. 두 쌍의 반지와 귀걸이는, 똑같은 모양이었으나 메이브의 눈 색과 다비드의 눈 색이 담겨 있는 보석이 박혀 있었다.
아마, 서로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메이브는 상자를 들고 있는 다비드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이걸 언제 준비한 거예요.”
메이브가 살짝 툴툴거리면서 하는 말에 다비드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결국 메이브는 고개를 작게 흔들며 행복에 겨운 웃음을 짓고 다비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끼워 주세요.”
그 말에 작게 웃은 다비드는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안에서 연녹색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메이브의 손을 붙잡아 그 가는 손가락에 반지를 천천히 껴 주었다.
“저도 껴 주시겠습니까?”
그 말을 하며 나무 상자를 들어 올려 메이브에게 건네주는 다비드의 행동에 메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뻗어 상자 안에 투명한 자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를 꺼내 다비드의 손을 붙잡아 약지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이제 저한테서 못 벗어날 걸요?”
장난기가 섞여 있는 목소리로 메이브가 말하자, 다비드는 그 말이 더 즐거운 듯 웃으며 속삭였다.
“메이브, 당신이 제게서 더 이상 못 벗어나는 겁니다.”
“……이제 저한테 목줄이 매인 거라구요.”
“그렇습니까? 그것도 저는 좋은데요.”
다비드는 고개를 숙여 메이브의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다비드의 머리카락을 익숙하게 쓰다듬어 주던 메이브는, 다비드가 여전히 쓰고 있는 화관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제가 화관 만들어 드렸으니까, 부케는 다비드 님이 만들어 주세요.”
***
다비드는 정말 메이브가 장난이 섞인 말로 꺼냈던 그 약속을 지켰다. 결혼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준비되었다. 이렇게 빨라도 될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처음에 결혼을 하겠다고 실베스타가와 에녹가에 편지를 붙이기 무섭게, 어디서 할 건지 묻는 두 집안 때문에 고민했던 것도 잠시였다.
다비드가 그런 것은 신경 쓸 필요 없다며 못을 박더니, 이곳에서 할 거라고 말했으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그 말에 긍정했다. 사람이 많은 것보다는 적은 것이 좋았으니까.
그 뒤로 어느 순간 수많은 사람이 오기 시작하더니 숲속의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메이브가 당황해서 쳐다보니 다비드는 웃으며 결혼을 하고, 저 자리에 신혼집을 지을 거라고 말했다.
메이브는 그게 우스갯소리처럼 장난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인부들의 노동에 어느새 큰 공터가 생겨났다. 그곳에 땅을 고르게 만들었다.
처음에 다비드는 메이브에게 어떤 결혼식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메이브는 그에,
“화려하지 않은 결혼식이요. 근처에 꽃 입구가 있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해요.”
결혼식은 메이브가 말했던 것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얀색 의자들이 자리를 차지하며 놓여 있었고, 신랑 신부가 들어오는 입구는 반구 모양의 꽃으로 장식했다.
그 앞으로 하얀 카펫이 단상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단상도 화려하지 않고 심플했다.
어쩌면 소박할 정도로 단출했고, 어떻게 본다면 메이브가 바랐던 공간이 완성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하아…….”
그리고 오늘이 드디어 결혼하는 날이었다. 이렇게 손바닥에 땀이 배어날 정도로 긴장한 것이 몇 번인지 메이브는 심호흡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메이브의 시선이 옷장에 걸려 있는 하얀 턱시도에 닿았다. 약간의 레이스가 달려 있는 턱시도는 한눈에 보아도 실력 좋은 장인이 만든 것 같았다.
“도련님, 이제 준비하셔야 해요.”
“이미 하고 있었잖아…….”
“옷도 입고, 머리도 하셔야죠.”
메이브는 오랜만에 본 시종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꼭두새벽부터 찾아온 시종들은 메이브와 다비드를 떨어트려 놓았다. 다비드는 어디서 어떻게 준비하는지 메이브가 알 수 없을 정 도로 서로는 만나지도 못했다.
그렇게 메이브는 때를 빼고 광을 내듯, 목부터 얼굴에 이상한 무언가를 발랐다가 닦아 내는 것을 하루 종일 해야 했다.
이제 끝이라고 해서 조금 편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이제 끝이라 말하는 시종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도련님이 실베스타 도련님과 결혼하실 거라곤 생각도 못 했었는데.”
느릿하게 말하면서 메이브가 입고 있던 옷을 벗기고, 옷장에 걸려 있던 하얀색 턱시도를 입혀 주는 시종의 두 눈가가 붉었다.
“꼭, 행복하셔야 해요.”
메이브는 그 말에 손을 내밀어 시종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사이 단추를 전부 채워 주던 시종이 코를 훌쩍 들이마시고는 메이브를 급히 의자에 앉게 했다.
메이브가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울지 않는 시종을 쳐다보다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제법 익숙해졌다. 저 검은색 머리카락도, 연한 자색의 눈도 말이다.
이제는 원래의 자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메이브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제 이 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메이브는 차라리 자신이 이 몸에 들어온 것처럼, 원래의 메이브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가 있기를 바랐다.
서로 각자의 길을 가기를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종은 머리를 전부 만져 주고 나서야 한 걸음 물러났다. 메이브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작게 미소 지었다.
멀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와 하얀색 턱시도가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조금은 부끄러운 것 같다고도 생각하며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제가 더 감사해요.”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메이브를 지켜보던 시종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에 행복하라는 말을 꺼내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메이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정원을 지나 급하게 만들었던 결혼식을 치를 장소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메이브는 꽃으로 된 입구에 서 있는 다비드의 모습을 보았다.
“와…….”
메이브와 달리, 다비드는 검은색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잘 어울려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메이브는 그런 다비드를 쳐다보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근처에 하객이 앉아 있는데, 그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롯이 다비드만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귀에 연한 자색의 귀걸이가 흔들렸다. 메이브는 그것을 보며 작게 웃고 자신의 귀를 툭, 건드렸다.
다비드의 눈 색과 같은, 그가 주었던 귀걸이가 작게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메이브가 다비드의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다비드는 메이브에게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갈까요?”
그 부드러운 웃음을 보며 마주 웃고 다비드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그러곤 꽃향기가 가득한 입구를 지나 하얀색 카펫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얼마큼의 시간을 함께할지는 알 수 없지만, 메이브는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었다. 그러다 많이 늙었을 때 같은 날, 같은 시에 함께 눈을 감고 싶다고 생각했다.
신관이 서 있는 단상에 다다랐을 때, 신관은 메이브와 다비드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실베스타 데이비드와 에녹 메이브의 결혼식을 시작합니다.”
길고 긴 선서를 끝으로 서로 오래오래 사랑하겠냐는 물음에, 메이브와 다비드는 같이 웃으며 ‘네’라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키스.”
신관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으나, 다비드는 두 손을 뻗어 메이브의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내밀었다. 다비드의 부드러운 입술이 마주한 연인의 입술과 닿았을 때, 메이브는 뜨고 있던 눈을 사르르 감았다.
꽃향기가 가득한 어느 봄날의 결혼식은 그렇게 치러지고 끝이 났다.
입가에 달콤함이 남아 있는 것 같았고, 한편으론 꽃 냄새에 빠져 버린 듯했다.
다비드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질 무렵, 감았던 눈을 뜬 메이브는 눈앞에 보이는 다비드를 보며 살며시 눈을 접고 웃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먼 미래에도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하며 마주 잡은 다비드의 손과 메이브의 손에는 서로의 눈 색으로 된 반지가 반짝였다. 작게 웃는 메이브의 귓가에 연한 녹색 귀걸이가 흔들리니, 다비드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언젠가 이때를 추억하며 메이브는 행복한 이 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