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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처음이자 끝 (17/18)

07. 처음이자 끝

메이브가 한참을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어쩐지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돈을 수없이 바른 것 같은 천장이 말이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메이브가 급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코, 콘라드……!”

잊을 것이 따로 있지, 그를 잊었다는 사실에 메이브가 사색이 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있던 메이브가 멍하니 티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던 다비드의 모습을 보았을 때 힘이 빠진 것처럼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자는 지금 치료받고 있습니다.”

무뚝뚝한 얼굴이, 일어나자마자 자신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찾았다고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아아, 다행이…… 다행이에요…….”

하지만 그 표정을 보았으면서도 메이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그가 잘못되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고,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메이브에게는 천상에서 신이 드디어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것처럼 느끼게 했다.

감동하고 안도한 듯한 메이브를 가만히 지켜보던 다비드는 의자에서 일어나 어정쩡하게 침대에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메이브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바닥에 주저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저와 했던 약속 잊지 않으셨습니까?”

“네?”

“그자를 찾으면 저와 함께 가 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메이브는 왜인지 다비드의 표정이 꼭 콘라드가 자신과 했던 약속보다 더 중요한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결국 작게 웃으며 두 팔을 뻗어 다비드의 몸을 끌어안았다.

“안…… 잊었어요.”

잊지 않았다. 메이브는 늦었지만 정말로 자신이 다비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힘들고 지쳐 미쳐 버릴 것 같던 그 순간까지, 다비드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의 손길, 그의 목소리로 미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어쩌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정말입니까?”

“네.”

다시 묻는 그 목소리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알란과의 일은 힘들었으나, 왜인지 그 기억은 그저 악몽일 뿐이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은 다비드의 손길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 웃을 수 있었다. 아니, 계속 그와 함께하면서 웃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 알고, 친해졌던 콘라드는 크게 다치기는 했으나 죽지 않고 치료받으니 다시 건강해질 거였다.

그러니 메이브는 이제 자신이 행복해져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비드 님, 있잖아요…….”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랑하는데, 끈적이는 무언가를 바른 것처럼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함께 안 간다고 해도, 제가 데려갈 겁니다.”

그 말을 하지 못하는 동안, 다비드가 다른 것으로 오해를 하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는 말에 메이브는 결국 크게 웃었다.

그러곤 눈물이 맺힌 것 같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다비드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제가…… 그…… 사랑한다고요.”

목소리가 많이 떨렸는지, 아니면 조금 입 안으로 삼켰는지 알지 못했다. 메이브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자신의 말이 다비드가 듣지 못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다비드가 그런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메이브의 몸을 떨어트렸다.

갑자기 다비드가 그를 끌어안고 있던 자세에서 뒤로 물러나게 된 메이브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놀란 것처럼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메이브를 가만히 보던 다비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시, 다시 말해 주시겠습니까?”

다비드의 놀란 표정을 보자 메이브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다비드에게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입 밖으로 꺼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당사자가 다시 말해 달라고 말하니 너무 부끄러웠다.

“모, 못 들었으면 됐어요.”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듣고 싶습니다.”

고개를 돌리고 다비드의 시선을 피하려 했으나, 다비드가 메이브의 어깨를 붙잡고 침대에 그 몸을 밀어트렸다. 침대에 누운 채로 다비드를 올려다보던 메이브는, 그 연한 녹색의 눈에 자신의 자색 눈에 가득 채워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간지럽고 터질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이 이러다가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까지 들었다.

“다시, 말해 주세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다비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 얼굴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메이브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했다.

메이브의 몸 위에 올라탄 다비드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쿵쿵, 크게 뛰는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합니다. 정말 제 목숨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메이브,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그러니 이제 제 손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말라고, 이제는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다비드는 끝까지 하지 않은 말을 목구멍에 눌러 담으며 부끄러워하는 메이브의 몸을 끌어안았다.

어쩌면 쉬운 길을 놔두고 너무 길게 돌아서 도착한 걸지도 모른다. 바로 옆의 지름길도, 그 앞에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좋은 길도 있는데, 굳이 가시밭길로 걸어간 걸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있는 다비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 그런데 여기는 어디예요?”

메이브가 의아해하며 익숙한 천장을 눈살을 찌푸리고 쳐다보며 묻는 말에, 다비드가 웃으며 그의 가슴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신의 방도 못 알아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

메이브는 저 천장이 어쩐지 이상하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이 에녹가의 메이브의 방이었다는 것에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익숙하기는 했으나, 못 알아볼 수도 있었다. 메이브가 이 방에서 묵은 것은 고작 3일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메이브는 옆에 누워, 자신이 보고 있는 천장을 바라보는 다비드를 힐끔 쳐다보다가 익숙하고 화려한 문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언제 여기에 온 거예요?”

기절하듯 잠이 들었으나, 그새 에녹가에 올 정도로 그 거리가 짧은 건가 싶기도 했다.

알란에게 납치당하고 난 후엔 그 방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에 그곳과 에녹 영지가 가까웠는지, 아니면 멀었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잠들었는지 궁금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가야 한다고 하죠.”

“네? 아, 네. 사람을 숨기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처럼요?”

“예.”

갑자기 그 말을 왜 꺼내는지 잠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던 메이브는 누워 있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 옆에 누워 있는 다비드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알란이 저를 납치한 곳이 에녹 영지였어요?”

미친놈인 것은 알았지만, 그럴 정도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설마 에녹가의 자제를 납치한 자가 에녹 영지에 가둬 놓았다니 말이다.

“미쳤다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저도 당신을 찾으러 오면서 정말 그 정보가 사실인지 헷갈렸으니 말이죠.”

“정보요?”

“정보상에게 큰돈을 지불했습니다. 간이 부어도 많이 부었던 건지, 알란이 당신을 가둬 놓은 별장이 에녹가와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네?”

“……기분이 나쁘기는 하지만, 이곳 테라스에서 보면 보이기도 합니다.”

다비드의 말에 메이브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주춤, 침대에서 일어난 메이브가 테라스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그에 침대에서 느릿하게 일어난 다비드가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얀 난간을 붙잡은 메이브가 주변을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멀리 보지 않고 가까이 본다면 꽃이 가득 채워져 있는 정원이 보일 뿐이었으나, 뒤에 서 있던 다비드가 메이브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고개를 돌리게 했다.

“저기 보입니까?”

“……어떤 거요?”

메이브는 다비드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는 것보다, 등 뒤에 다비드의 따듯한 체온이 느껴져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메이브의 모습에도 작게 웃은 다비드는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떨어트리고 저 끝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저기 붉은색 지붕 말입니다.”

“……아, 보이는 것…… 같아요.”

너무 작아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인상을 찌푸리고 집중하니 작은 붉은색 지붕의 꼭대기가 보이는 것 같았다.

메이브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껴안고 있는 다비드에게 몸을 돌렸다.

“저곳이…… 제가 납치되었던 곳이라고요?”

“예.”

알란, 그는 정말 미친놈이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쳐 있는 자였다. 하지만 아까 다비드가 말한 것처럼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간다는 말이 맞았다.

어느 누가 에녹가의 자제가 납치당했는데, 그곳이 에녹가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고 생각할까.

분명한 것은, 만약 이곳에 정보상이 없었다면 제대로 알기 힘들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메이브는 그 정보를 위해 큰돈이 들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저 얼굴, 저 몸에 재력까지 있다는 사실에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메이브는 다비드보다 사실상 더 높은 공작가의 자제였다. 다비드는 백작가의 자제였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에녹가에서 그리 오래 있지 않은 메이브는 에녹가의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메이브가 이곳에서 노예를 사 본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나마 메이브가 큰돈을 썼던 것은 험프리 섬에서 집을 구했을 때였으나, 그조차도 콘라드가 에녹가의 재산으로 산 것이었기에 메이브는 자신이 얼마나 부자인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정말…… 나무를 숨기려고 숲에 들어왔네요.”

“그 대신 당신이 구하려고 했던 자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다비드는 메이브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자신의 품 안에 떨어진 이 사람이 너무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그의 어깨와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면서 작게 속삭였다.

“제가…… 당신을 구해 빨리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다비드는 메이브를 데리고 에녹가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

금이 생겨 금세 깨질 것 같은 유리 공예를 만지는 것처럼, 다비드의 손은 떨렸다. 품에 안겨 있는데도, 금방이라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듯한 메이브의 모습이 무서웠다.

다비드는 한참을 그렇게 메이브의 어깨를 힘주어 껴안고 그의 몸을 들어 올린 채로 에녹가에 도착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던 기사가 메이브의 모습을 보고 놀란 듯 다비드를 쳐다보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당장 메이브 님을 치료해야 합니다. 빨리 문을 열고 의원을 부르셔야 합니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눈앞에 멈추어 있는데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은 다비드가 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메이브의 몸에 크게 보이는 상처는 없었다. 손목과 발목에 두껍게 덧대어 있던 천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괜찮다 하더라도 속이 망가져 있을 수도 있었다.

다비드는 알란이 에녹가 근처에서 메이브를 납치해 감금시킨 그 간덩이 부은 행동을 욕하면서도, 그 덕분에 메이브를 빨리 의원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칼을 들어 올리던 기사들도, 다비드의 품에 있는 메이브의 상태를 한번 확인하고는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어 주었다.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허튼짓은 하지 않으셔야 할 겁니다.”

“그럴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사는 저자의 품에 안겨 있는 도련님을 자신이 안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기사는 다비드의 몸에서 풀풀 풍겨 오는 피 냄새에 혹여 자신이 데리고 가려다가 도련님이 인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기사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으나, 다비드의 눈에서 오롯이 메이브를 향한 걱정이 느껴졌기에 한숨을 내쉬고 그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향했다.

메이브를 품에 안았던 다비드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을 때, 저택은 난리가 났었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종이 급하게 피범벅이 되어 있는 콘래드의 몸을 업은 채 뒤늦게 들어왔으니까 말이다.

“이게…… 무슨 일이지?”

저택의 소란에 계단에서 내려오던 에녹 공작이 다비드의 품에 안겨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굳어져 있던 얼굴이 당황과 걱정으로 물들었다.

공작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피에 범벅이 되어 기절한 콘라드에게 닿았을 때는 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자네는 누구인데, 내 아들을 품에 안고 이곳에 온 거요?”

메이브를 향한 걱정이 묻어나 있었으나, 다비드가 피투성이가 된 콘라드를 데리고 왔고, 그 품에는 기절한 메이브를 안고 있었기에 공작의 목소리에는 경계가 짙게 배어 있었다.

다비드는 그런 공작을 올려다보며 정중하게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원래라면 몸을 숙여 인사해야 할 테지만, 지금은 품에 메이브가 안겨 있기에 이것도 다비드가 많이 양보한 거였다.

“실베스타 데이비드입니다.”

“……실베스타 가문의 자제가 왜 저희 아들을 품에 안고 이곳에 왔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공작은 다비드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당황을 숨기려는 것 같았으나, 그 속에서 숨기지 못하는 감정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전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전에 의원이 메이브 님의 상태를 보는 것이 먼접니다.”

“……지금 당장 엘로이스를 불러와.”

공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근처에 있던 집사가 급히 엘로이스를 데리러 가기 위해 그녀의 방으로 뛰어갔다. 다비드의 품에 안겨 있는 메이브를 보던 공작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오게.”

공작의 말에 다비드는 메이브가 불편하지 않도록 몸을 고쳐 안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메이브의 방에 다다랐을 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공작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메이브의 모습과 그리 어울리지 않았다. 화려한 가구와 벽지로 도배가 되어 있는 공간이 그와 동떨어진 느낌을 들게 했다.

다비드는 침대에 메이브의 몸을 조심스레 눕혀 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작은 입을 열지 않았고, 다비드는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급하게 메이브의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엘로이스는 잠자리에 들었다가 급히 깬 것처럼 옷차림이 고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와서야 옷을 추슬러 입은 엘로이스는 방 안에 있는 공작과 다비드를 한번 쳐다보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메이브에게 다가갔다.

“……실베스타 공자.”

“예.”

“상태를 보는 데 시간이 걸리니, 아까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하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방 안에서 공작이 나가는 것을 잠시 쳐다보던 다비드는 침대에 누워 있는 메이브를 진찰하고 있는 엘로이스와 메이브를 쳐다보다가 공작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에 들어가 공작이 상석에 앉자, 그 맞은편에 서서 공작을 쳐다보았다. 공작은 그런 그를 가만히 보다가 다비드 앞에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앉게.”

“예.”

다비드는 허락을 받고, 공작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다비드는 이곳에 나도는 에녹 공작의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인을 사랑하는 애처가에, 그의 아들인 메이브를 사랑하는 자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의 적은 단 한 번도 살려 보내지 않는다는 악귀, 피에 미친 살인자, 그 이름이 뒤에서 돌고 있는 에녹 공작의 별명이자, 이명이었다.

“그래, 자네가 어떻게 내 아들을 데리고 왔는지 숨김없이 이야기해 보지.”

공작의 기세는 날카롭다 못해 무거웠다. 다비드는 공작의 품에서 어떻게 저런 말랑한 메이브가 자라났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다비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언젠가 사실을 알고 공작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보다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에 다비드는 처음 메이브를 만났던 때부터 그 안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다비드의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공작의 얼굴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네 말은, 자네가 내 아들을 잡아먹었다는 건가?”

그 말뜻은 아니었으나, 공작이 듣기에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비드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그게 맞는 것이겠지.”

공작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의자를 탁탁 두드렸다. 그게 화를 삭이는 것 같았으나, 그 무거운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다비드는 공작의 기세에 죽지 않고 그저 그를 쳐다보았다.

언젠가는 이 사실을 공작 역시 알게 될 것이다. 다비드는 언젠가 그 신전을 무너트릴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하…… 그간 성년식에서 실종된 자들이 그곳에 있다는 말이겠군.”

공작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공작이 이 사실에 머리 아파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 안에서 당하고 살았던 지키지 못한 자들은 그 안의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와서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거고, 겨우 빠져나온 쟁취한 자들도 자신의 이름에 오물을 묻히는 것은 싫었을 테니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고.

그래서 그 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 진득하고도 더러운 곳 말이다.

다비드는 그 안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마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벗어난 뒤에 대한 이야기, 메이브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도.

“……갑자기 여행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만, 그런 일이 있었으니 잊고 싶었겠지.”

공작은 다정한 아비처럼, 마음이 아픈 듯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다비드는 그런 공작을 쳐다보며 그가 아놀드 가문의 알란에게 납치당한 것과 그가 납치되었던 공간이 이 저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것까지 말했다.

그에 공작이 화가 잔뜩 묻어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알란을 죽일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비드는 공작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공작의 화가 숨김없이 드러난 눈이 다비드를 향했을 때, 다비드는 메이브를 구하기 위해 에보니 아더와 했던 약속까지 그 입으로 꺼냈다.

공작은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사람이 필요했다면, 그자가 아닌 내게 와야 했다.”

그 말이 맞았지만 이곳까지 올 시간은 없었다. 아니, 다비드가 사실대로 말한다 해도, 에녹 공작이 그를 믿고 병력을 지원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은 메이브가 다비드의 품에 안겨서 이곳으로 들어왔기에 공작이 바로 믿는 것일 뿐, 만약 다비드가 그저 공작을 찾아와 도와 달라 말했다면 공작은 자기 아들로 거짓된 협박을 한다고 화를 낼 터였다.

다비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으로 내뱉진 않고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비드가 무뚝뚝하게 말하는 대답에 공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또한 알고 있었다. 만약 다비드가 메이브가 위험하다고 갑자기 찾아왔다면, 굳게 닫혀 기사가 지키고 있는 저 문도 넘지 못할 거라는 것을 말이다.

콘라드에게 편지를 받은 지 벌써 3개월이었다. 그간 소식 없이 어딘가로 여행하고 있는 아들이 걱정되었으나, 3개월 만에 도착한 편지에 험프리에 도착해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건강하게 잘 있다는 말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또다시 연락이 오지 않아 걱정은 했으나, 기다리다 보면 건강하게 어느 지역에 있다고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공작의 생각과는 달리, 그사이 메이브가 납치를 당해 험한 일을 당했다고 하니 그는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믿으면서도 그렇게 힘들었을 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또한, 메이브가 납치당한 곳이 마차를 타고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도착하는 곳이라 하니, 공작은 자신의 능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그 신전에 있는 동안 아이의 순결을 가져간 다비드가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메이브의 정신이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가 납치당한 메이브를 구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 자리에 앉게.”

다비드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없었다면 메이브가 힘들 것이었기에 공작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메이브가 누군가를 짓누르고 그자를 잡아먹었다 해도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를 닮았는지, 그 여린 성격에 결국 다른 이들부터 배려했던 아들의 행동에 공작은 그저 미안한 감정과 함께 그래도 아이를 잘 키웠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래, 자네가 에보니가와 서로 합의한 계약을 알겠네. 하지만 만약 그자가 내 아들에게 다시 모습을 보인다면 나 또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걸세.”

공작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는 다비드를 슬쩍 보며 말했다. 하지만 다비드는 그 말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에보니 공자가 그자를 놓지 않는다 했습니다만, 그 말을 계속 믿을 수는 없으니 말이죠.”

분명 에보니 아더가 알란의 힘줄을 잘라서라도 메이브에게 가겠다고 말했다. 다비드는 아더가 알란의 힘줄을 정말 자를 것이라 생각은 했으나, 사실상 그자는 알란에게 마음이 있었다. 다비드는 알란과 아더를 떠올리면 한순간에 테이블에 얼굴이 꽂아 기절했던 다니엘의 모습을 금방 되짚을 수 있었다.

그런 자에게 붙잡혔으니, 어떻게 해도 알란은 쉬이 빠져나오지는 못할 거였다.

이야기를 모두 끝낸 다비드가 공작을 쳐다보니, 공작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비드에게 몸을 숙였다.

“내가 공작인 것을 떠나, 한 아이의 아비로서 내 아들을 구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공작의 모습을 본 다비드는 되레 자신의 몸도 숙이며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그랬던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다비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공작이 몸을 바로 세우고 여전히 몸을 숙이고 있는 다비드를 내려다보았다. 공작은 왜인지, 그 모습이 자신의 아내를 얻기 위해 장인에게 몸을 숙였던 예전을 떠올리게 했다.

“왜 당연한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느릿하게 묻는 공작의 말에 다비드는 고개를 들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를 욕하셔도 괜찮습니다.”

“그 말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내가 정하겠네.”

다비드는 혹시 공작이 자신을 거부하게 될 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메이브를 사랑한다 해도, 그의 허락 없이 메이브를 데리고 떠날 수는 없었다. 결국, 눈앞에 있는 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의 부모였으니 말이다.

“제가, 메이브 님을 사랑합니다.”

다비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사랑한다 생각했다. 다비드는 자신의 품과 손에서 떠나는 메이브의 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이미 6개월간 그를 보지 못한 것도, 자신의 실수로 납치당한 메이브를 구하러 간 그 긴 시간도 말이다.

다비드는 다시는 메이브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계속, 함께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지금 눈앞의 장인의 허락을 받는 것이 우선이었다.

“제가 마음에 드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공작님이 만족스러워하실 때까지 노력할 테니, 제게 메이브를 주실 수 있습니까?”

다비드는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공작을 쳐다보았다. 공작의 표정에서 다비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보였다. 아마, 아버지로서 아이가 너무 빨리 품에서 벗어나는 것이 싫은 것 같았다. 메이브는 이제야 20살이었으니 말이다.

다비드도 그것을 알기에 마른침을 삼키며 공작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차라리 누군가와 죽도록 싸우는 것이 마음 편안하다고 느낄 정도로, 너무도 이 공간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났을 때, 공작의 입이 벌어졌다.

“내가 그 말에 대답을 못한다는 걸 알고 있나?”

다비드는 공작의 말에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 부모가 아무리 반대한다 해도 아이를 이길 수 있는 부모는 없다네.”

공작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종을 흔들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문이 열렸을 때, 시종이 티 트레이를 끌고 와 테이블 위에 티 잔을 내려놓았다. 따듯한 티가 담겨 있던 주전자를 기울여 공작과 다비드의 잔에 따듯한 차를 따라낸 시종은 할 일이 끝났다는 듯, 조용히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그 말은.”

“자네가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닌, 메이브가 결정할 일이지.”

공작은 잔을 들어 따듯한 김이 올라오는 차를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으니까 말일세.”

또다시 말하는 공작의 말에, 다비드는 그것이 허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공작에게 몸을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몸을 숙여 인사하는 다비드를 가만히 지켜보던 공작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 말을 듣기에는 아직 좀 빠른 것 같군.”

공작은 몸을 숙인 채로 일어나지 않는 다비드의 모습을 잠시 보다가 몸을 돌려 집무실 문을 열었다.

“되었네. 나와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메이브의 상태가 더 궁금할 듯하니, 이만 가 보시게.”

다비드는 숙였던 몸을 들어 공작을 한번 쳐다보곤 다시금 인사했다. 그리고 급하게 메이브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다비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생각보다 금방 자라고, 금세 품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알았으나, 자신의 생각보다 더 빨리 품에서 떠나갈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공작은 아쉬운 마음에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

그길로 다비드는 메이브의 방에 들어가 그가 일어날 때까지, 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품 안에 안겨 눈을 깜박이고 있는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보면 좋은 거잖아요.”

메이브는 다비드가 무엇을 회상하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집 근처에 감금당했다는 사실은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지만, 다비드의 말대로 근처였기에 더 빨리 조치를 취한 거라고 생각했다.

“콘라드는 괜찮은 건가요?”

메이브는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다비드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예, 생각보다 심한 고문을 받았는지, 몸에 상처가 많아 한동안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검사예요. 몸에 다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지요?”

메이브는 콘라드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피가 범벅이 되어 있고, 벌어진 옷 사이로 깊은 상처가 가득했던 몸을 말이다. 만약, 콘라드가 다시는 이 일을 하지 못한다고 듣는다면, 메이브는 정말 그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다행히도, 손과 발은 멀쩡하다고 했습니다.”

“네?”

“메이브 님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그저 걱정일 뿐이라고 말해 주고 싶네요.”

“아…….”

“콘라드는 금세 건강해질 겁니다. 치료하던 의원도 회복 속도가 일반인보다 빠르다고 말했으니까 말이죠.”

다비드의 말에 메이브는 그제야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콘라드에게 문제가 없는 것도, 그가 건강해진 것도 모두 다 말이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메이브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다 어정쩡한 자세로 팔을 들어 올리는 다비드를 보며 바보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황했는지 메이브를 내려다보면서도 품에 안을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에 메이브는 조심스럽게 다비드의 품에 안겼다. 다비드는 메이브의 행동에 잠시 두 손을 멈추었으나 금세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제, 그자가 아닌 저를 봐 주시면 안 됩니까?”

장난기가 묻어난 목소리였다. 정말로 봐 달라는 의미일 수도 있었고, 이제는 그 음울한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로 바꾸려는 듯한 느낌도 들기도 했다.

메이브는 다정한 다비드의 행동과 말투에 결국 작게 웃으며 그 품을 힘주어 마주 안았다.

“당신을 보니까, 제가 지금 다비드 님을 껴안고 있잖아요.”

“……이걸로 제가 만족하지 못 하겠어서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만족해하시는 건데요?”

메이브가 다비드의 가슴에 기대었던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연녹색 눈에 가득 채워지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걸 마주 보면서 눈을 살짝 접고 웃었다.

그런 메이브의 모습에 다비드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메이브의 어깨와 머리에 닿아 있던 손을 들어 올려 메이브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제게 키스해 주신다면 만족스러울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다비드가 다른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툭툭, 건들며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둥글게 휘어지는 눈가와 작게 올라가는 입꼬리는, 그가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보였다.

메이브는 결국 작게 웃었다.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했는데, 메이브는 만약 둘이 싸운다면 누가 먼저 지게 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사랑을 하기도 바쁜데, 언제 싸우는 것을 생각할까. 메이브는 다비드의 등을 감싸던 두 손을 들어 올려 다비드의 얼굴을 감쌌다.

“정말 그걸로 만족해하시는 거죠?”

메이브는 장난기가 뒤섞인 얼굴로 웃으며 다비드의 얼굴을 붙잡고 더더욱 다가섰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 가까운 거리에서, 잠시 메이브가 멈추어 서서는 다비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다비드가 낮게 탄식했다. 메이브를 쳐다보던 그 다정한 눈빛에 진득한 감정이 묻어났을 때, 메이브는 고개를 내밀어 다비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지금까지 거칠면서도 투박하다고 생각했던 입술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어쩐지, 이렇게 먼저 키스하는 것이 부끄러워 내밀었던 얼굴을 뒤로 물리려 했다.

하지만 다비드는 손을 뻗어 메이브의 뒤통수를 붙잡곤 물러나려던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아……!”

놀라 벌어진 입술에 다비드는 입을 맞추었다. 벌어진 그 틈에 혀를 집어넣고 그 여리고 작은 입 안을 헤집었다. 속에서 돌처럼 굳은 것 같았던 메이브의 혀가 느릿하게 움직이더니, 다비드의 혀에 얽히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탐하고 탐했다. 다비드의 진득하고 깊은 키스에 메이브는 점점 숨이 가빠 오는 것을 느꼈다.

숨 막히듯 깊은 키스에 묻어나는 그의 감정에 메이브는 점점 몸이 들뜨는듯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가빠지는 숨을 계속 참고 있기가 힘들었다.

결국 메이브가 다비드의 얼굴을 붙잡고 뒤로 밀어내며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을 떨어트렸다.

“하아…… 하아.”

메이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아하아, 야하게 숨을 내뱉는 메이브를 바라보던 다비드는 그 모습이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메이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키스할 때는 코로 숨을 쉬어야죠.”

웃음기가 묻어 있는 다비드의 목소리에 메이브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키스 잘해서 좋겠어요. 많이 해 보셨나 봐요?”

툴툴거리며 입을 살짝 내민 메이브가 다비드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의 몸을 끌어안고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해 봤죠.”

“…….”

“당신한테요.”

“네?”

다비드와 키스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많이 한 것도 아니었다. 메이브는 이해를 하지 못해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다비드가 그의 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잠든 메이브 님께 했습니다.”

“……정말 변태예요? 자는데 왜 괴롭혀요?”

메이브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다비드를 올려다보았다. 자는 동안에 그가 어떻게 해도 알지는 못한다지만, 그렇다고 자는 사람을 괴롭힌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말이다. 메이브는 어쩌면 신전에서 한 번씩 야한 꿈을 꾸었던 게 다비드가 키스하면서 괴롭혀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눈을 뜨고 있을 때 제게 키스를 해 주진 않으시잖습니까?”

“네? 아니…… 그때는…….”

“지금도, 하다 말고 끝냈잖습니까.”

메이브는 입을 달싹거리며 할 말을 잃은 듯 다비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벌겋게 변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다비드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키, 키스하면 만족한다면서요.”

너무 부끄러워 메이브가 말을 돌리려 다비드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비드는 쉬이 벗어나려는 메이브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제대로 하려고 했는데, 도망갔잖아요?”

살짝 웃으며 볼을 두드리던 손으로 메이브의 얼굴을 들어 올린 다비드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당황해하는 메이브의 표정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제가 만족할 때까지 키스, 해 주실 거죠?”

“…….”

“안 해 주실 건가요?”

다비드는 메이브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다비드의 타액인지, 아니면 메이브의 타액인지, 어쩌면 서로 뒤섞여 있을 타액을 쓸었다. 손끝으로 짓누르듯 아랫입술을 문질러 닦으며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고른 치아를 지문으로 문지르며 다비드는 입을 열지 않는 메이브를 내려다보다 눈을 접고 웃었다.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실망한 것처럼 슬픈 얼굴로 축 처진 표정을 짓는 다비드에 메이브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연기를 했으면 연기 대상을 쉽게 받을 것 같았다.

메이브는 작게 입을 열고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벌어진 입 안으로 입술 주변과 치아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한 번에 들어왔다.

“제 키스가 싫으면, 저를 때리세요.”

다비드가 상체를 굽히고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다비드를 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도 그것을 알기에 싫으면 때리라고 말하는 걸 거였다. 메이브는 정말, 먼저 사랑하면 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때리고 싶어도 못 때리잖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눈앞에 있는 다비드를 사랑한다는 것도 알았고, 그와의 키스가 싫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메이브의 입술에 다시 다비드의 입술이 닿자, 입 안으로 들어왔던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오롯이 쳐다보고 있는 저 눈을 바라보며 메이브는 처음부터 다비드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하면 싸운다고? 아마, 그에게 계속 지느라 싸우지도 못할 것 같았다.

메이브는 다비드의 시선을 마주 보며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입술에 닿는 따듯함과 자신의 볼과 등을 감싸는 그 투박하면서도 단단한 손길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메이브는 다비드와 키스를 하며 감았던 눈을 떴다. 단 한 번도 눈을 감고 있지 않은 것처럼 뜨고 있던 그 눈을 바라보며 메이브는 결국 바보처럼 소리 없이 웃었다. 그마저도 입 안에서 손가락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혀에 웃음도 먹혀들어 갔지만 말이다.

짧게는 몇 분, 어쩌면 몇십 분은 키스한 것처럼 길고 긴 시간이 지났을 때, 서로 맞닿고 있던 입술이 서서히 떨어졌다. 입 안에 고인 타액을 삼켜 낸 메이브는 자신의 입술과 다비드의 입술 사이에 긴 은사로 연결된 타액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툭, 끊어진 은사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비드는 한 번 더 짧게 메이브의 입술에 키스를 하곤 몸을 바로 세웠다.

“사랑해요, 메이브.”

다정한 저 음색을, 어쩌면 평생 좋아할 것 같았다. 메이브는 머뭇거리다 손으로 자신의 볼을 긁으며 다비드의 얼굴을 보던 고개를 살짝 돌렸다.

“저도…… 사랑해요.”

우물우물, 입술을 움직이며 하는 말이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꼭 밖에서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아니, 분명 자신은 옷을 입고 있는데도 다비드의 시선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보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걸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따듯한 품에 안겨 눈을 슬며시 감았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저 따듯한 살 내음도 좋았고, 온몸을 두드리듯 쓸어내리는 저 손길도 좋았다.

“메이브 님.”

“……네?”

“같이 사는 곳은 역시, 사람 없이 한적한 숲의 오두막이겠죠?”

뜬금없이 다비드가 묻는 말에 메이브는 신전에서 그에게 했던 자신의 말을 다비드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메이브는 다비드를 쳐다보며 크게 웃었다.

“푸흐흐, 네. 한적한 숲속에 있는 오두막이요. 근처에 호수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호수 말입니까?”

“네, 물고기도 잡고, 수영도 하고. 괜찮지 않아요?”

메이브는 벌써 미래가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사람 없는 한적한 숲에서 생활하는 것 말이다. 물론 자급자족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도, 다비드도 귀족이었으니 서로 그런 곳에 산다고 해도 음식 재료는 사람을 시켜 가져와 달라고 해도 괜찮으니까 말이다.

아마, 평안한 시간일 것 같았다. 숲속은 금세 어두워지니 조금 이르게 잠이 들고, 환하고 조용한 곳에서 노랫소리 같은 새의 우는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고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아침을 해서 같이 웃으며 나눠 먹고, 한 번씩 산속을 산책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 다른 것을 하고 싶다면, 호수에서 같이 씻고, 수영을 하며 즐기는 것도 말이다.

아, 그 근처에서 모닥불을 피워 생선을 구워 먹는 상상도 즐거웠다.

“예, 메이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요.”

그 다정한 말투에 메이브는 온몸에 행복이 가득 들어차는 것 같았다. 어쩌면 신이 이제야 길고 긴 가시밭길을 벗어난 자신에게 선물을 내려 주는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살짝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다비드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러곤 쿵쿵 뛰는 그의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게 무엇이라 해도, 제가 이뤄 드리겠습니다.”

더불어 등을 두드리는 다비드의 다정한 손길을 한껏 느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어쩌면 오두막에 갔다가 힘들다고 금세 뛰쳐나올지도 모른다. 또, 마음에 들어 정말 그곳에 정착할지도 모르고.

그게 무엇이 되었다 해도, 결국 하나의 추억은 생기는 것이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입을 달싹였다.

“……사랑해요, 정말로.”

처음 ‘마이 홀’을 읽으면서 다비드가 힘들어했을 때 같이 아파했는지도 모른다. 글이라 생각했던 그가 너무 눈에 밟혔고, 그의 감정과 서사에 같이 눈물을 흘렸다.

메이브는 그때부터 다비드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던 그 순간부터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메이브의 몸에 들어왔을 때 싫었는지도 모른다. 다비드를 괴롭게 했던 자였으니까. 하지만 결국 그 몸에 들어와 다비드를 만날 수 있었고, 그에게 순결을 바치면서 그와 함께할 수 있게 된 거니 말이다.

“저도 사랑합니다.”

메이브는 다정한 다비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따듯한 그의 품에서 그의 향기를 맡고 있는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금, 난 너무 행복했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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