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납치 (15/18)

05. 납치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배에서 생활한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메이브는 눈을 뜨고 감으면 하루가 지나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메이브가 또 도망갈까 봐 다비드는 그가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정말 방 안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지냈다면 이미 반쯤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침대에서 일어나면 다비드가 있었다.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면 관계를 하느라 바빴다.

체력적으로 힘이 들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절하기를 몇 번, 한번은 해가 떠올랐기에 아침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를 기절하고 일어난 적도 있었다.

드디어 배가 에보니 영지에 선박하고 멈추어 섰을 때가 돼서야,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그마저도 메이브가 두 발로 걸어서 나간 것은 아니었다. 이미 두 다리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덜덜 떨려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렇기에 다비드가 예전의 신전에 있을 때처럼, 메이브의 몸을 안아 들고 배에서 느릿하게 빠져나왔다.

“오늘은 날씨가 좋군요.”

다비드의 목소리에 긍정하고 싶어도, 밤새, 아니 몇 날 며칠을 쉴 틈 없이 했던 관계에 목은 잔뜩 고생해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쇠를 긁어내듯 듣기 싫은 목소리만 흘러나올 것이 분명해, 메이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열이 오르는 얼굴을 다비드의 가슴께에 기대어 숨겼다.

“그러고 보니, 대륙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여행했다기보다는 다비드로부터 숨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였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하기에는 양심에 찔렸기에, 메이브는 다시 한번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그러면 이번엔 저희 영지로 가시죠. 아마 메이브 님이 좋아하실 겁니다.”

흔들리는 나무 발판을 밟고 내려가는 다비드의 품에 안겨 있던 메이브는 두 팔을 다비드의 목에 감았다.

실베스타 영지는 한 번쯤은 정말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마이 홀’에서도 산림이 가득하고 자연 경관이 좋다고 서사되어 있을 만큼 궁금하기도 했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삽화로 그림이 얼추 그려져 있었으나, 영지의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 다비드를 따라서 그의 영지로 향하면 실베스타 영지는 글로 본 것이 아니라 눈으로 처음 본 것이니 기대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말 가게 되면 더는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메이브의 감이 소리치는 듯했다.

메이브는 다비드의 품에 파고들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눈앞의 다비드를 한번 쳐다보다가 입을 벌렸다.

“……그전에…….”

쇠 긁는 듯한 목소리에 메이브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심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나, 말을 하고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고 갈라지다 못해 너무도 작은 목소리였다.

“제…… 호위 기사를 찾……아야 할 것 같아요.”

다비드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반년이 넘은 시간 동안 메이브를 찾아다니던 다비드에게서 또다시 도망간다 해도 붙잡힐 것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번에도 그에게서 도망간다 해도 그가 눈앞에 저절로 그려져 힘든 것은 메이브일 테니 말이다.

도망가다가 결국 그 마음을 알아 버린 이상, 더 피하는 것은 우스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이건 이거였다.

콘라드가 사라진 지 벌써 시간이 오래 흘렀다. 그사이에 에녹가에서 다른 기사를 보낸 것도 아니니, 분명 그의 신상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였다.

“그러니…… 실베스타 영지는 다음에 가요.”

메이브는 작게 몸을 움직였다. 오늘 새벽까지도 괴롭혀졌던 몸에 욱신거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허리는 지끈거렸고, 팔다리에는 힘이 없어 가늘게 떨려 왔다. 있는 힘, 없는 힘을 끌어모아 다비드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있는 것이 메이브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메이브는 한편으로 다비드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도, 그가 자신의 말을 들어 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자를 찾으면, 저와 함께 갈 겁니까?”

이번에 다시 다비드가 물었을 때는 실베스타 영지로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가자고 말하는 그 말이 좀 더 강조가 되듯 말했다.

왜인지 메이브는 다비드가 하는 말이 그것이 어디라 할지라도 함께 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곳에서 언제까지 있을지는 메이브도 몰랐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곳에 묶여 있다가 정말 생각했던 힐링 라이프를 즐기다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언젠가는 돌아갈 수도 있었다.

메이브는 차라리 그런 걱정을 할 시간에 아쉬운 사람이 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쉬운 것이 다비드가 아니라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네.”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메이브는 왜인지 처음으로 배 터지게 밥을 먹은 것처럼 온몸이 나른하고 만족스럽다고 느꼈다.

“그럼, 그자를 먼저 찾아야겠군요.”

다비드는 항구에서 벗어나 분수대 쪽에 메이브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메이브가 차가운 분수대의 돌벽을 붙잡고 아픈 몸에 힘을 풀고 멍하니 앞에 서 있는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다비드는 무언가 고민하는 얼굴로 잠시 서 있다가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마지막에 사라진 게 언젭니까?”

“3개월…… 정도 지났어요.”

“무엇을 하러 간 건지는 알고 있습니까?”

“……에녹가에,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안부 연락을 보내기 위해 에보니 영지에 다녀온다는 것까지요.”

“그렇다면 험프리에서 에보니 영지까지는 배로 일주일 정도 걸리는 거리이니, 그가 사라진 지는 2개월 하고 보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는군요.”

다비드의 말에 메이브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따진다면 2개월 하고 24일 정도의 시간이 비는 것이다. 하지만 험프리에 오는 배의 선원에게 물어보았던 그때를 떠올려도, 분명 배가 침몰하거나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 콘라드는 이 에보니 영지에 도착하고 나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다. 머리를 최대한 굴려도 그가 갑자기 에녹가로 향했다가 다시 에보니 영지에 돌아올 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분명 콘라드가 ‘이 주일 정도 자리를 비울 테니 그동안 조심히 있으세요.’라는 말과 함께 떠났으니 말이다.

그 말을 지키려면 정말 에보니 영지에 도착해서 편지를 부치고 그대로 배를 타고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었다. 만약 그가 에녹가까지 다녀올 거였다면 떠나기 전 메이브에게 한 달 정도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면…….”

다비드가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메이브를 쳐다보며 말을 늘어트렸다.

“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이곳에서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말을 하면서도 메이브가 또다시 도망을 갈까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 메이브는 헛웃음을 지으며 갓 태어난 짐승처럼 떨리는 손을 들어 다비드의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어차피…… 이 상태론 어디도 못 가요.”

떨리는 다리로 걸으면 얼마나 걸어갈 수 있는지가 더 문제였다. 아마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바닥에 엎어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메이브는 그래도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다비드의 얼굴에 자신이 했던 잘못을 떠올리며 그가 믿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떨리는 손을 움직여 여전히 가늘게 떨고 있는 다리를 가리키고는 둥근 무릎에 손을 내려놓았다.

“걷다가 넘어지는 걸 좋아하지는 않아요.”

이렇게 걷기도 어려울 만큼 괴롭히지 않았냐고 무언의 압박처럼 말했다. 그에 다비드의 시선이 메이브의 다리를 한번 향했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혹시 다른 이한테 시비가 붙을 수도 있으니, 근처에서 제 일행이 메이브 님을 지켜 줄 겁니다.”

“네?”

“금방 다녀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세요.”

그 커다란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듯이 쓸어내린 다비드가 몸을 돌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브는 헛웃음을 지었다.

근처에 일행이 있고, 그자가 메이브를 지켜 준다는 말은, 이곳 어디에서 다비드의 사람이 메이브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과 같았으니 말이다.

메이브는 허탈하게 웃으며 분수대에 앉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어차피 사람이 붙어 있는데, 저렇게 걱정하면서 가는 다비드가 귀여우면서도 그렇게까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서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만나러 오겠다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갔으니 메이브가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대놓고 사람이 있다고 말하니 기분이 묘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누가 지켜보고 있다고 말해 주는 다비드가 고맙기도 했다. 만약에 말하지 않았다가 알게 되었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기분이 상했을 테니 말이다.

뚜벅뚜벅.

진흙탕에 뒹굴고 바닥을 질질 끌고 오는 듯한 구두 굽 소리가 귓가에 거슬리게 들려왔다. 진득한 무언가가 묻은 신발을 바닥에 끌고 올 때의 그 찐득한 소리가 들려오자, 메이브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분명 주변의 사람은 많았고, 그 작은 소리가 크게 들릴 일 없는데도, 커다란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그 소리가 남은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

꼭 그것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다에 빠져서 누가 발목을 움켜쥐고 잡아끄는 것처럼 말이다.

뚜벅. 찌익. 뚜벅.

신발 끄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꼭 그 소리가 차츰 메이브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메이브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기분에 분수대 돌벽을 움켜쥐었다. 일어나고 싶어도 힘이 하나도 없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일어나면 바닥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메이브는 턱턱 막혀 오는 숨을 몰아쉬고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수많은 인파가 이리저리 움직였고 그 안에서 소음이 종종 들려왔으나, 그 기분 나쁜 소리는 계속해서 메이브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

메이브는 두 손에 힘을 주고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했다. 다비드가 분명, 떠나기 전 이곳에 자신의 사람을 두었다고 말했다. 메이브는 그 사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 괜찮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오스스, 팔과 다리에 서늘한 공기가 갑자기 몰려오는 것처럼 소름이 돋아났다. 메이브는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리고 그게 허상이 아니라 진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메이브는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금빛이 살짝 도는 갈색 머리카락이 살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짐승과도 같은 그 노란 눈동자가 오롯이 메이브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굳게 다물어진 것 같았던 입술 끝이 천천히 말려 올라가는 게 보였을 때, 메이브는 자신의 몸에 힘이 없다는 것도 잊고 분수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두 다리는 이리저리 흔들렸고, 긴장감에 떨리는 몸은 쉬이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도망가야 해.’

머릿속에 적색 신호가 깜박이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벗어나 어딘가에 있을 다비드를 찾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점점 익숙한 그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메이브는 홀린 것처럼 고정되어 있던 몸을 돌려 다비드가 자신에게 붙여 주었던 자를 찾으려 했다.

그런 메이브의 눈에 골목으로 끌려가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 저 사람이 다비드가 붙여 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망갈 수 없어.’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수 없었다. 메이브는 이 순간, 오늘 새벽에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고 허리를 흔들었던 다비드를 속으로 욕했다. 그리고 골목으로 끌려가던 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서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자를 쳐다보았다.

“……알란.”

그가 어떻게 신전에서 빠져나온 것인지 알지는 못했으나, 저 얼굴 저 미소는 메이브의 머릿속에 똑똑히 기억에 남았다.

즐거운 장난감을 찾았다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다가온 알란은 메이브의 코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자 포악한 짐승에 목덜미가 물려 곧 죽어 버린 초식 동물이 된 것처럼, 목덜미에서 흘러내린 땀이 등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안녕, 우리 오랜만이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가 메이브의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메이브는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란을 쳐다보면서도 그가 이리저리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아니, 알란을 쳐다보고 있는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려서 그가 저렇게 흔들려서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주춤, 메이브가 힘없는 다리를 움직여 뒷걸음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곧 관절이 굽혀져 바닥에 넘어지려는 찰나에 알란이 손을 뻗어 메이브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 그의 두꺼운 팔뚝에 몸이 가둬져 주저앉지도,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을 때 알란은 몸을 살짝 숙여 메이브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만날 거라고 말했잖아. 그래서 내가 아주 그리웠어?”

“……웃기는 소리.”

“오, 그동안 사랑을 많이 받았나 보네? 목소리가 잔뜩 쉰 걸 보니까.”

“…….”

“하긴, 씹질이 좋기는 하지?”

질 나쁜 말을 하는 알란의 목소리에 메이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그의 살이 닿은 부분이 꼭 뱀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기분 나쁘고 소름 끼쳤다.

근데 참 웃기지 않는가. 그렇게 운동을 하고 몸을 키웠는데도 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말이다.

“널 위해 준비한 공간이 있거든. 같이 가야지.”

“제가…… 왜 당신이랑.”

“안 그러면 네 사람, 그냥 내가 죽여 버릴지도 모르잖아?”

알란의 말에 메이브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알란이 신전에서 어떻게 나왔는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메이브가 찾으려 했던 자가 알란에게 붙잡혀 있는 걸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혹시 알란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사냥개는 그런 자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장난 섞인 두 눈은 불에 담긴 것처럼 흉흉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아니, 지금 알란에게 콘라드가 붙잡혀 있는지도 몰랐다. 정말 그 눈은 흥미로 얼룩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사람 목숨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하는 알란의 행동에 메이브는 입을 벌렸다 다물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알란은 다른 손을 움직여 메이브의 얼굴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좋게 말할 때 가야지. 안 그러면 내가 널 힘들게 할지도 모르잖아.”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메이브는 즐거워 보이는 알란의 모습에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꼬리를 물고 시간을 끌면 다비드가 도착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메이브의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알란은 메이브를 내려다보면서 억지로 그 몸을 끌어당겼다.

“재미있으니까.”

그 말 한 마디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다비드와 함께였을 때는 온몸에 달큼한 열이 올라왔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알란과 이야기할 때에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처럼 뜨거운 열이 올라왔다.

“재미있…… 하, 재미있다고요?”

재미, 그놈의 재미가 무엇인데 이렇게 사람을 진흙탕에 넘어트리는 기분을 들게 하는 걸까.

정신없던 그 와중에 고통스러운 것을 즐거워했다는 그 말, 맛있게 먹는다는 그 말, 보채지 않아도 먹여 주겠다는 그 말이 메이브의 머릿속에 동동 떠올랐다.

그때는 그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기에는 너무 힘들었고, 두 사람을 받아들이기에는 고통스러웠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또렷이 알 수 있었다. 그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메이브는 고개를 들어 올려 알란을 노려보았다.

“분명…… 그때 말했잖아요. 그때 한 번 박게 해 준 걸로 다시는 엮이지 말자고.”

말을 하면서도 화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빠득빠득 이를 갈며 노려보아도 더더욱 즐거운 얼굴로 웃고 있는 알란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말했지. 다시 만나자고.”

마지막에 그 거대한 홀에서 빠져나올 때 보았던 알란의 입 모양이 떠올랐다. 분명 그렇게 말한 것 같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정말 만나러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니라, 메이브의 사람까지 납치해 그자의 목숨으로 협박을 할 거라고도 말이다.

“저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잔뜩 쉬어 버린 목 때문에 말을 하면 할수록 날카로운 무언가가 목구멍 안쪽을 헤집는 것 같았다. 따갑고 이러다 피를 토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 말이다.

“바라는 거라. 그냥 지금처럼만 있어도 괜찮은데.”

“그럼……!”

“근데.”

알란은 메이브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살살 굴리는 알란의 손가락에 메이브의 머리카락이 엉켰을 때, 그는 메이브의 머리채를 붙잡아 잡아당겼다.

메이브의 얼굴이 꺾여 올라가자, 알란은 메이브의 목선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둥근 귀에 작게 속삭였다.

“머리 굴리는 거 다 보여.”

“…….”

다비드가 올 때까지만 기다리려던 것이 무색하게, 알란은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로 메이브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의 손에 잡혀 있는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당겨져 두피에서 뜯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따갑고 아파 오는 머리에 두통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눈에 눈물이 맺혀 왔고, 더 이상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메이브의 시선에 닿은 알란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으며 메이브의 몸을 들어 올렸다. 운동을 그렇게 많이 해서 덩치를 키우면 뭐 하나. 어차피 가벼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다비드와 알란이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데 말이다.

메이브는 알란의 어깨에 짐처럼 들려서는 다비드가 앉혀 주었던 분수대에서 점차 멀어졌다. 메이브가 그에 입을 크게 벌리고 살려 달라 외치려는 찰나, 알란의 손가락 세 개가 메이브의 반쯤 벌어진 메이브의 입 안으로 억지로 벌리며 들어왔다. 그렇게 목구멍 깊은 곳까지 들어온 손가락에 메이브가 헛구역질을 하며 몸을 버둥거렸다.

그런 메이브의 몸을 힘으로 누른 알란은 고개를 살짝 돌려 메이브에게 속삭였다.

“그러면 재미없어. 어차피 갈 거 편하게 가자. 응?”

알란에게 짐짝처럼 들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반항조차하지 못하는 인형처럼 들려 어디론가 향하면서 드는 생각은 오롯이 하나였다.

아, 다비드가 또다시 화나겠구나.

그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정말 이러다가 화가 날 대로 난 다비드를 보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가면 즐거울 테니까.”

헛구역질이 올라오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진득해졌다. 지켜 준다고 했던 자들은 이미 알란이 손을 써 놓은 건지, 아니면 다비드와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한 건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메이브는 힘없는 몸에 힘을 주면서 입을 틀어막은 알란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얼마나 힘이 강한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손에 메이브는 결국 포기하고 짐짝처럼 들려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더더욱 서러운 것은, 분명 이렇게 납치당하듯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다른 곳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조금만 도와주었더라면, 어차피 알란 혼자였으니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시간만 끌어준다면, 다비드가 올 텐데…….

“그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 하는지 보이는데.”

“……우욱.”

“다비드가 너를 구하러 올 것 같아? 구하러 오기는 늦었어, 메이브.”

느릿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꼭 뱀과 같았다. 발끝부터 몸을 휘감으며 올라오는 커다란 뱀이, 목에 그 커다란 몸통을 칭칭 감아 숨을 못 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될 거라 생각했다면, 아니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했다면 도망 따위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메이브는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한 콘라드에게 미안했고, 분수대에서 자신을 기다리라며 함께 콘라드를 찾고 어디론가 가자 말했던 다비드에게 미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오늘까지 괴롭혔던 다비드의 두 팔을 붙잡고 이번만 쉬게 해 달라고 했을 것이다.

떨리는 두 다리를 흔들어 알란의 등을 때려고,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알란의 모습에 도망가려던 의지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제 나랑 재미있게 놀아 보자고.”

사람들의 사이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 메이브는 반항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이 없었다.

차라리 다비드가 어딘가를 향할 때 같이 가 달라고 매달릴 걸 그랬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지켜 줄 거라 말한 사람을 옆에 서 있게 해 달라고 말할 걸 그랬다.

뒤늦게 후회해도 결국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

한편, 다비드는 정보 길드에 들어가 3개월 전 험프리에서 에보니 영지에 도착했던 콘라드에 대한 정보를 사고 있었다. 주머니에 있던 금화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으니, 그렇게 중요한 귀족이 아닌 평민이었던 콘라드의 정보는 생각보다 싼값에 얻을 수 있었다.

다비드에게 종이를 건네는 정보원은 의자에 앉아 무심하게 종이를 넘기는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6개월 전, 에보니에 도착했고 살르반 주점에서 식사했습니다. 그 뒤 배를 타고 험프리 섬으로 넘어갔죠.”

“제가 알고자 하는 건 그런 정보가 아닙니다. 그가 3개월 전 이곳에 도착한 뒤 사라진 정보를 얻고자 찾아온 겁니다.”

다비드의 말에 정보원은 손가락을 말아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다비드는 그 모습에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더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정보원은 다비드가 내려놓은 금화를 얼른 가져가 살펴보고 품 안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일반 금화 한 개로는 부족한 정보라서. 백금화 1개는 주셔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품 안으로 금화 하나를 넣고 나서도 탐욕을 숨기지 않는 정보상의 모습에 다비드가 의자에 편하게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았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고작 백금화 한 개 정도는 집어던져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평민 기사 하나의 정보가 백금화 한 개의 가치까지 올라갔다는 말은 귀족 하나가 엮여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계급 낮은 놈이 아닌 생각보다 직위가 있는 놈이 말이다.

“아, 제가 비싸게 받는 건 아닙니다.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지금 고객님이 바라시는 정보가 백금화 1개의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 정보니까 말이죠.”

살살 웃으며 테이블에 두 손을 깍지 끼고 내려놓는 정보원의 모습에 다비드는 헛웃음 짓고는 품에 있던 무거운 주머니를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여상하게 웃던 정보원이 손을 뻗어 주머니를 열고 안에 있는 수많은 백금화의 양에 마른침을 꿀꺽 소리 내며 삼켰다.

“이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금액을 확인하던 정보원의 눈이 빛났다. 두 손으로 주머니를 빼앗기기 싫다는 듯 붙잡은 정보원은 다비드를 쳐다보며 웃었다.

“바라시는 정보에서 추가로 더 알려 드리도록 하죠.”

정보원은 서랍을 열어 다비드가 건네준 주머니를 집어넣고는 탁, 소리 내며 서랍을 닫았다.

“6개월 전 험프리 섬으로 갔던 콘라드는 3개월 전 다시 에보니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니, 다른 정보를 알려 주면 좋겠군.”

“그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켈레 우편회로 향했죠.”

정보원이 말하고 있는 정보는 메이브가 말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메이브 역시 그자가 에녹가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부치러 에보니로 향했다고 말했으니까.

“켈레 우편회에서 에녹가에 편지를 보내고 나온 그가 다시 험프리로 돌아가기 위해 뱃삯을 냈습니다만.”

“타지 못했고.”

“네.”

거기까지 알고 있었냐는 듯 다비드를 쳐다보던 정보원은 곧 수많은 종이가 모여 있는 곳을 헤집으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항구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은 살르반 주점이었죠. 그게 공작가의 장자와 도날드 콘라드, 당신이 원했던 자가 처음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나기 전에 식사를 한 곳 말이죠.”

서류 사이에서 원하는 종이를 찾은 정보원은 그걸 다비드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켈레 우편회부터 콘라드를 미행했던 자가 있었고요.”

“말을 길게 늘어트리는 건 시간이 아까우니, 제대로 된 정보를 말해 주면 좋겠군.”

굳이 그가 어디서 편지를 보냈고, 어디서 식사를 했는지 필요 없는 정보에 시간을 투자하기는 아까웠다.

특히나 분수대에 두고 온 메이브의 모습이 떠올라 다비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근처에 메이브를 지킬 수 있는 실력 좋은 놈들을 두었으나, 왠지 불안한 감각이 느껴졌다.

“살르반 주점에서 배를 타기 위해 나온 콘라드는 곧 납치당했습니다. 그리고 그자를 납치하게 시킨 자는 아놀드 알란, 아놀드 가문의 차남이죠.”

“……잠깐. 누구라고?”

“아놀드 알란이요. 그자는 자신의 사람을 시켜 콘라드를 자신의 별장 지하 감옥에 가둬 놓았습니다. 또한 아놀드 알란은 콘라드를 납치한 후에도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이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정보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비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메이브가 위험했다. 자신이 아무리 실력 좋은 자들을 배치해 놓고 왔다 해도, 알란 역시 혼자서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다비드가 급히 몸을 돌려 나가려 할 때 정보원의 말이 이어 갔다.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네요.”

추가금을 많이 받았으니 서비스로 알려 주겠다고 말하는 정보원은 문을 열고 있는 다비드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데려왔던 에녹가 가문의 장자가, 아놀드 알란에게 납치되었다는군요. 빨리 가시면 잡으실 것 같습니다.”

“……제기랄.”

다비드는 문을 박차고 나가 메이브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던 분수대로 뛰어갔다. 낡아 빠진 건물에서 나와 분수대에 도착했을 때에는, 메이브의 흔적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보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왔으나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곳에서 메이브의 검은색 머리카락도, 금빛이 감도는 사냥개의 거친 머리색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골목길에 숨어서 쥐새끼처럼 도망가는 건가 싶어 다비드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하…….”

골목 안으로 들어온 다비드는 자신의 종이 갈기갈기 찢겨 죽어 있는 시체를 마주 볼 수 있었다. 혼자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설마 자신의 종도 이렇게 죽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다비드는 골목 안에서 흉흉하게 빛나는 눈을 한 채 입을 다물었다.

알란이 메이브를 납치하듯 데리고 갔으니, 걸어서는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차를 타고 나갔을 거다.

아마도 정보원이 말했던 콘라드가 갇혀 있는 알란의 별장으로 메이브를 데려갔을 것이다.

다비드는 멍청하지 않았다. 알란이 메이브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으니 메이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멍청하게 그대로 메이브를 구하겠다고 알란의 사람이 가득한 별장으로 뛰쳐나갈 생각은 없었다.

다비드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람을 데리고 알란을 치면서 그 안에 있던 콘라드까지 구해 내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다만, 다비드는 자신이 아닌 그 볼품없던 사냥개가 메이브를 건드릴 거라는 사실 하나에 눈앞이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다비드는 화를 조용히 삭이며 종의 시체를 두고 급히 걸음을 옮겼다.

에보니 영지에서 실베스타 영지까지 향했다가 다시 알란의 별장까지 가는 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최대한 빠르게 메이브를 다시 데리고 올 생각을 하는 다비드의 얼굴은 일그러져 화가 난 것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알란.”

그때 차라리 끝냈어야 하는 인연이었다. 마지막까지 더는 엮이지 말고 메이브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말했건만, 끝까지 따라와 메이브를 데리고 간 그의 행동에 다비드는 비릿하게 웃었다.

멍청한 사냥개의 목을 부러트릴 방법은 생각보다 많았으니 말이다.

***

알란에게 붙잡혀 짐처럼 들려가던 메이브는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 안에 집어던져졌다. 의자에 등과 머리가 부딪혀 욱신거리는 고통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메이브를 가만히 쳐다보던 알란은 마차에 올라타 마부가 앉아 있는 자리를 손으로 쿵쿵, 두드렸다.

마차가 서서히 출발하자 알란은 메이브의 옆구리를 발로 밟으며 웃었다. 마치 마차 바닥에서 고통으로 몸을 떨고 있는 메이브가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져 기분이 좋은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결국 네가 바라던 그놈이 널 구하러 오지 못했네?”

알란이 구두 굽으로 메이브의 옆구리를 살살 누르며 문질렀다. 메이브의 셔츠가 신코에 구겨져 허리가 드러나자, 알란은 셔츠 안으로 신발을 집어넣어 셔츠를 위로 들어 올렸다.

의자에 부딪혔던 살갗은 붉게 물들었고, 고통에 두 팔을 움켜쥐며 떨고 있는 메이브를 내려다보던 알란은 다른 발을 움직여 메이브의 앞섶을 슬며시 문질렀다.

“그가 구하러 올 거라고 생각해? 메이브?”

대답 없이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는 메이브의 모습에 알란은 눈을 빛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메이브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통에 찡그러진 표정이 생각보다 야했다. 알란은 아래에 뜨듯한 열기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엎어져 있던 메이브의 몸을 바로 세워 앉혔다. 그러나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힘들어하며 금세 바닥에 엎어질 것처럼 보이는 그의 가슴을 밟아 밀어내며 의자에 등이 닿아 움직이지 못하는 메이브의 모습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런, 대답해야지.”

“흐…….”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니 알란은 기분 나쁘게 낄낄 웃으며 반쯤 발기하는 메이브의 성기를 신코로 문질렀다.

“이런, 역시 고통을 쾌감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아니면 내가 씹질 해 주기를 기다리는 건가?”

알란은 상체를 살짝 숙이고 메이브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신전에서도 흥미롭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와 달리 잘 익은 과실처럼 보이는 메이브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도망가듯 모습을 감추었기에 아쉽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알란이었다. 하지만 다비드가 메이브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알란은 그보다 더 빨리 메이브를 찾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알란은 생각보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곰 새끼를 엿 먹이기 위해 에보니 영지로 향했을 때 켈레 우편회에서 에녹가에 편지를 부치는 콘라드를 만났으니 말이다.

그때 알란은 이곳에서 죽치고 있으면 언젠가 메이브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그 구질구질한 영지에서 3개월이나 기다렸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물에 대한 보상을 얻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응? 대답해야지.”

대답하지 않자, 알란은 메이브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당겨지는 머리카락에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느라 벌어진 메이브의 입 안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깨물면 제발 씹질 해 달라고 부탁할 때까지 맞게 될 거야. 메이브.”

“……끄…… 흐.”

손가락 두 개를 억지로 입 안에 넣은 알란은 배려 없는 행동으로 메이브의 입 안을 희롱했다. 손가락을 목구멍까지 집어넣었다가 빼내기를 반복했다. 알란의 손가락이 메이브의 타액으로 번들거렸고,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술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알란은 점점 발기하는 성기를 신발로 내리눌렀다.

“누가 성기를 이렇게 밟아 주는 게 좋아? 아니면 숨 막히듯 입 안을 쑤셔 주는 게 좋나?”

“……욱. 으욱…….”

목구멍이 따갑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숨을 쉬기 위해 메이브가 입을 좀 더 벌리자 알란의 손가락이 억지로 입 안으로 파고들어 와 더 깊은 안으로 찔러 들어왔다.

메이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면서도, 생리 현상처럼 아래에 열이 오르는 것에 메이브도 미칠 것 같았다. 싫다고 생각하는데도, 몸이 반응하니 말이다.

“아니면, 내 걸로 박아 주길 바라는 건가?”

즐거운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기분 나쁘게 웃던 알란은 소리 없이 울면서 헛구역질하는 메이브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입 안에 들어갔던 손가락을 억지로 집어 빼고는 메이브의 머리채를 붙잡아 자신의 성기로 가져왔다.

“악……!”

반쯤 몸이 숙여진 메이브가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머리를 잡아당긴 알란은 한 손으로 바지춤을 대충 끌러내려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를 메이브의 볼에 문질렀다.

“제대로 빨아 봐.”

“넌…… 미쳤어……!”

“이런, 네 사람 목숨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되지.”

메이브의 눈에서 기가 죽지 않은 것을 본 알란은 기분 좋게 웃었다. 역시 생각보다 재미있지 않은가. 재수 없던 곰 새끼와는 다르게, 메이브는 알란의 속에 있는 열기를 건드렸다. 그것이 좋은지 안 좋은지 아직 알란은 알지 못했으나, 썩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란은 상체를 살짝 숙이고 벌어진 입에 손가락을 억지로 집어넣어 메이브의 입을 벌렸다. 그리고 볼에 문지르던 성기를 축축해진 입가에 두드렸다.

“안 그래? 메이브.”

정말 알란의 손에 콘라드가 붙잡혀 있는지, 아니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메이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알란의 손에 콘라드가 붙잡혀 있다면 그의 말대로 메이브의 행동에 따라 콘라드의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메이브는 세상에서 가장 원망스러운 것을 보듯 자신의 입가를 두드리는 성기를 노려보았다.

“으……윽!”

메이브가 성기를 제대로 딥 쓰롯 하지 않자 알란은 그의 성기를 누르고 있던 발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쓰지도 못하는 거 터트려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하…… 할 거야. 윽……!”

고통에 메이브가 거친 목소리를 내뱉으며 결국 입을 크게 벌리고 알란의 성기를 빨아들였다.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었다가 고개를 물리기를 반복했다. 입 안에서 앞뒤로 움직이는 성기에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 힘도 없어 이렇게 당하는 것이 서러웠다. 메이브는 이 세상에 미친놈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미쳤을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쩌면 다비드가 메인수에서 벗어난 후, 그 자리를 메이브가 차지한 걸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눈물에 젖은 입으로 알란의 성기를 빨았다. 입을 최대한 오므리면서 당장 이를 물어 이 두툼한 살덩이를 잘라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목숨이 어찌 될지 몰랐고, 메이브뿐만 아니라 그에게 잘해 주었던 콘라드의 목숨까지도 사라질지 몰랐다.

“후…… 전부터 생각했는데, 목구멍 잘 조여야지. 응?”

알란은 제대로 빨지 못하는 메이브를 내려다보며 낮게 혀를 찼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메이브의 머리를 자신의 성기에 내리눌렀다.

알란의 커다란 성기 뿌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메이브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고, 메이브의 목젖 위는 성기 모양대로 불룩 튀어나왔다.

숨을 쉬지 못해 움찔움찔 떨고 있던 메이브가 몸을 들썩였다. 그러곤 힘없는 두 팔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잡고 있던 알란의 손과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손톱으로 긁으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단단히 머리를 내리누르는 손에 벗어나지도 못하고 발로 밝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우……우!”

“후우…… 이제야 목구멍을 쪼이네.”

알란은 비릿하게 웃으며 메이브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성기 뿌리까지 삼켰던 입에서 알란의 성기가 빠져나오자 거센 기침을 내뱉으며 울고 있는 메이브의 얼굴을 보던 알란은 몸을 좀 더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통스러워?”

“커흑. 으…….”

“근데 너, 단단해졌네?”

알란은 메이브의 어깨를 붙잡고 힘주어 뒤로 밀었다. 그의 몸이 한순간에 뒤로 넘어가 의자에 머리와 등이 부딪혔다. 고통에 몸을 말고 끙끙거리자 알란이 아랫입술을 혀로 핥아 냈다.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주저앉은 알란은 메이브의 바지춤을 붙잡아 단번에 벗겨 냈다.

“그…… 그만!”

메이브가 거세게 숨을 몰아쉬며 기침과 함께 소리치자 알란은 비웃듯이 메이브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 들어 메이브의 목에 가져다 댔다.

“재미있기는 한데, 그렇게 반항하다가 내가 널 죽여 버릴 수도 있어.”

“…….”

알란의 말이 거짓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메이브는 정말 알란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에 닿아 있는 날카로운 단도는 따가웠고, 좀 더 들어오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메이브가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알란은 단추가 채워져 있는 메이브의 셔츠를 툭툭, 끊어 냈다. 단추가 마차 바닥에 굴러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의 셔츠는 더 이상 셔츠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벌어져 그 하얀 속살을 훤히 드러냈다.

“벗어.”

그 목소리에 숨이 막혀 왔다. 꼭 마차 안에 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끝없는 바다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숨을 쉬는 것이 어려울 만큼, 알란의 말에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온몸이 굳어진 것 같으면서도 목에 닿아 있는 날카로운 칼의 느낌은 또 생생해서 떨림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알란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메이브를 쳐다보며 웃었다.

“내가 위에는 벗겨 줬잖아? 그러니 아래는 알아서 벗어야지.”

이미 반쯤 찢어진 셔츠는 떨고 있는 메이브의 몸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메이브는 두 손을 무릎에 내려놓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잘못하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벗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뒤섞였다.

“응?”

참을성이 없는 그가 칼등으로 메이브의 볼을 두드렸다. 날붙이 쪽은 아니었기에 상처는 생기지 않았으나, 메이브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갔다.

“버…… 벗을게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도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빠르게 달리고 있는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까도 생각했다. 아마 문을 열기도 전에 알란에게 붙잡혀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운 좋게 문을 연다고 해도 빠르게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린다면 크게 다칠 것이 분명했다. 최대한 다치지 않게 몸을 말아 뛰어내린다 해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어떻게 움직여 도망칠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든 도망쳤을 때 걸리는 건 콘라드의 목숨이었다. 메이브는 콘라드를 떠올리니 속에서 헛웃음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신전에서도 영웅이 되고 싶어서 지키지 못한 자를 떠올렸는데, 지금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면서도 다른 자의 목숨을 생각하니 말이다.

하지만 신전 때 그자들과 콘라드는 달랐다. 짧지만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메이브와 함께였던 사람이었다. 그자는 이곳에 온 메이브와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 긴 시간 동안 편안한 삶을 보낼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었다.

‘내가 콘라드를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를 버리겠는가.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메이브는 눈물을 삼켜 내며 떨리는 손으로 무릎에 걸려 있는 바지를 천천히 벗어 내렸다. 벗은 바지를 마차의 한구석으로 밀어 놓았을 때, 알란은 하얀 속옷 위로 부푼 메이브의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제대로 벗어야지.”

하얀 속옷 한 장을 겨우 입고 단추와 옷이 찢겨 구멍이 난 셔츠를 반쯤 걸치고 있는 모습이 생각보다 더 괜찮은 것 같았으나, 알란은 메이브를 다시 제대로 교육할 생각이었다.

장난감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제대로 머릿속에 각인해야 했다. 그러니 사람이 아닌 장난감이 옷을 입으면 이상하지 않은가.

“메이브.”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내뱉어지는 이름이, 다비드가 불러 주던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랐다. 소름이 끼쳐 왔고, 목숨을 앗아 가는 사자와 같게도 느껴졌다.

메이브는 떨리는 손으로 속옷을 붙잡고 무릎까지 끌러 내렸다. 반쯤 서 있던 성기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메이브는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맞는 것을 좋아하는 변태인 걸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쉴 틈 없이 괴롭혀졌던 몸이 예민해진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메이브는 벌써 망가지기 시작했을 테니 말이다.

메이브가 무릎에 걸려 있는 속옷을 벗으려고 했다. 그 순간 알란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엄지에 목젖이 눌렸다.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든 것에 메이브가 떨리는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알란의 손을 붙잡았다.

“너무 늦게 벗어서 지루하잖아.”

“흐……윽.”

“응? 어떻게 해야 지루해진 게 재미있을까?”

메이브의 손가락에 점점 힘이 들어가 알란의 손목과 손등에 긁히는 자국이 생겨났다. 하지만 알란의 손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좀 더 힘이 들어가게 목젖을 누르는 것에 메이브의 입이 벌어지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채워졌다.

“대답해야지.”

살살 웃으며 들고 있던 단도를 품에 넣은 알란은 그 손으로 메이브의 볼을 툭툭, 두드렸다.

“메이브, 어떻게 즐겁게 해 줄래?”

미친 새끼. 목 끝까지 욕이 차올랐으나,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메이브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알란의 손을 긁으며 움켜쥐었다.

곧 목젖을 누르던 알란의 손이 떨어졌을 때 메이브는 상체를 굽히고 묽은 위액을 마차 바닥에 토해 내며 기침을 거세게 내뱉었다.

“컥. 커흑……!”

메이브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워하는 얼굴로 몸을 떨고 있었다. 그 모습 하나하나를 지켜보던 알란은 메이브의 어깨를 구두 굽으로 내리누르며 웃었다.

“대답해야지.”

목젖을 누르던 손을 떨어트린 것도 결국 메이브가 대답하는 시간을 준 것뿐이었다. 메이브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신의 즐거움만을 찾고 있던 것이다.

메이브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떨리는 다리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깨를 누르고 있던 알란의 발이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내려갔다.

즐겁게 하는 것? 그런 건 없었다. 그저 알란은 이 마차 안에서 한바탕하고 싶어 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메이브는 여상하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움켜쥔다 해도, 솜방망이처럼 때린 티가 나지도 않을 거였다. 외려 때렸다가 호되게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메이브는 알란의 앞에 있는 의자에 무릎을 올리고 알란의 다리 위에 올라갔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게?”

맨살에 닿는 알란의 손과 그 몸은 소름이 끼치다 못해 더럽다고도 느껴졌다. 아니, 정말 싫었다.

“이렇게 좆은 발딱 세우고서.”

숨을 쉬지 못해 몸이 맛탱이가 간 건지, 아니면 정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때 몸이 느낀 건지, 알란의 말대로 메이브의 성기는 발기되어 꺼덕이고 있었다.

메이브는 눈물로 젖은 얼굴로 알란의 얼굴을 붙잡았다. 조금만 내리면 알란의 목을 움켜쥘 수 있었다. 하지만 메이브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란의 목을 조이는 것보다 그가 자신을 죽이는 것이 더 빠를 거라는 걸 말이다.

“대답, 해야지?”

알란은 메이브의 성기를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힘주어 잡는 것에 메이브는 자신의 성기가 꼭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 고통에 낮게 신음하며 아파하자, 메이브의 성기를 힘주어 붙잡고 있던 알란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리고 팔뚝에 걸려 벗겨지지 않은 셔츠를 바라보았다.

알란이 메이브의 등줄기를 따라 손으로 쓸어내리자 꼬리뼈 부분에 뭉쳐 있는 셔츠에 닿았다. 당장 이 셔츠를 잡아당긴다면, 힘없는 몸이 뒤로 넘어갈 터였다. 알란은 그렇게 되면 메이브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생각하며 비웃듯이 웃었다.

“설마 내가 씹질 해 주길 기다리는 거야?”

“……아, 아니……에요.”

괴롭혀진 목은 쉬다 못해 말을 할 때마다 옥죄이며 아팠다. 살짝 찌푸려진 얼굴로 입술을 깨문 메이브는 숨을 몰아쉬며 두 손으로 알란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씹질, 그놈의 씹질. 진절머리가 났다. 근데 참 웃기지 않는가.

결국 이렇게 싫었으나 저 성기가 구멍에 들어온다면 이 예민하기 짝이 없어진 몸이 느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메이브는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것이 알란이 아니고 그냥 커다란 인형이라 생각했다.

한 손으로 제대로 잡히지 않은 길고 두꺼운 성기는 잘 만들어진 딜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메이브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속으로 지금 눈앞에 있는 건 그냥 성인용품이다. 커다란 인형인데, 전기장판에 둘둘 싸여 있어서 따듯한 것뿐이라고, 계속해서 생각했다.

메이브는 무릎걸음으로 알란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다비드와 계속해서 아직 채 닫히지 않은 구멍에 그의 성기를 가져다 댔다.

“바로 쑤시게? 아아.”

메이브가 바로 성기를 집어넣으려던 것을 보던 알란이 등줄기를 매만지던 손을 움직여 메이브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벌렁거리는 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풀지 않았는데도 수월하게 들어가는 손가락에 알란은 비뚤어진 웃음을 지으며 메이브의 어깨를 힘주어 깨물었다.

“윽!”

고통 어린 신음이 알란의 귓가에 들려왔을 때, 알란은 잘근잘근 그 여린 살을 깨물면서 속삭였다.

“그동안 많이 박혔나 봐? 헐렁거리는데.”

메이브는 목 끝까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신전에서 나오고 나서 제대로 자위를 해 본 적도 없었다. 성욕을 운동으로 잡아 보겠다고, 하고 싶을 때면 더 오래 산을 뛰었다. 그렇게 몸을 갈아엎어서 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배에서 계속된 성관계에 풀어져 버린 구멍은 아직 채 돌아오지 않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알란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란에서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메이브는 성인용품이라 생각하고 있던 것이 무너지자 온몸이 작게 떨려 왔다. 알란에게 물린 어깨는 따가우면서도 뜨거웠고, 지금 구멍에 들어와 있는 손가락이 굽혀져 내벽을 긁어 낼 때마다 느끼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쑤시는지 궁금한데, 빨리 넣어 봐.”

알란의 즐거운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메이브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알란은 자신을 정말 즐거움을 느끼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을 말이다.

메이브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알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차라리 알란이 자신을 도구로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 역시 도구로 생각하자고 다짐했다.

근데 참 웃기게도,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다비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싫은데, 정말 싫은데 이곳에서 죽어 그를 못 보느니 차라리 한 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메이브는 자신의 인생이 참 기구하지 않은가 싶었다. 바라는 건 겨우 사소한 거였는데, 그것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이제 알게 된 감정을 제대로 표출하기도 전에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우스웠다.

신이 있다면, 신은 메이브를 싫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아…….

깊은숨을 토해 내고, 다리를 굽히면서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제 이 안으로 들어올 알란의 성기가 차라리 아무런 느낌이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민하기 짝이 없는 몸은 이렇게 원망하고 싫다 해도 느낄 것이 분명했다. 메이브는 이런 자신이 싫어지는 것 같았다. 허리를 지분거리며 엉덩이를 움켜쥐는 저 손이 싫었다. 투박하면서도 거친 손은 다비드와 달리 부드러운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도망갔는데, 웃기지 않는가. 결국 찾고 있는 사람은 오롯이 다비드였으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두 눈을 감고 어두운 가운데서 다비드의 모습을 그려 냈다. 자신을 지켜보던 그 다정하면서도 무겁고 진득한 감정이 느껴지는 시선을 떠올렸다.

그 눈을 보고 있으면 꼭 온몸이 밧줄로 묶이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홀린 듯 그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을 매만지던 손길 또한 떠올랐다. 그의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손이 어디로 움직였는지, 등줄기를 따라 쓸어내리면서도 힘껏 그 단단한 품에 몸을 끌어안는 것까지 말이다.

“더 기다려야 해?”

알란은 참을성이 부족한지 허리를 두드리는 그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쥐었다가 빼기고 했고, 구멍 안에 집어넣었던 손가락을 살살 헤집다가 내벽을 긁어내리며 서서히 빼냈다.

“……이제 넣을 거예요.”

모든 게 꿈이었다면 어땠을까, 슬퍼서 울었을까, 아니면 기쁨에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콘라드가 편지를 부치러 갔을 때 차라리 막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조금 더 늦게 그를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메이브는 가는 숨을 들이켜고 자신의 엉덩이에 문질러지는 그 단단하고 뜨거운 성기를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구멍에 문질러지는 귀두는 뜨듯하면서도 미끄러웠다. 메이브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알란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 음란하기 짝이 없는 단어를 툭툭 내뱉으며 속을 긁어 대는 것에 그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좀처럼 생각할 수 없었다.

“빨리 박아 넣고 싶어 벌렁거리면서 왜 이렇게 느려?”

정말 장난감으로 생각했기에, 기다리는 것도 싫은 것처럼 말하는 그 말이 메이브는 자신의 발목을 움켜쥐고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싫으면 어떡하나, 어차피 한번 대주는 것과 목숨을 생각하면 당연히 목숨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것과 양심은 또 다른 문제였다.

다비드가 좋았다. 그리고 그 감정을 깨달은 것도 얼마 되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살기 위해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해야 한다는 것이 우스울 뿐이었다. 꼭, 하면 안 되는 행동을 하고 나서 도덕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배덕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메이브는 차라리 좀 더 살아서 다비드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럽게 버텨서 그의 마음이 떠난다 해도, 죽지 않고 버티는 게 나은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가 이런 더러워진 자신을 보고 나서도 그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면.

“……흑!”

눈앞에 있는 알란의 목을 조여 어떻게든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메이브는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는 알란의 성기가 거북했지만, 그러면서도 속의 내벽을 가르며 깊은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거북하니까 차라리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비드와 그 한 주 쉴 틈 없이 관계를 해댔던 구멍은 이미 풀어질 대로 풀어져 있어서 알란의 성기를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속의 부분인 전립선에 닿는 느낌에 메이브는 입을 벌리고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싫었다, 정말 싫은데도 느끼고 있는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후…… 조이는 건 잘 조이는데, 그렇게 힘없이 움직인다고 기분을 좋게 해 주지는 않아.”

느릿하게 움직이는 메이브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알란은 메이브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거칠게 메이브의 몸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벌렁거리는 구멍에서 핏줄이 도드라진 성기가 뿌리까지 삼켜졌다가 귀두 끝부분까지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그에 인형처럼 알란의 손에 붙잡혀 몸이 흔들리는 메이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두 눈을 크게 뜬 채 신음을 삼켜 낼 수밖에 없었다.

느끼고 싶지 않았고, 자신이 느끼는 것을 알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메이브는 목구멍에서 울컥울컥 튀어나올 것 같은 신음을 억눌렀다. 하지만 전부 억누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결국 나지막하게 울고 있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크읏…….”

메이브는 차라리 자신의 구멍이 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단단히 조여 오는 저 흉물스러운 것을 잘라 버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온몸에 힘을 주어도 결국, 알란이 느끼는 것을 도와주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메이브가 들어 올린 시선을 내리고 알란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내리깐 눈 아래에서 얼굴이 붉어진 채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표정을 보고 나니, 속에서 웃음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씨발…….”

낮은 욕설과 함께 흔들리는 몸뚱이가 메이브는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 차라리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아…… 흑!”

들어 올린 몸이 한 번에 놓이면서 알란의 성기를 뿌리까지 삼켜 냈다. 그 순간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의자에 부딪히고 알란에 맞은 부분이 욱신거리며 몸이 움츠러들었다. 알란의 어깨에 얼굴이 닿았을 때, 익숙하지 않은 매캐한 담배 향이 맡아졌다.

메이브는 눈물이 고여 오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다비드였다면, 조금 편안한 살 내음이 맡아졌을 텐데.

“좀 더 조여 봐. 씹질을 하도 해서 너덜너덜하게 늘어났어? 응?”

알란은 자신의 두툼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메이브의 둥근 엉덩이에 힘껏 내려쳤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엉덩이가 작게 흔들렸다. 몸을 굽히며 잘게 떨리는 메이브의 등을 두드리던 알란은 그 하얀 엉덩이에 생긴 붉은 손자국을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맞은 거로 쌌어? 제대로 틀어막아야지 이렇게 질질 싸면 어디다 쓰냐?”

알란은 메이브의 허리에 있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상체가 뒤로 기울여지며 몸이 넘어갈 때쯤, 알란이 그런 메이브의 어깨를 붙잡았다.

“흐…….”

꺼덕이는 성기에서는 묽은 물을 뚝뚝 흘리고, 지금 박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게 더 먹음직스러워 보인다는 것을 모르는지 메이브는 알란을 원망스럽게 노려볼 뿐이었다.

“박아 주면 고맙다고 하지는 못하고 그렇게 노려봐?”

“……박아 달라고 한 적…… 없……. 악!”

박아 달라고 부탁한 적도, 해 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박아 주는 것이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 알란에 메이브는 결국 억울함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알란은 비릿하게 웃으며 붉은 자국이 남은 메이브의 엉덩이를 붙잡고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었다.

“아……아! 아흑! 윽!”

제대로 목구멍으로 신음을 삼키지도 못하고 내뱉는 메이브가 울면서 알란의 어깨를 움켜쥐고 손톱을 세우며 박아 넣었다. 하지만 알란은 외려 몸을 살짝 일으켜 마차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는 거칠게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허공에 들린 자세로 바닥에 떨어질 듯 위험하게 허리를 흔드는 알란의 행동에 메이브의 구멍 안쪽까지 그 성기로 희롱당하는 듯했다.

메이브는 느끼고 싶지 않으면서도 느끼는 자신의 몸에 눈앞이 흐려질 만큼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은 알란이 메이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박히면 좋다면서 왜 비싸게 구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흐…… 싫…… 아!”

“응? 빼지 말라고 구멍도 조여 대잖아.”

“아……흐으!”

“내가 말했지? 이 좆 맛이 그리워서 찾아오게 될 거라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는 알란의 모습에 메이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찾아왔다고, 아니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찾아온 것은 메이브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몸을 탐하고 있는 저 더러운 짐승이었을 뿐이었다.

메이브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눈물에 젖은 눈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흡. 좆…… 맛이… 그리워서 내가 찾아온 게 아니라!”

메이브는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들어 알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크읏! 네가……! 내 구멍…… 맛을 못 잊은 거겠지!”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며 화를 삭이지 못한 목소리로 메이브는 목구멍을 긁으며 소리쳤다. 힘을 주고 머리카락을 움켜쥐면서도 열기가 섞인 메이브의 눈은 쉬이 죽지 않았다.

알란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더더욱 즐겁다는 듯 웃고는 그의 목을 붙잡아 맞은편 벽으로 몸을 밀어붙였다.

“이런, 내가 구멍 맛을 못 잊었다고?”

메이브의 구멍 안을 헤집고 있던 성기는 이미 밖으로 끄집어내져 흉물스럽게 위아래로 꺼덕이며 흔들렸다. 알란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손을 긁고 있는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손에 감기는 작은 목을 쳐다보며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윽!”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붉어진 얼굴로 낑낑거리는 모습이 생각보다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알란은 눈물에 젖은 얼굴도 보기 좋은데, 저 얼굴이 더 망가져 일그러지면 얼마나 만족스러울까 그 모습을 흐뭇하게 그려 보았다.

생각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생각한 알란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붉어졌다 하얗게 변한 메이브의 귓가에 속삭였다.

“뭐 좋아, 메이브. 내가 네 구멍 맛을 못 잊었다고 생각하고 싶으면, 정말 그렇게 만들어 줄게.”

웃기는 그 말에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숨이 막혀 오는 통에 눈앞은 흐려졌고 정신은 몽롱했다.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 건지, 아니면 숨을 쉬지 않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숨이 막히는데 편안해지는 감각이 꼭, 침대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메이브는 흔들리는 눈으로 점점 흐려지는 앞을 제대로 보려고 했다. 웃기는 말을 지껄이는 알란이라도 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메이브가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에 보았던 것은 비릿하게 웃고 있는 알란의 입이었다.

***

정신을 차리는 것이 무서웠다. 차라리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메이브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온몸은 몽둥이로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힘겹게 눈을 뜨고 본 곳은 이끼가 가득 들어찬 돌벽이었다. 납치해 왔으니 제대로 된 방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가뜩이나 몸이 아픈데 이런 찝찝하고 습기가 가득한 곳에 가둬 놓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숨을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어제 그렇게 괴롭혀진 목은 침도 삼키기 힘들었다. 꿀꺽, 목울대가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바늘 수천 개가 목구멍을 갈기갈기 긁어서 안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메이브는 작게 한숨을 쉬며 뻐근하고 욱신거리는 몸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친 새끼…….”

아픈 목이었으나 입에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알란은 정말 미쳤다는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멀쩡한 사람이었으면 사람을 납치할 일도 없었다. 그만큼 또라이를 잘못 건드린 거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헛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정말 광적으로 미친놈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감옥이라 생각한 곳은 감옥이 아니었다. 웃기게도, 이끼가 가득 들어찬 돌벽과 눈앞에 두꺼운 쇠 찰상으로 갇혀 있었기에 감옥이라 봐도 무방했으나, 창살 너머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방이 보였다.

돈을 얼마나 처바른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장식으로 되어 있는 가구들과 금으로 만든 것 같은 테이블이 가장 먼저 보였다.

메이브는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방 안은 메이브밖에 없는 건지, 메이브가 살짝 움직일 때 나는 소음만 들렸다.

고요한 방 안에 메이브는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창살 쪽으로 걸어갔다. 손을 내밀어 한 손에 겨우 잡히는 두꺼운 창살을 움켜쥐고 작게 흔들었으나, 얼마나 바닥과 천장 깊은 곳까지 박아 놓은 건지,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하아…….

낮게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떻게 도망갈 방법이 있을까 보아도 작은 입구에는 몇 개의 자물쇠가 달린 건지, 힘으로 뜯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애초에 그런 힘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메이브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머리가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정말 감옥인데 그 앞을 방으로 꾸민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으나, 저 멀리 보이는 테라스에서 따듯한 햇볕이 방 안까지 들어오는 것을 보면 그것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아무리 미쳤다 할지라도 감옥을 위해 설치해 놓는 또라이는 없으니까 말이다.

방 안을 둘러보던 시선을 돌려 메이브는 자신이 갇혀 있는 공간을 살펴보았다. 천장과 바닥이 돌로 되어 있어 창살 안과 밖은 완전히 다른 공간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안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썩 괜찮은 침대와 테이블, 그리고 앉아 있을 의자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알란이 자신을 왜 여기에 집어 던지고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혹시 다비드가 구하러 오는 것일까, 그러니 이런 곳에 가둬 놓고 어딘가 간 것일까 생각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다비드가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구하러 온다 해도 조금 더 오래 걸리지 않을까.

똑똑.

생각이 깊어졌던 메이브의 귓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메이브는 반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돌려 커다란 방문을 쳐다보았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을 때, 메이브는 헛숨을 들이켜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니엘…….”

마지막에 신관들에게 끌려가며 목을 긁는 듯 소리치던 그의 모습이 메이브의 눈에 생생했다.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다니엘이 눈앞에 보이는 것에 메이브는 자신이 지금 잠에서 덜 깬 걸까 고민할 정도로 말이다.

“오랜만에 뵙네요, 메이브 님.”

살살 웃으며 메이브가 갇혀 있는 창살로 다가온 다니엘은 여전히 메이브가 손으로 잡고 있던 창살을 두드렸다. 흠칫 놀란 표정으로 손을 떼고 뒤로 물러가는 메이브를 지켜보던 다니엘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이 감옥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그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 어떻게 그곳에서 나온 거지?”

나오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이리저리 휘둘러 자신의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이었다. 그 신전에서 끝까지 말려 죽어 갈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눈앞에 보이는 것에 메이브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메이브를 지켜보던 다니엘은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그와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이 이상한가요?”

“…….”

“당신이 처음 신전에서 나갔으니 모를 수도 있죠.”

메이브는 다니엘의 말에 자신과 다비드가 함께 나간 신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그가 나왔는지, 또 알란은 어떻게 벗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메이브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손끝과 발끝이 차갑게 식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자신이 알지 못한 사이에 거짓말로 사람을 뒤흔들어 놓았던 자가 눈앞에 있으니 눈앞이 하얗게 변해 가는 것만 같았다.

다니엘이 나왔으니 다른 자도 나왔을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당했던 이들은 어떻게 된 걸까. 눈물을 삼키고 저들을 꺼낸 건지, 아니면 협박을 당한 건지 메이브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뒤죽박죽 섞였다.

“이런, 겁을 먹은 것 같아요. 메이브 님.”

“……웃기는 소리.”

“제가 어떻게 나왔는지도 궁금한가요?”

다니엘은 메이브의 억눌린 목소리를 무시하며 자신의 말만 할 뿐이었다. 꼭 겁을 먹은 것 같은 메이브를 비웃으며 말이다.

솔직히 궁금하기는 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나올 때, 메이브는 다시는 다니엘은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자신이 그 신전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다면 말이다.

“돈이면 모든 것이 된답니다.”

“……뭐?”

돈. 그 말뜻의 의미는 명확했다. 그곳에 귀족이 아닌 평민도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는 돈이 여유로운 자도, 또 돈이 없는 자도 있었을 터였다.

어차피 그 안에서 신관은 자신의 쟁취한 자든, 다른 자이든, 신관이든 누구를 데려가도 상관없다 말했었다.

그 말뜻은 자신이 괴롭혔던 지키지 못한 자가 아니라면, 다른 지키지 못한 자를 이용해 신전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커다란 돈을 안겨 주고 이곳에서 빼내게 해 준다고 유혹했다면, 돈이 없는 자는 어차피 그런 몸으로 나와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었을 테니 그 유혹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다.

“……잘못한 건 벌을 받았어야 했어.”

메이브는 존댓말을 하는 것도 집어치우고 다니엘을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잘못한 것은 벌을 받아야 했다. 그곳에서 그는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 자까지 돈으로 빠져나왔다고? 웃기지 않는가.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상했다. 만약 다니엘이 그렇게 돈이 여유로웠다면 왜 진작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것일까.

그 의문이 메이브의 속에서 뿌리를 내렸을 때 그것을 풀어 주는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벌은 받았잖아요. 그 구질구질한 지키지 못한 자의 몸을 만져 주었는데, 그게 벌이 아니면 도대체 뭡니까?”

살살 웃는 얼굴로 하는 말은 메이브의 얼굴을 충격으로 물들게 했다. 지금 다니엘이 하는 말이,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것과 같았다. 벌, 벌이 자신이 내리눌러 그자의 순결을 가져가 놓고, 그자의 몸을 만져 주었다는 게 벌이라고 말하는 다니엘의 모습에 메이브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불쌍하게도, 돈으로 휘둘리는 모습이 참 웃기더군요.”

다니엘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는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메이브의 눈은 흉흉하게 빛나 다니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근데 참, 아쉽단 말이죠.”

“…….”

“원래 그곳에서 망가졌어야 제가 생각했던 대로 그곳을 벗어났을 텐데, 쉽게 망가지지도 않고.”

메이브는 다니엘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문득 알란이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만약 다니엘이 그냥 돈으로 그 안에서 벗어났다면 알란과 엮일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 다니엘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는, 알란이 돈으로 그 신전에서 빠져나오면서 다른 지키지 못한 자에게 돈을 쥐여 주고 눈앞에 있는 다니엘까지 데리고 왔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어차피 당신도 돈이 없어서 다른 사람한테 빌붙듯이 나온 거잖아?”

목이 따갑고 누군가가 갈기갈기 찢는 것처럼 아팠으나 메이브는 할 말을 전부 했다. 어차피 다니엘을 긁어 대고 그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만약에 다니엘이 이 안으로 들어온다면 어떻게든 저 필요 없는 그것을 발로 차서 그가 행동하지 못하는 사이에 도망가는 수도 있었다.

메이브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숨겼다. 저들에게, 특히 눈앞에 있는 다니엘에게는 아프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게 죽도록 싫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메이브가 생각한 것처럼 다니엘은 쉬이 화를 내지 않았다. 외려 그렇다고 말하는 메이브를 비웃듯이 내려다보았다.

“맞아요. 돈이 없으니 다른 사람한테라도 빌붙어서 그곳을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다니엘은 창살을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메이브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며 웃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메이브, 당신도 뒷구멍을 이용해서 값을 치르고 그 안에서 나온 거고요.”

다니엘은 창살을 살살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그게 꼭 메이브의 몸인 것처럼 손길이 은밀해 보이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창살을 매만지며 움켜쥐었다.

“그게 문제입니까?”

“……왜 제게 거짓말을 한 거죠? 왜.”

메이브는 어차피 눈앞에 있는 다니엘을 화나게 만들 방법이 없으니, 지금까지 궁금했던 거라도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거짓말? 아아, 그거요?”

다니엘은 몸을 굽혀 창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창살은 생각보다 두꺼워 그의 얼굴이 안까지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꼭 안으로 들이민 것처럼 보였다.

“재미있으니까.”

“……뭐라고?”

“재미있잖아요? 뻔히 씻는 곳이 있는데 굳이 나체로 산에 올라가니 얼마나 수치스러웠나요? 아, 메이브 당신은 그걸 좋아하니까 부끄럽지는 않았나요?”

기분 나쁘게 웃는 모습이 꼭 알란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메이브는 지금까지 자신을 챙겨 준 척하면서, 자신이 힘들어했던 것을 외려 즐겼던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다비드의 말대로, 그는 믿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혹시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옛날에 생각했던 그 감정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라졌다.

“아, 어차피 다비드 그자가 챙겨 줬으니 좋았겠죠. 밖에서 하는 섹스는 좋았습니까? 물론 좋았겠죠. 그 커다란 것을 박아 줬을 테니까.”

“…….”

“얼굴을 붉히면서 헐떡거리는 게 생각보다 취향이었는데 말이죠.”

“…….”

“꼭 발정 난 개처럼 보였으니까요. 아, 부끄럽나요? 얼굴이 붉어져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은데.”

메이브는 다니엘의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부끄럽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화가 날 뿐이었다. 이런 자를 잠시라도 밖으로 같이 나가자고 생각했던 자신한테 말이다.

“혹시, 그때를 생각하니 발정 났습니까? 누가 박아 주길 원하는 거예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고요했던 방 안을 잠식했다. 낄낄낄,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 그 웃음이 돌로 된 벽을 두드리며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메이브는 두 손을 들어 올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자신이 겁을 먹었다 생각할 것 같아 그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기분이 나빴다고 해서 화가 난 건 아니었다.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일부러 저렇게 질 낮은 말을 꺼내면서 속을 긁어내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러면 제 좆이라도 빌려 드릴까요? 메이브, 당신이 허리를 앞뒤로 흔들면 박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을 하며 다니엘은 자신의 바지춤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풀어 헤치며 그 안에 반쯤 발기한 성기를 끄집어냈다.

그 성기를 보니 메이브는 속이 뒤집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바닥에 앉아 있던 몸을 조금씩 일으켰다.

“그게 좆이야? 그렇게 작은 걸 어디에 가져다 쓰라고 보여 줘?”

메이브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박아도 느낌 하나 없을 정도인데, 전에 네가 지키지 못한 자를 죽인 게 혹시 그자가 네 좆이 들어온 것도 몰라서 화가 나 죽인 거 아니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난 얼굴로 창살 안으로 손을 뻗는 다니엘의 모습에 메이브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창살이 두꺼워서 아무리 손을 집어넣어도 다니엘의 손은 메이브의 몸에 털끝조차 닿지 않았다.

“그런 걸 달고 허리를 흔들 거라면, 박지 말고 박히지 그랬어. 너한테 박혔던 지키지 못한 자가 불쌍할…….”

“그래서?”

일부러 다니엘의 화를 돋우기 위해 메이브가 비꼬듯이 말했다. 더 환하게 웃고, 더 비비 꼬아서 말했으나, 다니엘은 외려 집어넣었던 손을 움직이며 메이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나 본데.”

다니엘은 비릿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나가는 그 모습에 메이브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 밖으로 나갔던 다니엘이 금세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피로 범벅되어 있는 콘라드가 목줄에 걸려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만약 그것을 보지 않았다면 메이브는 다니엘을 더 긁어 댔을 것이다.

“아는 사람이죠? 모를 수 없겠지. 당신이랑 있던 사람이니까.”

다니엘은 기절한 듯 보이는 콘라드의 턱을 붙잡고 메이브가 잘 볼 수 있도록 창살에 그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자의 좆은 좋았나 봐요?”

비릿하게 웃으며 콘라드의 반쯤 찢어진 바지를 거칠게 찢은 다니엘이 축 처져 있는 콘라드의 성기를 붙잡았다.

“이게 제 것보다 작은 것 같은데, 이런 걸 박는 걸 좋아했나 봐요?”

“……그 손 놔.”

메이브는 다니엘을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살에 갇혀 있어 나갈 수도 없고, 그동안 자신과 함께했던 콘라드가 기절한 채 저렇게 몸을 유린당하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 걸음 걸어가 콘라드의 성기에 닿아 있는 다니엘의 손을 떨어트리고 싶어도, 떨어트린다 해서 콘라드가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은 놓기 싫고. 아, 제 좆이라도 빨겠어요? 그러면 이건 놓아주죠. 어때요?”

“…….”

“싫으면, 뭐.”

다니엘이 콘라드의 목줄을 잡고 있던 손을 움직여 콘라드의 목에 감았다.

“죽일 수도 있고요. 한번 죽이는 게 어렵지. 두 번은 쉽거든요.”

살살 목줄을 잡아당기는 다니엘의 손을 보자, 기절한 콘라드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고통 어린 신음이 들려왔다.

메이브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자신이 멍청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떠올렸다. 결국, 콘라드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 때문에 이곳에 끌려왔는데, 눈앞에 다니엘의 화를 돋운다고 콘라드의 목숨을 간과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메이브의 시선이 콘라드에게 닿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눈 안에 박혀 오는 듯했으나 메이브는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다니엘을 쳐다보며 웃었다.

“죽여.”

어차피 다니엘은 콘라드를 죽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만약 메이브가 알란에게 이렇게 행동했다면 정말 콘라드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니엘은 결국 알란의 손에 의해서 그 신전에서 빠져나온 거였다. 그런데 다니엘이 콘라드를 죽인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메이브는 알란이 자신에게 콘라드의 목숨으로 협박하는 것을 떠올렸다. 협박하는 것에 이용하는 것은 콘라드의 목숨이었기에, 만약 정말 눈앞에 있는 다니엘이 콘라드를 죽인다면 알란에게 그도 죽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왜 손을 움직이지 않아? 죽인다면서.”

메이브는 콘라드의 목줄을 움켜잡으면서도 더 이상 힘을 주지 않는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니엘 자신이 콘라드를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다니엘은 흥미가 사라졌다는 것처럼 콘라드를 붙잡았던 손을 놓으며 그를 한쪽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메이브는 콘라드가 부딪혀 쓰러진 곳으로 시선을 안 주려고 노력했다. 만약 콘라드에게 향했다면 자신이 하는 말이 허세라는 것을 다니엘이 눈치챌 거니까 말이다.

“소중한 사람은 아니었나 보네요.”

쯧, 낮게 혀를 차는 소리에 즐거움이 사라졌다는 듯이 들려왔다. 다니엘은 자신의 손에 묻어 있는 피가 더럽다는 듯 근처에 있던 수건으로 닦아 냈다. 하얀 수건이 붉게 물들어 갔으나, 메이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제가 충고 하나 해 줄까요?”

다니엘은 더러워진 수건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가만히 서 있는 메이브를 보고 말했다.

“그 같잖은 자존심, 내려놓아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당신이 죽을지도 모르니까.”

“…….”

“아, 혹시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전 죽은 사람을 안는 취향은 없거든요.”

다니엘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메이브의 몸을 한번 훑어보고는 몸을 돌려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한참이 지나 방 안이 고요해졌을 때가 돼서야 메이브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 세상에 정말 정상인 사람은 없을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정상인 사람은 다비드가 아닐까.

메이브는 한숨을 내쉬고 한쪽 벽에 몸이 구겨져 있는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얼마나 있었던 건지, 어쩌면 사라진 그날부터 있었을 콘라드는 옷도 거의 찢어져 있었다. 벌어진 옷 사이로는 맞아서 생긴 듯한 생채기와 깊은 상처들이 보였다.

아직 채 굳지 않은 피와 이미 아물어 버린 상처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을 보던 메이브는 한숨을 내쉬며 콘라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창살 사이가 막혀 콘라드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손을 아무리 뻗어도 그에게 닿을 것 같지는 않았다. 메이브는 콘라드를 내려다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콘라드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안해요…….”

다비드에게서 도망만 가지 않았더라면, 눈앞에 있는 콘라드가 다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피에 절어 고통스러워할 일은 없었을 거였다.

메이브는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뒤돌아보지 않고 다비드를 기다렸더라면 정말 행복했을까 싶었다.

아마 행복했을 것이다. 분명 다비드는 자신을 그 따듯한 품에 안아 주었을 테니 말이다. 아무런 무서움도, 두려움도 없이 원하는 것을 들어줬을 것이다.

자신이 평화로운 것을 원했다면, 정말 끝까지 원했던 그 삶을 이루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

메이브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콘라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 생긴 상처 하나하나가 지금까지 자신의 위치를 말하지 않아서 생긴 상처 같았다.

그나마 목숨을 붙여 놓는 것은 나중에 필요한 패였기 때문이겠지.

한참을 콘라드를 지켜보던 메이브는 머릿속이 차갑게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오랜 시간 함께했다고 콘라드가 가족인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목숨에 이리저리 휘둘릴 정도로 그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콘라드가 끝까지 자신을 숨겨 주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메이브는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자신이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는 사실이 썩 좋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착한 척한다고 착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막상 이런 상황을 겪으니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그 화살이 콘라드에게 향하지는 않았다. 모든 일의 주범인 알란에게 향했을 뿐이었다.

메이브는 거칠게 얼굴을 문지르다 얼굴이 따가워질 무렵, 무릎에 두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쭈그려 앉은 자세로 고개를 들어 올려 커다란 테라스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메이브는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알란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납치해서 이곳에 데려와 방치하는지 알지 못했다. 또한, 그는 다니엘이 무슨 도움이 있다고 그 신전에서 돈을 써서 데려왔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니엘이 좋은 패는 아니었다. 만약 쓰다가 버릴 말이라면 괜찮다 생각하려 해도, 돈을 써서 데려올 만큼 괜찮은 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콘라드를 죽이지 않은 것과 이곳에서 일하는 듯한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다니엘이 알란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 성격에 이곳에서 가만히 있을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뚜벅뚜벅.

신발을 질질 끄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던 메이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침대로 걸어갔다. 그러다 멈추어 서곤 몸을 돌려 닫혀 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뚜벅뚜벅.

질척하면서도 무거운 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싶었을 때,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가벼운 가운 차림으로 안으로 들어온 알란의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자신이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였는지, 벌어진 가운 사이로 보이는 알란의 몸 역시 콘라드와 마찬가지로 상처가 생겨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상처와 오래되어 보이는 상처가 메이브의 시선에 닿았다.

“일어났네?”

실실 웃으며 창살로 다가온 알란은 침대 바로 앞에 서 있는 메이브를 바라보다 비릿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구겨져 있듯 누워 있는 콘라드의 몸에 알란의 시선이 닿았을 때,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알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콘라드를 지켜보던 알란은 낮게 혀를 차고 몸을 돌려 테이블에 놓여 있던 은색 종을 흔들었다.

분명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질 듯한 모양새였으나, 알란의 신경질적인 움직임에 날카로운 소리가 뒤틀려서 울리는 듯했다.

“…….”

몇 번 종을 흔들던 알란이 테이블에 종을 던지듯이 내려놓고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적이 조금 지난 후, 알란이 열고 들어왔던 문에 아까 나가 버렸던 다니엘이 급하게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부르셨…….”

다니엘이 알란을 보며 말을 하기도 전에, 알란은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던 종을 들어 올려 다니엘에게 집어 던졌다. 그대로 날아간 종이 다니엘의 이마에 맞고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과 고통스러운 얼굴로 비틀거리며 맞은 부분을 다니엘이 한 손으로 감쌌다.

“왜 저것이 이 방에 있는지 알고 싶은데.”

알란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메이브가 생각했던 대로 다니엘이 콘라드의 목숨을 감히 가져가지 못하는 거였다.

다만, 메이브는 알란이 다니엘을 이용해 상처투성이인 콘라드의 모습을 보여 주며 자신의 위치를 알게 하는 건 줄 알았으나, 지금 알란의 행동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화가 난 것을 숨기지 않는 알란이 비틀어진 웃음을 짓고 다니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차라리 화를 냈다면 더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란은 자신이 화난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더는 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그게…….”

외려 당황스러운 얼굴로 콘라드를 힐끔 쳐다보던 다니엘의 표정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보니, 아마 다니엘은 메이브에게 콘라드로 협박한 뒤, 다시 그를 원래 있던 장소로 되돌리려고 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까 메이브가 다니엘을 긁었던 것이 멍청한 짓은 아니었던 거였다. 화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다니엘이 화가 많이 났던 걸지도 모른다. 메이브는 속으로 두 사람의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지기를 빌었다.

“분명 지하에 갇혀 있어야 할 것이 왜, 이곳까지 나와 더럽히는지 말해 봐.”

알란은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번째는 마차에서 자신이 목 졸라 기절해 버린 메이브 때문에 끝까지 못 갔기에 방에 돌아와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나중에 자신의 좆이 없으면 울면서 찾을 정도로 망가트릴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계획을 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할 방 안에 피비린내와 쓰레기까지 방치되어 있으니, 화가 나지 않으려야 안 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자신에게 저것을 써도 되는지 묻지도 않고 지하 감옥에서 들고 나온 다니엘의 모습에 알란은 기분 나쁘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아직 네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거야?”

알란은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다니엘은 알란이 다가오는 것에 어깨를 움츠리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메이브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을 때, 알란은 다니엘의 어깨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처음에 내가 그곳에서 널 빼낼 때 말했잖아. 즐겁게 만들라고. 근데 왜 기분이 나쁘게 만들지?”

“즈…… 즐겁게 만들어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저자를 이용하면…….”

“그러니까 저걸 왜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썼냐고 묻는 거잖아.”

알란은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다니엘을 내려다보았다. 다니엘도 그렇게 몸이 작은 편이 아니었으나, 알란에게 어깨를 잡힌 채 둘이 같이 서 있으니 상당히 왜소해 보일 정도였다.

“대답, 해야지?”

알란은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다니엘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쳐다보았다. 그는 다니엘이 생각보다 이용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신전에서 돈을 주고 데리고 온 거였다. 그런데 힐끔, 창살 안에 있는 메이브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다지 쓸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원래는 더 즐겁게 놀 생각이었다. 메이브가 다니엘에게 복수를 불태울 거라 생각했고, 다니엘 역시 그 안에서 빼주지 않은 메이브와 다비드를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만약에 메이브가 쉬이 자신이 교육하는 동안에 그 기가 죽지 않으면 다니엘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원망하고 있는 자에게 잡아먹히면 분명히 망가질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상황을 보았을 때, 다니엘을 이용한다고 메이브가 망가질 것 같지는 않았다. 외려 자신의 화를 억누르고 차갑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자색의 눈을 보니, 잡아먹으라고 집어넣었다가는 되레 잡아먹힐 것 같았다.

그것도 생각보다 즐거울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살인을 해 본 것 같지 않은 자가 처음 살인을 했을 때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걸 보는 것도 즐거우니까 말이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다니엘의 모습에 메이브는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떤 약점이 잡혔기에 저렇게 비굴해 보이는지 메이브는 숨을 삼키며 알란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 눈과 마주쳤을 때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한 거야 당연한 문제고. 왜 허락 없이 저걸 가져왔냐고 물었잖아.”

알란은 집요했다. 어떻게든 왜 이유 없이 콘라드를 사용했는지 듣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 다니엘의 표정이 점차 무너졌다. 잠시 고요한 방 안에 우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브는 알란이 움켜쥐고 있는 다니엘의 어깨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응?”

알란은 메이브를 쳐다보던 시선을 돌려 눈앞에 얼굴이 일그러진 다니엘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후장에 좇질 해 줘야 말할래?”

작게 속삭이듯 하는 말이었으나, 고요한 방 안에서는 그 목소리가 되레 크게 들려왔다.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진 다니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 전체가 덜덜 떨리는 다니엘의 모습에, 메이브는 갇혀 있는 자신보다 더 불쌍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다시는 알란 님의 말없이 사용하지 않겠…….”

“같은 말을 여러 번 하게 하지 말고. 왜 허락 없이 가져왔냐고.”

“……메이브를 협박하려고 했습니다.”

“네가? 왜?”

“…….”

“또 같은 말 반복하게 하네? 대답.”

알란은 더욱 구겨지는 얼굴로 다니엘을 내려다보았다. 또다시 입을 다무는 모습에 알란은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문 옆의 벽에 그 얼굴을 내리꽂았다. 쿵 소리와 함께 다니엘의 얼굴이 벽에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붉게 물드는 얼굴을 보면서도 알란은 그의 머리카락을 놓지 않았다.

“크윽. 마…… 망가트리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하아…….”

고통이 억눌린 신음과 함께 왜 콘라드를 데리고 왔는지 실토해 낸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알란은 그를 문 쪽으로 내팽개쳤다. 중심을 잡지 못해 멍청한 자세로 넘어진 다니엘을 내려다보던 알란은 그 몸뚱이를 비웃듯 내려다보며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니엘의 허벅지를 힘주어 밟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까 그걸 왜, 내 허락 없이 하냐고. 응?”

메이브를 망가트리는 건 오롯이 알란의 손짓에 의해서야 했던 일이다. 알란은 그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다르게 움직여진다 생각하니, 속에서부터 불쾌감이 스멀스멀 자리 잡았다.

왜?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으나, 알란은 그 망가진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은 자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알란이 자신의 발밑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다니엘을 차갑게 식은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가.”

허벅지를 밟고 있던 발이 떨어졌을 때, 다니엘은 기다시피 방문으로 걸어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꼬리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급하게 방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메이브는 주춤,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허벅지와 발목이 침대 다리에 부딪혀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낮은 소음에도 알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열려 있던 방문을 닫고 몸을 돌려 메이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걸어와서는 창살을 움켜쥐고 침대 앞에 서 있는 메이브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

알란의 눈이 메이브의 얼굴을 쳐다보다 내려가 마차에서 움켜쥐었던 목에 닿았다. 힘주어 잡았던 목은 손자국 모양으로 푸르스름하게 피멍이 올라와 있었다. 하얀 피부에 도드라진 색 때문인지, 알란은 자신의 아래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저 몸 구석구석에 저런 상처와 멍을 만들면 얼마나 예쁠까, 생각하며 알란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리 와.”

“…….”

명령하는 게 입에 밴 것처럼 말하는 알란의 모습에 메이브가 움칠 몸을 떨며 좀처럼 앞으로 가지 못했다. 하지만 알란은 그런 메이브를 쳐다보다 시선을 더러운 냄새가 나는 콘라드에게로 향했다.

“저거 죽게 하고 싶으면 오지 않아도 괜찮고.”

메이브가 다가오지 않자 알란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콘라드에게 걸어가려 했다. 그에 알란이 정말 콘라드를 죽일 것 같다는 생각에 급하게 걸음을 옮겨 창살에 다가갔다. 메이브는 아직 알란이 자신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기에 죽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속으로 빌고 빌었다. 저 흥미가 떨어지기 전에 다비드가 늦지 않게 오기를 말이다.

“다음부터는 늦장 부리지 말고 달려와야 할 거야.”

느릿한 목소리로 말하는 알란이 가운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품 안에 주머니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가운에 주머니가 달려 있던 건지, 알란이 다시 손을 빼냈을 때는 손에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굳게 자물쇠로 잠겨 있는 문을 움켜쥔 알란이 열쇠로 자물쇠를 하나둘 풀어내기 시작했다.

찰칵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리기 시작했다.

메이브는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알란을 피해서 도망갈 자신은 없었다. 어떻게든 도망쳐도 바닥에 기절한 콘라드를 들고 도망간다면 가기도 전에 알란에게 붙잡힐 것이 뻔했다.

메이브가 생각하는 사이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알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메이브는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알란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기절하기 전에 내가 네 구멍 맛을 못 잊어서 널 찾았다고 했지?”

“…….”

“그래서 구멍에 씹질을 하려고 왔어, 메이브.”

비뚤어진 웃음을 지으며 메이브의 어깨를 움켜쥔 알란은 배려 없이 그의 몸을 이끌어 침대로 집어던졌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침대에 넘어진 메이브가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을 때, 알란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얼굴을 내리꽂았다.

부드러운 이불에 얼굴이 쓸린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얼굴은 따가웠고, 잡아당겨진 머리카락에 두피는 욱신거리며 아팠다. 두통까지 찾아오는 것 같을 때, 바지를 벗기는 알란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

놀란 메이브가 손을 등 뒤로 움직여 알란의 손을 쥐려 했으나, 외려 알란의 큰 손에 메이브의 두 손이 붙들렸다. 힘을 주어도 알란의 손아귀에 붙잡힌 손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메이브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들썩이자, 알란은 메이브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 힘을 풀고 가운의 허리에 매고 있던 끈에 가져갔다.

대충 묶여 있던 끈을 잡아 푼 알란의 행동에 벌어져 있던 가운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알란은 그것이 상관없는지 흉흉한 성기를 꺼덕이며 허리끈으로 잡고 있던 메이브의 손목을 묶기 시작했다.

“이거 익숙하지? 거기서 계속 이렇게 생활했으니까.”

“그…… 그만!”

“처음에는 족쇄를 채워 놓을까 했는데, 그러면 재미없잖아?”

알란은 메이브의 손목을 단단하게 묶었다. 메이브가 두 손이 묶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알란의 손은 그의 손목에서 팔뚝을 지나 어깨까지 쓸어 올렸다. 메이브의 어깨에 닿아 있던 손이 뱀처럼 움직여 손자국 모양이 남아 있는 목에 닿았다.

알란은 메이브의 목을 감싸 쥐고 침대에 눌려 있던 얼굴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등과 알란의 가슴이 닿았을 때, 알란은 고개를 살짝 숙여 메이브의 귓불을 이빨로 짓누르듯 깨물며 속삭였다.

“난 네가 내 좆에 환장했으면 좋겠거든.”

“당신은…… 미쳤어.”

“오, 내가 미친 걸 이제라도 알았으면 다행인데?”

어떤 말을 해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말투에 메이브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발정 나서 미쳐 버린 사냥개잖아.”

기분 나쁜 웃음을 메이브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던 알란은 딱딱하게 굳어지는 메이브의 어깨를 보고 몸을 가늘게 떨며 웃었다.

알란은 메이브의 고개를 억지로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겁에 질렸다고 생각했는데, 화를 참고 있는 표정에 알란은 역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아랫입술을 짓누르며 깨물고 있는지, 상처가 생겨 핏물이 맺힌 입술을 혀로 핥아 냈다. 피와 타액이 섞여 그의 입술 주변이 붉게 물들었을 때, 알란은 기가 하나도 죽지 않은 메이브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네 구멍에 발정 났으니, 받아 줘야지. 안 그래?”

알란은 메이브의 목을 움켜쥔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그의 볼과 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이미 발기한 성기를 메이브의 구멍으로 가져갔다. 뻐끔거리는 구멍이 꼭, 빨리 넣어 달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뭐야. 기대돼? 벌써 벌렁거리는데.”

“……미친 새끼…….”

“욕하는 것도 야해 빠져서는. 빨리 넣어 줄 테니까 재촉하지 말라고. 아, 재촉한 만큼 잘 조여야 할 거야, 메이브.”

구멍 안으로 서서히 밀려들어 오는 성기에 메이브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어 있는 구멍 안으로 들어오는 성기에 내벽이 빡빡하게 조여 왔으나, 배려 없이 한 번에 쳐올리고 들어오는 것에 메이브는 헛숨을 들이켜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끄윽…….”

코끝에서 매캐한 담배 향이 맴돌았다. 익숙하지 않은 향이 넌 지금 다비드 말고 다른 사람과 하고 있다고 속삭이듯 말하는 것 같았다. 메이브는 묶여 있는 두 팔을 움직이려 했으나 얼마나 단단히 묶어 놓았는지, 움직일수록 끈에 살갗이 쓸려 따갑고 뼈마디에서 비명을 질러 댔다.

손톱을 세우고 손가락에 힘을 주어 알란의 살이라도 후벼 파고 싶었으나, 쉴 틈 없이 한 번에 들어왔던 성기가 빠져나가더니 다시 속으로 깊게 들어오는 것에 메이브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느끼는 이 몸뚱어리가 원망스러웠고,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몸에 메이브는 그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켜야 했다.

“헐렁거리잖아, 메이브. 이제 한 개로는 만족 못 할 정도로 늘어났어?”

메이브는 자신의 엉덩이를 꽉 쥐는 알란의 손길이 꼭 썩어 문드러진 뼈가 긁는 것처럼 불쾌했다. 하지만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질척한 감정의 늪에 빠지는 것 같았다. 손이 되어 버린 감정들이 온몸에 달라붙고, 움켜쥐는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무리 뿌리치고 뿌리쳐도, 도망갈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메이브는 그저 정신을 차리자고 다짐했다. 알란이 무슨 행동을 하든 넘어가지 말자고 말이다. 하지만 속으로 들어온 성기의 감각은 너무도 생생했다.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눈을 질끈 감고 다비드라 생각하고 싶어도, 그 손길과 천박한 말투에서 겨우 그려 놓았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만 했다.

“메이브.”

‘메이브 님.’

저 목소리에서 다비드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싶었으나,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고 흐트러지기만 했다. 메이브는 점차 움직이기 시작하는 알란의 허리 짓에 몸이 앞뒤로 작게 흔들렸다.

부어 있는 구멍이 벌어지고 안으로 들어오는 성기는 어쩐지 다정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설마 알란이 정말 미친 걸까, 메이브의 머릿속에 의아함이 들 무렵이었다.

잠시 다정했다는 것을 비웃듯, 알란이 메이브의 엉덩이를 쥐고 다른 손으로 그의 등을 내리눌렀다. 침대에 상체가 짓눌리고 엉덩이만 들어 올린 이상한 자세에서 메이브가 몸을 떨었다.

그런 메이브를 내려다보는 알란은 그저 허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살갗이 두드려지는 소리가 돌벽에 부딪히며 울려 퍼지듯, 방 안에 탁탁,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메이브는 자신의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것보다 더 싫은 것은, 구멍 안이 빡빡할 거라 생각했으나 언제 풀어놓았던 건지, 아니면 정말 계속 풀어져 있던 건지, 알란이 움직일 때마다 야한 물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구멍 조여.”

등을 내리누르는 손길은 거칠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속을 거칠게 헤집는 성기 때문에 메이브는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몸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힘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릴 때마다 몸을 내리누르는 손길이 더욱 거칠어진다고 느껴졌다.

메이브는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지만 그럴수록 힘만 들었다. 빨리, 빨리 다비드가 자신을 구해 주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메이브는 참지 못한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며 새어 나오는 신음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크읏…….”

낮은 신음과 함께 따갑고 욱신거리는 구멍에서 무언가가 주르륵,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메이브는 단단히 묶여 있는 두 팔을 움직이며 알란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팔을 잡고 어깨를 내리누르는 알란의 행동에,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파 더 이상의 반항은 하지 못했다.

“좋아? 물이 질질 흐르네.”

‘다비드.’

“네 구멍에 환장했는데, 지금처럼 허발하게 헐렁거리면 안 되지. 메이브. 응? 제대로 조여야지.”

온몸을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느낌과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메이브는 제대로 숨도 못 쉬고 꺽꺽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런 메이브의 모습에 낮게 혀를 찬 알란이 그의 몸을 붙잡고 배려 없이 몸을 돌렸다.

“아……!”

낮은 신음이 벌어진 입에서 튀어나왔다.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지, 양다리를 벌린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메이브의 성기는 이미 투명한 물이 귀두에서 뿌리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알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메이브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망가트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울기만 하고 즐기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아니, 어쩌면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알란은 손을 뻗어 발기한 메이브의 성기를 힘주어 쥐고 위아래로 작게 흔들었다. 진득한 정액과 쿠퍼액이 뒤섞인 애액이 알란의 손가락에 감겨 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여린 살갗을 문지르며 쓸어내렸고, 넘쳐흐르는 물에 마디마디가 질척하고 진득거렸다.

“날 봐.”

알란은 메이브의 턱을 움켜쥐고 얼굴을 잡아당겼다. 텅 빈 것 같은 자색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 이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알란은 기분이 나빴다.

저 자색의 눈동자에 죽지 않는 자존심이 좋았다. 이렇게 당하면서도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텅 비어 있어 정말 넘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알란은 눈살을 찌푸린 채 구멍에 거칠게 박아 대던 성기를 끄집어냈다.

알란의 성기를 품고 있던 구멍이, 한순간에 성기가 빠져나가자 작게 움찔움찔 떨려 왔다. 배려 없는 행위 때문인지 이미 부어 있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붉게 물든 구멍을 내려다보던 알란은 낮게 혀를 차며 자신의 성기를 움켜쥐고 눈물로 더러워진 메이브의 얼굴을 쳐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원래의 알란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의 배려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절했다면 얼굴을 손바닥으로 내리쳐 일어날 때까지 때렸을 것이다. 제대로 조이지 못한다면 조일 때까지 머리채를 쥐고 고통스럽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지, 알란은 자신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메이브의 얼굴과 가슴에 진득한 정액을 쏟아 낸 알란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 몸뚱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기분 더럽네.”

작게 달싹거리는 입술 모양이 ‘다비드’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알란은 속에서 화가 밀려 올라오는 것 같았다. 목구멍은 뜨겁고 머리는 열기에 집어삼켜지는 듯했다.

알란은 두 팔이 묶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메이브를 한참 쳐다보다 거칠게 몸을 돌려 메이브가 갇혀 있는 곳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을 자물쇠를 걸어 단단히 잠가 놓고 콘라드의 머리채를 잡았다.

“내일은 제대로 해야 할 거야. 메이브를 봐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알란은 콘라드의 머리를 움켜쥔 채 천천히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나간 길에 붉은 피가 얼룩덜룩 새겨졌다. 꼭, 잊지 말고 이것을 보며 네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알란이 떠나고 한참이 지났을 때, 메이브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거칠게 자신의 안을 쑤셨던 곳은 따갑고 욱신거렸다. 아랫배는 찢어질 듯 아팠고, 부딪혔던 온몸은 욱신거리며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메이브는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덜 떨리는 다리가 금세 굽혀져 바닥에 주저앉으면서도 헛웃음을 지었다.

“…….”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건지, 무엇을 원했던 건지, 메이브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잊고만 싶었다. 이 상황에 알란을 원망하던 메이브는 결국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왔다.

만약 콘라드가 가는 것을 막았더라면, 험프리 섬으로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신전에서 다비드를 만났을 때 어떻게든 그를 깔았더라면, 알란에게 그 말을 하고 그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성년식에 가지 않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메이브는 갈 곳 잃은 감정에 무너졌다. 몸을 움츠리고 소리 없이 울면서 그저 다비드만을 속으로 찾았다.

그 다정한 손이 더러워진 얼굴을 매만지며 닦아 주기를, 차가워진 몸을 따듯한 품으로 안아 주기를,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다정하게 치료해 주기를 바라고 바랐다.

메이브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올려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납치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생각하고 생각해도, 기억이 갑자기 사라진 부분은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메이브가 알란을 감당하지 못해 기절한 동안 이곳에 온 걸 수도 있었으나, 메이브는 왜인지 그게 아니라고 느껴졌다.

만약 알란이었으면 깨어나기 전에 메이브를 계속 재우고 재웠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커다란 달이 움직이는 것을 올려다보며 바닥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둥글게 몸을 말았다.

묶여 있는 두 팔은 아팠고, 왠지 가슴 한편이 뻥 뚫린 것처럼 허했다. 너무 춥고 무서웠다.

“흐으…….”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울던 메이브는 어느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알란에게는 무섭지 않은 척, 두렵지 않은 척, 할 말 못 할 말을 다 했으나, 솔직히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두렵고도 무서웠다.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이미 발끝부터 좀먹어 가며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메이브는 소름이 돋아나는 몸을 더더욱 둥글게 말면서 자신의 몸을 껴안고 있는 다비드을 떠올렸다. 그리고 제발 이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가 자신의 앞에서 웃고 있기를 바라고 바랐다.

‘신이 있다면…… 이번에는 제발 이루어 주세요.’

도망가는 것도 바라지 않아요. 이제 그냥 그의 옆에 있을게요. 힐링 라이프도 바라지 않을게요. 시끄러워도 괜찮으니까, 제발…… 이번만 제 소원 좀 들어주세요.

목구멍에서 내뱉어지지 않은 목소리로 메이브는 속에서 몇 번이고 소리치고 소리쳤다. 이 눈을 뜨면 모든 게 꿈이었다면 좋겠다고, 꿈이 아니라면 그 익숙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은 다비드가 있기를 말이다.

***

몇 날 며칠이 지났을까, 메이브는 족쇄에 묶여 있는 자신의 손목과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 족쇄가 두 손에 달렸을 때는 어떻게든 이것을 풀어 보겠다고 두 팔을 움직여 창살에 부딪히고 난리를 쳤었다. 하지만 손목에 상처만 생겨나고 붉게 부어올라 욱신거리는 손목이 아프기만 할 뿐, 작은 흠집만 생기는 족쇄에 포기하고 잠들었었다.

그리고 일어나니 어느새 하얀 붕대가 손목에 두껍게 둘러 있었고, 족쇄는 더욱 단단히 손목에 감겨 있었다.

그것이 도망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 메이브는 한숨을 내쉬고 쭈그려 앉아 테라스를 쳐다보았다.

이 방에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메이브가 혼자서 이곳에 갇혀 있을 때면 테라스 밖으로 보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식사 시간만 되면 꼬박꼬박 밥을 가지고 알란이 찾아왔다. 그마저도 먹지 않으려 하면 알란이 억지로 입을 벌려 음식을 집어넣었다. 그게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메이브는 먹지 않는 것을 그만두었다.

음식을 가져오면 먹고, 밤에 알란에게 짓눌려 당하는 것이 벌써 며칠이 지났는지 시간을 알 수도 없었다. 눈을 뜨면 아침이었고, 어느 날은 눈을 뜨니 늦은 밤이었다.

메이브는 묶여 있는 손을 움직여 다리를 살살 긁었다. 그러곤 긁은 자국이 붉게 올라오는 것을 내려다보며 닫혀 있는 문을 쳐다보았다.

‘언제 오는 거예요?’

당장 저 문이 열려서 다비드가 올 것 같았다. 이따금 문이 열릴 때마다 다비드의 모습을 찾을 때면 들어오는 알란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알란이 화가 난 얼굴로 메이브를 괴롭게 했다.

손을 들어 올릴 때도 있었고, 어느 날은 한없이 다정하게 대해 준 적도 있었다. 메이브는 그 알란의 모습을 떠올리며 문득, 신전에서 다비드가 아닌 알란을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망가졌을지, 아니면 이 생활이 익숙해져 그저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메이브는 몸을 긁고 있던 손가락을 멈추고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메이브의 눈두덩이 무릎에 닿고 불편한 자세로 몸을 웅크린 채 낮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바보, 멍청이.’

힘들고 괴로운데도, 죽는 것이 무서웠다. 아니, 죽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었다. 그게 괴롭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메이브는 자신의 목숨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다. 만약에 알란이 메이브가 이곳에서 가장 친해진 콘라드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 중에 단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콘라드에게 죄악감을 가지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선택할 것이다.

호구처럼 남한테 모든 것을 퍼 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메이브는 이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리 시간마다 밥이 따박따박 나온다고 해도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메이브가 정말 못살고 거지 같은 인생을 살았다면, 이것도 좋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메이브의 인생이 그렇게 팍팍하지는 않았다.

메이브는 눈두덩을 무릎에 누르면서 숨을 멈추었다가 몰아쉬기를 반복했다.

이제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그런 일 따위 없을 걸 알면서도 안 좋은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울 뿐이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빌미로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이 모든 상황이 이제는 싫었다. 싫고 원망스러운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더더욱 힘들었다.

바닥이 없는 늪지대에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도망가려고 온몸을 버둥거릴수록 더더욱 깊은 곳으로 내려앉는 것처럼 말이다.

‘일주일만 더 기다리면…… 오지 않을까…….’

부모님이 기다리는 아이를 위해 여섯 번 자고 나면 원하는 게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니 메이브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지어졌다.

어차피 신은 없었다. 바람이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는데, 그런 것을 원한다 한들 누가 이 바람을 이루어 줄까.

이루어 줄 사람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은 알아서 헤쳐 지나가야 할 뿐이었다. 메이브는 무릎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눌렸던 눈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흐릿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면서 환한 테라스를 쳐다보다가 굳게 닫혀 있는 방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얼마나 지나면 저 문이 열리며, 음식을 들고 알란이 찾아올까. 메이브는 문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고개를 돌리며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불편한 몸을 움직여 침대로 걸어가 앉으면서도 온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상처가 생기는 것을 막느라 날카로운 날붙이 하나 없는 감옥에서 메이브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끼가 잔뜩 끼어 있는 돌벽도 익숙해졌다. 이제 이곳에서 자고 일어나 밥을 먹고, 또 자고 일어나 알란과의 그 끔찍한 관계를 하면 되는 거였다.

“하…… 하하.”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는데 눈앞은 흐릿해졌다. 뿌연 눈앞에 무거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움직여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찰캉 찰캉, 손목과 발목에 연결되어 있는 사슬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귓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친구이자, 같이 이야기를 해 주는 것 같다고도 느껴졌다. 정말, 미쳐 버린 걸까…….

“싫어…….”

미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바라고 바란 건 겨우 평범한 일상이었는데 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쩌면 돈 많은 백수로 살고 싶다고, 원했던 것부터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메이브는 깊게 가라앉은 감정이 발끝부터 자신을 좀먹어 가는 것을 느꼈다.

뚜벅뚜벅.

그러다 메이브의 귓가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알란의 발걸음이라고 하기에는 찍찍 끌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거우면서도 바닥을 힘 있게 두드리듯 걷는 소리에 메이브는 반쯤 감은 눈으로 문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알란이 아니라 다니엘이 찾아온 것일지도 몰랐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문 앞에서 멈추었는지 더는 들리지 않는 소리에 메이브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딸칵.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와 함께 작게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누굴까. 하지만 누구여도 무슨 상관일까. 어차피 그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면 도와 달라고 몇 번이나 외치고 울고불고 난리 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그 긴 시간 동안 알란과 다니엘을 빼고는 메이브가 보았던 사람은 없었다.

첫날, 다니엘이 피투성이가 된 콘라드를 데리고 온 것을 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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