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험프리 섬(1) (12/18)

03. 험프리 섬(1)

서두르며 에녹 영지를 벗어나 에보니에 도착했을 때, 그제야 메이브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다비드가 에녹가에 도착하기 전에 그에게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가는 동안에도 다비드가 그동안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것이 생각났으나, 메이브는 고개를 흔들며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사이에 마차가 멈추어 서고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그 앞에 서 있던 콘라드가 그런 메이브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도련님?”

콘라드는 의아한 목소리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해 보이는 메이브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에 정신을 차린 메이브가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며 마차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여기가 에보니 영지인가요?”

“예? 아. 그, 네.”

메이브가 존댓말을 할지 예상치 못했던 콘라드는 당황했다. 하지만 곧 그걸 숨기고 고개를 끄덕이며 부두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이 에보니에서 다른 섬으로 갈 수 있는 부두입니다.”

메이브는 주변을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비릿한 바다 냄새와 거리의 판매대에 올라온 해산물, 그리고 즐겁게 들리는 목소리가 이곳의 분위기를 더욱 부드럽게 해 주었다.

메이브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매력이 보이는 주변을 느릿느릿 둘러보다 부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에 콘라드는 마차를 다시 에녹 영지로 돌려보낸 후, 급히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다른 섬으로 떠나는 배는 언제 탈 수 있을까요?”

콘라드는 자신의 도련님이 자신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이 어색했다. 특히, 콘라드는 평민 신분이었다. 그는 자기의 재능과 힘으로 에녹가에 자리를 잡고 더는 올라갈 수 없는 곳까지 도달했다.

그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이가 에녹 공작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에녹가에 뼈를 묻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뼛속까지 귀족인 메이브가 평민인 자신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고 어색해서 메이브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콘라드?”

“그, 곧 열흘간 항해를 하면 도착할 수 있는 험프리 섬에 갈 수 있는 배가 도착할 겁니다.”

“험프리?”

“예, 평화로운 섬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라 전쟁이 일어나도 일어났는지 모를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죠.”

메이브는 콘라드의 말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만큼 평화로운 곳이고, 가는 것만 열흘이 걸린다면 최고의 도망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메이브는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비릿한 향을 맡으며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콘라드를 돌아보았다.

“출발까지는 시간이 넉넉한 건가요?”

“……네, 보통 배가 부두에 선박하고 나면 3시간 정도 있다가 출발합니다.”

“그러면 그사이에 식사하러 가요.”

“……예, 도련님.”

콘라드는 메이브에게 말을 편하게 하라고 몇 번이나 말하려 했으나, 다른 것을 묻는 메이브의 물음에 답변하느라 그에 대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메이브는 그런 콘라드가 당황해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자신의 윗사람이 반말하다가 존댓말을 하게 되면 어색할 것이 뻔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콘라드 씨.”

“예?”

“한동안 여행하면서 저는 제 직위를 숨기고 싶어요.”

메이브는 어떻게 말해야 콘라드가 의심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 여행 기간 동안은 불편하시더라도 도련님이 아닌 저를 메이브라 불러 주시겠어요?”

“하지만 어떻게 제가.”

“만약 그 이름이 부르기 힘드시다면, 저를 제프리로 불러 주세요.”

콘라드가 불편해하는 문제를 이미 그는 알고 있었다. 콘라드는 에녹가의 기사로 묶여 있는 몸이었다. 그러니 메이브가 자신의 직위를 숨기기 위해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해도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메이브라 불러 달라고 했을 때, 콘라드가 쉬이 부른다고 했다면 그게 더 큰 문제였다. 콘라드가 메이브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익숙해졌을 때, 자신의 소식이 퍼져 나가는 것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제프리 님.”

콘라드는 한참의 고민이 끝나자 메이브가 원한 대로 그 이름을 불러 주었다. 메이브는 콘라드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고는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바다를 보는 것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시장을 걷는 것도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메이브가 처음 경험하는 것이기에 모든 것이 신기했다.

메이브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처럼 하늘에 태양이 떠 있으나, 그 옆으로 지구에서 보는 달보다 수배는 커 보이는 달도, 서양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도, 염색을 한 것처럼 색색의 빛을 품고 있는 것도, 그 어느 것 하나도 지구와는 달랐다.

메이브는 잠시 자신에게 익숙한 색은 검은색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가려 했다.

“도, 아니 제프리 님,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습니다.”

간판이 허름한 곳으로 메이브가 들어가려 하자 콘라드가 급히 뛰어와 근처의 괜찮은 식당으로 데리고 가려 했지만, 메이브는 그런 콘라드를 보며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원래 값비싼 곳보다는 사람이 많은 곳이 가장 맛있는 법이에요.”

메이브는 자신이 가려던 식당 안을 바라보았다. 간판이 덜렁거려 금세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질 것 같았다. 외형은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식당이었으나, 그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사람들이 값이 싸서 먹었다면 저렇게 즐거운 웃음을 머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메이브가 보고 있는 곳의 사람들은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럼, 들어가요.”

메이브가 먼저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콘라드는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작게 늘어트리고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뛰어다니는 점원을 한번 쳐다본 메이브는 주변을 둘러보다 근처의 빈자리로 걸어갔다. 메이브가 먼저 자리에 앉자 콘라드는 그의 옆에 자리 잡고 서 있으려 했다. 그러나 메이브가 콘라드의 손목을 붙잡고는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설마 서서 식사하시려는 건 아니지요?”

“제가 어떻게 도, 아니. 제프리 님과 함께 식사를 하겠습니까.”

“한동안 여행하면서 계속 이렇게 식사할 때가 많을 텐데, 그럴 때마다 제 옆에 서서 안 드실 건가요?”

“……마른 육포로 허기진 배는 금세 채울 수 있습니다.”

“자리가 많다면 다른 자리에 앉아서 따로 먹자고 하겠지만, 이곳은 아주 바쁘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편하게 지내 주실 수는 없나요?”

메이브는 한동안 같이할 콘라드와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특히, 혼자 식사하는 것만큼 맛없는 것도 없었고, 자신이 식사할 때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더 불편했다.

메이브는 물러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콘라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솔직히, 이건 메이브가 투정 부리는 것과 같았다. 자신을 지키지 위해 함께 온 콘라드에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식사를 해도 된다고 말하는 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메이브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화려하고 값비싸 보이기에 이미 식당에 들어올 때부터 시선이 몰리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메이브는 콘라드를 더더욱 서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콘라드가 메이브의 옆에서 지키듯이 서 있다면, 그건 자신이 귀족이라 말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콘라드가 옆에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메이브의 맞은편에서 같이 식사한다면 돈 많은 상인이나 졸부가 비싼 옷을 입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콘라드.”

메이브는 결국 조금 딱딱해진 목소리로 콘라드를 부르고 손가락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앞에 앉아서 나와 같이 식사하죠. 설마 제가 내리는 명령을 듣지 않는 겁니까.”

익숙하게 뱉어지는 명령이, 메이브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사람에게 명령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해도, 메이브가 겨우 그 집 안에 있던 시간을 합쳐 봐야 이틀이었다. 그리고 하루 만에 그 미친 신전으로 가서 몸과 정신이 힘들 만큼 고생했던 메이브였기에 이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함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메이브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어쩐지 불편해 보였던 콘라드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지더니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으니 말이다.

“콘라드, 저는 여행이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예.”

“그러니 제가 존댓말을 하는 걸 어색해하지 말고, 제게 제프리라 부르며 편하게 대해 주세요. 또한 한동안 저와 여행하면서 동고동락할 텐데, 식사 정도는 익숙해지는 것이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도련님, 저는 평민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메이브는 귀족과 평민의 직위에 대한 차이를 알지 못했다. 만약 메이브가 이곳에 왔을 때 평민이었다면 콘라드가 불편해하는 이유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메이브는 이미 귀족 중 높은 가문으로 빙의했다. 그러니 콘라드가 불편해하는 것도, 왜 자신이 평민이라고 말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문제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메이브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콘라드 씨,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저는 편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러니 불편하시더라도 콘라드, 당신이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네요.”

메이브는 더 이상 콘라드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겠다는 듯, 그의 말을 끊어 냈다. 그가 불편해할 것을 알아도,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했을 때 차라리 지금 먼저 이렇게 이야기하고 끝내는 것이 나았다. 만약 메이브가 생각하는 대로 안 된다면 메이브가 더 불편할 터였다.

메이브로선 이번은 이기적으로 나가자고 생각했다. 무심해 보이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콘라드 역시 지금 메이브에게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어린 도련님이 아직 세상을 알지 못해 저렇게 대하는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프리 님.”

결국, 이곳에서 지는 것은 콘라드였다. 그가 아무리 의무를 말하고 공작님에게 메이브를 지키고 보조하는 것을 명받았다고 해도 메이브는 듣지 않을 터였다. 또한, 만약 콘라드가 그 이야기를 메이브에게 했다면 메이브는 그런 콘라드에게 외려 되물었을 것이다.

처음은 공작의 명령으로 메이브의 곁에 있게 되었으나, 결국 다시 영지로 돌아갈 때까지는 콘라드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메이브였으니 말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메이브는 이제야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것 같았다. 살짝 웃고 있으니 주문하지도 않은 음식을 가지고 온 직원이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메이브가 그것을 의아해할 때, 직원은 그저 맛있게 드세요, 라는 말과 함께 바쁘게 다른 자리로 뛰어갔다.

“원래 이런 식당은 메뉴가 고정되어 있는 곳이 많습니다.”

“아, 한 가지 메뉴밖에 없다는 소리예요?”

“예.”

테이블에 올라온 음식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커다란 빵, 수프 안에 들어가 있는 큼지막하게 들어 있는 감자와 고기, 그리고 생선이 박혀 있는 파이였다. 다른 것은 전부 맛있어 보였으나, 메이브는 꼬리와 머리가 보이는 파이는 묘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먹죠.”

메이브가 먼저 빵을 뜯어 먹자, 콘라드가 그런 메이브를 잠시 바라보다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 대화 없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급히 테이블에 놓여 있는 음식을 먹었다. 크게 맛있다, 맛이 없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왜 웃으면서 먹는지는 알 수 있었다.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많이 들어갔는지, 음식은 하나같이 부드러웠고, 고소했다. 메이브는 식사가 끝난 뒤 부른 배를 문지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콘라드가 그 뒤에 일어나 카운터로 가 음식값을 계산하는 걸 보며 메이브는 식당에서 빠져나왔다.

콘라드의 말처럼 아까 없었던 커다란 배가 부두에 세워져 있었다. 메이브는 정말 모험을 떠나는 듯한 기분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저 배를 타야 합니다.”

“네, 이제 출발해요.”

콘라드가 앞장서서 걷는 것을 보며 메이브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커다란 배에 방값과 뱃값을 주고 올라타니 험프리 섬으로 가는 사람이 많은지, 갑판 위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메이브는 그것을 잠시 보다가 받은 열쇠에 새겨져 있는 번호를 찾아 객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조금 작아 보이는 방 안에 침대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콘라드가 당황스러워하는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아까 말을 잘못했는지…….”

“괜찮아요. 항해가 긴 것도 아니고 일주일인데 그렇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메이브가 괜찮다고 말했으나, 콘라드는 정말 당황한 얼굴로 잠시만 이곳에 있어 달라고 말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메이브는 멋쩍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근처에 있던 침대에 주저앉았다.

메이브는 콘라드가 자신을 편하게 여기려면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메이브는 작게 나 있는 둥근 창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투명한 유리 밖으로 푸른 바다가 끝도 보이지 않게 펼쳐져 있었다.

“……모험 정신.”

메이브는 전날 자신에게 거베라 꽃을 주며 모험 정신을 응원하고,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가졌다고 말했던 신관을 떠올렸다. 메이브는 어쩌면 신비로운 모험이 정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앉아 있던 침대에 누웠다.

눈을 느긋하게 감았다가 뜨고 있으니 이제는 정말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조금 남은 아쉬움은, 그냥 그때 자신을 도와준 그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방 안으로 들어온 콘라드가 죄송하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을 보이자, 메이브는 방을 바꾸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결국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저는 불편하지 않으니까요.”

메이브의 말에도 고개를 못 들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콘라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단단한 근육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것에 메이브는 자신도 다시 운동을 시작해 조금 빠졌던 몸을 원래대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말할게요. 콘라드,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그 말을 끝으로 커다란 고동 소리가 들리더니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요했던 바다를 가로질러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니, 배가 작게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메이브는 둥근 창문으로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배가 바다를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바닷물 소리와 선선한 바람에 메이브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안녕, 다비드 님.’

메이브는 자신을 찾아올 다비드가 자신의 부재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을까, 아니면 화를 낼까 잠시 생각했다. 아마 어쩔 수 없다는 듯, 정말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 생각하고 떠날지도 몰랐다.

그걸 생각하니 조금은 가슴이 욱신거리는 게, 메이브는 말없이 다비드에게서 도망가 생긴 양심 통이라고 생각했다.

메이브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일주일간의 일을 메이브는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생긴 다비드와의 인연은 그렇게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함에도 소중해져 버렸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망가져 버린 자들의 표정이 또렷하게 기억나는데도, 한편으로는 그 얼굴들은 전부 흐릿하고 다비드의 모습만 떠올랐다.

메이브는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침대로 가 주저앉으며 눈가를 덮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이 잘하는 행동인지 메이브도 확정할 수 없었다. 멀지 않은 날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이브는 침대에 몸을 눕히며 눈을 감았다.

‘내가 도망가려 했던 이유…….’

메이브는 자신이 다비드에게서 도망가려 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그건 자신이 미친 서브공이었던 에녹 메이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왔으니, 이제는 그 미친놈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메이브는 그에 대해서 자신은 미친놈이 되지 않을 거라고 확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몸에 들어와 빙의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원래의 메이브가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자신을 도와주었던 다비드가 소설처럼 망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다비드가 더욱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 것뿐이었다.

‘다비드 님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가 행복해졌으면 좋을 것 같았다. 다비드에게 순결을 바치면서도 목숨을 연명하고 싶었던 그 과거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메이브는 작게 웃었다. 그래도 다비드의 그 아름다우면서도 남자답던 얼굴이 추억 속에 남으니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것 같았다.

메이브의 소망은 너무 볼품없이 작은 거였으나, 크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었다. 모든 조연과 주연에게서 벗어나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것. 그저 편하게 살고만 싶었으면 쉬운 문제였겠으나, 그때까지도 메이브는 자신이 도망가면서 일어날 일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메이브를 위로하듯 반쯤 열려 있는 창문에서 시원한 바닷소리가 고요한 방 안으로 청명하게 흘러 들어왔다. 메이브는 바닷물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힘든 것은 별로 없었다. 특별히 다른 일이 있다고 한다면, 콘라드가 뱃멀미를 했다는 걸 손꼽을 수 있었다.

덩치와 맞지 않게 안색이 파리해져서 힘들어하던 콘라드는 배가 험프리에 도착했을 때, 빠르게 육지로 내려와 숨을 토해 냈다. 파리했던 안색이 조금 혈색이 도는 것을 보며 메이브는 작게 웃고 콘라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제 괜찮아요?”

“으…… 제가 뱃멀미가 있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방금까지 타고 있던 배를 돌아본 콘라드는 다시 생각하는 것도 싫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메이브는 그 모습에 결국, 작게 어깨를 떨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콘라드는 지금까지 육지에서 발을 떨어트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높은 파도를 갈라 움직이는 배를 처음 탔던 것이다. 만약에 콘라드가 메이브를 따라오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도 뱃멀미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나중에 배를 타고 나가야 할 텐데, 그때는 괜찮으시겠어요?”

험프리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걸어서 돌아다니면 섬의 끝에서 끝까지 이틀 만에 갈 수 있을 만큼 그리 크지 않았다. 험프리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면 무조건 배를 타야만 했다.

메이브가 그것을 생각하며 콘라드에게 물으니, 그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해 갔다.

“……괘, 괜찮습니다…….”

분명 괜찮지 않는 얼굴을 하면서도 괜찮다고 말하는 콘라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니까 재미없잖아요.”

그간 일주일 동안 콘라드와 함께 배를 타고 오면서 많은 일이 있었다. 어쩌면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일 수도 있었으나, 메이브는 그것이 꽤 괜찮은 날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첫날과 이튿날은 콘라드가 메이브를 불편해했다. 그리고 그때 뱃멀미로 고생하면서 메이브를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 했었다.

사흘이 되고 나흘이 되는 날, 콘라드는 메이브를 제프리라는 가명으로 부르는 것이 익숙해졌으며, 메이브가 존댓말을 하는 것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닷샛날, 메이브는 오랜만에 꿈에서 다비드를 보았다. 신전에서 자신을 챙겨 주면서 자신에게 기대라고 말하던 그때의 꿈을 말이다. 눈을 뜨니 묶여 있지 않은 손이 어색했고, 왜인지 눈앞에 다비드가 있어서 그의 성기를 빨아야만 할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그 모든 것이 허상이며 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동이 틀 무렵이었다.

마지막 도착하던 엿샛날, 콘라드가 저 멀리 보이는 대륙을 보며 혈색이 감도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브는 배의 뒤편으로 걸어가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대륙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제프리 님?”

메이브는 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다, 콘라드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따금 다른 생각을 할 때마다 멍하니 풀어진 얼굴로 있었기에, 콘라드는 익숙하다는 얼굴로 메이프를 쳐다보았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셨습니까?”

딱딱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메이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마을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작은 섬이라 그런지, 거대한 성벽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급하게 만든 것처럼, 어쩌면 손재주가 별로 없는 사람이 만든 듯 보이는 투박한 나무 울타리가 주변에 둘러져 있었다. 그 앞으로 입구 앞에 반쯤 갈라진 나무판이 꽂혀 있었다.

그 나무 판에는 ‘험프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투박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비를 맞아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으나, 그 글씨가 흐릿하지 않고 또렷해 보였다.

“험프리에 도착해서 정말 신기해서요.”

“생각보다 작은 섬이라 실망하셨습니까?”

“아니요.”

메이브는 작은 섬이라 좋았다. 섬의 이름만큼이나 평화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마을 주변을 두르고 있는 나무를 보니 산책하기도 괜찮을 듯했다. 나중에 이런 곳에 집을 짓고 살아도 꽤 좋을 만큼 말이다.

“마음에 무척 들어서요.”

평화로운 만큼, 계속 평화롭기를 바라던 메이브는 마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숙소에서 생활을 할까 잠시 고민했으나, 이곳에서 최대한 오래 있을 예정이었기에 그는 돈을 쓰기로 했다.

흥청망청 써도 상관없을 만큼 돈이 있으니, 이런 곳에 집 한 채 정도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중에 이곳을 떠났다가 다시 휴양하러 온다고 해도 지낼 곳이 있으니까 말이다.

“제프리 님, 그러면 괜찮은 집을 먼저 보고 있을 테니, 마을을 둘러보고 계시겠습니까?”

콘라드는 눈빛을 빛내며 주변을 보고 있는 메이브에게 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이곳에서 메이브의 몸을 상하게 하거나 위험할 것은 전혀 없었다. 그에 콘라드는 자신이 집을 보고 메이브는 마을을 둘러볼 것인지 물었던 것이다. 그에 메이브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네, 다녀오세요.”

메이브의 답을 들은 콘라드는 집을 구하러 걸음을 옮기면서도, 어쩐지 호수에 어린아이를 혼자 놔두는 기분이 들었다. 콘라드는 걸으면서 이따금 메이브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근처에 상가를 기웃거리고 주변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잠시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빨리 다녀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콘라드의 모습이 빠르게 사라지자 메이브는 주변을 둘러보던 것을 멈추고, 마을 입구로 걸어가 근처에 나무가 많은 곳을 한번 보고 그 옆에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후…….”

길을 따라 걷고 있다 보니, 주변에 보이던 작은 마을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주변은 작고 커다란 나무와 길을 따라 피어난 들꽃, 그리고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잡초들로 가득했다.

숨을 크게 몰아쉬고 내쉬기를 반복하니, 싱그러운 풀 내음이 맡아졌다. 메이브는 속이 맑아지는 듯했다. 근처에 가장 커다란 나무에 자리를 잡고 앉아 등을 기대고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나무 사이, 나뭇잎 사이사이로 떨어지는 햇볕이 내리쬐는 것에 메이브는 그 따듯함을 느끼며 두 눈을 서서히 감았다.

이제 거의 다 끝났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이제 험프리에서 살 집을 구하고, 한동안 평안한 삶을 지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다비드가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온다면 빠르게 도망가면 되지 않을까. 이 순간만큼 메이브는 맘 편히 생각했다.

<다음 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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