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도망
마차가 한참을 달려 집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커다란 쇠문이 열리고 마차가 정원을 지나 저택의 문 앞에 멈추어 섰다. 메이브는 마차가 멈춘 것을 느끼고 문을 열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왔다.
이미 늦은 시간이니 모두가 잠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메이브가 마차에서 내리고 고개를 들자, 닫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문이 열려 있고, 그 앞에 그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메이브는 자신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보다, 정말 그 신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자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다비드 덕분에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적으로 힘들었던지, 진짜 부모님이 아닌데도 메이브는 심장이 울렁거렸다.
“아가.”
메이브를 내려다보던 어머니가 계단을 내려와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메이브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성인이 된 걸 축하한다, 메이브. 걸음마를 뗐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네가 성인이라니 믿기지 않는단다.”
어머니가 메이브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두 팔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메이브는 얼떨떨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어 아직 입구에 서 있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분명, 자신의 부모님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못 보았던 부모님을 만난 것처럼 심장이 울렁거리고 목이 멨다.
겨우 하루 동안 같이 있다가 일주일을 보지 않았다. 근데 참 이상하지, 꼭 오랜 시간 알고 있던, 아니 정말 부모님과 떨어진 지 오래되었다가 다시 만난 듯한 기분이 드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어쩌면 정말, 이 몸에 자신이 정착되어 원래 메이브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메이브가 느끼는 감정은 말도 안 되는 거였으니 말이다.
“……다녀왔어요.”
목이 메여 울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메이브가 작게 중얼거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는 그런 메이브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장하다고, 고생했다고, 대견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그 손길에 메이브는 마음의 안정과 함께 그간 힘들었던 것들이 모두 흘러 사라지는 것 같았다.
“늦은 시간에 내가 너무 잡고 있었던 것 같구나. 어서 방으로 들어가 푹 쉬렴.”
“……네.”
메이브는 머뭇거리며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계단을 서서히 올랐다. 아버지의 앞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어깨를 툭툭, 투박하게 두드렸다. 그 행동이 꼭 잘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메이브는 그에 고개를 살짝 숙여 아버지에게 인사하고, 그를 지나쳐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시종이 고개를 숙여 메이브를 반겼다.
신전에서 먼저 가족에게 말한 건지, 아니면 성년식을 하러 가고 8일 뒤에 끝나서 돌아오는 게 원래의 전례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걸 묻기도 힘들었기에 메이브는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계단을 올라 방으로 걸어갔다.
“후…….”
방 안으로 들어온 메이브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일주일이 지난 것이 무색하게 매일매일 청소했는지 방은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메이브는 가만히 주변을 보다 천천히 침대로 걸어가려 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메이브는 고개를 살짝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들어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열리며 신전에 갈 때 옷을 입혀 주었던 시종이 들어왔다.
“도련님, 고생하셨어요.”
그의 손에는 따듯한 물이 담긴 그릇이 들려 있었다. 시종은 근처 테이블 아래 김이 올라오는 그릇을 내려놓은 후 메이브를 바라보았다.
“주무시기 전에 발을 마사지해 드릴게요. 그동안 많이 피곤하셨을 거잖아요.”
“…….”
하지만 발 마사지보다는 빨리 잠을 자고 싶었다. 이 불편한 옷을 벗고 그저 쉬고 싶던 메이브가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자, 시종은 몸을 돌려 옷장에 걸려 있던 가운을 들고 메이브에게 다가왔다.
“옷 벗겨 드릴게요.”
시종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마치 즐거운 듯, 어쩐지 메이브가 대단하다는 듯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메이브는 머뭇거리다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시종은 목 끝까지 채워진 단추를 하나둘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툭툭, 규칙적인 소리와 함께 입고 있던 옷이 메이브의 몸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마지막 단추까지 푼 시종은 메이브가 입고 있던 옷을 근처의 의자에 올려놓고, 가운을 메이브에게 입혀 주었다. 마지막 허리끈까지 단단히 매듭을 묶은 시종이 잊었다는 듯 메이브를 올려다보았다.
“속옷은 지금 갈아입으시겠어요?”
“아니, 너무 피곤해서 빨리 자고 싶은데.”
“그러면 피로를 풀게 마사지를 빨리 해 드릴게요. 의자에 앉으세요, 도련님.”
“……응.”
메이브는 피로한 얼굴로 물그릇 앞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시종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메이브가 신고 있던 신발을 조심스럽게 벗겨 그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메이브의 발목과 발바닥을 정성스럽게 감싸 쥐고는 따듯한 물 그릇 안에 발을 담갔다.
손에 물을 담아 발등부터 물을 묻히며 뭉쳐 있는 발을 주무르는 그 따듯한 손길에 메이브는 점점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시종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있잖아.”
“네?”
“너도 성년식을 치렀다고 했지?”
메이브의 물음에 시종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웃었다.
“도련님과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저도 성년식을 치렀어요.”
“너는…… 어떤 느낌이었어?”
너도 음욕의 신 타니아의 신전에 가서 그런 경험을 했냐는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메이브는 팔걸이에 팔뚝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턱을 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말에 시종은 성년식을 치르던 그때를 생각하는지 작게 웃으며 메이브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성년식 때 운이 좋았던 편이었어요.”
시종은 손가락으로 메이브의 발등을 힘 있게 누르듯이 문질렀다.
“도련님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신전 안에 들어가기 전에 성수로 몸을 씻어 내고 들어갔어요.”
“성수…….”
“씻어 냈다고는 하지만, 제가 평민이다 보니 신관님께서 제 머리에 물을 부었다고 보는 게 맞아요.”
메이브는 시종의 말에 반쯤 감겨 있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집에 있던 옷 중에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갔었어요. 그런데 결국 물에 젖은 생쥐처럼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요.”
시종이 말하는 것과 메이브가 경험했던 것이 달랐다. 메이브는 계단을 내려가 분수대처럼 생긴 그곳에서 혼자 몸을 씻어 냈다. 하지만 시종은 신관이 그의 머리 위에 물을 뿌렸다고 말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싶었으나, 시종의 표정에서 그때의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느낀 건 제가 느낀 것 중에 가장 신비로웠어요.”
“……무엇이?”
“커다란 홀에 저와 같은 평민이 모두 모여 무릎을 꿇고 커다란 신의 석상 아래서 기도를 했어요. 도련님은 저보다 더 고귀하시니까, 저와는 달랐겠죠.”
한 발을 전부 주무른 시종이 부드러운 타월로 물기를 닦아 내고, 옆에 있던 폭신한 슬리퍼를 차분히 신겼다. 그리고 아직 마사지하지 않은 메이브의 한쪽 발을 조심히 감싸 쥐고 따듯한 물에 내려놓으며 다시 말했다.
“눈을 감고 굶지 않고 배부르게 살고 싶다고 기도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정말 굶지 않고 배부르고 몸 편히 일하고 있고요.”
시종의 말에서 쟁취한 자도, 지키지 못한 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메이브는 그 말을 들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고 허탈하게 웃었다.
“도련님?”
메이브의 웃음소리에 의아한 시종이 그를 불렀으나, 메이브는 대답할 기력도 없었다. 바보 같았다. 그 한 해에 성년식을 치르는 사람이 그곳에 모두 모였을 리 없었다. 정말, 메이브가 운이 좋지 않아서 그 신전으로 가게 된 것이었을까.
다만, 시종이 떠나기 전에 했던 말과 비슷해서 모두가 그런 성년식을 치른다고 혼자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나도 너와 비슷했어.”
“네? 아니, 어떤 신전에서 도련님께 물을 뿌려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든 시종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메이브를 바라보았다. 메이브는 그게 아니었지만, 시종에게 너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 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비슷했다는 거지. 누가 내게 물을 뿌리겠어?”
“어휴, 놀랬잖아요. 정말 그랬으면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가만히 안 있으셨을 거예요.”
시종이 고개를 작게 흔드는 모습을 보며 메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테라스를 지난 시선이 어두운 밤하늘에 닿았을 때, 메이브는 소리 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메이브가 바라는 건 아주 소박한 것이었다. 돈 많은 자제이니, 아무것도 안 하는 돈 많은 백수로 살자는 것. 그게 다였으니 말이다.
“그렇겠지.”
“당연하죠. 공작님이 바로 뛰어가서 따질 일이라고요.”
메이브는 시종의 말에, 자신이 빙의하기 전의 메이브가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원작의 메이브가 그렇게 미친 것도 이해 가기는 했다. 버릇이 잘못 들어서 비뚤어진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도련님, 그래도 성년식을 무사히 치르신 거 축하드려요.”
무사히 치르지는 않았다. 차마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그 어두운 것까지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메이브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한 번씩 성년식을 치르는 사람들 중에 실종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실종?”
메이브는 시종의 말에 그 신전에서 벗어나지 못할 쟁취한 자들이 문득 떠올랐다.
“네, 평민뿐만 아니라 귀족 중에서도 성년식을 치르러 갔다가 실종이 된 사람들이 나와요.”
“…….”
귀족도 실종된다는 그 말에, 메이브는 자신이 있었던 신전에서 나가지 못한 쟁취한 자들 중 귀족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미 메이브가 만난 사람만 해도 다비드와 알란이 백작가의 자제였다.
“신전에 마차가 도착하는데 마차 안이 텅 비었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리고 그 마차를 다시 신전에서 돌려보내 집에 도착하는데, 그 안에 성년식을 치르러 간 사람의 물건과 옷가지가 있고 사람은 사라졌대요.”
메이브는 신전을 나와 마차에 탑승했을 때 의자에 놓여 있던 자신의 옷과 신발을 떠올렸다. 그 말을 듣고 있으니 성년식을 치르러 갔다가 실종되었다는 사람들이 결국 지키지 못한 자에게 선택받지 못해 신전에 묶여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시종은 그것을 알지 못하니, 무섭다는 듯 어깨를 작게 떨었다.
“그것 때문에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혹시 도련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많이 걱정하셨어요.”
“……그렇구나.”
메이브는 그 안에 자신이 있었다고, 하지만 자신은 순결을 바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끝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는 눈을 반쯤 감으며 이 이야기와 기억은 죽을 때까지 묻자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
“응?”
“실베스타 장자는 만나셨어요?”
기대감에 두 눈을 빛내고 있는 시종이 발을 닦아 주는 걸 보며 메이브는 입을 달싹였다.
“……아니.”
“으음, 아쉽네요. 베일에 감춰진 장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했거든요. 신전이 많으니 만나는 것도 힘들었을 거예요.”
다비드, 실베스타 데이비드. 메이브는 마지막에 자신을 찾아오겠다며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떠나간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언제 이곳을 찾아올까 생각했으나, 실베스타의 영지는 산림 깊은 곳에 있기에 에녹 영지까지 오려면 시간이 꽤 필요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메이브는 내일 아침 부모님에게 말해, 어디 먼 영지로 떠나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다 됐어요, 도련님. 피곤하실 텐데 어서 주무세요.”
물기가 묻은 수건을 그릇에 담은 시종이 물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메이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은 메이브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탁,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히자 방 안에 다시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피곤한데도 잠들고 싶지 않은 기분에 메이브는 의자에서 일어나 테라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곤 하얀 돌로 된 난간에 팔을 기대고 서늘한 바람을 가만히 느꼈다.
시선에 닿은 작은 등이 밝게 비추고 있는 정원이 꼭, 밤하늘에 수를 놓은 별처럼 보였다.
코끝을 스치는 꽃 향도, 몸을 두드리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도, 마치 모든 것이 잘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에녹 메이브.’
“하아…….”
‘메이브 님이 저만을 바라보고, 제 품 안에 있기를 바란다면, 그게 사랑하는 겁니까?’
“……어디서 잘못된 걸까.”
‘만약 그렇다면, 전 메이브 님을 사랑하는 거겠네요.’
메이브는 다비드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그 낮은 목소리와 자신에게 사랑하는지 물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때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몸을 돌려, 절 보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어차피 메이브 님과 전 약속으로 얽힌 사이고, 이곳을 벗어나면 헤어질 사이인데.’
‘한낱 말뿐인 거 아시잖아요?’
끝까지 다비드에게 그건 자신이 불쌍해서 사랑한다고 느끼는 거라 말했을 때, 단 한 번 바라는 것을 들어주자 한 그날, 그는 메이브에게 사랑한다 말해 달라고 했다.
‘……다비드 님, 사랑…… 사랑해요.’
메이브는 그때 그 말을 했던 자신의 마음을 떠올렸다. 정말 고백하는 것처럼 한낱 말뿐인데도 부끄럽고 목구멍이 뜨듯해졌던 그 순간을 말이다.
‘저도 사랑해요. 메이브 님.’
‘제가, 동정은 아닌 것 같아요.’
‘나만 바라보고 내 품 안에만 있어 주면 좋겠다는 이 감정이 동정 같지는 않아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내가 당신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그저 동정일 뿐이었다면, 내가 당신을 볼 때마다 키스하고 싶고, 그 몸에 나를 새겨 넣어 잊지 못하게 만들고 싶을 리가 없죠.’
메이브는 온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도망가겠다고 다짐했으면서 그날 다비드의 고백을 떠올리고 있으니,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지 비죽 웃음이 흘러나왔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을 내리고 난간을 붙잡았다. 열이 올라 뜨듯해진 얼굴에 차가운 바람이 스치자, 조금은 숨을 쉬기 편해지는 것 같았다.
“다비드 님.”
메이브는 이곳에 없는 다비드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나를 이용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아, 메이브. 당신에게 옭아매진 날, 벌을 받지 않게 하는 도구로 이용하라고.’
그 당당하고, 우직하면서도 다정했던 그 모습을 떠올리던 메이브는 난간을 움켜쥐고 있던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어쩌면 이 말이 메이브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메이브는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왜 다비드에게서 도망을 가야 할까. 그가 메인수이기 때문일까.
그 답은 메이브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비드에게서 도망을 가야 한다고 온몸의 감각이 소리쳤다. 벗어나야 한다고, 갇히지 싫다면 멀리멀리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도록 숨으라고 말하는 듯했다.
메이브는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고 등이 반짝이는 정원을 내려다보던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화려하게 수놓인 별을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 저를 잊어 주세요.”
멍청한 다비드.
‘대신, 사랑을 못 받는 동물은 죽는다고 하니까.’
‘하루에 한 번, 절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그때 그가 바랐던 말을 메이브는 그 이후로 말하지 않았다. 다비드도 메이브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익숙해지는 게 이상한 겁니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되는 건데, 굳이 익숙해지려고 하지 마세요.’
‘분명, 괜찮을 겁니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모든 것이 괜찮을 거라 말했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던 메이브는 기대고 있던 난간에서 몸을 바로 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모든 미련을 버린 것처럼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가 테라스 문을 굳게 닫았다.
유리 밖으로 비치는 풍경을 잠시 눈에 담은 메이브는 후련했고,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좋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비드 님의 말대로,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 제발 자신이 떠날 이곳으로 그가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점차 자신을 잊어버리기를 바랐다. 그러다 언젠가 나이가 들어 혹시 파티에서 만나게 되더라도, 웃으며 인사하는 사이가 되기를 마지막까지 바라며, 침대에 몸을 누워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저도, 저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다비드 님도…….”
다비드가 듣지 못하는 말을 내뱉은 메이브는 후련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한편으로 아쉽다고 느껴지는 건, 그동안 의지했던 다비드에게 미안한 감정 때문일 터였다. 그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메이브는 말없이 다비드를 피해 도망가는 것이 괜찮을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메이브는 자신이 이야기를 비틀었다고 해도, 조심해야 했다. 목숨은 하나였고, 만약 이곳에서 죽는다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니 그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그것은 서로가 합의한 거래였으니, 그도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메이브는 이제, 정말 이곳에서 벗어나 원했던 힐링 라이프를 즐기자고, 그 지긋지긋한 신전은 잊자고, 그 안에서 만났던 인연도 전부 끊어 내자고, 혼자 결정하고 다짐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적막감이 감돌던 방 안은 고른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하지만 테라스 문을 두드리는 서늘한 바람이 나중에 있을 위험을 알리는 듯 덜컹거리며 적막한 방 안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깊은 잠에 빠진 메이브는 듣지 못한 채, 꿈의 나락에 깊이 빠져 있을 뿐이었다.
***
이른 새벽에 눈이 떠진 메이브는 침대에서 일어나 뻐근한 눈을 문질렀다. 두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일주일간 거의 묶여서 생활했던 기억 때문인지 아침에 편안하게 일어나는 것도, 몸이 뻐근하지 않는 것도, 편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까지 모든 게 어색했다.
메이브는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로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어젯밤에, 이제는 그때 경험한 모든 것을 혼자 묻기로 했으면서 다시 떠올리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후우.”
메이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이 저택에서 벗어나자고 생각했으니, 부모님에게 여행을 떠난다고 말해야 했다. 아침에 같이 식사를 할 테니, 그때 말하자고 다짐했다.
혹시 말리거나 가지 말라고 한다면, 물건을 챙겨 도망갈 생각까지 끝낸 메이브는 옷장 문을 열고 안에 들어 있던 가죽 가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장대에 놓여 있는 보석으로 된 브로치와 시계를 챙기고는 몇 가지 입을 만한 옷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당장 나가도 괜찮을 정도로 물건을 챙긴 메이브는 옷장 안에 무거워진 가방을 집어넣었다.
똑똑.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시간이 조금 흘렀는지, 익숙한 시종의 목소리에 메이브는 급히 옷장에서 심플해 보이는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꺼내고 옷장 문을 닫았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시종이 물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그러다 메이브가 들고 있던 옷을 잠시 쳐다보곤 근처 탁상에 물그릇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그 옷으로 입으시겠어요?”
“편한 옷을 입고 싶어서.”
“세안부터 해 드리고, 옷 갈아입는 것 도와 드릴게요.”
물그릇 안에 부드러운 천을 넣었다 꺼낸 시종은 물을 조심스레 짜낸 뒤, 근처에 서 있는 메이브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닦았다. 그리고 화장대에 있던 크림을 꺼내 얼굴에 전부 발라 주고, 전날 자신이 묶었던 허리 매듭을 살며시 풀어냈다.
“아, 속옷은 지금 꺼내 드릴게요.”
메이브가 옷을 꺼내면서 속옷을 꺼내지 않았기에, 시종은 그가 입던 끈으로 된 속옷을 보고 옷장으로 걸어가려 했다. 그에 메이브는 급하게 시종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어머니가 만들어 준 거니 오늘까지는 입으려고.”
“……네? 하지만 이미 하루 이상은 입으셨는걸요?”
시종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자 메이브는 귀족은 매일매일 속옷을 갈아입는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힘들게 만드신 거잖아. 오늘까지 입고 나면 더는 입지 않을 텐데. 그러니 하루라도 더 입고 싶어서.”
“아, 죄송해요. 도련님. 도련님의 생각을 제가 미처 알지 못했어요…….”
시종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금세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지만 메이브는 그런 시종의 모습에 무안해 손끝으로 볼을 긁었다. 풀이 죽은 것은 괜찮았지만, 갈아입히던 옷은 마저 마무리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메이브가 괜찮다는 듯 시종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에 정신을 차린 듯 시종은 약간 침울한 얼굴로 그가 입고 있던 가운을 벗겼다. 그러자 서늘한 방 안의 공기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다. 메이브는 두 손으로 몸을 작게 문질렀다.
그러는 사이에 시종은 메이브가 꺼냈던 셔츠를 그에게 입혀 주기 시작했다.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고 바지까지 입혀 주는 행동에 메이브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중을 해 주는 것이 불편했었다. 하지만 신전에서 씻는 것도, 먹는 것도, 옷을 입었다 벗는 것도 모든 것을 전부 다비드가 해 주었기 때문인지 전과는 다르게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도련님, 여기에 앉으세요.”
시종이 화장대 앞에 있던 의자를 살짝 빼내는 것을 본 메이브는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시종이 메이브의 머리카락에 물을 묻히고 머리를 만져 주기 시작했다.
“오늘은 주방장님이 도련님의 식사를 위해 힘을 냈다고 들었어요.”
“식사?”
“네, 성인이 되셨으니 든든히 드셔야 한다고 비싼 재료로 식사를 준비한다 하더라고요.”
“기대되네.”
비싼 재료로 힘을 내서 만든 음식이 얼마나 맛있을까, 메이브는 아직 보지도 못한 음식을 빨리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메이브의 눈을 반쯤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머리를 만져 준 시종이 조금 길어진 그의 머리끝을 만졌다.
“이번에 머리도 한번 자르셔야겠어요.”
메이브는 그 말에 화장대에 있는 거울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눈을 찌를 것처럼 어중간한 길이의 앞머리가 거슬렸다. 하지만 반쯤 머리를 뒤로 넘겨 만져 준 것 때문인지, 눈에 찔리지는 않았다. 메이브는 눈꼬리 근처에 있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뒤로 넘기곤 의자에서 일어났다.
“부모님은 식당에 계셔?”
“아마 지금쯤 식당에 계실 거예요.”
“그래.”
메이브는 머리도 멋있게 해 주고, 옷을 갈아입혀 준 한 시종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고맙다고 말하면 시종이 당황할 것이 뻔했기에 메이브는 살짝 웃으며 시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 덕분에 멋있는 모습이 된 것 같아.”
이렇게 하면 고맙다는 걸 조금 돌려 말한 건 아닐까, 메이브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자 시종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흔드는 것이 보였다.
“아니에요. 저는 도련님 덕분에 이곳에서 지낼 수 있는 건데, 도련님이 더 멋있고 편안하게 제가 더 열심히 노력할게요.”
메이브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르게 감동한 것 같으면서도, 더 노력한다는 시종의 모습에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이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그 말이 의아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것으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메이브는 시종에게 무엇을 도와줘서 이곳에서 지낼 수 있는지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었다. 차라리, 빙의했으면 원래 메이브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묻게 되면 이상하게 보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기대할게.”
메이브는 궁금증을 꾹꾹 눌러 담고 방 밖으로 나가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본모습을 보여 주지 않고 친절한 모습만을 보여 주었으니, 아마 그때 시종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소설 속의 클리셰처럼 골목에서 굶어 죽을 뻔한 시종에게 일을 준 걸지도 몰랐다. 시종은 신전에서 굶지 않고 배부르게 살 수 있게 빌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메이브는 묻지 못한 궁금증을 혼자 추측해서 풀어내며 어느새 식당 문 앞에 도착했다. 근처에 있던 시종이 메이브를 보고는 손을 뻗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식당 안쪽으로 커다란 식탁과 그 위에 다 담지도 못할 만큼 차려진 음식이 보였다.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가니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아버지와 그 옆에 자리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메이브는 어머니의 맞은편 자리에 있는 식기를 보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메이브가 작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에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어머니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메이브는 어머니의 맞은편 자리로 걸어가 의자를 꺼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이제 식사하지.”
아버지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와 함께,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그 뒤에 서 있던 시종은 아버지가 물 잔을 들어 올리자 소리 없이 다가와 아버지의 잔에 물을 따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메이브는 속으로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는 입을 벌렸다.
“어머니, 아버지.”
메이브의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에 부모님의 시선이 메이브에게 닿았다. 그는 그 시선을 느끼며 최대한 떨리지 않게 말하자고 몇 번이나 속으로 다짐했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부탁이라. 무슨 부탁을 말하는 거지?”
아버지가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고 근처에 있던 천으로 입가에 묻은 소스를 툭툭, 두드려 닦았다.
“이번에…… 성년이 되었으니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 보고 싶어요.”
메이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는 걱정이 약간 묻어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다른 지역, 어디로 여행을 가려고 하는 거니?”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지 않으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메이브는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가야 하고, 사람을 숨기려면 사람 속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실베스타 영지로 가 보려고 해요.”
“실베스타 영지라. 그곳은 산림이 우거져 있어 가는 것이 힘들다는 걸 알고 있나?”
“……네, 그곳을 지나 바다의 도시인 에보니 쪽도 가 보려고 해요.”
실베스타 영지로 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아는 지역이라고는 ‘마이 홀’에서 보았던 지역 이름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확실히 기억나는 것이 아니었기에 주연들의 성을 떠올리며 메이브가 말했다.
“에보니 영지는 괜찮지. 항구가 자리 잡고 있어 무역으로도 유명한 곳이니 말이다.”
“……무역이요?”
“알고 말한 것은 아니었나 보군. 배가 많이 오가는 곳이니, 근처에 작은 섬으로도 여행을 갈 수 있지.”
메이브는 아버지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배가 많이 오가고 근처에 작은 섬이라는 말에 드디어 자신이 숨을 곳을 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은 어느 정도 하고 올 생각이지?”
“……1년. 1년 동안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오고 싶어요.”
어느 정도 허락한 것 같은 아버지의 말에 메이브가 속으로 안도할 때 어머니가 의자에서 급히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 메이브는 어려요!”
어머니의 급한 외침에도 아버지는 손을 뻗어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는 스테이크를 썰었다.
“성년이 되었으니, 어린 것도 아니지.”
“이제 막 성년이 된 거예요.”
“언제나 우리 그늘에 아이를 묶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일세. 이번에 메이브가 여행으로 성장해서 오는 것도 썩 괜찮지 않소?”
어머니의 걱정 어린 말에 얼마나 메이브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메이브는 그에 이 몸에 갑자기 빙의하게 된 뒤, 원래의 메이브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저희의 품에서 나가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걸 포기한 것처럼 메이브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정한 눈에 품은 걱정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걱정을, 이 사랑을 자신이 받아도 되는지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꼭, 깊고 깊은 심해에 온몸이 묶여 있는 것 같았다. 어깨가 무거워지고 마음은 불편했다.
미친놈이었지만 이렇게 사랑을 많이 받았던 메이브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왜 이런 사랑을 받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렇게 비뚤어진 걸까. 수없이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헤엄쳤다.
“그렇지 않니, 메이브.”
다정한 목소리가 메이브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메이브는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도 어머니, 저는 한 번쯤 자유롭게 여행을 가 보고 싶어요.”
여행, 언젠가 정말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게 지금이 아닐 뿐이었다. 메이브는 당장 도망갈 곳을 물색해야 했고, 그게 어디든 다비드의 손이 뻗지 않는 곳이어야 했다.
메이브가 공작 가문의 아들인 것처럼, 다비드 역시 백작 가문의 아들이었기에 그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필요를 위해서라면 사람을 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처럼 성장해서 다시 돌아올게요.”
그게 어느 정도일지는 메이브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길고 긴 시간이 지나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 짧은 시간이 지나서일 수도 있었다.
메이브는 그 모든 것을 떠올리며 눈앞에 있는, 이제는 자신의 어머니가 된 메이브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메이브는 오롯이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믿어 달라는 듯이 편안하게 웃었다. 그런 메이브의 모습에 어머니는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어 나이프를 우아하게 들어 올렸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에 걸려 있는 나이프가 작게 흔들렸다. 어머니는 고민이 많은 얼굴로 메이브를 한번 쳐다보다가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 말처럼 여행을 가면 아이가 성장해서 올 테죠. 하지만 혼자는 못 보내겠어요.”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툭툭, 두드려 닦으며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콘라드를 붙여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
처음 들어 보는 이름에 메이브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마이 홀’을 읽었을 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콘라드. 극 중에 그렇게 비중이 크지 않은 인물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마이 홀’에서의 이야기는 메인수였던 데이비드를 따라서 움직였으니, 메이브 주변의 인물은 나오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
“콘라드가 곁에 있다면 저도 조금은 안심이 되네요.”
두 분이 믿고 메이브에게 붙여 줄 만큼의 인물이니, 호위 기사일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콘라드가 누구인지를 묻는 것보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만약 늦게 허락해 주었다면, 메이브는 나가는 날 다비드와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콘라드와 같이 가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신 것에 메이브는 작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얼마나 하다 올 생각이니?”
나이프로 고기를 기품 있게 썰고 있는 어머니를 잠시 쳐다보던 메이브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얼마나 여행을 하게 될지, 메이브도 장담할 수 없었다.
“가고 싶었던 곳을 전부 가 보고 만족스러울 때 돌아올 거예요.”
“가고 싶은 곳이, 그래 아까 말했던 실베스타 영지와 에보니 영지. 그 두 곳을 말하는 것이냐.”
“……아놀드 영지도 한 번쯤은 가 보려고 해요.”
메이브는 자신의 입으로 아놀드 영지도 간다고 말했으나, 속으로는 절대로 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메이브를 쳐다보았다.
“왜 그곳에 가는 거지?”
“이번에 성년식에서 만난 인연이니, 그들이 지내는 곳을 한 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메이브는 자신이 이렇게 입에 발린 말을 잘하는 게 신기했다. 거짓말을 하는데도 그게 진짜인 것처럼 말했으니 말이다. 이러다가 정말 남들에게 사기를 치는 사기꾼이 되어도 모두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혼자 뿌듯해했다.
“좋은 인연은 끝까지 가는 것도 괜찮지.”
아버지 역시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런 메이브를 쳐다보던 시선을 돌려 멈추었던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그런 부모님을 잠시 쳐다보던 메이브는 식사를 빠르게 끝냈다. 그리고 부모님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피해 방으로 돌아왔다. 아까 다 싸 놓은 짐 가방을 들고 방문을 열고 나가니, 밖에 시종이 서 있었다.
아버지에게 이미 이야기를 다 들었는지 시종은 손을 뻗어 메이브의 손에 들려 있는 가방을 가져가 계단을 찬찬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행은 어디로 다녀오실 거예요?”
“에보니 영지로 가 볼 생각이야.”
“아! 그 검술 천재가 있는 곳 말씀하시는 거예요?”
“검술 천재?”
“네, 에보니 아더. 에보니 백작 가문의 장자 말이에요.”
커다란 문 앞에 선 시종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던 메이브는 그의 등 뒤를 따라 걸으며 시종을 쳐다보았다.
분명, 메이브가 도와주어 감사하다고 말했던 시종인데도, 지금 이 안에 들어온 메이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가문의 시종들이 전부 다 아는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뒤가 찜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검술 천재야?”
하지만 메이브는 이번에는 너무 궁금했기에 시종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마이 홀’에서 에보니 아더, 흑곰에 대해 다룬 이야기가 있었으나, 그의 영지가 바다가 있는 부두에 있는 것도, 그가 검술을 잘 다루는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아놀드 알란과 사이가 몹시 좋지 않으며, 서로를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서사에 쓰여 있을 뿐이었다.
메이브는 이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네, 작년에 성년식을 끝내고 올해 황실에서 열리는 검술 대회에서 쟁쟁한 후보를 무찌르고 우승했잖아요.”
“……우승.”
“도련님?”
시종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메이브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의아하게 보는 시종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그 시선을 무시한 채, 저 앞에 보이는 마차로 걸어갔다.
신전의 마차와는 다르게 가문의 모양이 그려져 있는 화려한 마차를 보고 있으니, 어느새 옆으로 온 지도 모를 기사가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반갑습니다, 도련님.”
메이브는 그 우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가 아까 부모님이 말했던 콘라드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에 메이브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마차 문을 붙잡고 올라갔다.
“앞으로 잘 부탁해, 콘라드.”
“예, 잘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콘라드의 고개가 시종에게 향했을 때, 시종은 콘라드에게 몸을 숙여 인사하고는 마차의 짐칸에 메이브의 짐을 넣었다.
“도련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살짝 웃으며 인사하는 시종을 보고 메이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문이 조용히 닫히고 부드러운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고 나니, 이제 정말 이곳을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났다.
메이브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이었으나, 이곳은 메이브가 있으면 안 되는 곳이기도 했다. 다비드가 자신을 잊었을 때, 그때 돌아오자고 다짐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메이브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따듯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정원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며 메이브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나니,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말, 그렇게 바랐던 일상을 지낼 수 있을지, 아니면 다비드를 피해 계속 도망자 생활을 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메이브는 그건 그거대로, 이건 이거대로 어떤가 싶었다. 정말 만약에 다비드가 메이브를 잊지 않는다면 메이브는 어느 깊은 곳에 숨어 편안한 삶을 살 것이고, 그가 메이브를 잊는다면 다시 돌아와 저 화려한 집에서 편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메이브는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쩐지 꽃을 따듯하게 품고 있는 햇살이, 메이브는 자신의 앞길에도 따듯하게 내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메이브가 타고 있던 마차가 빠르게 움직이며, 저택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니, 아무리 푹신한 의자였어도 메이브이 엉덩이와 등이 배기기 시작했다. 그는 작게 몸을 움직이다 마차 벽에 기대어 눈을 살며시 감았다.
‘신님, 신님. 앞으로 제 앞길이 평안하게 해 주세요.’
***
“그래서, 찾지 못했다고?”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했다. 화가 진득하니 묻어 있던 목소리를 끝으로 탁탁, 규칙 있게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잠시 적막이 감돌던 방에 울려 퍼졌다.
“……죄송합니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 녹색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흉흉히 빛이 났을 때, 그 눈은 몸을 숙여 사죄하는 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술에서 비릿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거칠게 넘긴 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환하고 아스라이 부서져 내리는 달빛에 비치는 연분홍색의 머리카락이 작게 흔들렸을 때, 그 앞에 서 있는 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몸을 굽힌 채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자그마치 6개월이다. 그런데 그사이 아무런 소식을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죄송합니다.”
다비드는 그때의 일을 서서히 떠올렸다. 산림이 우거져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는 숲을 지나 영지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영지로 돌아온 다비드는, 작으면서도 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을지 모르는 메이브가 어디론가 도망갈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에 급히 옷만 갈아입고 에녹 영지로 출발했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날씨가 흐릿했다. 가는 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져 바퀴가 고장이 나고, 망가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에 마차를 끌고 있던 말 한 필을 풀어 에녹 영지까지 급히 달려갔었다.
속도에 얼굴과 몸에 부딪혔다 떨어지는 빗줄기는 따갑기 그지없었고, 눈앞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폭우가 쏟아졌다.
온몸이 물에 젖어 무거웠으나, 다비드의 눈빛은 죽지 않은 채로 안개가 짙게 깔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길을 아는 것처럼 에녹 영지로 향할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영지에 도착했을 때, 다비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메이브를 만난다는 생각에 급히 근처에 있던 옷가게로 들어가 괜찮은 옷 한 벌을 사고 숙소에서 몸을 씻어 더러워진 옷을 버렸다. 그리고 멀끔해진 모습으로 머리를 정돈하고 에녹가에 도착했을 때, 살짝 미소 지어져 있던 그 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메이브가 이곳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택의 감옥을 지키고 있던 기사에게 들은 말은 다비드의 얼굴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이제 그를 책임져 주겠다고 말하려 그렇게 힘든 길을 찾아온 건데,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메이브가 어디론가 도망을 가 버렸다.
다비드는 혹시 기사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지 한참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으나, 그는 어쩐지 귀찮아 보이는 얼굴로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어느 가문의 자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도련님은 얼마 전 여행을 떠났습니다.”
“……언제 떠났는지 알 수 있습니까?”
“도련님과 만나는 것은 약속되어 있던 일입니까?”
다비드의 물음에 기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외려 그에게 되물었다.
“……만나기 위해 찾아온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때, 메이브가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다비드도 알고 있었다. 멍하니 풀어진 얼굴에 당황이 감돌았을 때, 그때 그 몸을 붙잡아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게 자신의 마차에 태웠어야 했다. 다비드는 살짝 굳어진 얼굴로 커다란 쇠문 뒤쪽으로 펼쳐져 있는 정원과 그 뒤의 화려한 저택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다비드의 물음에 기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곧 각 잡힌 몸으로 섰다.
“도련님은 성년식을 치르고 돌아온 다음 날, 바로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성년식. 다비드 역시 신전의 마차를 타고 원래 성년식을 치렀을 곳에 도착했었다. 그곳에서 성년식을 무사히 치르고 저택까지 돌아온 시간이 3일. 그리고 바로 출발해 쉴 틈 없이 달려 에녹가에 도착한 것이 4일. 그사이에 메이브가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어디로 갔는지 물어도 기사는 고개를 흔들며 어디로 갔는지는 자신들도 알지 못한다고 못을 박듯이 말했다.
다비드는 눈앞에 있는 기사에게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화를 참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메이브가 돌아온다면 다비드가 다녀갔다 말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철창에 가두려 했던 새가 도망갔으니,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다비드는 기사가 그의 말을 전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자, 떨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다시 실베스타 영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있는 돈과 자신의 사람을 풀어 메이브의 소식을 찾고 찾았다. 하지만 흔치 않은 자색의 눈을 보았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메이브의 이목구비와 비슷한 사람을 찾고 찾았을 때, 그와 비슷한 자를 보았다는 말에 다비드가 말을 타고 달려간 것도 몇 번, 그중에서 실제로 메이브였던 적은 없었다.
다비드는 그제야 정말 메이브가 흔적도 없이 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비드는 그에 화가 났다는 것보다 즐겁게 웃었다.
자유롭게 날던 새를 잡는 것도 괜찮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벌써 6개월이 지날 거라고는 다비드로선 생각지 못했다. 메이브가 자유로울 거라 생각한 것은 단 한 달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수색하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지?”
“섬입니다.”
난간에 몸을 기댄 다비드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자신의 종을 바라보았다. 종의 말대로 대륙에서 다비드가 찾지 않은 곳은 단 한곳도 없었다. 그곳이 벼랑 끝에 있는 곳이어도, 산간 오지 전부 그 흔적을 찾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비드가 가지 않은 곳이 있었다. 배를 타고 나가야 하는 작은 섬. 그곳이 다비드가 찾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다비드는 메이브가 그곳까지 가서 불편한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신전에 있을 때 사람 없는 오두막에서 살고 싶다는 그 소소한 소원을 떠올리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같이 가지.”
“……주군도 채비를 하는 겁니까?”
“정말 그곳에 메이브가 있다면, 찾고 나서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다비드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메이브가 숨을 곳, 메이브가 모습을 감추는 것, 모든 것을 말이다. 다비드는 이들에게 두 가지 명을 내렸다. 하나는 메이브의 소식과 정보를 가지고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약 메이브를 찾게 되면 그의 몸이 상하지 않게 자신의 앞으로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들만 보내고 메이브의 몸을 상하지 않게 데리고 오려다 놓칠 수도 있을 터였다. 다비드가 알고 있는 메이브는 착한 듯하면서도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비드는 한 번은 속았으나 또다시 속을 생각은 없었다. 이미 한 번 자신의 손을 떠나 도망갔으니, 이제는 붙잡을 때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그곳에도 없다면, 그분이 다른 모습으로 변장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것 같나?”
“……아닙니다.”
“모습은 감출 수 있지. 그런데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게 있지 않나.”
다비드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툭툭, 건드렸다. 머리색은 염색해서 바꿀 수 있어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것은 눈동자 색이었다.
“자색의 눈이 흔한가?”
“……흔치 않습니다.”
황실의 핏줄로 내려온다는 색이 자색이었다. 진하면 진할수록 그 핏줄이 고귀하다고 말하는 색이었다. 그러니 그 눈이 흔한 것이 아닌데도, 메이브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종의 말처럼 그가 대륙을 벗어나 섬으로 도망쳤다는 말이었다.
다비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종에게 느릿느릿 걸어가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준비해. 오래 기다렸으니 모셔 와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하지만 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종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다비드의 손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몸을 일으킨 종의 얼굴은 고통에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다비드가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떨어트리니, 종은 급히 그 어두운 방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다비드는 고개를 돌려 커다랗게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 만나러 갈 수 있겠네요. 메이브 님.”
듣지 못할 메이브가 곁에 있는 것처럼 속삭이듯 말한 다비드는 눈앞에 마치 그가 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풀어진 눈으로 달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에 펼쳐진 별을 보며, 메이브도 지금 같은 것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화가 나 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그런 다비드가 몸을 크게 움직이니, 가볍게 걸치고 있던 가운이 그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다비드는 그것이 불편하지 않는 듯 선반으로 걸어가 자신이 떠올려 그렸던 메이브의 그림을 들어 올렸다.
환하게 웃고 있는 메이브의 그림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던 다비드는 입가로 가져가 그림에 자신의 입술을 작게 비볐다.
“조금만 기다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