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01. 성년식
메이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밖에 없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느라 따가워진 볼과 코에 그는 들고 있던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처음 신전에 갈 때 입었던 하얀색 옷은 전과 다르게 품이 조금 커졌다. 신전에서 그것을 하는 시간을 빼면 먹고 잠잔 것밖에 없는데도, 살이 빠진 것 같았다. 어쩌면 근육이 빠진 걸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편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메이브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던 다니엘 때문에 다른 이들은 어떻게 나왔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자신을 보고 있던 짐승 같은 알란의 눈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다비드의 품에 안겨 그곳을 빠져나왔을 때, 오롯이 자신만을 보고 있는 것 같던 알란은 입을 뻐끔거리며 메이브에게 ‘나중에 다시 만나.’라고 말했던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입 모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이브는 알란의 눈이 형형하게 자신을 쳐다보며 입꼬리만 올려 웃던 그 표정이 뇌리에 남았다.
“내가 지금 누구를 걱정해…….”
기억을 더듬고 있던 메이브는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누구를 걱정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당장 어떤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하게 꼭꼭 숨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메이브는 무릎에 내려놓았던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답답한 심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메이브는 머리를 잡고 쥐어뜯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멍청한 메이브, 둔하고 바보 같은 메이브. 다니엘이 끝까지 이름을 모를 거라 생각한 자신의 둔함에 속으로 몇 번이고 자신을 욕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메이브는 고개를 들어 올려, 산에서 나와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지금 고민한다고 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에 다비드가 에녹가를 찾아갈 때까지 자신을 기다리라 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
메이브는 무거워진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어쩐지 자신의 눈앞에 선택지가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비드가 에녹가로 올 때까지 그를 기다리는 것과, 다비드가 에녹가에 도착하기 전에 어디로 향했는지 모든 흔적을 지우고 숨는 거였다.
메이브는 머리를 잡고 있던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탁탁, 손톱이 이빨에 갈리는 소리가 조용한 마차에 한참을 울렸다.
‘어쩌긴 뭘 어떻게…… 도망가야지.’
메이브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시뮬레이션 해 보았다. 자신이 행하려고 하는 게 문제가 없을지, 어디로 도망가야 자신이 바라고 바랐던 힐링 라이프를 즐길 수 있을지 고민했다.
주변에 시끄러운 것도 없고, 조용한 산림에 있는 작은 오두막 같은 집이 메이브가 원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난 날 다비드와 이야기하면서 나왔기에 메이브는 그런 집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메이브 님, 따로 좋아하시는 것 있으신가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아요.’
‘아무것도 없는 곳?’
‘네, 주변에 시끄러운 것도 없고…… 그냥, 조용한 산림 안에 있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거…… 그게 좋아요.’
만약 메이브가 그곳에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고 숨는다 해도, 다비드가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그가, 끝끝내 자신을 찾아올 것 같았으니 말이다.
메이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차가 서서히 멈추어 서는 걸 느꼈다. 성년식을 치르게 되는 신전에 도착한 건지, 마차가 멈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평온한 날입니다, 형제님.”
문을 열어 준 사제는 아까까지 있었던 신전의 사제와는 사뭇 달랐다. 보는 사람마저 평온하게 만드는 미소를 머금은 그가 메이브에게 조용히 손을 뻗었다.
“제 손을 붙잡고 조심히 내려오세요.”
메이브는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제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러곤 코끝을 스치는 산뜻한 꽃냄새를 따라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얀색 신전은 먼저의 그 신전과 비슷해 보였지만, 주변에 펼쳐져 있는 하얀색과 분홍색 꽃들의 모습에 메이브는 입을 헤벌렸다.
“저 꽃은…….”
“거베라 꽃을 말씀하시는군요.”
“거베라 꽃이요?”
“네, 분홍색의 거베라는 감사와 숭고한 아름다움을 뜻하며, 하얀색의 거베라는 희망과 의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
둥글고 수많은 꽃잎이 모여 있는 꽃이, 어쩐지 해바라기 같아 보였다. 메이브는 신관의 손을 계속 잡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멍하니 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성년식이 끝나면 형제님께 오렌지색의 거베라 꽃다발을 드릴 겁니다.”
“그 꽃은 무슨 의미를 품고 있어요?”
메이브는 복잡했던 머릿속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신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직 자신이 신관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놀란 얼굴로 급하게 손을 떨어트렸다.
그런 메이브를 바라보며 포근한 미소를 머금은 신관이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성인이 된 이들에게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그들의 모험 정신을 응원한다는 의미로 신비와 모험 정신의 뜻을 가진 오렌지색 거베라 꽃을 선물해 드리고 있습니다.”
메이브는 신전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신관을 따라 걸었다. 그러면서도 하얀 신전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꽃향기와, 심플하면서도 그 매력을 뽐내는 거베라에 시선이 빼앗기는 듯했다.
“성인이 되면 지금까지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라는 의미입니다.”
신관은 고개를 살짝 돌려 거베라 꽃을 보면서도 착실히 따라오는 메이브를 쳐다보았다. 그에 신관의 말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메이브가 고개를 돌려 신관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신관의 모습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친절하게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호기심과 궁금증은 삶의 질을 올려 준답니다.”
신관은 그런 메이브를 다정하게 쳐다보며 하얀색 문에 손을 가져갔다. 메이브는 그 문을 보자 음욕의 신전 홀의 문이 떠올랐다. 저 문이 열리고 그때와 같은 상황이 펼쳐지면 어떻게 하나 고민하는 사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
문이 열려 안쪽으로 보이는 공간에 메이브는 미약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입구부터 저 끝에 손을 모으고 있는 여신의 석상 앞까지 하얀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대리석 위로 깔린 카펫 밑으로는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공간에 투명한 물이 채워져 있었다. 그 물 위를 연꽃처럼 둥둥 떠 있는 색색의 꽃들이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신관은 문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메이브를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메이브가 정신을 차리고 신관을 쳐다보았다. 신관은 그런 메이브를 잠시 바라보다 손으로 여신의 석상을 가리켰다.
“저 앞에 가서 기도를 하면 됩니다. 이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말하지 않고, 형제님의 마음 깊은 곳에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메이브가 주춤거리며 부드러운 카펫을 밟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관이 잡고 있던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홀 안에 울렸다. 그마저도 곧 들리지 않게 되자 홀은 깊게 가라앉은 것처럼 조용했다.
메이브는 석상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도 투명하다 못해 바닥이 보이는 물과 그 위에 떠다니는 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꽃 냄새에 취한 건지, 아니면 너무 조용한 이곳에서 톡, 톡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서 그런지 메이브는 무거웠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걸음, 두 걸음 옮길 때마다 석상이 가까워지는데도 멀어지는 것 같았다. 분명 짧은 거리인데 길다고도 느껴졌다.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 발걸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
멍하니,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여신의 석상을 바라보았다. 신관의 미소처럼 포근하고 자애로운 그 미소에 메이브는 심장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두근두근 뛰고 있는 가슴을 붙잡고, 웃고 있는 석상을 쳐다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힘겹게 무거운 걸음을 옮겨 마지막 계단을 남겨 놓고 메이브는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게도, 울적한 마음에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 같았고, 한편으로는 이제 괜찮다고 따듯한 품에 안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는.”
메이브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입을 벌려 자신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떠올리며 입술을 서서히 벌렸다.
“평안한 날을 보내고 싶어요.”
아무 위험도, 문제도 없는 평온한 날을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행복해지고 싶어요.”
신에게 소원을 빌어 이루어진다면 메이브는 이곳에서 행복해지는 게 소원이었다. 누군가는 책에 빙의하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으나, 메이브는 아니었다. 굳이 지금 이렇게 돈이 많은 가문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릴 것은 누리며 살고 싶었다.
메인수였던 데이비드를 괴롭히지도 않았고, 결국 무난하게 지났으니 이제 죽을 위험은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다.
메이브는 다비드가 자신을 찾아온다고 말했으나, 상관없다 생각했다. 어차피 그전에 모습을 감추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조용하고, 편안하고, 즐겁게. 그런 일상을 보내고 싶어요.”
메이브가 오롯이 바라는 것은 그게 끝이었다. 누군가는 용기를, 어떤 자는 힘을, 또 다른 자는 돈을 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이브가 원하는 것은 편안한 하루였다.
아무 두려움도 없고, 편안하게 잠을 자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놀고 싶을 때 빈둥거리면서 노는 것. 어쩌면 쉬운 것이고 어쩌면 가장 어려운 그것이 메이브가 원하고 바라는 거였다.
메이브는 두 손을 맞잡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바라고 바라니, 제발 자신의 힐링 라이프를 지켜봐 달라고 말이다.
“제 꿈은…… 돈 많은 백수니까…….”
끝까지 지켜봐 달라고 말하던 메이브는 결국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성년식을 치르며 신의 석상 아래에서 기도를 하는데 원하는 게 돈 많은 백수라니, 메이브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다.
하지만 우스우면 뭐 어떠할까. 평생토록 원했던 꿈이 그것인데 말이다.
“……응?”
메이브는 어쩐지 누가 주변에서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숙였던 고개를 들어 눈앞에 보이는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아까처럼 두 손을 마주 잡고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석상이, 조금 더 진한 웃음을 짓고 있는 듯 보였다.
메이브는 혹시 자신이 잠에서 덜 깬 건가 싶어 손을 들어 눈을 문질러 보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여도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진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자신이 착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고개를 흔들고 눈앞의 석상을 보며,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으로 걸어가니 아까 그렇게 길게 느껴졌던 길이 짧게 느껴졌다. 메이브는 문고리를 붙잡았다.
작은 웃음소리가 메이브의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허밍 같으면서도 즐거운 웃음소리에 메이브는 고개를 돌려 홀 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많이 피곤한가?’
너무 피곤하면 이상한 이명이 들린다고 하는데, 그래서 들리는 건가 싶었다. 메이브는 갑자기 소름이 돋아나는 느낌에 두 손으로 팔 주변을 문지르다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따듯한 공기가 몸에 달라붙는 느낌에 메이브는 걸음을 멈추고 목을 감싼 옷을 매만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생하셨습니다, 형제님.”
“네?”
문 바로 근처에 있던 신관이 품에 오렌지색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메이브가 신관의 손에 들려 있는 꽃을 가만히 바라보자, 신관은 그 꽃다발을 메이브의 품에 안겨 주었다.
“성년식이 끝나신 것을 축하드려요.”
“……끝났……다고요?”
성년식이 끝났다는 말에 메이브는 멍하게 풀어진 얼굴로 신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음욕의 신전에서 그렇게 힘들었기에, 성년식이 도대체 어떻게 치르는지 너무도 궁금했었다.
하지만 입구에서 석상의 앞까지 걸어가 기도를 드리는 것이 끝이라는 말에 메이브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데, 푸근한 얼굴로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신관의 표정을 보니,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네, 형제님이 걷는 그 길이 시련이었고, 형제님이 고개 숙여 기도한 그곳이 앞날의 축복이었어요.”
메이브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정말 이것이 끝이라는 사실에 메이브는 혹시 거짓말이 아닐까, 또 무언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몇 번이고 메이브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가는 길이 쉬우셨나요?”
“네?”
“아니면 어려우셨나요?”
신관의 말을 메이브는 이해할 수가 없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신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숨겨지지 않는 그의 감정에 신관은 부드럽게 웃으며 메이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만약 형제님이 가는 길이 쉬웠다면, 살면서 잘못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반면 가는 길이 어렵고 가시밭길처럼 힘들었다면 그것은 형제님이 살면서 커다란 잘못을 했다는 겁니다.”
메이브는 그 말에 그제야 석상까지 가는 길이 왜 그렇게 발걸음이 무겁고 길게 느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이 짧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메이브는 신관에게 그럼 안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는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전, 신관은 메이브에게 말했었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메이브의 가슴에 묻으라는 것을 말이다. 메이브는 결국 그 웃음소리를 묻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피곤했기에 들었던 이명이라고 생각하며 품에 안아 든 꽃을 내려다보았다.
향기로운 꽃이 유난히도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신비와 모험 정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꽃이, 어서 도망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형제님의 앞길에 무서운 가시가 기다릴 수도 있고, 어여쁜 꽃이 펼쳐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
“그 길에 무엇이 있든지, 형제님은 가고자 하는 길을 잊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면 됩니다.”
신관은 그 말을 하고 메이브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메이브가 두 손으로 꽃다발을 들고 있는 상태로 신관을 바라보자, 자신의 일은 이제 끝났다는 듯 신관이 몸을 돌렸다.
“이제 돌아가실 시간이니, 저를 따라오세요.”
왔던 길을 돌아가는 신관의 뒷모습을 보며 메이브는 무거워지는 다리를 움직였다. 한 발, 두 발,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온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에 메이브는 고개를 숙이고 꽃을 내려다보았다.
잘못한 만큼 가는 길이 힘들었을 것이고, 잘못이 없는 만큼 가는 길이 쉬웠을 거라 말하는 성년식이, 메이브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메이브가 빙의하기 전 원래의 에녹 메이브는 속으로 모든 것을 숨긴 채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자였다. 앞에서는 착해 보여도, 뒤에서는 음험하게 남을 괴롭히고 죽이는 것을 즐기던 미친놈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메이브는 고개를 들어 신관을 바라보다가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이 유난히 더 무거워 보였다. 다시는 오지 않을 곳인데도 불구하고 눈에 밟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직은 알지 못했다.
“형제님.”
그런 메이브를 부르는 신관의 목소리에 메이브가 정신을 차렸다.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타고 왔던 마차가 보였다. 신관은 마차의 문을 열고 메이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고 안에 탑승하라는 듯이.
메이브는 잠시 신관의 행동에 머뭇거렸지만, 곧 신관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 올라타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신관은 그 아래에서 메이브에게 축복을 내린 후, 마차의 문을 닫았다.
이제 정말 성년식이 끝났다는 사실에 메이브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작인 걸까.”
돈 많은 백수로 살기가 생각보다 힘들었다. 왜인지 목숨을 저당 잡혀 누군가에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메이브는 등받이에 등을 편하게 기대고 출발하는 마차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창밖으로 나무와 바람에 꽃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이곳에 들어온 지 이제 8일째, 한 주가 겨우 지나갔는데 너무 많은 일이 메이브에게 벌어졌다.
갑작스러운 성년식을 치르는 것도, 그 신전이 미쳐 버린 신전인 것도, 메이브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빠르게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갔다. 메이브는 눈을 감고 있는 상태로 손을 움직여 품에 들려 있는 꽃잎을 매만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 지나갔는데, 이상하게 익숙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메이브가 이 몸에 자리를 잡으면서 원래의 그와 동화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메이브는 감았던 눈을 뜨고 어둑해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신님, 신님. 왜 저를 미친놈한테 빙의시키셨나요…….’
남이 싼 똥을 열심히 치웠는데 이상하게 계속 어디선가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치우고, 치우다 보면 언젠가 바라던 힐링 라이프를 즐길 수 있을까. 하지만 왜인지 메이브의 감이 앞으로도 더 많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메이브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일단, 에녹가로 돌아가면 짐부터 싸고 여행을 다녀온다고 말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돈이 되는 보석을 챙기고 밖에서 즐길 것 좀 즐기고, 다비드나 알란이나,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기억에서 자신이 사라지면 돌아오자고 생각했다.
그러곤 커다란 별장 근처의 호수가 있는 곳에서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다 나중에 다비드가 자신을 완전히 잊었다면, 그때 말했던 것처럼 숲속에 한적한 오두막을 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메이브는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행복한 미래를 계획하는 동안,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건 그만 모르는 일이었다.
그 행복하고 달콤한 상상이 깨지게 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