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세 번째 밤
“……읏?”
움직이던 메이브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을 반쯤 뜨고 속이 꽉 찬 기분에 묶여 있는 팔을 살짝 움직였다. 뻐근한 몸과 별개로 손끝에 만져지는 단단한 근육에 뻑뻑한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비틀었다.
“일어났어요?”
웃음이 섞여 있는 다비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술만 뻐끔거렸다. 구멍 안에서 꺼덕이며 요동치는 성기가 가장 먼저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다리 안으로 들어온 단단한 허벅지에 숨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뭐 하세요……?”
“아, 이게 저녁에 제가 메이브 님에게 해야 했던 행동입니다.”
“……그, 네.”
살짝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다비드가 이런 행동을 이유 없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지키지 못한 자가 잘 수 있다는 방법이라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미쳐 버린 신전이라고 속으로 욕을 반복하자, 정말 더 미쳐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럼, 천천히 빼겠습니다.”
“읏.”
구멍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자, 예민해진 구멍이 벌렁거렸다. 주름을 문지르며 한 번에 빠져나갔다. 메이브의 허리가 굽혀지며 숨을 몰아쉬었다.
밤새 성기를 넣고 있었기에 벌어져 있던 구멍은 좀처럼 조여지지 않고 크게 벌렁거렸다.
“잠깐 누워 있어요. 수건으로 밑 좀 닦고 올게요.”
“……네.”
다비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걸어가는 것을 쳐다보다 몸을 비틀며 침대에서 힘겹게 일어나 기댔다. 잠을 잘못 잤는지, 허리가 유난히 뻐근하고 욱신거렸다. 무거운 몸을 비틀며 최대한 기지개를 켜고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 있는 물을 붓고, 축축해진 수건으로 애액이 묻어 있는 것 같은 성기를 꼼꼼히 닦는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자신을 생각하는 것에 헛웃음이 지어졌다.
“메이브 님?”
“……그냥, 거기에 있어요.”
메이브는 다리를 움직여 침대에서 느리게 일어났다. 손이 묶인 지 벌써 3일째. 처음에 불편하고 아파졌던 것도 이제는 점점 익숙해지는 기분이었다.
“제가 가도.”
“다비드 님이 저를 생각하는 것처럼, 저도 최대한 노력하려고요.”
“그럴 필요는…….”
“혼자서 다 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도 다비드 님이 제게 거의 맞춰 주시잖아요.”
무거운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뻐근한 몸에 목을 찬찬히 돌리며 움직이고는 테이블에 서 있는 다비드의 앞에 멈추어 섰다.
메이브는 말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다비드를 한번 쳐다보곤 천천히 무릎을 굽히며 그의 다리 앞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상체를 꼿꼿이 세우자, 다비드의 반쯤 발기한 성기가 눈앞에 보였다. 하룻밤 동안, 자신의 안에 들어가 있던 성기를 보자 기분이 묘해졌다.
“…….”
3일, 아니 어쩌면 이틀 만에 이곳에 몸과 정신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밤에 자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도, 다비드의 성기를 빨아서 그의 정액을 삼키는 것도, 이상하게 짝이 없는 옷가지를 입고 나체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전부 기분 나쁘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메이브는 이러다 일주일이 지난 뒤에 자신이 변해 있을까, 무섭다고 생각하며 입을 점차 벌렸다.
입술 끝에 닿은 성기를 혀로 감싸며 핥아 냈다. 차가운 물로 씻어서 그런지, 뜨거울 것 같았던 성기는 생각보다 시원했다.
“하아…….”
낮은 숨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고, 눈앞에 보이는 성기의 밑동을 보며 최대한 입을 벌려 다비드의 성기를 빨아들였다. 점점 단단해지는 성기는 입천장을 누르며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벌어진 턱이 뻐근했고, 혀를 누르며 꺼덕거리는 성기가 갑갑하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어이없는 것은 진한 냄새가 나던 그것이, 어쩌면 조금 거북했던 그것이 이제는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메이브 님.”
다비드가 손을 뻗어 메이브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성기를 최대한 빨아내면서도, 이따금 헛구역질이 올라오는지 작게 우욱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린 것 하나하나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혀를 조금 더 내밀어 보시겠어요?”
“……우?”
다비드의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춘 메이브가 고개를 작게 기울였다가 천천히 입을 벌린 상태로 혀를 내밀었다. 다비드의 기둥에 걸려 더 이상은 내밀어지지 않는 혀를 내민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다비드는 그런 메이브의 머리카락을 살짝 움켜쥐며 고개를 들어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아침은 9시인데…… 벌써 8시예요, 메이브 님.”
“……으.”
“빨리 제 것을 삼킨 후 음욕을 덜어 내는 방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은데, 제가 좀 도와 드려도 괜찮겠어요?”
다비드가 도와줘도 괜찮으냐는 말에, 메이브는 한순간 자신의 목구멍 깊숙이 들어와 숨을 쉬기 버겁게 했던, 난폭한 행동을 기억해 냈다.
그것이 아니라면, 얼굴이 붙잡혀 거칠게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든, 그 방법은 그리 다정한 방법은 아니라는 거였다.
“어떤가요?”
느릿하게 묻는 말을 들으며, 입꼬리를 천천히 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쩌면 다비드를 만나고 지금까지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을 다비드가 자신에게 묻는 걸지도 몰랐다.
“도와 드려요?”
결국 또다시 묻는 그 말에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천천히 고개를 뒤로 물려 목덜미에 닿는 다비드의 손길을 느꼈다. 입 안에서 그의 성기가 빠져나오는 순간, 입에 고인 타액을 삼켜 내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도와줘요.”
“아플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대신, 최대한 빨리…….”
싸 주세요, 라는 말이 왜 이리 부끄러운지, 목구멍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메이브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다비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목덜미를 살짝 덮는 머리카락을 살살 문질렀다.
“최대한 빨리 싸 줄게요.”
끝내지 못했던 말이 다비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고개를 살짝 숙이려 하자, 다비드가 손을 뻗어 볼을 감싸 쥐었다. 그러다 엄지손가락으로 짓누르며 입 안으로 파고드는 손가락이 입을 벌렸다.
더불어 성기의 끝부분이 입술을 누르고 손가락과 함께 파고들어 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고, 이빨이 성기를 긁지 않도록 최대한 입을 벌렸다.
다비드의 손이 얼굴을 감싸며 긴 손끝이 목덜미에 닿았다. 강한 힘으로 얼굴이 숙여지고 입 안으로 뜨거운 성기가 밀려들어 왔다.
“조금만 참아요.”
행동과는 다른 부드러운 다비드의 목소리가 메이브의 귓가에 들려왔다. 한 번, 두 번 거칠게 얼굴을 붙잡은 다비드의 손이 메이브의 고개를 움직였다.
점차 빨라지는 고갯짓과 입 안으로 밀려드는 성기가 목구멍 깊숙이 들어와 목울대가 불룩 튀어나오길 반복했다.
숨이 가빠졌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어 눈에 차오른 눈물이 눈꼬리에 매달렸다. 목이 벌겋게 변해도 다비드의 속도는 느려지지 않았다.
“크읏…….”
머리 위에서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더운 숨과 뒤섞여 있는 그 숨결에 메이브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숨을 쉬는 것이 점점 힘들어져 몸을 버둥거렸다. 숨을 조금이라도 쉬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볼을 누르며 목구멍 깊이 박혀 오는 성기의 움직임은 거칠고 자비가 없었다.
“조금……만.”
낮은 다비드의 목소리에 신음이 뒤섞여 있었다. 낮게 우는 짐승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목구멍을 문지르는 거친 성기가 혀와 입천장을 비비며 박혀 오길 반복했다. 몇 번 그 자비 없는 행위가 지속될 때, 다비드의 성기가 입 안에서 꿈틀거리며 진득한 정액이 쏟아졌다.
“하아…… 괜찮아요?”
걱정이 묻어나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입 안에 들어와 있던 다비드의 성기가 빠져나갔다. 정액과 타액이 뒤섞여 텁텁해진 입 안의 혀를 작게 움직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목울대를 움직이며 입 안에 가득한 다비드의 것을 삼켜 냈다.
불룩 튀어나온 귀두에 문질러진 목구멍이 쓸린 건지, 열기가 남아 있는 건지, 정액을 삼킨 목구멍은 어쩐지 가시가 박힌 것처럼 그 느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쉬어 버린 목소리의 메이브가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혀를 달싹이며 텁텁한 입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다 표정을 풀었다. 그러자 메이브의 입이 개운치 않다는 걸 알고 있는지, 다비드가 메이브의 입 안에 차가운 물이 담긴 잔을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입을 벌린 메이브가 물을 몇 번 마시며 텁텁해진 입 안이 조금 나아졌을 때, 몸을 비틀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다비드 님.”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 메이브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다비드를 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앞으로 나흘. 어쩌면 닷새일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잘 부탁드려요.”
최대한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생각한 것보다 편안하게 나오는 목소리에 안도하며 눈을 서서히 감았다. 그러자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과 함께 볼에 문질러지는 투박한 손길을 느끼며 눈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 눈앞에 서 있는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메이브는 어쩐지 눈앞에서 웃고 있는 다비드의 표정은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이상하게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미소인 듯하다고 생각했다.
***
음욕을 덜어 내기 전, 성수를 마시고 정액을 성수가 담겨 있던 잔에 뿌리는 동안 메이브와 다비드의 행위를 지켜보는 신관 또한 점점 익숙해졌다.
힘이 풀린 몸을 다비드의 품에 안겨 방으로 돌아오는 것, 식사를 끝내고 교육을 받으러 가는 길, 모든 것이 점차 익숙해지는 것 같아 무서우면서도 허탈했다.
“메이브 님?”
지금도 신전에서 챙겨 준 식사를 끝내고 세 번째 교육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냥,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너무 익숙해진 제가 이상해서요.”
메이브의 몸으로 빙의한 지 이제 나흘, 신전에 들어온 지는 사흘. 앞으로 남아 있는 교육은 나흘, 어쩌면 닷새였다.
그런데 한 달은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익숙해지는 모든 것이 어색했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성기를 흔들며 손이 묶여 있는 채로 돌아다니는 지키지 못한 자와, 그 옆에서 느긋하게 걸어가는 쟁취한 자들은 이제 흔한 풍경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익숙해진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죠.”
“……네?”
다비드가 메이브의 어깨를 감싸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다비드의 품에 안기는 순간 메이브가 서 있던 방향으로 지키지 못한 자가 어디론가 도망치는 듯 빠르게 뛰어갔다.
“그렇다면 메이브 님이 미치지는 않을 테니까요.”
“의미를 모르겠어요.”
덤덤하게 내뱉는 다비드의 말을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가 안 되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은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저 다정하게 웃는 얼굴로 메이브를 내려다보는 다비드가 그의 어깨를 감싼 상태로 교육을 받을 홀로 걸어갔다.
“……그저 꿈같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꿈이요?”
홀로 들어와 이제는 익숙한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고 서 있자, 다비드는 서서히 사람들로 채워지는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어날 리 없는 악몽 같은 꿈을 꿨습니다.”
“…….”
메이브는 다비드가 말하는, 일어날 리 없는 악몽 같은 꿈이라는 말이 어쩐지 ‘마이 홀’에서 나왔던 다비드의 일생이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꿈으로 다비드에게 찾아올 리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꿈은…… 꿈일 뿐이에요.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어요.”
“맞습니다. 일어날 수 없는 꿈일 뿐이죠.”
그런 다비드의 목소리에서 미약한 증오와 원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것이 메이브에게 향한 것은 아니었으나, 메이브는 자신에게 향하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그러니, 꿈과 다르기 전 메이브 님을 지켜 주고 싶어서요.”
다비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홀의 문이 큰 소리와 함께 닫히며 익숙한 신관이 걸음을 옮겨 석상 앞에 자리를 잡고 섰다.
신관은 늘 그렇듯 주변을 훑어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첫날 이곳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홀 안의 사람들이 많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듯 웃고 있는 신관의 모습은 소름 끼칠 뿐이었다.
“오늘 배우게 될 교육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울지 모릅니다.”
신관이 웃는 얼굴로 지키지 못한 자들을 둘러보던 눈이 메이브의 얼굴에 닿았을 때 멈추었다. 다비드가 그런 메이브를 등 뒤로 숨기며 신관의 시선을 가렸다. 하지만 신관은 상관없는지 느긋한 투로 말을 이어 갔다.
“오늘 배우게 될 교육은 쟁취한 자가 지키지 못한 자를 산책시켜 주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교육과는 다르게 쉬워 보이는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메이브의 생각이 무색하게 이어지는 신관의 말에 그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산책을 시키는 데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신관이 웃는 얼굴로 손을 뻗자 석상 근처에 서 있던 신관이 들고 있던 붉은색 줄을 당겼다. 커다란 종이가 석상의 손에서 펼쳐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시는 바와 같이, 쟁취한 자들은 지키지 못한 자들의 건강을 위해 그들을 산책시켜 주어야 합니다. 다만, 지키지 못한 자들은 쟁취한 자들이 건강을 챙겨 주니 그들을 위해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종이를 지팡이로 가리킨 신관의 웃음이 점점 진득해졌다.
“지키지 못한 자들은 쟁취한 자들의 것을 품어야 합니다. 또한 쟁취한 자들은 지키지 못한 자가 자신의 것을 품은 것이 빠지지 않게 그들의 다리를 들어 올려 주어야 합니다.”
펼쳐져 있는 종이에는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똑바로 서 있는 사람과 엎드려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그저, 서 있고 엎드려 있는 사람만 그려져 있다면 이렇게 당황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관의 말처럼 엎드려 있는 사람은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있는 상태로 두 다리는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들려 있었다. 엎드려 있는 사람의 벌어진 다리를 붙잡은 서 있는 자는 발기되어있는 성기를 구멍 안에 밀어 넣는 것 같은 그림이 종이에 크게 그려져 있었다.
“지키지 못한 자는 자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 두 발이 아닌 두 손으로 걸으며 신전을 한 바퀴 돌아야 합니다.”
신관의 말에 메이브는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죄, 그것이 무슨 죄라고 할지라도 지금 홀 안에 서 있는 지키지 못한 자들의 죄는 그저 자신의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것 한 가지밖에 없었다.
어쩌면 다른 자들은 더 커다란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크고 작은 모든 죄를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자, 그렇다면 쟁취한 자들은 왜 지키지 못한 자들의 품에 그것을 넣어 같이 산책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있을 겁니다.”
신관이 닫혀 있는 문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쟁취한 자들과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는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 이유는 간단하죠, 쟁취한 자들의 죄를 지키지 못한 자가 받아들여 그들의 죄까지 사하기 위해 두 손으로 신전을 돌아야 합니다. 그러니 쟁취한 자의 죄까지 받아든 지키지 못한 자는 신전을 두 바퀴를 돌아야 합니다. 그들의 죄 역시, 사하여 주어야 하니 말이죠.”
신관이 웃으며 하는 말에 메이브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웃기는 소리,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켜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겨우 그것, 그것 하나로 죄를 사할 수 있었다면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굳이 그걸 해야 합니까?”
지금도 보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쟁취한 자가 한 말에 주변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하기 싫다면, 지키지 못한 자는 쟁취한 자들의 벌까지 혼자 감내해야겠지요.”
“쟁취한 자들에게 따로 안 좋은 것이 있습니까?”
“전부터 말했듯, 쟁취한 자들의 벌은 지키지 못한 자가 받을 뿐입니다.”
그저 쟁취한 자들의 벌을 지키지 못한 자가 받을 뿐이다, 그 말이 끝이었다. 그 이상으로 안 좋은 무언가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그것으로 교육을 이수하지 않고 지키지 못한 자를 두고 나갔던 쟁취한 자들이 다시 나가는 것이 보였다. 문밖으로 나가는 쟁취한 자들은 제 등 뒤로, 진득하게 웃고 있는 신관은 보지 못한 채 익숙하게 닫혀 있는 홀 문을 열고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메이브 님, 두 팔을 묶고 있는 손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풀어도 되는 게 맞을까요?”
“신전을 두 손으로 돌아야 하니, 등 뒤로 묶인 상태로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다비드의 손이 손목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매듭이 묶여 있던 하얀 끈이 살갗을 문지르며 천천히 풀어졌다. 오랜 시간 묶여 있던 손이 풀렸다. 뻐근한 어깨를 조용히 움직이며 앞으로 손을 내밀자 붉은색 자국이 손목과 팔뚝까지 새겨져 있었다.
저릿한 손목과 어깨를 주무르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자유로워진 두 팔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힘이 제대로 들어갈 것 같지도 않은 상황에 신전을 두 바퀴나 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끈은…….”
다비드가 손에 들려 있는 하얀 끈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의문인 그때, 아직 홀에서 나가지 않은 신관이 남아 있는 자들을 지켜보며 말했다.
“죄를 사할 때, 지키는 자들은 악한 것을 볼 수 없게 해야 합니다.”
신관의 뜻은 명확했다.
“지키지 못한 자들의 손을 묶고 있던 것으로 그들의 눈을 가려야 합니다. 신전을 돌아 그들의 죄가 사라질 때까지 지키지 못한 자들은 쟁취한 자들의 목소리만을 들어야 합니다.”
웃기는 소리였다. 목 끝까지 차오른 욕설을 억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다비드를 쳐다보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끈을 메이브의 얼굴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자신의 죄를 사하지 못하는, 지키지 못한 자들을 끌고 나가세요.”
메이브는 자신의 눈을 가리는 하얀 끈에 눈을 천천히 감으면서, 비명과 함께 살려 달라는 지키지 못한 자들의 통곡을 들어야 했다.
그들이 잘못한 것은 정말 없었는데도, 이곳에서는 그것이 죄였다. 그들이 쟁취한 자들의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것도, 그들의 죄라는 것이 웃기면서도 슬펐다.
지키지 못한 자들의 죄는, 어쩌면 가벼우면서도 무거울 터였다.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런 상황을 얻어야 한다는 것도 억울하지만, 쟁취한 자가 잘못하는 것에 지키지 못한 자가 벌을 받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메이브 님, 일어나세요.”
다비드의 덤덤한 목소리를 들으며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손을 사용하는 것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신전을 돌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눈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허리를 쓸어내리는 다비드의 손길과 그의 목소리가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질 뿐이었다.
메이브가 고개를 돌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주변을 살펴보아도,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천천히, 엎드릴 겁니다.”
허리를 누르는 손길과 함께 상체가 굽혀졌다. 허벅지 아래에서 느껴지는 단단하고 딱딱한 것이 여린 살갗을 문질렀다. 그리고 천천히 위로 올라간 성기가 엉덩이를 벌려 안으로 들어왔다.
“두 손 내려서 바닥을 짚으세요.”
다비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정쩡하게 상체를 숙인 자세로 두 손을 뻗었다. 한 번에 손이 바닥에 닿지는 않았다.
두 손이 차가운 바닥에 닿을 때까지 점점 두 다리를 벌렸다. 바닥에 손이 닿았을 때 구멍에 닿는 딱딱하고 익숙한 감촉에 훅 숨을 들이켰다.
“……많이 힘들 겁니다.”
덤덤하게 말하는 다비드의 목소리에 고개를 작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힘든 것을 떠나서 넘어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바닥을 짚고 허리를 굽힌 어정쩡한 자세로 가만히 있으려니, 엉덩이를 붙잡은 투박한 손길이 느껴졌다.
둥근 엉덩이를 벌리며 구멍에 닿아 있던 성기가 밀려들어 왔다. 하루에도 몇 번, 붉은 구멍을 벌리고 들어오던 단단한 성기가 막힘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읏…….”
속을 긁으며 성기가 안으로 들어오자, 여린 속을 두드리는 것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엉덩이를 붙잡았던 손이 천천히 내려가 허벅지에 닿았다. 그리고 허벅지를 움켜쥔 손이 다리를 들어 올리자 바닥을 짚고 있던 두 팔이 절로 떨려 왔다.
“너무 힘들면 말해요. 멈출 수 있으니까.”
멈추는 것보다 최대한 빨리 신전을 도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힘이 없는 두 팔에 최대한 힘을 주고 있으니, 두 다리가 다비드의 손에 들려 허공에 떠올랐다.
하체가 들리고 상체가 숙여지자 온몸의 무게를 두 팔로 버티는 것 같았다. 힘없는 팔이 굽어져 바닥에 자빠질 것만 같았다.
“몸, 돌릴게요.”
구석진 자리에 서 있어서 문까지 가는 길이 멀지도 몰랐다. 눈앞이 보이지 않으니 그 거리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다비드가 천천히 움직이는 걸음 소리와 함께 두 손을 움직이려 했다. 보이지 않는 앞에 손 하나 내미는 것조차 힘들었다.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몸의 중심이 무너졌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얼굴이 처박혀 넘어질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힘주어 깨물자 다리를 단단하게 움켜쥔 다비드의 손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비드가 아무리 다리를 힘주어 잡고 있다 해도, 바닥에 넘어지는 것조차 막을 수는 없었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갈게요.”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한 번, 두 번, 손을 내밀어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금세 허리와 이마 부분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하……으.”
느릿한 걸음에 몸이 흔들려 구멍 안으로 들어와 있는 성기가 작게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전립선을 두드리는 성기로 인해 몸에 있던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메이브는 자신의 성기가 앞뒤로 흔들리며 쿠퍼액인지 모를 애액이 투둑, 툭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은 벌겋게 변하고 뜨듯해진 목덜미를 숨기지 못한 상태로 입술을 깨물었다.
“……곧 문입니다.”
다비드의 목소리도 많이 낮아졌다. 그 안에 품어진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숨을 삼키고 떨리는 팔을 뻗으며 나아갔다. 더운 공기가 사라지고 서늘한 바람이 몸에 달라붙었다 떨어지는 것 같았다.
홀 안에서 빠져나온 것 같다고 느껴졌을 때, 다비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른쪽으로 갈 겁니다.”
다비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손을 조금씩 움직였다. 결국, 힘이 빠진 손이 굽혀졌다. 얼굴과 어깨가 바닥에 부딪히자 고통이 밀려들어 왔다. 눈에 눈물이 맺혀 왔고, 앓는 소리를 죽이기 위해 숨을 멈추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브 님, 괜찮습니까? 많이 아프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시간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니까, 너무 급하게 갈 필요는 없습니다.”
“……네.”
다비드가 손을 뻗어 메이브의 허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 손길이 매이브의 허리와 골반을 문지르며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그러니까 힘이 없으면 바로 저를 불러요. 바로 멈출 테니까요.”
걱정이 묻어 있는 목소리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려 오는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바닥을 짚으며 두 팔을 뻗었다. 아릿하게 아픈 어깨와 팔목이 지끈거려 왔지만, 숨을 한번 참았다가 뱉어 내며 다시 손을 뻗어 앞으로 나아갔다.
“천천히 왼쪽으로 몸, 돌릴 거예요.”
다비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손을 뻗자 차가운 바닥이 아닌 거친 흙이 만져지는 듯했다. 손바닥에 작은 알갱이가 붙었다가 떨어졌다.
불편한 자세와 힘없는 두 팔에 몰리는 무게 중심을 잃을 것만 같았다. 최대한 힘을 주어도 팔이 떨리는 것과 동시에 힘이 점차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흐…… 자, 잠깐.”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다비드의 걸음이 멈추었다. 뻗고 있던 손을 서서히 숙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쪽 다리를 힘주어 움켜쥔 채, 다른 허벅지를 잡고 있는 손을 움직인 다비드가 저리는 허벅지를 매만져 주었다.
“괜찮아요?”
“……괜, 찮아요.”
자신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의 하체를 들고 있는 상태로 움직이는 다비드도 힘들 것이다. 차라리 엎드려서 개처럼 신전의 주변을 도는 것이 더 나을 듯싶었다.
“잠……깐만 쉬었다가…… 가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던 두 팔은 힘이 없었고, 지금 움직이면 바로 넘어질 것이 분명했다. 구멍 안에 들어가 있는 성기는 단단하고, 속에서 움직이는 느낌이 세세하게 느껴졌다.
온몸이 땀에 미끄러웠고, 손바닥마저 땀이 흥건해 손을 움직여 걸을 때마다 흙이 손바닥에 달라붙는 듯했다.
차가운 바닥에서 넘어졌을 때는 충격에 아팠으나, 이곳에서 넘어진다면 살갗이 쓸리며 다칠지도 몰랐다.
“아, 아직 한 바퀴는…… 멀었죠?”
홀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두 팔을 움직여 걸은 것조차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미 한 바퀴를 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다 돌았습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말뿐이라도 감사해요. 다시 가요.”
떨리는 두 팔에 힘을 주며 천천히 바닥을 향해 뻗으면서도 주변에 다른 거친 숨소리라거나,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하으. 저희…… 잘 가고 있는 거, 맞아요?”
“네, 잘 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축축한 땀이 흘러내리는 메이브의 등을 내려다보던 다비드는 고개를 들어 한쪽을 바라보았다.
지키지 못한 자는 두 눈이 가려져 있는 상태로 신전을 한 바퀴 돌아야 했다. 그 눈이 되어주는 것이 쟁취한 자였다. 쟁취한 자가 이상한 곳으로 향해도 지키지 못한 자는 보이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다비드의 시선에 보이는 쟁취한 자들은, 맞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지키지 못한 자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작게 입 안의 혀를 굴리던 다비드는 낮게 혀를 차며 메이브의 다리를 움켜쥐었다가 고민하는 얼굴로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메이브 님.”
“으. 네?”
“신관이 두 손으로 걸으라고 말했지만, 그 손이 바닥에 닿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기억납니까?”
“……아.”
다비드의 말대로 신관은 지키지 못한 자가 쟁취한 자의 것을 품고 두 손으로 걸어 산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비드의 말대로 두 손이 땅에 닿아야 한다는 말은 없었다.
“……없, 없었던 것 같은……데.”
메이브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다비드가 메이브의 무릎을 감싸 쥐며 하체를 힘주어 들어 올렸다.
“제 허리를 힘줘서 감을 수 있습니까?”
“흐……윽. 안…… 될 것 같은데요.”
땀이 배어난 다리는 다비드의 허리에 힘을 주어도 밑으로 흘러내렸다. 정면이었다면 더 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엎드린 자세로 다비드의 허리를 감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제가 팔로 힘주면 지탱할 수 있습니까?”
“…….”
다비드가 팔에 힘을 주었는지 그의 팔 안에 단단하게 붙잡히는 다리가 느껴졌다. 힘이 들어간 손이 움직이는 듯하더니 아랫배와 허리를 움켜쥐는 손길과 함께 땅을 짚고 있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아……!”
“……오래는 버틸 수 없으니, 한 번씩 쉬면서 걸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으…….”
“조금 힘들어도 참으세요.”
두 팔로 바닥을 짚으며 걷는 것보다는 괜찮았다. 다만, 메이브 역시 상체에 힘을 주어 버텨야 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한 번씩 메이브가 지칠 때쯤, 다비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메이브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거친 숨을 몰아 쉬어야 했다.
땀에 흥건해지는 몸은 찝찝했고, 현실에서도 이렇게 운동을 안 했는데 이곳에 와서 전부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메이브는 자신 만큼이나 다비드 역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리를 잡고 있는 손은 뜨거웠고, 한 번씩 몸을 들어 올릴 때 다리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다비드가 허리를 등 뒤로 기울이며 몸을 들어 올려 주는 것 같았다.
“……거의 다 끝났습니다.”
다비드의 목소리도 낮아졌고, 숨결이 꽤나 거칠어졌다. 구멍 안에서 꺼덕이며 움직이는 성기는 힘든 몸 때문에 쾌락 같은 것은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피로감이 몰려오는 몸과 정신에 침대에 누워 잠들고만 싶을 뿐이었다.
***
두 바퀴를 도는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끝이 났다. 차가운 대리석에 몸이 들러붙고 거친 숨을 몰아쉴 때, 구멍에서 빠져나가는 단단한 성기가 느껴졌다.
두 눈을 가리고 있던 끈까지 풀어졌을 땐 환한 빛이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따가운 눈을 깜박이며 땀으로 젖어 있는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런 메이브의 손을 붙잡은 다비드는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비드 님?”
“일단 방으로 들어가죠.”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104번 방에 도착했다. 익숙한 방이 보이자마자 메이브는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온몸은 비명을 지르는 듯했고, 아프지 않은 곳이 한 곳도 없다고 느껴졌다.
그런 메이브를 내려다보던 다비드는 손을 뻗어 그의 오금과 어깨를 움켜쥐어 한 번에 안아 들고 침대에 눕혀 주었다.
“……좀 괜찮습니까?”
“……다비드 님도…… 히, 힘드시잖아요.”
힘없는 팔을 들어 올린 메이브가 찝찝한 이마를 문지르자, 다비드는 테이블 위에 있는 차가운 물을 수건에 뿌린 뒤 땀에 젖은 메이브의 몸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그러자 시원한 수건이 더운 몸을 식혀 주는 것 같았다. 메이브가 숨을 낮게 몰아쉬며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그런 그를 근처에 있던 나무 의자를 끌고 와 자리를 잡아 앉은 다비드가 내려다보았다.
“메이브 님.”
“……네?”
“……잘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고생 많았어요.”
다비드가 손을 뻗어 땀에 젖은 메이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영겁의 시간처럼 길고 길었던 세 번째 교육이 이제야 끝났다는 사실에 메이브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비드 님도…… 힘들었잖아요.”
메이브는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붉은색 손자국이 남아 있는 허리를 문질렀다. 입을 벌려 다비드에게도 고생했다고 말하려는 찰나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며 다니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점심부터 내일 아침까지는 금식의 시간이라 따로 식사가 나오지 않을 거예요.”
“신관님.”
그 말을 하고 나가려는 다니엘을 다비드가 붙잡았다. 몸을 돌리려던 자세로 멈춘 다니엘이 고개를 돌려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다비드의 진지한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할 말이 누군가가 들으면 안 되리라는 것을 알았는지, 다니엘은 반쯤 열려 있던 방문을 닫고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네, 다비드 형제님.”
“저희가 신관님을 도와주기로 약속했던 것처럼, 신관님도 저희를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담담하게 말하는 다비드의 말을 가만히 듣던 다니엘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때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옷을 벗고 가라고 말했던 것부터 메이브 님께서 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도와준 것인데 말이죠.”
“겨우 그 정도로 다니엘 님을 믿을 수는 없다는 건 본인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다니엘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찰나에 보였던 표정은 착각인 듯 금세 풀어졌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다비드를 바라보던 다니엘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무엇을 해 주면 저를 믿어 주실 건가요? 형제님.”
“청탑. 청탑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시죠.”
다니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오는 다비드의 말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눈을 홉뜬 다니엘이 눈앞의 다비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청탑에 대한 것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전에 왔던 신관이 말해 준 것뿐입니다.”
다니엘의 표정에 그가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보였다. 다비드는 그런 다니엘을 가만히 바라보며 의자에 기대고는 웃었다.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습니까?”
“하.”
“신관님이 말했던 것처럼, 이곳에서 누군가를 데려가는 것. 저희 말고는 신관님을 데려가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희가 신관님을 믿게 만들려면 청탑에 대해서 알려 주셔야 할 겁니다. 그것을 못 하겠다면, 저희도 신관님을 믿기는 힘들죠.”
다비드의 말에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다니엘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왔던 신관이 청탑에 대해 말했다면, 가면 안 된다는 소리도 들었겠네요?”
다니엘이 하는 말에 다비드는 대답 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침대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상체를 일으킨 메이브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눈앞에 있는 다비드와 메이브를 바라보았다.
“청탑은 사실상, 음욕의 신인 타니아 님의 힘을 키우는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힘을…… 키우는 곳이요?”
메이브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다니엘은 팔짱을 끼고 닫혀 있는 방문에 기댄 상태로 메이브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성년식이라고 알고 이곳에 있는 자들의 음욕과 절망, 그리고 쾌감으로 타니아의 힘은 점점 강해집니다.”
다니엘은 청탑에 관해 떠올리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신전의 가장 구석에 자리 잡은 신전은 이곳에서 가장 은밀하고, 더러운 곳이었다.
“이곳에 첫날 왔던 사람들보다 지키지 못한 자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나요?”
다니엘의 말에 메이브는 지난번에 다비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알란의 지키지 못한 자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 첫날과 다르게 교육을 받는 홀 안에 사람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 모든 진실이 청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이브는 다니엘의 입술을 바라보며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사라진 자들은 교육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벌을 받고 있습니다.”
“벌……이요?”
“좋게 말하면 벌이죠. 다르게 말하면 공장일 뿐입니다.”
공장이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아 메이브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다니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묶여 있는 지키지 못한 자들이, 그곳에서 도망칠 수도, 그렇다고 정신이 망가지지도 못한 상태로 쾌락에 헤엄치는 공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신전에서 그런,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에요?”
다니엘의 말에 눈을 크게 뜬 메이브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전이 미치고 악독하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일 거라는 건 몰랐다. 사라진 지키지 못한 자들의 숫자가 많아진 만큼, 청탑 안에 갇혀 고문과 같은 쾌감을 받는 자들이 많다는 말이었다.
메이브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그게 자신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자체에 자신이 혐오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말씀드렸잖아요.”
담담하게 말하는 다니엘은 눈앞에 있는 메이브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진득하게 웃고 있는 그의 표정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
“이곳은 성년식을 치르는 신전이 아니라고.”
다니엘이 여상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럼, 그럼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 건데요.”
메이브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호숫가에서 다니엘이 다비드와 메이브에게 도와 달라고 말했을 때, 이곳이 성년식을 치르는 곳이 아니라는 말은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신전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미쳐 버린 신전과 음욕의 신을 섬기는 신관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신전이었기에 한편으로는 이해하려고 했다.
“신전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겁니까?”
가만히 있던 다비드가 다니엘을 보며 하는 말을 들으며 메이브는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었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다니엘을 쳐다보았으나 그의 웃는 낯은 흩트려지지 않았다.
“성년식은 참 중요하죠. 안 그렇습니까?”
다니엘은 고개를 기울이며 벽에 머리를 기댄 상태로 작게 웃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다니엘을 지켜보던 다비드와 메이브가 입을 다문 채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엘은 고개를 살짝 움직여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성년식을 치르지 못한 사람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다니엘의 말은 메이브가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마이 홀’을 읽으면서 성년식 관련해서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었다. 그리고 성년식이 이 세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관례인지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다니엘의 말을 들으면 메이브가 생각했던 것보다 성년식에 관련해서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성년식을 치르지 못한 자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죠. 또한, 다른 곳에서 일하기조차 힘들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일 테니까.”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다니엘은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을 꺼내는 다니엘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요?”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에 다니엘의 웃음이 점차 진득해졌다.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와 가늘게 떨리는 어깨가 그는 마치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죠. 이런 성년식을 치르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고 반항하지 않는다는 것. 의아하지 않았습니까?”
이불 위에 있던 손가락을 움직여 하얀 이불을 움켜쥔 메이브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성년식을 못 치르는 순간 그게 귀족이든 평민이든, 어차피 인생 말아 먹으니 그게 무엇이 되어도 이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거죠.”
다니엘은 등에 기댔던 나무문에서 떨어져 한 걸음, 메이브에게 다가왔다. 의자에 앉아 있던 다비드가 몸을 일으키며 그런 다니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다니엘이 손을 뻗어 침대 헤드를 움켜쥐고 침대에 반쯤 앉아 있는 메이브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이곳이 신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서 왜 나오는 겁니까?”
다비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메이브를 바라보던 다니엘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여기가 신전이 맞는지, 아니면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잖아요?”
다니엘은 손가락으로 차가운 헤드를 쓸어내렸다.
“어차피 성년식을 치르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은 맞으니까요.”
다니엘은 뻐근한 몸을 기지개 켜듯 움직였다. 다니엘의 몸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던 메이브는 입 안이 바싹 말라가는 것 같았다.
성년식이 이렇게 중요한 관례라는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 다니엘과 다비드가 하는 행동을 보면 성년식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행사 중에 하나인 것 같았다.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드리도록 해야겠네요.”
다니엘이 침대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몸을 돌려 천천히 문으로 걸어갔다.
“이곳이 신전이 아니라도, 결국 이곳에서 교육이 끝나면 성년식을 치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맞아요. 그렇다면 이곳에서 무슨 짓을 당하든, 아니면 교육을 받지 못해 성년식을 치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돌아가지 못하겠지.”
“어디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으세요?”
“어디든.”
“맞아요. 그게 어디든 성년식을 치르지 못한 자는 돌아갈 수 없어요. 왜? 이유는 간단하죠, 성년식을 치르지 못했으니까.”
다니엘은 손을 뻗어 방문을 붙잡고 고개를 살짝 돌려 서 있는 다비드와 침대에 상체만 반쯤 일으켜 굳어 있는 메이브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곳이 신전이 맞든, 아니든 중요한 건 아니죠. 성년식을 치르려면 있어야 하는 것은 맞으니까요. 이제, 이 이야기를 끝으로 저를 믿어 주었으면 좋겠군요.”
“또 한 가지.”
다니엘이 문고리를 돌려 나가려고 하자, 그런 그를 다비드가 막았다.
“또, 무엇을 묻고 싶으신가요?”
고개를 돌린 다니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목소리에 귀찮다는 감정이 묻어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런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다비드는 표정 변화 없이 다니엘의 등 뒤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은 왜 이곳에서 나가지 못했지?”
“…….”
“지키지 못한 자는 어떻게 해서든 교육을 이수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지키는 자였던 당신은 왜 여기서 나가지 못했는지 묻는 겁니다.”
“말씀, 드렸잖아요? 쟁취한 자를 죽여서 나가지 못했다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웃고 있는 다니엘의 표정이 약간 굳은 것처럼 보였다. 메이브는 살며시 떨리는 목소리와 표정에서 다니엘이 무언가를 숨기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만약 쟁취한 자를 죽여서 나가지 못했다면.”
다비드가 그런 다니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비드의 연녹색 눈이 짙게 가라앉는 것 같을 즈음, 눈앞에 있는 다비드의 웃음은 어느새 사라졌다.
“신관이 아니라, 지금 지키지 못한 자가 청탑에서 쾌락에 헤엄치며 벌을 받는 것처럼 당신도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묻는 겁니다.”
“저를 믿어야 할 텐데요.”
“믿는다 해도 의아한 것은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쟁취한 자를 죽였고, 성년식에 대한 교육은 끝났기에 신관으로 그 벌을 받는다는 생각은 안 하시는 건가요?”
표정이 굳은 다니엘이 다비드를 노려보며 입술을 짓이기듯 목소리를 억누르고 말했다. 그 행동과 말에 메이브는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았다.
“이미 망가진 자를 왜 신관으로 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신관님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망가진 거, 그저 이 신전이 믿는 타니아에게 힘을 키워 주는 용으로 쓰는 것이 더 맞는 것 같은데 말이죠.”
다비드의 말에 메이브는 어깨를 굳힐 수밖에 없었다. 다비드가 정말 자신이 아닌 다른 자들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메이브 자신이 다비드의 지키지 못한 자였기에 그가 자신을 챙기는 거였다. 만약 메이브가 다비드의 지키지 못한 자가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처럼 다른 자에 대해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을 사람이었다.
메이브는 그런 사실을 알고 나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던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지.
“어차피 망가진 자들이지 않습니까? 신관님.”
메이브는 무뚝뚝하게 내뱉는 다비드의 말 하나하나가 바늘이 되어 자신의 몸에 콕콕 박혀 드는 것 같았다.
다비드가 교육을 치르는 동안 자신을 지킬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 해도 이건 그 느낌이 달랐다. 만약 자신이 그에게 순결을 주지 않았다면, 그의 지키는 자가 아니었다면. 수많은 감정과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저를 믿으셔야 할 겁니다.”
다니엘은 다비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며 방에서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그런 다니엘의 모습을 뒤로한 채 메이브는 고개를 돌려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다비드 님.”
“네? 메이브 님.”
메이브의 부름에 다비드의 날카로운 눈매가 풀려 부드럽게 웃었다. 늘 그렇듯 다정한 말투와 행동에 이상하게 등줄기가 오싹할 뿐이었다.
“……다비드 님은 지키지 못한 자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비드의 생각을 알 수 없었기에 그저 물어봐야 했다. 다비드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으나, 교육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지키지 못한, 음…….”
무언가를 말하려던 다비드가 행동을 멈추고는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던 메이브는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숨 쉬는 것조차 멈출 만큼 기다리면서 지켜보았다. 그러자 다비드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메이브 님은 제가 지켜 드릴 겁니다. 메이브 님이 말했던 것처럼, 이 교육이 끝나기 전까지.”
“…….”
“그러다 제가 메이브 님의 진실한 이름을 알게 된다면, 그 이후에도 책임지고 지켜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다비드에게 순결을 바치지 않았다면, 제가 당신의 지키지 못한 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할 거였다고 묻고 싶은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하지만 끝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을 삼키며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메이브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 손이 묶여서 생활해야 했기에 몸 씻는 것, 밥 먹는 것 하나하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없었다.
오늘 받은 세 번째 교육 같은 경우에도, 메이브가 한 것이라고는 얼마 없었다. 거의 다비드가 메이브의 몸을 들어 올려 도와주었기에 허리에 힘을 주는 것이 많았을 뿐이다.
“…….”
결국 몸에 달라붙은 거머리처럼 다비드의 곁에 붙어서 이곳에서 벌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나가는 것. 그것이 메이브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메이브 님?”
의아함이 묻어 있는 다비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저 바보처럼 웃었다. 메이브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또한 다비드가 자신을 지켜 준다고 말하지만, 결국 다비드가 빈정이 상해서 자신을 지켜 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다비드 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다비드에 대한 궁금증과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지키지 못한 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모든 생각들을 억눌렀다.
“제 말이요?”
“네, 어쩌면 다니엘이 지키지 못한 자가 아니라 쟁취한 자일지도 모른다는 거요.”
의아할 법한데도, 다비드가 더는 묻지 않는 것에 안도하며 웃었다. 불안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으나 남은 기간 동안 무엇이 된다 해도, 메이브는 다비드에게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은 말, 생각했던 모든 것을 말하는 멍청한 행동보다 그가 기분 상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메이브는 속으로 다짐하며 다비드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많았으니까요. 지금도 답 없이 도망갔으니, 쟁취한 자라는 가설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니엘이 지키지 못한 자라고 생각했다면 이번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다비드의 말에 다니엘이 쟁취한 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렇게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저 다비드의 가설이 맞았구나, 완전히 다니엘을 믿지 않아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메이브 님.”
“네?”
“제가 끝까지 메이브 님을 지킨다는 마음은 달라지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이미 망가진 자들은 힘을 위해 그냥 청탑에 넣지 그랬냐는 말이 머릿속에 떠돌아다녔다.
메이브는 그 말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만약에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다비드의 지키지 못한 자가 되었다면, 그가 하는 말은 자신을 향했다는 것 그 한 가지였다.
“…….”
입술을 달싹이던 다비드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하더니 곧 입을 다물었다. 메이브는 그런 다비드를 올려다보며 작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불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을 주무르며 숨을 작게 들이켰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배고픈데 금식이라니, 너무한 것 같아요. 그렇죠?”
무거운 분위기를 없애기 위해 한 말에 다비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큰 힘이 교육이라는 것을 빙자한 이상한 운동을 시키더니, 끝내 굶주린 배를 채워 줄 음식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이 서러웠다.
그래도 그 이상 무언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메이브는 만약 자신이 쟁취한 자였다면 음식을 달라고 편하게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음식을 신관이 주었을 때 쟁취한 자가 먹는다면, 분명 그 벌을 지키지 못한 자가 받을 거라는 건, 보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많이 배고프신가요?”
“아, 괜찮아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메이브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다비드의 말에서 그가 음식을 구해 오겠다는 느낌이 다분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일 테니까…….”
“……잠시 나갔다가 올 테니 방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다비드가 손을 뻗어 메이브의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잠시만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당연하죠.”
메이브는 왜인지 다비드가 자신을 어린아이 대하듯 행동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부끄러운 느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몇 번 더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다비드가 나간 방문을 지켜보던 메이브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고 손을 들어 눈가를 내리눌렀다. 머릿속은 복잡했고, 속은 답답하기만 했다.
“……모르겠다.”
어차피 성년식만 끝나고, 이 신전에서만 벗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사이였다. 더는 크게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몸을 돌려 자유로운 두 손으로 하얀 베개를 끌어안았다.
다비드가 나간 방 안은 너무도 고요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곳에 메이브의 작은 숨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 그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은 메이브는 부드러운 베개에 볼을 문지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방 안에서 나온 다비드는 표정을 굳힌 채, 고민하며 복도를 정처 없이 걸어 다녔다. 분명 메이브의 표정에 불편함이 약간 묻어 나왔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치 않았다.
자신이 말했던 것에 메이브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했으나, 왜 그가 충격을 받았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군가보다 메이브가 중요했다. 지키지 못한 자는 다비드와 아무 연관이 없었기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다만, 그게 메이브가 아니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후…….”
그래서 그 말로 다니엘을 밀어붙인 것인데, 외려 메이브가 충격을 받은 것이 아이러니했다. 그가 다른 지키지 못한 자들을 걱정하는 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 벌이 자신에게 올지 몰라도, 걱정하는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았다. 다만, 그 벌이 실제로 메이브에게 닥치는 것을 다비드는 원치 않았다.
차라리 쓸모없는 다른 자를 이용하면 했지 메이브가 위험에 처하거나, 그때 보았던 것처럼 단상 위에서 고통 섞인 비명을 지르는 지키는 자처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메이브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답답해 오는 마음에 주먹을 움켜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다비드는 메이브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며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알란.”
저 멀리 알란의 모습이 보이자, 다비드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알란의 몸이 돌며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다비드는 그런 알란에서 빠르게 걸어갔다.
“뭐야?”
다비드는 비뚤어진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보는 알란을 마주 보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당신.”
다비드가 알란의 몸에 밀착하듯이 달라붙어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명예를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한 아놀드 가문의 차남, 맞나?”
“……허, 그게 네 녀석이랑 무슨 상관이지?”
“아무래도 이 신전이 이상한데. 네 녀석이 날 도와주었으면 좋겠기에 말이야.”
“이런,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거면 나한테 보이는 행동부터 뜯어고치고 와서 다시 말하는 게 어때?”
알란이 다비드의 어깨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러고는 더러운 오물이 묻었다는 듯 어깨를 거칠게 손으로 털어 냈다. 다비드는 그런 알란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가 왜인지 뒤틀려서 비릿해 보였다.
“명예롭다더니, 그 말은 전부 거짓이었나 봐?”
“이곳에서 명예를 지킬 필요는 없잖아?”
“이 신전이 성년식을 치르는 신전이 아니라면?”
“아니라 해도 어차피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름없는데, 내가 굳이 위험한 것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알란이 팔짱을 낀 채 다비드를 위아래로 훑으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네가 못 하니까 나한테 도와 달라고 온 거 아닌가?”
“그래서?”
“꿇어. 그러면 내가 도와줄지도 모르지.”
하얀 치아가 보일 정도로 기분 좋게 웃는 알란의 모습에 다비드는 어이없다는 듯 비웃고는 그가 겨우 들을 만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청탑에 가면 지키지 못한 자가 그 안에서 동물처럼 묶여 쾌락에 빠져 있다던데. 네 녀석의 사라진 지키지 못한 자가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명예를 중시한다면, 네 녀석의 지키지 못한 자는 지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결국 네 녀석에게 순결이 사라진 사람인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하는 다비드의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저 비릿하게 웃는 얼굴로 말하는 게 알란이 보기엔 얄미울 뿐이었다.
“네가 청탑에 가서 알아보든 말든 상관은 없어. 어차피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니까.”
“하…….”
“네 말대로 난 그 안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 왜냐고? 내 지키지 못한 자를 지켜야 하는데 굳이 그 사람이 위험해지게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생각은 없거든.”
다비드는 표정을 구기고 있는 알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분 나쁘고 짜증이 묻어난 표정을 보니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사냥개면, 사냥개답게 네 녀석이 한 실수는 숨기거나 없애야 하지 않겠어?”
“…….”
“그 소중한 명예가 더러워지기 전에 말이야.”
“네 녀석이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다비드는 그저 어깨를 살짝 으쓱이고는 몸을 천천히 돌려 왔던 길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럼, 어쩔 수 없고.”
“야, 기다려.”
다비드가 한 걸음 걸어가려는 순간 알란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다비드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걸음을 옮기려 하자, 알란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다비드에게 걸어가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여기가 성년식을 치르지 않는 신전이라는 건 무슨 뜻이야?”
“그건 네가,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 오면 알려 주겠지.”
“뭐?”
“멍청하게 내가 가지고 있는 패를 너한테 보여 주겠어?”
“……하, 씨발.”
알란의 욕설을 들으며 뿌듯하게 웃은 다비드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떨구며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별거 아니었다면 내가 네 목을 비틀어 버릴 거야.”
“만족스러운 답을 들고 오길 바라지.”
***
짧게 선잠을 자다 메이브가 일어났을 때, 여전히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살짝 흔들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근육통에 비명을 지르는 몸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윽…….”
욱신거리는 몸을 손으로 주무르며 한참을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다비드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 일어나셨어요?”
다정하게 웃은 다비드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방문을 닫으며 메이브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입고 있던 하얀 옷에 꼭꼭 숨겨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빵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한참을 찾아봤는데, 이것밖에 구하지 못했어요.”
“아.”
“배고프시잖아요? 신관이 오기 전에 가볍게 먹으면 걸리지 않을 겁니다.”
다비드는 메이브의 손에 가져온 빵을 올려 주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빵을 든 메이브는 고개를 들어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다비드 님은 드셨어요……?”
“저는.”
“안 드셨죠?”
메이브가 살짝 웃으며 다비드가 건네준 빵을 반으로 잘랐다. 그리고 다비드의 손에 빵을 내밀었다.
“같이 먹어요.”
“메이브 님이 더 배가 고프실 텐데요.”
“저만 배가 고픈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같이 먹어요.”
작은 빵 하나였지만, 신관의 눈을 피해 다비드가 가져왔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혼자 먹고 왔을 수도 있는데, 배가 고프다는 메이브의 말 한 마디에 다비드는 어디선가 빵 하나를 훔쳐 가져왔던 것이다.
“……메이브 님 혼자 드셔도 부족할지 몰라요.”
“다비드 님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못 먹고 굶었을 텐데, 지금은 한입이라도 먹을 수 있잖아요?”
“…….”
“혼자 먹으라고 하면, 제가 너무 죄송한걸요. 그러니까 같이 먹어 주세요, 다비드 님.”
“……알겠습니다.”
그제야 다비드는 메이브가 내밀고 있던 빵을 건네받고는 걸음을 옮겨 방문에 등을 기대고 문을 열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신관이 오기 전에 먹어요.”
“……감사해요, 다비드 님.”
다비드가 가져온 빵은 지금까지의 빵보다는 딱딱했다. 하지만 입 안에 넣었을 땐 그 어떤 음식보다 고소하고 더욱 맛있었다.
복잡했던 머릿속은 그저 다비드의 고마움이 가득했고, 입 안에 한입으로 들어온 빵을 아껴 먹듯 꼭꼭 씹어 먹었다.
“깨끗하게 가져오고 싶었는데…….”
다비드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메이브는 입 안에 들어가 있던 빵을 삼키며 웃었다. 아마, 다비드는 손에 깨끗하게 들고 오지 못하고, 옷 안에 숨겨 자신의 몸에 닿아 있던 빵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이 정도도 정말 감사한걸요?”
메이브가 웃으며 하는 말에도 다비드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런 다비드의 모습에 메이브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다비드 님이 이렇게라도 가져오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무것도 못 먹었을 거예요.”
메이브는 천천히 다비드에게 걸어갔다. 들고 있던 빵은 아직 그의 입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메이브는 손을 뻗어 다비드의 손에 있던 빵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다비드의 입가에 빵을 가져다 댔다.
“그러니까, 이건 더럽지 않고 깨끗한걸요.”
“……하지.”
다비드가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을 때, 메이브는 그의 입 안으로 빵을 밀어 넣었다. 다비드의 입이 다물어지며 우물우물 씹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메이브는 그제야 한 걸음 물러나 다비드를 편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비드 님이 더러운 것도 아니고요. 저희 매일 씻잖아요.”
“하지만 오늘은 아직…… 씻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면 다비드 님은 제가 땀이 흐르고 있으면 더러운가요?”
“……아니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정말 감사할 뿐이니까 더는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창밖에서 환하게 들어왔던 햇볕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메이브는 자신이 잠든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구겨져 있는 옷 안으로 빵을 넣어 최대한 숨기고 왔을 다비드를 생각하며 살짝 웃자, 그는 입 안에 들어 있던 빵을 삼키고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제가 배고프다고 힘들게 빵을 가져다주신 거 고마워요.”
“……저야말로 맛있게 드셔 주셔서 감사하죠.”
“아직 늦지 않았으면, 같이 씻으러 갈래요?”
“아, 그러면 손……을 다시 묶어야 할 텐데 괜찮으신 겁니까?”
“하루 이틀 묶고 있던 것도 아닌걸요?”
메이브는 익숙하게 다비드를 쳐다보던 몸을 돌렸다. 아직은 아픈 두 팔을 등 뒤로 가져가자 다비드가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메이브에게 다가갔다.
다비드는 아까 메이브의 눈을 가렸던 하얀 끈을 내려놓았던 테이블로 손을 뻗어 끈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등 뒤로 내민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요 며칠 풀지 못하고 묶여 있던 끈 때문인지, 메이브의 양쪽 손목에는 붉은색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자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자국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다비드는 한숨을 작게 내쉬고, 천천히 흔적이 남아 있던 자리 위로 하얀 끈을 감싸며 메이브의 두 손목을 묶었다.
“메이브 님.”
“네?”
“따로 좋아하시는 것 있으신가요?”
“음…….”
메이브는 좋아하는 거라고 해 봐야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애초에 다비드가 묻는 말이 음식에 관한 질문인지, 아니면 다른 취미에 관한 질문인지, 어떤 의미로 묻는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물어보면 그만이었기에, 메이브는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어떤 질문인 거예요?”
“음…….”
“음식이라면…… 달콤한 게 좋아요.”
“음식이 아니라 다른 것은요?”
다른 것은 무엇을 좋아할까 잠시 고민했다. 팍팍한 생활 때문이었는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인 것 같아요.”
“아무것도 없는 곳?”
“네, 주변에 시끄러운 것도 없고…… 그냥, 그…… 조용한 산림 안에 있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거, 그게 좋아요.”
메이브는 말하다 보니 ‘마이 홀’에서 다비드를 감금했던 깊은 산속의 오두막이 순간 떠올랐다. 작게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지우고 편안하게 힐링을 즐기는 시간을 떠올렸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몸을 누이고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쉬는 날, 시끄러운 소리가 없고 작은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면 정말 편안하고 기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군요.”
“다비드 님은요? 따로 좋아하는 거 있으세요?”
“예.”
“어떤 거예요?”
소설 속에서 다비드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기에 메이브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도 조용한 곳에서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좋습니다.”
“……그게 뭐예요. 제가 말한 거 그대로 말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요. 정말 조용한 곳에서 쉬는 게 좋아서 그런 겁니다. 나중에, 성년식이 끝나면 저랑 같이 쉬러 함께 떠나 볼래요?”
부드럽게 웃는 다비드의 말에 목구멍이 턱턱 막혀 왔다. 좋다고 말하기에는 이곳에서 떠나면 그를 더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 좋다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작게 가로저으며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죄송해요.”
메이브가 고개를 숙이며 다비드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메이브를 내려다보던 다비드의 입꼬리가 비틀리듯이 올라갔다.
“저와 함께 어디로 가는 것이 그렇게 싫으신 겁니까?”
메이브의 귓가에 가라앉은 다비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놀라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고개를 들어 다비드를 올려다보았다. 메이브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 굳어 있던 다비드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러나 되레 상심한 것처럼 얼굴이 살포시 일그러져 있었다.
“아…… 아, 아니, 아니에요!”
“…….”
부정을 해도 다비드의 표정이 풀어질 것 같지 않았다. 메이브는 한숨을 삼켜 내며 눈을 굴렸다. 같이 가자고 말한다면 다비드의 표정이 풀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신전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비드와는 남이 되어야 했다.
“……전, 단지…….”
신전에 있는 동안 다비드와 몸을 섞는다 하더라도, 그게 끝일 거라 생각했다. 이곳에서 다비드에게 순결을 바친 것은 그저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작은 티끌조차 남기기 싫어서였다.
3일. 그사이에 다정하게 챙겨 주는 다비드의 행동 하나하나에 두근거리거나 심장이 떨릴 정도로 그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없었다.
어쩌면 몸 정이 맘 정으로 바뀔지도 몰랐으나, 그것조차 겨우 일주일 사이에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이 미쳐 버린 신전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다비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래서 메이브는 자신의 감정이 그저 다비드에게 의지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
변명하다가 다비드가 그것을 언젠가 함께 어디로 가자고 믿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은 희망이나 티끌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메이브는 지금도 이곳에서 다비드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다비드가 혼자 힘들어하는 것은 싫었기에 그만큼 메이브는 자신도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닌 ‘의리’라고 생각했다.
“메이브 님.”
다비드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높지도, 그리 낮지도 않은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고 다비드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다비드가 천천히 손을 뻗어 메이브의 어깨를 붙잡았다.
“…….”
어깨를 붙잡은 손이 어쩐지 뜨겁다고 느껴졌다.
“제가 메이브 님을 사랑해서, 그래서 저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신 겁니까?”
메이브는 다비드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비드의 표정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 하나에 혹시 다비드가 상처를 받을까 봐 메이브는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
다비드의 일그러진 표정과 찌푸려진 눈매가 메이브의 시선에 들어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지금 많이 아프다는 것처럼 보이는 표정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니면, 제가 메이브 님이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닌 건가요?”
“아, 아니요!”
다비드의 말에 메이브는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신전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메이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비드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면 제가 메이브 님과 했던 내기처럼, 메이브 님의 이름을 알게 된다면 저와 같이 여행을 떠날 수 있나요?”
“…….”
“메이브 님의 이름을 알 수 있다면 제가 이 신전에서 나가도 메이브 님을 책임질 수 있으니까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메이브는 차마 다비드의 대답에 편하게 답변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만 모를 뿐 메이브의 이름은 이미 다비드가 알고 있었다. 다비드가 자신의 이름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임을 알게 된다면, 그가 내기에서 이기는 거였다.
“……다비드 님과 함께하는 것이 불편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이곳에서 전 다비드 님에게 의지하고 있고요.”
“그런데, 왜 저와 나가면 여행을 간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겁니까?”
어떡해 대답해야 다비드가 포기를 할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를 속이며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메이브는 한숨을 작게 내쉬고 등 뒤로 묶여 있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긴장감에 땀이 배어나는 손이 어색했다.
“다비드 님은 귀족이잖아요.”
메이브는 다비드보다 더 높은 직위를 가진 귀족이었음에도, 차라리 그가 자신을 귀족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말하자고 생각했다.
“저 같은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귀족이나, 평민이나 그런 직급은 말하지 않았다. 메이브는 그러니 이것은 거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저희의 인연은 이곳에서 끝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며 메이브는 웃었다. 자신이 메인수였던 다비드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신전에서 그가 저 끝 바닥에 처박히지 않는 것, 그 한 가지였다.
그의 정신이 망가지지 않고 달려가는 그 두 다리가 멈추어 서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지금 메이브의 몸에 들어온 자신이 하고 싶은 거였다.
다만, 그 이유로 다비드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첫 시작이 달라졌는지, 달라지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다비드와 함께하다, 정말 티끌처럼 작은 무언가로 인해서 다비드가 이 ‘마이 홀’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자신은 죽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작은 인연마저 이곳에서 매듭을 끊고 다비드를 피하리라 다짐했었다. 이곳에서 떠나면 등장인물을 만나지 않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자고 생각했다.
원하고 바랐던, 편하고 뒹굴뒹굴하는 휴양을 즐기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그것이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비드 님은 그저 미안함에 절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걸 거예요.”
“…….”
“그래서 책임을 지고 절 지켜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럴 필요는 없어요.”
“왜, 왜입니까?”
“다비드 님이 지켜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제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다비드와 함께 있으면 분명, 편안하고 안정이 되는 것은 맞았다. 그만큼 다비드에게 기대어 의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의지하고 있었는지 몰랐었다. 하지만 문득 깨닫고 나니 메이브는 생각하던 이상으로 다비드를 많이 믿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알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누군가를 믿기 힘든 이 신전에서 메이브를 챙겨 주고 다정하게 대해 준 사람은 오직 다비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듯 다비드에게 기대었는지도 모른다. 메이브는 작게 웃으며 살짝 몸을 돌려 침대로 걸어갔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제가 만약에 다비드 님의 순결을 가져갔고, 지금 다비드 님이 행동하는 것처럼 제가 다비드 님을 챙겨 주고 다정하게 대했다면. 당신이 절 사랑했을까요?”
“……그런 경우는.”
“만일이라는 가정하에, 이런 경우가 없다 해도 있다고 하면요. 당신은 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 이유로 메이브 님이 절 싫어한다는 겁니까?”
다비드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메이브는 침대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다비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혼란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고민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충격 받은 듯한 표정이 보였다.
“아니요. 저는 다비드 님이 싫지 않아요.”
다비드를 싫어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다비드의 행동과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메이브는 아무리 자신이 멍청하고 눈치가 없어도 다비드의 눈빛에서 묻어나는 감정을 모르지 않았다.
“다비드 님이 강제로 한 것도 아니고, 결국 제가 다비드 님에게 제 순결을 준 것이니까요.”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혹시 모를 죽음을 피하고자 메이브가 선택했던 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건 걸요?”
천천히 다리를 굽혀 침대에 주저앉았다.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침대는 아직 따듯하게 느껴졌다.
긴장감에 욱신거리던 다리와 팔이 작게 떨려 왔다. 정말 이러다가 내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겠다고 생각할 때, 문에 기대어 있던 다비드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 말은, 이곳에 있는 동안은 제게 의지하겠다는 말입니까?”
“……그렇죠?”
메이브는 다비드의 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아프게 말했지만, 그중에서 원하는 답만 들은 것처럼 묻는 다비드의 말에 할 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지금은 그걸로 만족하니까 괜찮습니다.”
“지금은……이요?”
담담하게 내뱉는 다비드의 말이 무언가 이상했다. 의문을 품고 다비드가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비드의 입에서 다시 한번 그것에 대한 답변은 나오지 않았다. 다비드는 그저 메이브의 다리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비드는 손을 뻗어 작게 떨리는 메이브의 다리를 붙잡아, 세우고 있던 무릎 위에 하얀 발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경련하고 있는 종아리와 발목을 감싸며 아프지 않게 주물렀다.
“……읏.”
“오늘 무리했으니까, 내일 아프지 않게 주물러 드릴게요.”
“……대답, 안 해 주시는 건가요?”
지금은 뒤에 나올 다비드의 말이 궁금했다. 하지만 부드럽게 웃고 있는 다비드에게서 그 뒤에 말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메이브는 숨을 들이켜고 멈추며 다비드를 내려다보았다. 다비드의 표정과 말없이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는 행동에 그가 끝까지 대답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메이브 님.”
부드럽게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던 다비드의 손길이 떨어지자, 굳게 닫혀 있던 그 입술이 열리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그 목소리가 처음으로 무섭다고 느껴졌다.
“전 처음에 당신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생각입니다.”
“……처음에 했던 약속이요.”
“네, 이곳에 있는 동안 당신을 지키겠다는 약속이었죠.”
메이브는 어쩌면 이 방에 메인수와 만나게 된 것이 다행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만약 다비드와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미래는 암울하기 그지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다비드가 자신을 지켜 준다고 말하는 것에 안도하는 것이 우스웠다.
어차피 교육이 끝나고 성년식을 치르고 나면, 산속 깊은 곳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아무도 없는 그 안에서 편하게 뒹굴면서 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등줄기가 오싹했다. 눈앞에 서 있는 다비드의 생각을 알 수 없었고, 그의 눈이 어쩐지 깊게 가라앉은 것처럼 보여서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동안 저에게 의지한다고 했던 말.”
나긋나긋하면서도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는 다비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박힌 것처럼 들려왔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고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저 다비드의 표정이, 자신은 그의 손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안 잊어요.”
다비드의 말을 잊기는 힘들었다. 이곳에서 메이브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도, 벌을 받지 않는 것도, 모든 것이 다비드가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비드가 만약 배려해 주지 않았다면, 메이브는 분명 자신이 보았던 지키지 못한 자들처럼 힘들어했을 것이다. 제대로 먹지 못해 근육이 빠졌을 것이고, 그 힘든 벌에 정신이 나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기에 그가 배려해 주고 자신을 보호해 주는 이 상황이 기꺼웠지만, 그렇다고 계속 그 옆에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메이브는 다비드의 옆에 있을 수 없었다. 계속 옆에 있다면 언젠가 다비드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리고…… 감사할 뿐이에요, 다비드 님.”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 메인수를 납치해 숲속에 숨겨진 오두막에서 다비드를 탐했던 악역. 그 억압과 날뛰던 행동을 사랑한다고 외치던 미친놈. 메인수를 사랑한다고 욕구를 숨기지 않고 표출해 노예를 구하던 그 미친 인간이 자신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상기하며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다비드를 올려다보았다.
“다비드 님이 아니었다면, 이미 전 망가졌을지도 모르니까요.”
담담하게 내뱉는 메이브의 목소리에 앞에 서 있던 다비드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하지만 그런 다비드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메이브는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이 희망적이라는 듯 기쁘게 웃었다.
메이브의 표정에 다비드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한숨을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곤 메이브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찬찬히 침대에 눕혔다. 다비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메이브를 보고 미소 지었다.
“메이브 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지켜 드릴 테니까요.”
그 말과 함께 이불을 덮어 주는 다비드의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메이브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몸을 씻어야 한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뭉쳐 있던 근육을 풀어 주었던 다비드의 행동에 노곤해진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금세 잠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메이브는 두 눈에 힘을 주고 다비드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어둠이 내려앉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 틈으로 빛이 한 줌도 들어오지 않아 손을 들어 다비드의 손을 채우려 했으나,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다비드가 메이브가 내미는 손을 붙잡아 이불 위에 올렸다.
“메이브 님, 오늘 피곤했을 텐데 한숨 주무세요.”
“……하지만 씻어야…….”
“제가 수건으로 닦아 드릴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익숙함을 받아들이자고 생각하며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다비드의 말처럼 몸은 피곤했고, 졸음은 몰려왔으니까 말이다.
메이브는 힘이 들어갔던 몸을 풀고 침대에 맡겼다. 부드러운 천이 몸을 감싸는 걸 느끼며 반쯤 뜨고 있던 눈을 살며시 감았다.
자기 전에 미친 신전에서 준 상자 안에 든 물건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깊은 수마에 몸을 맡겨 버린 메이브는 금세 잠들 수밖에 없었다.
***
메이브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그러자 다비드는 메이브의 눈을 가리던 손을 천천히 뗐다. 편안하게 잠이 든 메이브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다비드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 끝에 주저앉았다.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건지.”
분명, 이곳에서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 같았던 메이브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자신의 사랑을 그저 미안함에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웃기게도, 그것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터인데, 책임과 미안함을 이야기하며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메이브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그 말에 정말 작은 티끌만큼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겁니까? 아니면, 제가 지켜 주는 것이 부담스러운 겁니까.”
이미 잠들어 버린 메이브에게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갈 곳 잃은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잠이 든 메이브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다비드는 앉아 있던 침대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시간이 흘렀으니 그 멍청한 놈이 답을 가져왔을 거라 생각하며, 잠든 메이브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곤 메이브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방 밖으로 나갔다.
“…….”
방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다비드가 생각한 대로 얼굴이 굳어 있는 알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란은 다비드의 앞으로 빠르게 걸어와 주변을 살폈다. 긴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근처의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돌려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네가 생각했던 그 대로던데.”
“그 말은 지키지 못한 자가 동물처럼 묶여 있다는 내 가설과 맞는다는 건가?”
“그래.”
혹시나 하는 생각이 확신이 되었다. 알란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사라졌던 지키지 못한 자들은 동물처럼 묶여 그곳에서 쾌락을 탐하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눈앞에 알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니, 그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끔찍하거나 지저분한 상황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됐으니까 가 봐.”
“잠깐.”
“더 할 말이 있는 건가?”
“그대로 끝이라고? 더 다른 이야기는 안 하고?”
“너랑 내가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다비드는 메이브가 혹시 모를 벌을 받지 않도록 청탑으로 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알란을 이용한 것뿐, 그와 같이 이곳에서 헤쳐 나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다비드가 알란을 이용한 것 때문에 그의 지키지 못한 자가 더 고된 벌을 받을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 문제는 다비드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이 신전이 미친 것을 알았으니, 네게도 쓸 만한 정보였을 텐데.”
“허…… 진짜 미친 새끼네.”
“내가 미쳤든 미치지 않았든, 난 내 사람만 지키면 돼. 그리고 네 녀석도 명예를 더럽히기 싫어서 한 행동일 텐데, 그에 대한 보상을 왜 내게 원하는 거지?”
다비드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눈앞에 서 있는 알란을 한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쿵, 소리가 나며 닫혀 버린 문밖으로 시끄러운 개소리가 들려왔으나, 다비드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잠든 메이브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비드는 이상하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희생하려는 메이브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이야기를 알려 준다면 메이브가 바보같이 그 불구덩이로 뛰어 들어갈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난, 당신만 지키면 돼.”
이곳에 있는 지키지 못한 자가 전부 죽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다비드는 그저 눈앞에서 편안하게 잠이 든 메이브만을 지키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다 이 미친 신전을 벗어나게 되었을 때, 도망가려는 그를 붙잡고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면 되는 거였다. 두 귀를 막고 두 눈을 가려 버릴 생각이었다.
다비드가 만들어 놓은 환상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메이브에게 가장 이상적인 미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비드는 손을 뻗어 메이브의 이마에 들러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메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