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수라더니! 1
룬명 지음
[ 메인수라더니! 1 ]
[1부] 01. 성년식
살면서 한 번쯤은, 회귀해서 로또나 코인을 사서 대박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 돈 많고 잘생긴 누군가의 몸에 빙의해서 신나게 놀아 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모든 것이 안 된다면, 환생해서라도 돈 많은 부자의 아들이 되어 놀고먹으며 즐기고 싶었다.
힘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하게 쉬면서 돈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만 했을 뿐 그게 이루어질 거라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생각이었기에 좋았을 뿐 직접 겪어 보았을 때, 모든 것이 행복하지는 않았다.
“하아…….”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회귀나 빙의, 환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가 좋았다.
하얀 이불을 품 안에 그러모아 놓은 상태로 세상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원하는 곳으로 환생하거나 빙의할 수 있었다면, 소설책을 끼고 게임기를 들고 있는 상태로 자신을 치여 줄 트럭을 돈이라도 끌어모아 구했을 것이다.
“……미치겠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건 맞았다. 돈 많은 집안의 누군가에게 빙의되었고. 흥청망청 돈을 물 뿌리듯 써도 돈은 남아돌 만큼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흔하디흔한 엑스트라였다면 이렇게 한숨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름 비중 있는 소설 속 주인공 중의 한 명으로 빙의를 했다. 그것도 19금 떡이 가득한 ‘마이 홀’ 소설 속으로.
“…….”
‘나의 구멍’이라는 이름만큼, 메인수를 사랑하는 공들이 있었고, 자신은 그중에 한 명이었다.
…차라리 멀쩡한, 돈 많은 공이였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것을.
원작이 시작하기 전에 빙의한 것은 천운이었지만, 자신이 빙의한 인물은 ‘마이 홀’ 소설 속의 비중이 높은 악역이었다.
메인수를 광적으로 집착하며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메인수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납치해서, 숲속에 숨겨져 있는 어느 오두막에서 그를 탐하며 사랑한다고 외치는 또라이였다.
차라리 이것만이라면 괜찮았다. 이 악역이 얼마나 또라이였는지, 성년이 되고 나서 자신의 욕구를 표출한다고 노예 시장으로 가선 메인수와 비슷하게 생긴 노예를 구해 밤낮 가리지 않고 아랫도리를 휘둘렀던 놈이다.
“하아…….”
그래서 한숨은, 아무리 목구멍 깊이 누르려고 해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원작이 시작하기 전이니 아직은 괜찮았다. 노예를 구한 것도 아니었고, 메인수와 다른 공들과 마주친 적도 없었다.
소리 소문 없이 돈을 쓰며 살까 했으나,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돈 많은 집안인 만큼 ‘성년식’이 되는 날 신전으로 가 일주일 동안 지내야 했다. 그곳에는 메인수와 공들이 있었기에 결국 등장인물과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성년식이 바로 오늘이었다.
‘눈 딱 감고…… 미친 것처럼 성년식 안 간다고 해야 하나.’
빙의한 것은 어제고, 오늘은 성년식이었다. 무언가를 준비할 시간은 단 1분도 없었다. 전날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아니면 미쳐서 상상의 나래를 현실성 있게 펼치고 있는지, 그도 아니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죄 없는 이불을 쥐어뜯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화려한 보석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문이 열리고 시종이 들어와 성년식에 갈 준비를 해 줄 터였다.
하지만 그곳에 가서 까딱 잘못하면 데드 엔딩이었다. 그러니 죽어도 가기 싫었다.
‘분명, 실수할지도 모르는데…….’
실수했다가 죽는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자신이 왜 빙의를 했는지 이유조차 알 수가 없었는데, 이곳에 와서 죽는다는 건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트럭에 치이지도, 게임을 하다가 쓰러지지도,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이상한 물건 역시 단 하나도 산 적이 없었다. 혹시 자다가 가스가 터져서 가스 중독으로 죽었을까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똑똑—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며 어디 숨을 곳이 있는지 찾아보아도, 커다란 방에 돈이 될 것 같은 값비싼 가구들은 있어도, 몸을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유리문 뒤에 테라스가 보였지만, 자신이 있는 방은 무려 3층이었다. 잘못해서 숨다가 떨어져 죽을 것 같았다.
“……들어와.”
결국 목구멍에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을 천천히 내뱉었을 때, 육중한 듯한 문을 열고 익숙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시종이 몸을 살짝 숙여 인사했다.
“오늘은 빨리 일어나셨네요, 도련님.”
“…….”
“이제 성년식이어서 기대가 되시는 겁니까?”
“……으음, 글쎄.”
“저는 사실 기대됩니다.”
나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시종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왜?”
나는 이상하지 않게 느릿하면서도 평온하게 웅얼거리듯이 시종에게 물었다.
“성년식을 치른 사람만이 한 인격으로 존중받으니까요.”
인격.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이곳에서 성년식이 어떤 것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곳에서 성년식을 제대로 치러야만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성년식을 못 치른 사람은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잖습니까.”
시종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손에 들고 온 은그릇을 침대 근처에 내려놓은 시종은, 팔뚝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은그릇 안의 뜨듯한 물에 천천히 적셨다. 그러곤 물을 머금은 수건을 비틀어 짜냈다.
투두둑, 수건에서 떨어진 물이 다시 그릇 안으로 떨어져 내렸고, 시종의 손등과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렸다. 익숙한 듯 수건으로 가볍게 닦아 낸 시종은 자신을 바라보며 근처에 서서 수건을 들고 있는 손을 내밀었다.
“얼굴 닦아 드리겠습니다.”
아무런 대답은 하지 않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듯한 수건에 문질러지는 감촉은 따듯하면서도 이게 현실이라고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것만 같았다.
둥근 얼굴을 지나 얼굴 곳곳을 닦고 목과 목덜미, 귀 뒤까지 닦아 준 시종은 수건을 다시 물에 빨아 짜내며 손가락 사이사이와 손등을 문질러 주었다.
“그건 그렇고, 실베스타 가문의 장자도 이번 성년식에 온다고 합니다.”
“실베스타…….”
실베스타 데이비드. 이 소설 속 메인수의 이름이었다. 이름과 같게, 커다란 산림이 가득하고 주위가 숲에 둘려져 있는 실베스타 가문에서 태어난 데이비드는 그 이름과 똑같이 사랑받고 자란 존재였다.
숲을 품은 것 같은 연녹색 눈동자와 연분홍색 물감을 풀어낸 것 같은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은 따듯하면서도 부드러웠다고 기억했다.
“네, 그렇게 숨겨 놓고 키웠다고 말했던 실베스타의 장자도 이번 성년식을 도련님과 같이 치른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해야 해?”
반말, 반말. 존댓말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반복하며 시종을 바라보며 묻자, 시종은 작게 고개를 흔들며 반대편 손등과 손가락도 찬찬히 닦아 냈다. 뜨듯한 천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몰라도, 어쩐지 살갗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아니요. 지지 말고 오세요, 도련님.”
“……뭐?”
“그 가문의 장자가 무척 엘리트라고 들었어요.”
시종은 무언가를 다짐한 것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도련님이 실베스타 장자보다는 훨씬 대단하신걸요.”
에녹 메이브. 그게 지금 자신이 빙의한 인물의 이름이자, 지금 내 이름이었다. 신에게 바쳐져 열광을 시킨다는 뜻을 가진 이름. 어순과 뜻도 제대로 맞지 않는 이름이었다.
메이브라는 악역은 대단했다. 가족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이가 좋았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전날 밤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을 끌어안고 울며, 드디어 성년이니 벌써 다 컸다고 아쉬워하던 메이브의 어머니와 그 옆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조금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던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났다.
메이브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본모습을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다. 뒤에서는 사람을 죽이며 웃는 잔혹한 살인마였으나, 남들 앞에서는 순수하고 착한 듯이 연기했다.
“그래? 그렇게 말해 주니까 고마워.”
그나마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성격이 더러웠다면, 하루아침에 성격이 바뀐 미친놈이 되어 버렸을 거였다. 또한 이야기를 뒤틀려고 했을 때, 자신의 뒷소문에 안 좋게 바뀔지도 몰랐으나 모든 것은 아직 시작하기 전이었다는 것이다.
아직은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터였다. 아니, 어떻게 해서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수건을 탁상에 내려놓는 시종을 보며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허리에 묶여 있던 매듭을 붙잡아 풀어내자 허리춤의 끈이 사르륵 풀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틈 없이 묶었던 가운이 벌어져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운동을 한 몸에 반뜻한 근육이 오밀조밀하게 차 있었다.
“성년식 동안은 하얀 옷을 입고 생활해야 되고, 시종은 함께 갈 수 없어요.”
“응.”
“도련님이 잘하실 거라고는 알고 있지만, 혹시 혼자서는 힘들다면 꼭 공작님께 말씀하세요.”
“어차피 나 말고도 다른 사람도 혼자 알아서 할 텐데,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 보셨던 도련님인데, 당연히 걱정이 되죠!”
투명한 물 대신 피를 묻혔다는 말은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내가 알고 있는 메이브는 그렇게 순했던 인물은 아닌데, 왜 저렇게 유리 깨지듯이 대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그만큼 메이브가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노련하게 연기를 한 걸지도 몰랐다.
“먼저 속옷부터 입혀 드릴게요.”
“속옷도 하얀색이야?”
“네, 성년의 날에는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고, 옷부터 신발, 속옷까지 전부 하얀색으로 입어야 하며 더러워지면 안 돼요. 그리고 신전에 들어가면 밖에서 묻은 오물을 씻어 내야 해서 신전의 중간에 있는 물로 몸을 씻고 옷을 입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 관례예요.”
“관례?”
“네, 그 사람이 원래 악하거나 선한 것을 떠나 성년의 날에는 모두가 선하게 보여야 하니까요.”
하얀색 양쪽에 끈이 달린 속옷을 다리 사이에 집어넣은 시종은 엉덩뼈가 불룩 튀어나와 있는 부분에 끈으로 매듭을 묶었다. 단단하게 묶인 리본 매듭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소설 속에서도 하얀 옷을 입고 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브 악역 공이 옷 안에 양쪽을 끈으로 리본 매듭을 묶은 하얀 속옷을 입고 있는지는 몰랐다.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속옷은 꼭, 이 디자인이어야 하는 거야?”
매듭의 끝부분에 늘어진 하얀 끈 하나가 허벅지를 간지럽혔다. 손가락으로 붙잡아 당기기만 하면 풀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속옷은 썩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님께서 도련님이 성년식에 걸맞게 이 속옷을 입고 가 주시면 좋겠다고 챙겨 주셨는데,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속옷을 준비해서 가지고 올게요.”
시종이 묶었던 매듭을 풀려는 듯이 끈을 붙잡으며 말했다. 메이브의 어머니가 준비했다고 하니, 차마 착용하지 않겠다고 말하기가 애매했다.
“이거 마님께서 밤새 만든 속옷이에요, 도련님.”
차마 어머니가 직접 만들었다는 속옷을 입기 싫다고 말하기도 애매했고, 성기를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천은 분명 값비싸고 좋은 천으로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밤새 만든 속옷이라고 하는데 안 입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매듭을 붙잡고 있는 시종의 손을 살짝 툭, 건드렸다.
“입고 갈 테니까 옷을 입혀 줘.”
“네.”
반쯤 주저앉아 있던 시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면에 자리하고 있는 옷장으로 걸어갔다. 옷장에도 박혀 있는 보석을 떼어 가져다 팔기만 해도 커다란 돈이 들어올 것만 같았다.
시종이 옷장 손잡이를 붙잡고 열자, 그 안에 하얀 옷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용히 옷을 들고 오는 시종을 쳐다보았다.
들고 있는 옷에 이상하게 바지가 보이지 않았다.
“원래 바지는 안 입어야 해?”
커다란 가운처럼 긴 옷은 입으면 발목을 살짝 가릴 것처럼 보였지만, 옆선은 오금까지 벌어져 있었다.
“네, 신전은 신께 더 다가갈 수 있는 곳이라 성년식을 하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옷을 입는 것이 관례예요.”
“…….”
시종이 옷을 걸어 놓은 쇠를 빼내고는 하얀 옷을 자신에게 입혀 주었다. 사르륵,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천이 들러붙으며 몸을 쓸고 지나갔다. 목선을 전부 가려 버리는 목깃과 앞부분은 전부 단추로 되어 있었다.
하얀 옷으로 전부 입으면 금욕적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색정적으로 보일 것만 같았다. 가슴께에서 벌어진 옷을 당겨서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는 시종의 모습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무릎 선까지 자리 잡은 단추를 채우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쇄골 위로 있는 단추를 톡톡 채웠다.
“완벽해요.”
작게 손뼉을 치며 말하는 시종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 한쪽에 놓인 거울로 걸어갔다.
“…….”
목이 보이지 않을 만큼 올라간 목깃에 작은 속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소매 부분도 손끝이 겨우 보일 것처럼 길었고, 발등 위에서 흔들리는 밑단까지 어디 하나 노출이 없었다.
메이브의 머리카락이 밤을 가둬 놓은 것처럼 어두운 흑발이어서 그런지, 그도 아니라면 옅은 자색의 눈 때문에 그런 것인지. 금욕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색정적으로 누군가를 유혹하는 사람처럼 노출 없는 옷이 야해 보일 지경이었다.
찬찬히 손을 들어 올려 눈꺼풀 근처에서 흔들리는 흑발의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기며 드러난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도련님이 보셔도 되게 멋있지 않으세요?”
쭉 찢어지듯 올라간 눈매 아래 날카롭게 생긴 인상이 보였다. 꾹 다물고 있는 입술까지, 확실히 공이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잘생겼다는 느낌이 강했다.
빙의하기 전에도 이런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면, 회귀도 빙의도 환생까지 바라지 않고 신께 고마워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걸을 때마다 종아리 사이로 들어오는 옷자락과 트여 있는 옆선에 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사라지는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훤한 다리 사이에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더더욱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이제 출발하셔야 해요! 짐은 제가 꼼꼼하게 챙겨서 마차 짐칸에 넣어 놨어요! 도련님.”
이제 원작이 시작이라는 것에 가슴이 답답했다. 정말 미친 척하고 가지 말까 했지만, 기대된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시종에게 부정의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밤새 속옷을 만들어 성년식에 입힐 거라 기대하며 만든 메이브의 어머니에게도 미안했기에 무거운 어깨를 반듯하게 들어 올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몸을 돌려 닫혀 있던 화려한 문을 밀어냈다. 부드럽게 열리자, 문밖에 검을 들고 있는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보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기사가 보는 사람도 기분 좋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제 도련님이 다시 돌아오셨을 때는 성년이 되어 있겠습니다.”
“……그렇겠지.”
“분명 잘 해내실 겁니다.”
표정과는 다르게 무뚝뚝한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며 긴 복도를 지나갔다.
발끝에 닿는 부드러운 카펫과 커다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햇빛을 머금은 녹음의 잎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사실은 가기 싫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누가 가고 싶을까.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은 것을 목구멍 깊이 누르며 긴 복도를 지나갔다.
성년식을 치르고 싶지 않았지만, 시종은 이곳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성년식이 필수라고 했다. 가고 싶지 않아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카펫 위를 부드럽게 스치듯 문지르며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하얀 계단을 내려갔다.
“혹시 모를 것을 대비해서 호신용 단검과 장검을 마차에 챙겨 놓았습니다.”
“……신전 안에 무기 소유가 불가능하지 않나?”
신전 중간에서 밖에서 묻은 오물을 씻어 내야 한다고 했기에, 밖에서 가져오는 무기를 들고 들어갈 순 없을 듯했다.
“가는 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챙겨 놓았습니다.”
“가는 길?”
“신전에서 보낸 마차를 타고 가셔야 하며, 따로 저희가 동행을 할 수 없으니까 몸을 지킬 무기라도 챙겨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계는 성년식 한번 치르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신전으로 들어가면 몸을 씻어야 하고, 하얀 옷과 신발을 신어야 하며, 바지는 입을 수 없었다.
또한 직위가 어떻든 신전에서 보낸 마차를 타고 신전으로 향해야 하는데, 호위조차 받을 수 없다는 건 조금 신기했다.
그리고 일주일. 성년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몰라도 그곳에서 머물러야 하는 기간이 생각보다 긴 것 같았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키라는 거구나.”
생각한다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계단 중간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자 옆에 서 있던 기사가 몸을 굽히고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손을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제 손등을 이마에 문지르며 작게 속삭이듯 사과하는 기사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보통 기사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가.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으니 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손을 잡고 있던 기사의 투박한 손끝이 작게 떨려 왔다.
“가는 길을 지키지 못하지만, 성년식이 끝나고 돌아오시면 단언컨대 도련님을 혼자 두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건 이거대로 불편하다고 생각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기사의 손에 잡힌 손을 빼내었다. 그러곤 멈추었던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다 내려가자,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문을 양옆에 있던 시종들이 열어 주었다.
이제 부자의 삶인 걸까 생각하며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선한 바람이 몸에 달라붙을 때마다 입지 않은 바지 때문에 다리 사이가 시렸다. 불편하다고 생각하며 무릎을 스치고 허벅지를 문지르다 눈앞에 보이는 크고 거대한 하얀 마차를 바라보았다.
“신전에서 보낸 마차입니다.”
신전에서 보낸 마차인 것은 분명히 알았다. 백금을 녹여 낸 것처럼 하얀 마차는 겉면 사이사이에 화려한 음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저 커다란 마차에 문양을 새겼을 기술자들은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천천히 눈꺼풀을 감았다 뜨고는 걸음을 옮겨 마차로 다가갔다.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것에 의아했지만 호위도, 시종도 데려갈 수 없고 하얀 옷 또한 더럽히면 안 된다고 말했던 것을 생각했다.
아마 더러운 무언가는 만질 수 없고, 성년식을 치르는 사람만이 만지고 탑승할 수 있을 듯했다.
손을 뻗어 마차 문을 열고 밑의 발받침을 밟으며 마차 위에 올랐다. 마차 안도 화려했지만, 모든 게 하얀색이었다.
“하…….”
크고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 쿠션과 하얀 벽. 마차 창밖을 가리는 커튼까지도 하얀색이었다. 이러다가 신전에 가기 전에 미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려 소파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마차 문을 쿵, 소리 나게 닫았다.
“도련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창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기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좆됐다…….”
속에서 말이 우러나왔다. 무거운 돌멩이가 가슴 위를 내리누르는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차가 서서히 출발하자, 감았던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반투명한 하얀 커튼 뒤로 수없이 많은 꽃을 품고 있는 정원이 지나갔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 밖의 풍경이 점점 빠르게 지나갔다. 그런 배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폭신하고 부드럽다고 생각한 의자 쿠션은 왜 이리 불편한지, 빠르게 달릴 때마다 엉덩이가 배겨 오는 것 같았다.
“데이비드.”
이 소설의 메인수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곤 화려한 대문을 지나 펼쳐진 고른 길을 달리는 마차에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등을 편히 기대고는, 또다시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살아갈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메인수를 납치하면 안 되고, 메인수와 얽히면 안 된다 그리고 원작의 내용과 최대한 벗어나야 했다.
만약 메인수와 얽히다 실수라도 하면 정말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죽을지 모른다. 자신은 아직 못된 짓을 하지 않았다 해도 메이브는 악역이었다. 그것도 또라이에 집착과 광기가 뒤섞여 있는 공이었고, 사람의 목숨 줄 따위는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미친놈이었다.
“하아…….”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이고, 눈앞은 캄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지, 메인수와 얽히지 않고 다른 공들과 만나지 않을지, 머리를 싸매고 이리저리 고민을 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불편한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살짝 꼬고 앉아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어차피 마차에 탑승했고, 마차는 신전으로 달리고 달려서 빠르게 도착할 것이 분명했다.
도망가고 싶어도 이곳에 대한 지식도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돈은 없었다.
화려하고 보석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옷을 입고 신전으로 향했다면, 마차에서 뛰쳐나와 옷에 달려 있는 보석을 팔고 생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후회는 길고 생각은 짧았다. 액세서리 하나 달리지 않은 옷으로 도망가느니, 주인공들과 만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문제없을 거라고 맘속 깊이 바랐다.
창밖의 풍경은 자신이 살고 있던 곳과는 확실히 달랐다. 유럽에 온 것같이 화려하고 예쁜 건물들과 편한 옷을 입은 사람들조차 현대가 아니라 중세적인 느낌이 들었다.
신전이고, 기사고. 귀족부터 해서 이곳은 ‘마이 홀’ 소설 속이 맞는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있다면…….”
자신의 성처럼 신에게 바쳐질 테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속으로 속삭이며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멈추어 섰을 때 몸이 앞뒤로 작게 흔들렸다. 졸음기가 몰려와 무거워진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차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앉은 상태로 기다려야 하는 걸까. 잠깐 고민하던 사이에 새하얗기 짝이 없는 마차의 문고리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다행히도 마차의 문이 열리고 나서 보이는 건 신관이었다.
산적이나 위험한 일은 당하지 않아서 안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금방이라도 목숨 줄이 위태한 등장인물들을 만나러 도착했다는 것에 슬퍼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형제님.”
그 말을 하며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신관을 잠시 쳐다보았다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신관의 손을 무시하고 마차의 발받침을 밟고 내려왔다.
“제가 남자이니 부축은 필요 없습니다.”
앉아 있는 상태로 마차를 오래 타고 와서인지 살짝 구겨진 옷 끝을 손바닥으로 툭툭 털어 냈다. 구겨진 옷이 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민망할 법도 했을 텐데, 남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웃으면서 고개를 작게 숙이며 인사한 남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뻐근한 궁둥이와 허리를 두드릴 시간도 없었다. 힘들다는 생각을 마음 깊이 누르며 신관의 등 뒤로 따라 걸었다.
“전 앞으로 형제님과 함께 생활할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전…….”
같이 생활해야 하는구나, 잠시 생각하면서도 순간 내 원래 이름을 말할 뻔했다. 그러다 원래 자신의 이름은 어차피 이곳에서 사용하지 못하는데, 괜한 고민을 했다고 생각하며 작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메이브. 메이브라고 불러 주세요.”
“이름이 아름답네요.”
아름다운 이름은 아니었다. 열광시킨다는 뜻은 어떻게 보면 좋아 보이지만, 다른 면으로는 좋지 않은 뜻이었다. 너무도 기쁘거나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뛴다는 이름. 어쩌면 원래의 메이브와 가장 잘 어울릴 이름인지도 몰랐다.
“……감사합니다.”
다니엘의 등 뒤를 따라가며 주변은 천천히 둘러보았다. 거대한 원형의 통로를 지나 화려한 장식과 석상도 지나쳤다. 신전이 아니라 금을 처바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 말을 하면 신성 모독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다니엘의 등 뒤만 바라보며 따라 걸었다. 허리까지 오는 은발의 머리카락이 걷는 걸음걸이에 따라 이리저리 작게 흔들렸다.
“도착했습니다.”
통로 끝에서 우두커니 멈춘 다니엘의 모습에 등 뒤에서 따라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 시종이 말했던 게 이 뜻이었는지, 통로 끝부분에는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인공 호수와도 같아 보이는 웅덩이는, 양옆에 백색의 돌로 감싸여 있었고, 그 중간에는 두 손을 모은 상태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남자의 석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크기도 생각보다 크고 넓어서 분수대라기보다는 호수처럼 보였다.
“밖에서 묻어난 오물과 나쁜 기운을 없애야 하기 때문에, 먼저 성수로 몸을 씻어야 합니다.”
“…….”
몸을 씻어야 한다는 건 이미 시종에서 들었던 터라 상관없었다. 다만, 눈앞에 보이는 성수가 모여 있는 곳이 사방이 전부 뚫려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자신만 온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은 이미 씻고 들어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직 그 커다란 물이 고여 있는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먼저 옷을 벗어 저한테 주시죠.”
“……다 벗어야 합니까?”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내뱉으려 해도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려 왔다. 변태도 아니고, 남들이 볼 수 있는 훤한 곳에서 옷을 전부 벗고 씻기는 싫었다. 아니, 부끄러웠다.
그런 자신의 말에 미소를 머금은 다니엘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모친이 만든 속옷을 제외한 옷은 입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
이미 신전에 도착했는데 그러기 싫다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목 끝까지 채워져 있던 단추를 하나둘 풀어냈다. 툭, 툭. 단추가 풀어질 때마다 몸을 조여 오던 하얀색 옷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손이 아랫배까지 도달했을 때, 벌어진 옷은 가슴을 훤히 보여 주었다. 서늘한 바람이 가슴에 들러붙는 것에 허리가 써늘해지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돌아가는 긴 통로. 어디를 둘러보아도 누군가의 시선이 닿을 것 같은 위치에 있는 호수 같은 분수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옷을 벗고 있는 자신이 꼭 부정한 무언가를 저지르는 것만 같았다.
단추를 전부 풀어낸 옷을 찬찬히 벗었다. 어깨에 걸려 있던 옷이 사르륵 쓸리며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벗은 옷을 다니엘에게 전달해 주고 나자, 자신이 입고 있는 것은 엉덩이뼈 부분에 리본으로 매듭에 묶여 있는 하얀 속옷밖에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성수로 몸을 씻어 내고 오시면 됩니다.”
부끄럽고, 얼굴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벗었는데 이제 와서 부끄럽다고 옷을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더운 얼굴을 작게 가로저으며 천천히 하얀색 신발을 벗어 다니엘의 앞에 내려놓고 계단을 조용히 내려갔다.
차가운 계단에 닿은 발바닥이 유난히 시리면서도 뜨거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점점 가까워지는 석상이 꼭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후…….”
목구멍에 걸려 있던 더운 숨을 내쉬고는 다리를 들어 올려 하얀 벽돌 안에 고인 물에 집어넣었다. 발끝부터 시릴 거라고 생각했던 물은 생각보다 따듯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두 발을 전부 집어넣고 다리를 굽혀 주저앉았다. 따듯한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하나밖에 입고 있지 않았던 하얀 속옷은 물기를 먹어 축축하고 찝찝해졌다. 몸에 달라붙은 속옷은 아무것도 가리지 못하고 자신의 성기와 엉덩이의 살결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손을 뻗어 성수를 손바닥에 모아 어깨와 가슴을 씻어 내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저 위에 서 있는 다니엘이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씻어야 한다는 것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데. 신전에 왔으니 신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두 손으로 성수를 모아 머리에 쏟아 냈다.
몇 번을 쏟아 내자 머리가 성수에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얼굴과 몸 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성수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들어가 있던 자리에서 빠져나와 서서히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다리를 움직여 하얀 계단을 한 걸음, 두 걸음 올라갈 때마다 지나간 자리에 성수로 인해 발자국이 새겨졌다.
“이제 옷을 입으시죠. 메이브 형제님에게 묻어 있던 오물과 나쁜 기운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웃기지도 않았다. 만약 정말로 오물과 나쁜 기운이 묻어 있다고 해도, 기도하거나 옷을 입은 상태로 씻으면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래의 메이브였다면 자신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옷을 전부 벗어 던져 물 안에 들어갔다가 당당하게 빠져나왔을지도 모른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머리카락이 찝찝해서 손을 들어 올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곤 다니엘이 들고 있던 옷을 건네받았다.
“그렇군요.”
축축하게 젖어 있는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이 목선을 따라 흘러내려 등줄기에 선으로 그림을 그렸다. 하얀 살결 위로 그려지는 물 그림이 찝찝해서 손으로 문질러도 몸에 흐르는 물이 번질 뿐이었다.
살갗에 달라붙는 팬티는 축축하기 그지없었다. 반쯤 죽어 쪼그라든 성기가 그대로 보이는 게 싫었기에 물을 닦지도 않고 그 위에 옷을 걸쳐 입었다.
밀려 올라가는 옷이 살갗에 달라붙었다. 하얀 옷에 물이 머금어져 살결이 비쳤다. 달라붙는 옷을 한번 떨어트려 보아도, 물이 먹은 옷은 다시금 몸에 들러붙었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 이곳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듣고 오셨을 겁니다.”
다니엘의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목부터 천천히 단추를 채워 내려갔다. 상체를 살짝 굽히고 무릎에 있는 단추까지 채웠으나, 물을 머금은 옷은 몸에 달라붙어 메이브의 몸 라인을 도드라지게 보이게 만들었다.
“네.”
“한동안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침 7시에 기상해야 하며, 식사가 준비되는 시간에 식사를 하러 가야 합니다.”
옷을 다 입은 것을 본 다니엘이 몸을 돌려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긴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다니엘의 등 뒤를 따라 걸으며 몸에 달라붙는 옷을 살짝 들어 올려 들썩였다.
“준비된 시간에 운동을 해야 하며, 성년이 되기 전, 신께 기도를 드리기 전까지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네.”
하얀색 벽에 두드러진 베이지색 문 앞에 멈추어 선 다니엘이 한쪽 문을 붙잡고 천천히 열었다. 고개를 돌려 안쪽의 방을 바라보자 한 사람이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하얀 침대와 나무로 만든 선반 중간에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그전에 몸에 가지고 있던 음욕을 덜어 내야 합니다.”
“……예?”
가만히 들으며 대답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 다니엘을 볼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의 시선이 당연한 것을 왜 그렇게 당황하느냐는 듯이 느껴졌다.
무언가 물어보려 했던 것을 멈추고 입을 다물자, 다니엘이 문을 잡고 있는 상태로 방 안을 가리켰다.
“혼자 위로하며 잔 안에 그 흔적을 담아 놓고 나오면 됩니다.”
“……더러운 오물과 기운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해서 성수로 씻었는데, 자기 위로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까?”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답답함에 묻는 말에도 다이엘은 그저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아 방 안으로 살짝 밀었다.
주춤주춤, 중심을 잃은 발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갔을 때, 다니엘은 문을 잡고 있는 상태로 말을 이어 갔다.
“몸이 깨끗해졌으니, 안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형제님. 방 안에 들어가면 잔 안에 들어 있는 성수를 먹고, 속 안의 남은 욕구와 음욕을 털어 내고 나오시죠.”
쿵,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닫혔다. 어이없는 마음이 조금 더 몸집을 키워 냈다. 이럴 거였다면 옷을 제대로 입으라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자위를 할 때 다시 반쯤 옷을 벗을 수밖에 없어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원래 성년식이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의문만 더 커질 뿐이었다.
침대에 앉아 고개를 돌려 문을 쳐다보았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은 자신의 정액을 잔 안에 담지 않는 이상은 열어 줄 것 같지 않았다.
“하아…….”
이러고 싶어 성년식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손을 뻗어 눈앞에 있는 금색의 잔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물이 잔 안에 담겨 있었다. 다니엘이 성수라고 말했으니 몸을 씻었던 물과 같은 성수일지도 몰랐다.
천천히 잔을 입가에 가져가 잔 안에 있던 물을 전부 입 안으로 털어 냈다. 뜨겁지 않고 차가운 물이 입에 머금어졌다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목울대를 움직이며 물을 삼켜 내고는 잔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내가 못 할 줄 알아?’
자위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었다. 침대에 편하게 앉아 두 손으로 무릎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단추를 하나둘 다시 풀어냈다. 아랫배 부분까지 단추를 풀었을 때 살짝 엉덩이를 들어 올려 발목 아래에서 흔들리는 밑단을 붙잡아 등 뒤로 가져갔다. 축축한 속옷이 부드러운 시트에 문질러졌다.
한숨을 내쉬면서 엉덩이뼈 부분에 매듭 끈을 손으로 붙잡아 잡아당겼다. 스르륵, 양쪽에 예쁘게 묶여 있던 리본이 풀어지자 성기를 가리고 있던 속옷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켜고 천천히 내쉬며 발기하지 않은 부드러운 성기를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가락을 오므리자 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스르르 손가락으로 주무르며 성기를 앞뒤로 살살 흔들었다.
“하아, 읏…….”
더운 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손끝으로 기둥을 쓸어 올리며 불룩 튀어나온 귀두를 살살 문질러도, 좀처럼 성기가 단단해지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탁탁탁, 소리 나게 손을 흔들었다. 점점 세포가 아래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랫배에 작게 힘이 들어가고 위아래로 흔드는 손은 점점 빨라졌다.
손아귀 안에 말캉거리던 살덩이가 점점 단단해지며 크기를 점차 늘려 왔다.
“흐읏…….”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뱉으며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탁탁탁, 위아래로 흔드는 손가락 사이에 밑동이 부딪칠 때마다 살갗을 두드리는 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점점 빠르게 손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아랫배가 욱신거렸고,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 성기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하으, 응…….”
어깨를 움츠렸다가 상체를 살짝 숙이며 손을 점점 빠르게 흔들었다. 팔뚝에 근육이 도드라지고 손등에 핏줄이 불룩불룩 튀어나왔다. 점점 빠르게 흔드는 손길에 성기가 욱신거릴 때, 더운 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목덜미가 뜨듯해지고 입술에서는 단 숨이 연거푸 흘러나왔다.
“하아…….”
귀두 끝에서 쿠퍼액이 송골송골 맺혀 왔다. 손가락 사이에 문질러지는 살갗은 간지러우면서도 뜨거웠다. 찌걱찌걱, 야한 소리가 움직이는 손아귀 안에서 흘러나왔다. 허벅지가 조금 더 벌어지며 단단한 근육이 도드라졌다.
움칠, 몸을 작게 들썩이며 숨을 크게 뱉었다. 야한 쿠퍼액이 손가락에 진득하게 묻었다. 살갗에 문질러져 뜨듯해진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리자 성기에 묻어 있던 쿠퍼액이 늘어났다가 끊어졌다.
“읏!”
거의 쌀 것 같다고 느꼈다. 온몸의 감각이 한데 모인 것 같았고, 손가락이 쓸리는 부분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기를 반복했다. 숨을 천천히 들이켜고 내뱉기를 반복하며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흐으, 하아…….”
열기에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잔을 붙잡아 성기 앞에 가져갔다. 찌걱찌걱, 탁탁탁. 살갗을 두드리는 소리와 애액이 문질러지는 야한 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였다.
손을 까닥거리며 움직이기를 반복하자, 상체가 숙여지고 아랫배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흣……!”
성기의 밑동부터 꿈틀거리며 잔 안에 하얗고 농도 짙은 정액을 뿌려 넣었다. 이마에 맺혀 있는 땀과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성수가 뒤섞여 어깨춤을 적셨다.
나른해진 몸에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침대의 하얀 시트를 끌고 와 쿠퍼액과 정액으로 지저분해진 성기를 문질러 닦았다.
“읏…….”
예민해진 성기를 부드러운 시트로 문지르자 허리가 잘게 떨려 왔다. 숨을 잠시 멈추고 열기에 휩싸인 몸을 진정시키려 했다.
크게 심호흡하기를 반복하고는 차분하게 깊은 숨을 내쉬며 손에 묻은 애액도 닦아 냈다. 한쪽에 흘러내린 팬티의 끈을 단단하게 당기고는 아직 죽지 않은 성기를 밀어 누른 뒤에 엉덩이뼈 부분에 단단하게 끈으로 매듭을 묶었다.
열기가 사라지지 않자 손끝이 떨려 와 몇 번이나 헛손질을 반복했지만, 이내 한쪽에 예쁜 리본을 묶으며 팬티를 고정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풀었던 단추를 채워 놓은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 단단하게 닫혀 있는 문을 두드렸다.
“…….”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문 앞에 서 있던 다니엘이 밤꽃 냄새가 진득하게 맡아지는 방 안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제 메이브 형제님은 음욕을 털어 내신 겁니다.”
다니엘은 눈앞에 있는 메이브를 힐끔 쳐다보았다. 열기에 붉은 홍조가 올라와 있는 얼굴이 얼마나 거칠게 몸을 움직였는지 훤히 보였다. 날카롭게 올라갔던 눈꼬리는 쾌감 때문인지 조금 작게 내려앉아 있었다.
살짝 벌어져 있는 입술 사이에서는 뜨듯한 열기가 뒤섞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제 방으로 가시죠.”
몸에 들러붙은 옷은, 더는 옷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메이브의 몸에 붙어 있었다. 물기를 먹어 반투명해진 옷 위로 메이브의 하얀 살결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제 끝입니까?”
“방 안에 들어가면 형제님과 함께할 다른 형제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방은 그래도 혼자 쓴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신전이라 그런 걸까, 다른 사람과 사용해야 한다는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살면서 기숙사 생활도 했고 다른 사람과 룸메이트로 같이 살아 본 적도 있었다. 혼자 살 때도 친구들이 늘 놀러 왔기에 집에 사람이 없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자고 지내는 것은 별로 상관없었지만, 제발 소설 메인 인물만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저는 누구와……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는 겁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다니엘이 작게 고개를 흔들며 몸을 돌렸다.
“저도 형제님이 어떤 형제님과 사용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덤덤하게 말하는 다니엘의 목소리에 더는 말을 꺼내기가 애매했다. 말을 하면 끊는 저 말투가 조금은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뚜벅뚜벅 걸어가는 다니엘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를 몇 번, 도중에 신발을 신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
“저…… 다니엘 님?”
“왜 그러시죠? 형제님?”
“아까 제가 신발을 신고 오지 않았…….”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다니엘이 메이브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서 보시면 생활하면서 입을 옷과 신발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물건은 전부 회수할 예정이니, 괜찮습니다.”
“……네.”
신발과 옷을 다시 준다고 말하는데, 다시 가서 신발을 신고 오겠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나올 것 같은 한숨을 눌러 담고 다니엘이 걷고 있는 방향으로 따라 걸었다.
차가운 복도에 닿는 맨발은 뜨듯해진 체온을 식혀 주었다. 한 걸음, 두 걸음, 하얀색 바닥에 작은 물기가 머금어진 물 자국이 새겨졌다가 점차 말라 사라졌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니 긴 복도를 지나 코너를 꺾었을 때 한쪽에 문들이 길게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중에 104 숫자가 적혀진 팻말이 붙어 있는 곳으로 다가간 다니엘이 문을 열고는 메이브를 쳐다보았다.
“이곳이 일주일 동안 형제님이 지내실 방입니다.”
“감사합니다.”
바닥에 발끝을 문질렀다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방을 같이 사용할 사람은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양쪽에 하얀색 침대가 두 개 놓여 있었고, 침대 가장자리에는 물건을 놓을 수 있는 작은 선반과 한쪽 벽면에 옷장 하나가 가구 전부였다.
침대 위에는 하얀색 이불이 잘 개켜 있었다. 그 위에 다이엘이 말한 것처럼 하얀색의 편해 보이는 옷이 놓여 있었다.
“침대 위에 있는 옷으로 갈아입고, 입고 왔던 옷과 물건은 이 바구니에 안에 넣으시면 됩니다.”
“…….”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나가지 않는 다니엘의 모습에 목깃 부분의 단추를 잡고 있는 상태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가지는 않으시나요?”
“밖에서 가져온 물건을 혹시 소지할 수도 있으니,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다는 말이었다. 차라리 같이 옷을 벗으면 부끄럽지나 않지. 누구는 옷을 벗고, 누구는 그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에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다니엘은 지켜볼 것이고, 자신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어차피 다 같은 남자인데, 뭐 어떻겠냐고 생각하며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어차피 다니엘은 아까 복도에서 자신이 옷을 벗었던 것을 보았기에 크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단추를 다 풀어내고 물을 먹은 옷을 바구니 안에 던져 넣었다. 팬티의 한쪽 매듭을 풀어내자 성기를 가리고 있던 팬티가 흘러내려 허벅지에 들러붙었다. 반대편 끈도 풀고는 바구니 안에 집어넣으며 침대에 있던 옷을 들어 올렸다.
“……다니엘 님, 속옷은 없는 건가요?”
침대 위에는 하얀색 원피스 같은 옷 한 개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스러움에 두 눈이 작게 흔들렸다.
자신이 벗어 놓은 옷가지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들어 올린 다니엘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신에게 다가갈 때는 최소한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메이브 형제님.”
“……성년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성년식이 이상했다. 특히나 이곳이 19금 신이 가득했던 소설 속 안이기에 더욱 불안했다.
사람들이 오고 갈지 모르는 곳에서 옷을 벗고 모든 것이 보이는 정중앙에 있는 곳에서 몸을 씻어야 했다. 그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음욕을 버린다는 이유로 방 안에서 혼자 자위를 해 정액을 잔 안에 담아야 했다. 이제는 원피스 같은 옷 빼고는 속옷을 입지 않고 생활해야 한다는 말은 이 뒤에 더 심하고 더 이상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쉽게도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형제님.”
다니엘은 메이브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메이브가 들고 있는 옷은 아마 최대한 밑으로 당겨서 내린다 해도, 허벅지의 중간 부분까지밖에 가려지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성년식을 할 때 사용하는 옷은 전부 기장이 정해져 있는 듯했다.
입는 사람이 키가 크거나, 작거나 상관이 없었다. 누군가는 길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셔츠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길면서도 짧은 길이였다.
“앞으로 시련을 어떻게 끝낼지는 모두 메이브 형제님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다르다는 것만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친절하게 말해 주는 것 같으면서도 다니엘은 자신에게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저 선택과 행동에 따라 다르고,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마 자위를 하거나 아까처럼 목욕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원래 소설도 아무런 개연성이 없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신이 가득한 소설을 보고 싶어서 보았던 소설인데, 이럴 줄 알았다면 제대로 된 소설을 읽었을 거였다.
손에 들려 있는 하얀색 원피스처럼 생긴 옷을 노려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며 머리에 생겨 있는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두 팔을 넣어 밑단을 끄집어 내렸다. 허벅지 중간에서 흔들리는 옷은 몸을 크게 숙이거나 다리를 움직이면 옷이 밀려 올라가 중요 부위와 엉덩이가 드러날 것 같았다.
“이대로 일주일을 생활해야 하는 건가요?”
아까 복숭아뼈 근처에서 밑단이 흔들렸을 때도 다리 사이가 시리고 불편했는데, 지금은 더더욱 불편했다. 최대한 옷의 밑단을 붙잡고 잡아 내리면 엉덩이 부분의 옷이 밀려 올라갔다.
“신전에 있는 동안은 그 옷을 입고 생활해야 합니다.”
“…….”
“또한 입고 있는 옷은 자신이 빨아서 다시 입어야 합니다.”
가만히 다니엘의 말을 듣고 있다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옷을 빨아서 입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덤덤하게 말하는 다니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상하게 뒤가 찜찜했다.
“……혹시 다니엘 님, 신전에서 지급해 주는 옷은 이것이 다인가요?”
설마설마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다니엘의 표정은 미약한 웃음이 피어나 있었다.
“네, 신전에서 지급해 주는 옷은 그것 한 장뿐입니다. 신전 안에서는 매일 몸을 깨끗하게 하는 만큼, 옷 또한 깨끗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하나뿐인 옷을 빨아서 입고 생활해야 한다는 말은, 옷을 빠는 동안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체로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축축한 옷을 입기 싫다면 옷이 마르는 동안에도 아무런 옷을 입지 못한다는 것이다.
“옷을 빨 수 있는 곳은 신전에 있지 않습니다.”
“……네?”
“신전 밖으로 나가 한쪽에 있는 작은 오솔길을 올라가면, 그 위치에 작은 호수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옷을 빨고 입으시면 됩니다.”
“……그러면 옷이 찢어지거나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당황함에 떨리는 목소리로 다니엘에게 묻자, 그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이 나긋나긋한 어조로 대답했다.
“옷이 찢어졌다는 것은 관리를 하지 못한 겁니다. 또한, 옷이 찢어진 더러운 상태로는 생활을 할 수 없으니.”
다시 지급해 준다는 걸까.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다니엘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생활하게 되겠죠.”
“……네?”
“신전에서 지급해 주는 성년식의 옷은 단 한 벌, 지금 입고 있는 옷입니다. 그 옷은 성년식이 끝나는 그날까지 입는 옷인데, 찢어진 옷은 신께 불경하니 입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죠.”
다니엘은 천천히 그 말을 하며 메이브의 옷이 들어 있는 바구니를 품에 안았다. 옷을 잡아당긴 것을 멈춘 메이브가 멍한 얼굴로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다니엘은 그런 메이브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니 옷은 최대한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메이브 형제님.”
“…….”
“저는 메이브 형제님이 가져온 옷을 보관해야 하기에 잠시 자리를 비울 겁니다. 아마 같은 방을 쓰게 되는 다른 형제님도 곧 도착할 테니, 방 안에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성년식을 시작하기 전, 모두 방 안에 들어갔을 때쯤 어떤 시험이 있는지 알려 드릴 때까지는 이곳에서 나가지 마세요. 형제님.”
다니엘이 하는 말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
자신의 할 말은 끝났다는 듯, 옷이 담겨 있는 바구니를 들고 나가는 다니엘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옷을 잡아 내리고 싶어도 혹시 옷이 찢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날까 봐 할 수도 없었다.
탁,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힘이 빠진 것 같은 다리에 침대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문질렀다.
“하아…….”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한숨밖에 없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손끝으로 얼굴 전체를 문지르며 목구멍에서 내뱉어지는 한숨을 세상이 꺼져라 푹푹 내쉬었다.
‘제발…… 등장인물이 같은 방에 오지 않게 해 주세요.’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등장인물과 엮이는 것보다는 소리 소문 없이 혼자 성년식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 돈을 흥청망청 쓰고 싶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등장인물들과 만나야 한다면,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친절하고 착하게 대해 주자고 다짐하며 얼굴을 문지르던 손을 천천히 내려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일주일 정도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가구만이 있는 방 안을 차분히 둘러보았다. 방을 같이 쓸 룸메이트는 언제 올지 몰랐다.
“…….”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상태로 굳게 닫혀 있는 하얀 문을 바라보기를 몇 분, 방음이 잘되는 건지 아니면 주변에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는 건지, 고요한 적막만이 방 안을 맴돌았다.
천천히 심호흡하듯이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눈앞이 컴컴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귀는 조금 더 예민해졌다. 소리에 집중했지만 정말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똑똑—.
작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드디어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손바닥에 땀이 끈적하게 배어나는 것 같았다. 축축해진 손바닥을 무릎에 문지르며 방문을 바라보자 문이 서서히 열리며 솜사탕 같은 연한 분홍색 머리가 보였다.
“설마…….”
나지막하게 속삭이면서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메인수의 머리색이 연한 분홍색인데,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의 머리색도 연한 분홍색이었다.
그렇게 바랐는데 결국 등장인물을 넘어 주인공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는 것에 깊은 한숨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자신을 보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천천히 드러나는 얼굴은 잘생겼다기보다는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얼굴과는 딴판으로 운동을 열심히 한 것처럼 다부진 몸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사람을 훑어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한 녹안. 꼭 파스텔의 녹색 색감에 하얀색 물감을 툭 떨어트린 것처럼 색깔은 오묘했고, 몽환적인 느낌이 강했다.
저 눈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녹안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흔치는 않았지만 메인수인 데이비드가 아닐 수도 있다는 희망을 담으며 침대에서 조용히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전, 메이브예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일부러 성은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주일간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동요하지 않은 척,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내민 손끝은 가늘게 떨려 왔다.
감정을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데이비드라면 잘못하다간 자신이 죽을지도 몰랐다.
내민 손끝을 붙잡는 단단한 손은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마디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거친 손가락에 살갗이 쓸려 조금은 따가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손가락을 오므리고 남자의 손을 붙잡아 작게 흔들었다.
“데.”
남자의 이름 첫마디가 나오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을 질끈 감으며 제발 저 입에서 ‘데이비드’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제 이름은 다비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메이브.”
생각했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 나오는 것에 안도해하며 반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고 긴장감이 풀어진 얼굴로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은, 신이 자신을 불쌍해서 굽어살펴 주시는구나 생각하며 다른 손도 들어 올려 다비드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웃었다.
날카롭게 생긴 얼굴이라 웃어도 쭉 찢어진 눈매가 살짝 내려가는 것일 뿐, 그렇게 순해 보이지 않을 거라 장담한다.
“다비드 형제님, 가지고 온 옷과 물품은 이곳 바구니에 넣어 주시고 침대 위에 있는 옷으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예.”
다비드의 등 뒤에서 바구니를 들고 온 신관이 방 안 중간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다비드의 손을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천천히 떨어트리며 뒷걸음질 치자, 다비드는 잡고 있던 손을 몇 번 주무르다가 목깃 부분으로 가져갔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에 하얀색 어깨춤이 천천히 젖어 들어갔다. 툭툭, 풀어지는 단추에 옷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얀색 옷 안에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가 드러났다.
단단하고 다부진 근육이 옷 밖으로 드러났을 때, 아까 자신과는 다르게 덤덤하게 옷과 속옷을 벗어 바구니 안에 집어넣은 다비드는 침대 위에 있던 옷을 들어 올려 입었다.
‘좀 짧은데……?’
자신은 그나마 허벅지 중간까지는 입고 있는 옷이 내려왔지만, 다비드는 어깨가 조금 있어서인지, 아니면 가슴과 등 근육 때문인지는 몰라도 입고 있는 옷이 겨우 성기를 가릴 듯 짧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옷 밖으로 주요 부위가 전부 드러날 것만 같았다.
“다른 형제님이 모두 방을 안내받으면 성년식을 시작할 겁니다.”
다비드가 옷을 담은 바구니를 들어 올린 신관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메이브와 덤덤하게 신관을 지켜보는 다비드를 쳐다보았다.
“그동안은 방에서 쉬면서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낼 룸메이트와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도 괜찮겠군요.”
신관은 품 안에 바구니를 안고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고 한 걸음 밖으로 나갔다.
“성년식이 시작할 때쯤에 찾아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쿵, 소리 나게 하얀 문이 닫혔다. 밖의 소음은 다시 단절되었고 다비드와 자신의 숨소리만 적막함이 감도는 방 안에 들려왔다.
“음…….”
딱히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손을 내밀고 자기소개는 서로 끝낸 상황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도 아니었기에 이렇다 할 이야기가 오고 가지는 않았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천천히 묻는 다비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리를 굽혀 침대에 주저앉았다. 혹시 성기가 보일까 다리를 꼬고 허벅지 사이에 옷을 집어넣은 상태로 두 팔을 쭉 뻗어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신께 모든 것을 바친다는 구절이 유명한 곳에서 왔습니다.”
편하게 말하고 싶어도, 눈앞에 있는 다비드가 무뚝뚝한 어조로 딱딱한 존댓말을 하자 왜인지 자신도 그렇게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에녹.”
다비드의 입술 사이로 이제는 자신의 성이 된 이름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에녹 영지에서 오셨군요.”
소설 속에 적혀 있는 구절 중.
「에녹 영지의 입구에는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그곳에는 돌을 깎아서 쓴 ‘신께 모든 것을 바치리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메이브는 언제나 그런 비석을 노려보며 자신이 영주가 된다면 그 돌을 산산조각 내서 부숴 버리겠다고…….」
신께 보던 것을 바친다는 구절이 쓰여 있었다. 신전의 마차를 타고 오면서 그것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으나, 아마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다비드 님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하지만 저 구절을 말했다고 바로 다비드의 입에서 에녹 영지가 나온다는 것은 신기했다.
“숲이 가득한 곳에서 왔습니다.”
“……숲이 가득한 곳이요?”
“메이브 님도 제게 퀴즈를 주셨으니, 저 또한 이 정도만 알려 드리죠.”
숲이 가득한 곳, 너무 포괄적이고 광활했다. 어쩌면 근처에 숲이 있는 곳을 숲이 가득한 곳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고, 정말 영지 주변을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숲이 가득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 중간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곳에서 자신이 살던 사람이고, 이 소설 속의 세상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면 다비드의 말을 듣고 영지의 이름을 떠올릴 수도 있었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머리를 싸매고 기억을 비틀어 짜내도 숲이 가득한 곳의 영지가 어디인지, 어디에 위치했는지 단 하나의 정보도 알 수가 없었다.
“숲이 가득한 곳은…….”
단 하나, 자신이 알고 있는 숲이 가득한 곳이라면 떠오르는 지역은 실베스타. 메인수가 태어나고 자란 영지밖에 없었다.
“저는 실베스타 영지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눈앞의 침대에 차분히 앉은 다비드는 성기가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듯 다리를 살짝 벌리고 상체를 수그려 편하게 앉았다. 그러곤 허벅지에 팔뚝을 기댄 채 두 손을 맞잡은 상태로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맞나요? 다비드 님.”
실베스타 영지가 아니기를 바랐지만, 만약에 맞다 해도 메인수와 이름이 달랐다. 하지만 그마저도 거짓된 이름을 말한 것일 수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머리가 안 돌아가면 몸이 고생한다고 어른들이 말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항상 몸이 고생한 것 같았다.
“글쎄요.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살짝 웃고 있는 얼굴이 조금은 밉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얼굴은 예쁘면서도 잘생겨서 그런지 부루퉁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한 번도 얼굴만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지금 보니까 자신은 아무래도 얼굴만 잘생기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두루뭉술하네요.”
말하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왜 말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멍청하게 에녹 영지에서 왔다고 한 말에 긍정한 자신이 바보 같은 거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눈을 천천히 감은 상태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속옷 한 장도 입지 않고 있는 것이 어색했고, 시선 아래 드러난 남자의 성기가 아직 발기 전인데도 생각보다 크다는 것이 신기했다.
메이브의 성기도 그렇게 작은 크기는 아니었는데, 막상 발기하고 나서의 성기를 생각했을 때 다비드의 성기가 조금 더 클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 잘 지내보죠. 다비드 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옷을 손바닥으로 툭툭 털어 내며 살짝 웃었다. 어색한 것보다는 속 편하게 친해지자는 생각을 했을 때쯤, 굳게 닫혀 있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서서히 열렸다.
“성년식이 곧 시작할 것이니, 이제 강당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다니엘이 웃는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와 메이브와 다비드를 가볍게 쳐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신관은 옷을 전부 차려입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천은 바닥을 쓸고 지나갔고, 옷 아래 발끝은 감춰져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목 끝까지 작은 살결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신관과 다르게 성년식을 치르는 자신과 다른 사람은 속옷을 착용할 수 없었고, 성기도 거의 드러내다시피 해야 했으며, 단 한 장의 하얀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전부인 것을 비교했을 때 차이가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