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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린 외전 (25/25)

목린 외전

무시무시한 귀혈족이 오고 있다.

초족 족장의 딸 목린은 소중한 고향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어 이른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창 연습을 했다. 하나 터무니없이 형편없는 제 실력 탓에 오히려 절망하고 말았다.

목린은 훌쩍이면서 다시 평지로 내려갔다.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감도 오지 않았다. 지금쯤이라면 그자들이 도착했을지도 몰라. 두려운 미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걸으면서 손등으로 눈가를 계속 문지르던 목린은 길 위에 툭 튀어나온 돌을 보지 못하였다. 결과는 뻔했다. 발이 걸리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목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황한 그녀가 짧게 비명을 지르려던 차였다.

한데 그때, 든든한 팔이 목린을 옆에서 안았다.

“괜찮아? 안 다쳤어?”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목린은 화들짝 놀라 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키가 큰 사내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 * *

“이쪽은 저희 마을에서 가장 큰 우물입니다…….”

족장인 월진을 비롯한 귀혈족 사람들에게 마을을 소개하는 익문의 손짓과 눈빛에는 힘이 없었다. 반면에 귀혈족 사람들은 단월도가 가진 다양한 특징에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그들은 익문이 가리킨 우물로 한꺼번에 웃으면서 달려들었다. 물맛이 좋다느니, 깨끗하다느니, 쉬지 않고 날아오는 칭찬에 익문은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목린이……. 어디 있니…….’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오늘 아침에 실종된 딸 생각뿐이었다. 울면서 집 밖으로 뛰쳐나간 목린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맏이인 아들 목현이 뒤늦게 쫓아갔지만 헛수고일 뿐이었다.

저들이 웃는 얼굴을 하고 혹시 우리 목린이를 납치해 숨겨 둔 게 아닐까라는 의심 탓에, 익문은 귀혈족의 칭찬에도 제대로 응하지 못했다. 물론 굳이 목린의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저렇게 무섭게 생긴 자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지만.

'아무리 늦어도 지금쯤이면 밥 먹는다고 돌아오고도 남을 아이거늘…….'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익문이 초조하게 몸을 떨고 있을 때, 갑자기 귀혈족 사람들이 같은 방향을 올려다보며 일제히 고함을 내질렀다. 집에 숨어 있던 나머지 초족 사람들 또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격렬한 함성이었다.

나무를 타고 어떤 이가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를 보던 익문은 기절할 뻔했다. 그가 나머지 한쪽 팔에 끼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월진이 외쳤다.

“언영아!”

“안녕하세요. 숲에서 여자아이가 혼자 울고 있길래 데려왔습니다.”

소녀를 안아 들고 착지한 사내는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씩씩하게 말했다.

“목린아!”

익문은 두 팔을 벌리며 달려갔다. 부끄럽게 생판 남들 앞에서 눈물이 솟구쳐 나왔으나, 딸의 귀환 앞에서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목린은 청년의 목에 적극적으로 두 팔을 단단히 두른 채 안겨 있었다. 혹시라도 땅에 곤두박질칠까 두려워 매달렸다고 하기엔, 이미 남자의 두 발은 안전하게 땅에 닿은 지 오래였다. 더 이상 그렇게 달라붙을 필요가 없었다.

목린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언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언영은 목린의 허벅지를 받친 팔의 위치를 고친 뒤에, 익문에게 밝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 마을의 족장님이십니까?”

“그…… 그렇소만.”

익문이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고 답했다. 어린 딸을 안고 있는 젊은 사내라니, 아무리 딸을 찾아 준 게 고맙다 해도 절로 긴장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 소저의 부친 되시는 분이겠군요! 제대로 잘 찾아온 것 같아, 그렇지?”

청년은 목린을 향해 가볍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목린의 통통한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목린이 언영이라고 불린 이에게서 동그란 눈을 떼지 못하는 동안, 그는 익문을 마주 보며 대화를 마저 이었다.

“숲에서 혼자 울고 있는 소저를 발견하여 걱정되어 주시하던 와중에, 어쩌다 보니 구하게 되었습니다. 큰 탈은 없는 것으로 보이나 적어도 오늘 하루는 푹 쉬게 해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고맙…… 고맙습니다.”

익문은 목린을 향해 어서 내려오라는 듯 팔을 벌리며 답했다. 목린은 언영과 아버지를 번갈아 보다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서둘러 목린을 제 쪽으로 끌어온 익문은 어디 다친 데는 없나 그녀를 살피기 시작했다.

“목린아, 이 아비가 걱정 많이 했다. 내가 말을 잘못했어. 다 내 잘못이다. 미안하다!”

목린은 익문을 보긴커녕 계속 고개를 돌려 멍한 얼굴로 언영만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익문은 더욱 감정이 끓어오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안 그래도 귀혈족이 침략 왔는데 너는 보이지도 않고……!”

하나 귀혈족은 익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귀가 밝았다.

“침략이라니?”

뒤에서 들리는 말에 익문의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익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근처에 있던 우람한 귀혈족 사람들이 일제히 같은 표정과 자세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운데에 있던 월진의 눈썹이 기묘하게 꺾였다.

“우리가 침략을 왔다고……?”

* * *

“하하하하하하하하!”

얼마 후, 월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온 섬을 누볐다. 어찌나 즐겁게 웃는지 눈물도 찔끔 새어 나왔다. 검지로 눈물을 닦아 낸 그녀가 즐겁게 말했다.

“참략이라고? 그런 오해를 사다니. 내 평생 처음이군!”

“그렇게 웃을 일은 아니……오. 우리는 퍽 진지했……수다.”

익문은 어색하게 말을 놓으며 답했다. 월진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미안하네. 지난 한 달간 얼마나 마음 졸이며 살았겠는가. 그래도 다행이지. 이렇게 바로 오해가 풀리다니 말이야! 이렇게 잘못 시작된 관계를 수년간 이어 나간다고 생각해 보게.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월진이 다시 한번 웃자 이번에는 뒤에 있던 나머지 귀혈족도 함께했다. 월진이 말하길 ‘따뜻한 넓은 품’을 가진 그들의 가슴팍이 신나게 흔들렸다.

“하하하! 물론,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이렇게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거지만.”

“월진 족장.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드네.”

익문이 털어놓았다. 사실이었다. 물론 저들의 거침없는 움직임이 부담스럽긴 하였으나…… 조금 전 깊은 대화에서 새로이 알게 된 귀혈족은 생각보다 꽤 괜찮은 이들이었다. 솔직히 두 부족이 모두 소극적인 성향을 가졌더라면 이렇게 빨리 원활한 교류를 나누진 못했을 터니 다행이라 봐야 했다. 무엇보다 뒤늦게 알고 보니 족장 월진의 아들이었던 언영은 정말로 목린을 친절히 구해 준 것이었다. 그 사실도 호감에 이바지했다.

그래도 아직은 겁이 남은 익문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다만 우리는 이런 교류가 아주 낯설다네. 우리가 너무 어색하게 행동한다 싶어도 이해해 주게.”

“하하하하, 당연하지!”

호탕하게 외친 월진이 손을 펼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 두 사람을 보게나. 벌써 저렇게 달라붙어 있지 않는가. 우리 두 부족도 저렇게 금방 친밀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네.”

저 두 사람? 고개를 돌린 익문은 의문을 띄우기도 전에 경악했다.

“목린아……! 지금 대체……!”

익문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우다다다 목린의 앞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목전에서 벌어지는 정갈하지 못한 행위에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서 내려오렴!”

목린은 그새 또 언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우 얌전히 안겨 있었다. 언영이 목린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며 싱긋 웃었다.

“하하하하. 족장님,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공자께서 괜찮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 목린아!”

“다리가 매우 아프다고 하던걸요.”

“다리……?”

익문은 말끝을 흐렸다. 왜냐하면 분명 조금 전에, 숲에서 우느라 배가 많이 고팠는지 뽈뽈뽈 달려가 맛난 주전부리를 얼른 먹으러 가는 목린을 봤던 탓이다.

익문이 눈을 가늘게 뜨는 동안, 목린은 시뻘겋게 익어 버린 얼굴로 뻔뻔히 아버지를 못 본 척했다.

귀혈족은 이틀 정도 더 섬에서 시간을 보내고 떠났다. 초족의 우려와는 달리 귀혈족은 조금 지나치게 다정할 뿐, 정이 많고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좋은 이들이었다. 이별의 시간이 왔을 때, 초족이 품고 있던 그들을 향한 경계심은 거의 허물어진 지 오래였다.

작별 인사를 하는 사람들의 표정에 한결같은 아쉬움이 누워 있었다. 격렬하게 서로를 얼싸안고, 함께 어깨를 치면서 다음을 기약했다.

그중 가장 가운데에 있던 언영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햇살 아래 그의 환한 미소가 찬란하게 빛났다. 목현의 옆에 얌전히 서 있던 목린은 그 웃음을 천천히 감상했다. 눈부신 아름다움에 그녀의 마음은 설렘으로 울렁거렸다.

* * *

익문은 끙끙 앓고 있는 딸을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강하게 잘만 돌아다니던 모습이 마치 허상이었던 것처럼, 목린은 요즘 일어서기조차 힘들어했다.

그래, 귀혈족이 방문한 이래로 목린은 이렇게 변했다. 얼굴을 자주 붉히고, 틈만 나면 울상을 지었으며, 심할 경우 지금처럼 발열 탓에 앓아눕기까지 했다. 결국 목현이 목린을 업고 옆집에 사는 의원님 댁에 찾아갔다.

“어, 어떤가?”

“흐음…….”

목린의 맥을 짚은 의원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초조해진 익문은 다급하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옆에 있던 목현이 그의 어깨를 잡으며 튀어 오르려는 것을 막아 주었다.

“우리 목린이, 어디 크게 아픈 건 아니지?”

“…….”

“말 좀 해 보게!”

“아버지, 진정하세요.”

목현이 끼어들어 말렸으나, 그도 속이 타들어 가기는 매한가지였다.

목린의 증세는 누가 봐도 가볍지 않았다. 집에 있을 때는 힘없이 누워 있는 게 일상이었고, 가끔은 심지어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 익문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제발 좀 말해 달라고 청해도 소녀는 꾸준히 침묵을 지켰다. 두 부자는 날이 갈수록 애가 탔다.

병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오늘 아침, 목린은 결국 소리 내 꺼이꺼이 울었다. 더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목현과 익문은 결국 의원에게 이전보다 훨씬 정밀한 검사를 부탁했다.

의원은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익문, 놀라지 말게. 목린이의 병명은…….”

목현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익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이듯 의원의 두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마침내 노인의 입술이 벌어졌다.

“상사병이네.”

“사, 상사병……?!”

익문은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은 사람처럼 뒷걸음질 쳤다. 옆에 있던 목현이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잡아 주었다. 익문은 의지하듯 아들의 손을 쥐고 더듬거렸다.

“상사병이라니.”

무슨 큰 지병이 아니라고 하니까 다행이기는 하다만.

익문이 창백한 얼굴로 뻐끔거렸다.

“내가 상사병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는가? 그 말뜻은 우리 목린이가 누군가를…….”

“언영 님…….”

그리고 때마침 목린이 혼미한 정신 속에서 중얼거렸다.

“언영 님, 보고 싶어요. 흑흑흑흑…….”

불처럼 뜨거워진 목린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 남자는 멍한 표정과 함께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 * *

“목현아. 목린이는 오늘도 바닷가에 있느냐?”

“예, 아버지…….”

“하아.”

익문은 벽에 등을 천천히 기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비로서 목린이가 시집갈 날을 종종 생각해 보곤 했었다. 하지만 귀한 딸이 혼례식 날 함께 맞절할 이로 다른 부족 사람을 상상해 본 적은 꿈에서도 없었다. 아마 옆집 아들 덕복이겠거니 속으로 늘 확신했던 차다. 한데…….

‘그 사내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한다니.’

귀혈족은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건 부족 전체를 통틀어서 하는 얘기지, 개개인이 어떤 모습을 갖고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물론 목린을 구해 준 전적이 있기에 그 커다란 청년에게 약간의 호감은 있다. 하나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 목린이가 그렇게 좋아한다면.

한편 갈매기 몇 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흐린 오후. 바다 앞에서는 한 소녀가 울적한 표정으로 외로이 앉아 있었다.

“언영 님 보고 싶어……. 흑흑흑…….”

어제도, 그저께도, 지난주도 똑같았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바다만 그저 멀거니 바라보며 하루를 때웠다.

‘목린아. 그 사내가 그렇게 좋더냐?’

‘네. 그분이 도와주신 그 순간에 반했어요……. 덩치가 크신 걸 보면 밥도 잘 먹고 잘하실 것 같아요.’

얼마 전 익문이 목린을 조용히 불러 물었다. 더는 피할 길이 없다고 확신한 목린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자백했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익문이 다시 입술을 뗐다. 그의 목소리에 딸을 위한 뜨거운 결심이 사무쳤다.

‘목린아. 그 사내가 그렇게 마음에 든다면…… 이 아비가 어떻게든 힘써 보마.’

‘힘써 본다는 그 말씀인즉슨…… 혹시 저와 언영 님이…… 호, 호 혼…… 이, 이…… 인을……!’

‘아이고, 목린아!’

익문은 옆으로 기절하려는 목린을 간신히 안아 들었다.

아버지께서 지지해 주신다면 그만큼 든든한 일도 없다. 하나 아버지께서는 신이 아니었다. 목린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깊이 절감하고 있었다.

귀혈족 사람들이 까먹고 알려 주지 않고 떠난 건지, 아니면 애초에 처음부터 생각이 없었는지는 몰라도 초족 사람들에겐 귀혈족과 닿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식을 돕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들이 주변에 없다면 소용없는 것. 지금으로선 귀혈족이 먼저 연락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목린에게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이었다.

‘지금 뭐 하고 계실까? 그쪽에 있는 어여쁜 미인들이랑 시간을 보내고 계실지도 몰라. 그러다가 눈이 맞으면 어쩌지? 아니, 이미 정인이 계실지도 몰라.’

그럴 힘만 된다면 매일매일 귀혈족이 사는 육지로 헤엄쳐 가고 싶었다.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언영이 살아가고 있을, 눈에 보이지 않는 먼 세상이 그토록 간절했다. 말 한마디 섞지 않아도 좋으니, 저만치에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목린아!”

그때 뒤에서 목린의 친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목린아, 우리랑 놀자!”

“또 바다 보는 거야? 춥지 않아?”

“그 사람이 그렇게 좋은 거야?”

“으응…….”

목린이 고개를 수그리며 수줍게 말했다.

그날, 넘어질 뻔한 몸을 일으켜 주던 그 다정다감한 손짓과 표정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눈부신 햇살이 그의 미소를 보듬던 그때, 목린은 정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번쩍 들어 올려 안아 줬을 때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어어?”

또다시 회상에 잠겨 있던 목린은 친구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바다에서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 * *

거의 석 달 만이었다. 바다 위에 서서히 모습을 키우는 귀혈족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목린은 제일 앞줄에서 떨리는 마음을 붙잡았다.

“목린아, 힘내라!”

“우리가 도와줄게.”

“너무 떨지 마, 잘 될 거야.”

목린의 뜨거운 상사병은 이미 섬 전체에 퍼진 지 오래였다. 마을의 어른들과 친구들이 주변에서 그녀에게 응원의 한마디를 던졌다.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 주고 힘찬 목소리로 격려했다.

배가 육지에 닿았다.

“하하하하하! 익문!”

월진이 한쪽 팔을 들며 맨 앞에서 인사했고, 후면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뒤따라 크게 웃었다. 그들은 머지않아 선체 밖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단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목린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혹시 이번에는 함께 오시지 않은 걸까. 실망감이 고개를 들기 직전, 목린은 다행히 그를 발견했다. 눈이 확장되고 입이 절로 벌어졌다.

‘저기 계신다!’

어쩜 그저 걷는 모습도 저렇게 멋지실까.

언영은 여느 때처럼 가볍게, 바보 같지만 목린의 눈엔 마냥 멋있기만 한 미소를 입에 띠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와 함께 나란히 발맞추어 걸어오고 있는 이들의 얼굴은 목린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언영에게서만 후광이 나는 듯했다.

“목린아, 진정해!”

옆에서 친구 중 하나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목린의 작은 어깨를 안아 주었다. 그 모습이 언영의 관심을 끌었다.

“어, 안녕!”

언영은 즉시 걸음을 멈추더니 한쪽 팔을 높게 뻗고 흔들었다. 목린은 물론이고, 그녀의 주변에 있던 이들도 일제히 움찔거렸다.

언영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대열에서 벗어났다. 환한 미소를 보이며 목린의 앞으로 신나게 달려왔다. 그리고 검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의 표정에 기대가 만발했다.

“오랜만이야! 그때 그 애 맞지? 지금은 다 나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나 기억해? 기억하지?”

“저, 저, 저는…… 그게…….”

목린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더듬거렸다. 언영이 싱긋 웃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였지?”

“어, 저…… 저는…… 저는…….”

언영의 웃는 얼굴과 오로지 그녀를 향하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목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실망할 겨를도 없었다.

“저는……!”

얼굴이 시뻘게진 목린은 통성명은 물론이고 숨쉬기조차 힘들어했다. 더듬거리며 떠는 목린을 지켜보던 친구들이 결국 도와주러 달려왔다.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지려는 목린을 끌어안고 언영을 향해 대신 외쳐 주었다.

“백목린이에요! 백목린!”

“목린이에요!”

“기억해 주세요! 꼭이요!”

목린은 친구들의 품에 안겨서도 전혀 진정하지 못했다. 쿵쿵 날뛰는 심장을 안정시키느라 두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허덕거렸다. 안쓰러운 모습 탓에 자리를 못 떠난 언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목린이는 괜찮은 거야?”

“네, 네!”

“그럼요!”

“많이 허약한가 보구나. 정 힘들면 내가 부축을 도와줄 수도 있어. 필요하면 얘기해!”

언영이 당장이라도 나서겠다는 듯 두 팔을 넓게 벌리며 다가왔다. 그러나 그의 넓은 가슴을 본 목린의 정신은 더욱 혼미해질 뿐이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린 목린의 팔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목린아!”

당황한 언영이 외쳤다.

우선 목린의 심박을 진정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친구들은 목린을 들어 안은 후 언영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을 닦아 주고, 물을 먹였다. 그러자 다행히 목린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차차 눈동자를 움직이며 주변 친구들을 분간하고, 말을 할 수 있는 정도까지 왔다.

"고마워, 얘들아. 너희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몰라."

목린이 물 잔을 두 손으로 얌전히 잡고 말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언영을 이대로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또 언제 섬으로 찾아올지 누가 알겠는가. 근처에 있을 때 최대한 많이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아 두어야 했다. 게다가 정말로 그와 혼인이라도 하게 된다면(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목린은 또 숨을 헐떡였다.) 그의 얼굴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목린은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터로 다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연을 알고 있는 초족 사람들이 수척해진 목린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언영 또한 꽤 멀리서부터 목린을 눈에 담았다. 목린은 얼굴이 창백한 것이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원래 몸이 많이 허약한 편인가? 괜찮으냐고 물어보고자 언영이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다른 청년이 먼저였다. 방금 막 꺾은 듯한 꽃을 들고 있던 한 사내가 목린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목린아. 네가 좋아하는 꽃이야.”

서툴게 말하는 그의 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덕복 오라버니! 정말 고마워요!”

순식간에 생기를 되찾은 목린이 환하게 답했다. 덕복은 정말 꽃 중에서도 목린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꺾어 왔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언영은 앞으로 나아가려던 몸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크게 아픈 애는 아닌 것 같은데.’

괜한 참견이 아닐까 싶어 언영이 목린 앞으로 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목린이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다.

“……!”

목린은 얼어붙었다. 손에 쥔 꽃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마찬가지로 화들짝 놀란 언영이 얼른 꽃을 주워 주려고 몸을 움직이자 목린은 어깨를 들썩이며 움찔거렸다. 그녀는 언영이 다가오기 전에 얼른 꽃을 다시 줍고 반대 방향으로 쌩 달려가 버렸다. 그대로 익문의 뒤에 숨어 버린 목린은 그 상태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어 언영을 살폈다. 언영에겐 제 모습이 보이지 않으리라 믿는 것 같았다.

언영은 어색하게 물러섰다.

무슨 상황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를 무서워하나 봐.’

언영은 난감해졌다. 귀혈족은 상대가 클수록 더 넓은 품을 가졌다 하여 더 친숙히 여겼다. 또한 언영은 친근한 성격으로 유명했기에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조차도 그를 좋아했다.

‘보아하니 다른 사람들한텐 안 저러고 나만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보통의 귀혈족 사람이 저런다면야 간단하다. 왜 무서워하냐고, 어색함을 풀어 보고자 함께 서로에게 주먹질이나 하지 않겠냐고 정답게 물었을 터이나, 숨도 쉬기 어려워하는 조그만 여자애랑 그러긴 쉽지 않았다.

“공자는 훤칠하고 인물도 좋으니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겠군.”

잠시 뒤, 익문이 언영에게 다가왔다. 친밀한 인사로 시작했지만 물론 안부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이 말을 발판으로 목린과 그를 이어 주고자 함이었다. 긴장한 익문의 목덜미에는 벌써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예?”

주변에서 그 말을 들은 언영의 친우들은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일제히 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등을 때리고 배를 잡고 굴렀다.

익문은 대체 그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그러다가 가운데에서 멋쩍은 얼굴로 목을 긁고 있는 언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언영이 부끄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젠가 마음이 가는 여인을 만나 아이도 많이 낳고, 함께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아직 상대를 찾진 못했습니다.”

확실히 여자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지, 으레 그 또래 사내들이 그러듯 예쁘고 고운 새색시를 상상하며 언영은 얼굴을 살짝 붉히고 있었다. 익문의 눈엔 그마저도 희망이었다. 아비로서의 감정을 빼고 보아도 목린은 아주 괜찮은 신붓감임이 틀림없었다. 예쁘지, 심성도 곱지, 밥도 잘 먹지.

“그렇군. 어쩌면…… 어쩌면 그 여인이 우리 섬에 있을지도 모르지. 허허허.”

익문이 어색하게 말했다. 그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언영이 적당히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 공자가 찾는 여인의 특징이라도 있는가? 우리가 도와줄 수도 있네. 뭐, 이를테면…… 우리 목린이와 같이…….”

멀리서 몰래 경청하고 있던 목린의 귀가 최고로 예민해지는 순간이었다.

“음.”

언영은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기실 다른 부족 족장들과도 이런 얘기를 나눈 적도 한두 번이 아니라서, 언영은 대충 이 대화의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로 하는 답도 같았다. 적당히 웃으면서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말을 내놓는 것이다.

예외는 딱 한 번이었다. 금족의 족장이 물었을 때 ‘아, 물론 혜운 누님은 아름다우시지요!’라며 그래도 약간은 긍정에 가까운 답을 한 적이 있었다. 정말 혜운과의 혼인을 고려해 본 게 아니라, 절세미인으로 유명한 혜운이 예쁘다는 생각을 밖으로 꺼낸 것뿐이었다. 혜운에게 마음은 없어도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은 있으니 말이다.

다만 그것을 엿들은 혜운이 격노하며 ‘난 내 아이가 주언영처럼 멍청하길 원하진 않아!’ 하며 언영에게 주먹을 쉬지 않고 휘둘렀고, 이후로 언영은 누가 혼인 얘기를 꺼내면 절대 여인을 칭찬하지 않았다.

하나 이번에도 평소와 같이 응하기에는 걸리는 것이 몇 가지가 있었다.

이를테면 저기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듯한 목린이라든가…….

언영은 목린에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미안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절대 목린을 겁먹게 할 의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눈앞에만 있어도 벌벌 떠는 목린인데, 만일 혼인 얘기까지 들린다면 저 조그만 애가 얼마나 무서워할지 눈에 선했다.

단순히 모호한 반응으로는 목린을 완전히 안심시킬 수 없을 터. 하여 언영은 평소보다 더 냉정하게 내뱉었다.

“마음은 정말 고맙게 받겠습니다, 족장님. 하나 족장님의 여식은 제게 그저 너무 어리게 보일 뿐입니다.”

그를 무서워하는 목린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러면 안도하겠지. 언영은 뒤돌고 있는 목린의 등을 보며 뿌듯하게 생각했다.

* * *

몇 달 뒤.

처음 듣는 신기한 이야기에 초족 사람들의 귀가 쫑긋 섰다.

다른 부족과 쉽게 어울릴 길이 없는 초족이니, 귀혈족이 말하는 부족 연합 대회는 그 정의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나 귀혈족으로부터 열정적인 설명을 들은 이후로, 모두의 눈이 흥미로움으로 반짝였다.

재밌을 것 같다, 우리도 가 보고 싶다!

하나 가 보고 싶은 것과 막상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 주저하려니, 이를 눈치챈 귀혈족 사람들이 함께하자고, 잘 도와주겠다고 하며 원하는 이들은 망설이지 말고 이번에 따라오라고 제안했다. 쩔쩔매던 초족 사람들은 귀혈족의 적극적인 설득에 하나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언영의 시선이 구석에 가만히 서 있는 목린에게 향했다. 늘 눈에 띄게 겁먹고 있으니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목린아, 너는 관심 없어?”

“네?”

언영이 먼저 말을 걸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목린이 허둥거렸다.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언영이 혼인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날만 생각하면 목린은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느낌이었다.

원래도 자신이 없었는데, 실낱같던 희망마저 산산이 조각난 그날 이후로 목린은 더욱더 그의 앞에 서기 두려워했다. 그를 더 좋아하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웠다. 끝이 절벽임이 보이는 그 길을 더 가고 싶지 않았다. 하나 사람 마음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리 없었다.

가장 조용한 곳에 숨어 있었는데 왜 굳이 나를 지목하신 걸까? 목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저는…….”

“괜찮아. 내가 낯설지 않게 많이 도와줄게.”

“저, 저는! 저는……!”

‘네, 좋아요!’라고 목린도 속으로는 신나게 외쳤다. 마음만은 이미 춤을 추고 있었다. 하나 이를 어쩌랴. 몇 달이 지나도 그의 앞에선 제대로 된 문장 하나도 완성하지 못했다.

목린이 헐떡이며 계속 속삭였다. 커다란 눈에 공포가 물결쳤다.

“저는……!”

“아, 아니야! 싫으면 오지 않아도 돼. 괜찮아! 거절해도 돼!”

언영은 제가 실수했다고 생각하여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목린이 속으로 외쳤다. 아니에요! 전 좋아요!

“전……!”

하나 앞서 말한 대로 언영이 정말 옆에 늘 달라붙어 도와주는 상상을 하게 되니 도저히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란히 단둘이 걷는 상상은 이어서 손을 잡는 단계까지 올라가고, 마침내 늦은 밤 이슥한 곳에서 입술끼리만 살짝 서로 부딪치는 상상까지 도달했을 때(목린이 머릿속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야한 상상이었다.) 목린의 시야가 흐려졌다.

“아아아……!”

“목린아!”

기절한 목린은 언영의 등에 업혀 의원 댁에 실려 갔다.

의식이 없을 때라도 언영의 곁에 바짝 달라붙었으니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 만일 며칠 뒤 깨어난 목린의 상태가 양호했다면 그 사실에 조금이나마 기뻐했을지도 몰랐다. 하나 대회 일정에 맞추려면 얼른 떠나야 하기 때문에, 그녀가 기절한 사이 언영을 비롯한 귀혈족과 초족 몇 명은 이미 배를 타고 떠나 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목린은 이후 며칠간 극심한 우울함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 *

수년이 흘렀다.

그날도 시작은 순탄했다.

귀혈족의 배가 단월도에 정박했고, 초족 사람들이 멀리 사는 이웃을 반기러 밖으로 달려 나왔다.

언영은 섬사람들의 얼굴이 분간되기도 전부터 바깥으로 나와 주변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처음 단월도에 발을 디뎠을 때와 비교하면 그는 많이 변해 있었다. 어느새 언영은 귀혈족 가운데서도 가장 장신의 사내가 되어 있었고, 얼굴 또한 소년인지 청년인지 애매한 모습에서 온전한 남자로 성장했다.

다가오는 이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훑듯이 살피는 데에 온 힘을 쏟고 있던 언영은, 뒤에서 들려오는 친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누구 찾아?”

현오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언영이 재빨리 말했다. 당황스러움을 얼른 속으로 삼켰다.

‘이거 큰일 났네.’

언제부턴가 단월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목린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 하나 몸은 이성과 달리 움직였다.

지난 수년간 언영은 목린을 배려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아무래도 목린은 그에 대해 큰 착각을 가진 듯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애써 목린에게 다정한 모습, 친근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늘 애썼는데 이는 오히려 역효과만 냈다.

하여 언영은 방향을 바꾸었다. 정 필요할 때가 아닌 이상 목린이 있는 곳을 절대 쳐다보지 않았고, 말도 걸지 않았다. 목린을 없는 사람 대하듯 했다. 보아하니 목린의 여린 마음에는 이 방법이 더 나은 듯싶었다.

하나 없는 사람인 양 대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을 의식한다는 의미였다. 그리하여 이 섬에 발을 내딛는 순간마다 언영의 모든 오감은 한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목린에게 늘 집중했다. 심지어 섬이 아닌 육지에서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낼 때도 목린 생각에 푹 빠질 때가 있었다.

언영이 목린을 배려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아무래도 익문과의 대화였다. 처음에는 은근슬쩍 물어오던 익문은, 갈수록 조바심이 나는지 대놓고 우리 딸 어떻겠냐고 물어오기 시작했다. 언영은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목린이가 제 곁에 있을 때 모습을 보시고서도 그런 말씀이 나오시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애써 속을 삭이며 절대 생각 없다고 늘 완강히 부인했다.

‘나보다 눈치가 없으셔서야…….’

그런데 목린이는 정말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언영은 더욱더 주변을 열심히 살폈다.

* * *

“됐다.”

마지막으로 목린의 입술에 손가락으로 살살 연지를 덧발라 주며, 친구가 물러섰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여인들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쏟아져 나왔다.

“목린이 정말 예쁘다…….”

“내가 사내였다면 바로 청혼했을 거 같아.”

“눈을 못 뗄 것 같아.”

“정말……?”

목린이 수줍게 물어보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사실 다른 사내의 눈길은 목린에게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목린이 원하는 건 오로지 한 사람이었다.

목린은 본래 분칠을 잘 할 줄 몰랐지만, 원하는 사내 앞에서는 예뻐 보이고픈 욕심이 자꾸만 피어올랐다. 설령 그가 마음이 없더라도. 쳐다봐 주지 않더라도. 말 한 마디 못 건다고 하더라도. 한 공간에서 그가 그녀의 존재만 느껴 준다면야 더 바랄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제 언영은 예전처럼 말을 걸어 주지도 않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과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갖 용기를 쥐어짜 그와 대화를 이어 나갔을 텐데……. 뒤늦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그의 관심을 받고자 하는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목린은 허탈해지기도 했다. 그가 아버지 앞에서 혼인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으로 구는지 알면서도…….

목린은 천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공터로 나아갔다.

“…….”

그들이 목린의 존재를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 있던 사내들이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목린을 돌아보았다.

언영은 목린을 등지고 있었기에 비교적 반응이 늦은 축에 속했다. 옆에 있던 현오가 언영의 어깨를 검지로 톡톡 쳤다.

"저분 족장님 따님 아니셔? 그, 예전에 네가 구해 줬던 그분 말이야."

항상 무의식 속에서 목린을 좇고 있는 언영은 현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몸을 돌렸다. 이어서 그의 입이 바보같이 쩌억 벌어졌다. 언영의 턱 또한 자연히 힘을 잃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목린을 눈으로 훑던 현오는 ‘괜찮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다시 무심코 언영을 쳐다보고, 그의 괴상한 표정에 기겁하여 뒤로 물러섰다.

“으앗.”

당황한 것도 잠시, 현오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반했구나?”

현오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언영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뭐, 뭐?”

“네가 언제 여자를 그런 얼굴로 쳐다봤다고 그래?”

언영이 시뻘건 얼굴로 내뱉었다.

“웃기지 마. 입 닥쳐.”

“쑥스러워하지 마. 이 형님이 도와주마. 저기, 목린 님!”

“입 닥치라고!”

“으아아악!”

언영은 한 팔을 사용하여 현오를 저 멀리 바다로 던져 버렸다.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현오에겐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으며, 언영은 다시 목린이 있는 방향을 몰래 힐끔 살폈다.

‘다행이야. 못 들었어.’

감정이 너무 잘 보이는 목린의 저 얼굴이, ‘반했구나?’ 같은 말을 듣고도 저리 변화 없이 차분할 리 없었다. 이전처럼 또 벌벌 떨었겠지. 그러기는커녕 이쪽은 없는 사람 대하듯 걷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저렇게 예쁘게 꾸미고선 이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언영은 기분이 팍 상했다. 이 속상함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앞에 보이는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 * *

그날 늦은 밤, 언영은 배에 있는 자신의 처소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안 돼. 날 무서워하는 애랑…….’

그 조그만 애는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놀라서 까무러칠 것이리라.

그것을 알면서도 언영은 성기를 만지는 손을 멈추지 못했다. 몰래 힐끔힐끔 쳐다본 어여쁜 얼굴을 계속 떠올렸다. 숨이 거칠어지고 이성이 흐릿해졌다. 목린을 아래에 깔고 눕는 것을 상상했다. 벌벌 떠는 얼굴을 핥아 주고 다리를 잡아 벌린 다음에 안으로 처박으면, 그 커다란 눈은 더욱더 벌어질 테고…… 계속 쑤걱쑤걱 넣어 대면 뽀얀 가슴이 귀엽게 흔들릴 테다.

“아아.”

언영은 바닥에 머리를 대고 괴롭게 헐떡였다.

* * *

“목린이 어제 정말 예뻤는데…….”

목린의 친우들이 그다음 날 다시 모여 탄식했다.

애써 공들여 꾸며 주었는데 정작 언영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물론 그들의 착각이었다. 언영은 이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재빨랐다.) 어제 목린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하는 그들은 안타까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오늘도 한 번 더 꾸며 보자.”

귀혈족은 오늘 늦은 오후에 떠나기로 했으니까, 낮에 잠깐이라도…….

그러나 목린이 손을 내저으면서 시도는 무산되었다.

“아니야……. 포기할래.”

“목린아!”

목린의 벗들이 놀라 외쳤다.

하지 않겠다는 것과 포기한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말이었다. 포기하겠다는 것은…… 이제껏 노력해 왔던 세월을 다 내려놓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한 명이 서둘러 내뱉었다.

“아직 마음을 제대로 드러낸 적도 없잖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게 분명한데 드러내서 뭘 하겠어.”

목린이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몇 년째 눈이 마주치면 말도 못 하고 더듬거리기만 하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할 리 없어.”

그동안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멀리서 구경만 한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자신 있게 만든 꽃가락지를 들고 언영의 앞에 찾아간 경험도 있었다.

‘어, 어, 언영 님.’

‘응? 목린아, 무슨 일이야?’

거의 안 들릴 정도로 작게 불렀는데 그걸 또 용케 알아들은 언영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더랬다. 목린은 꽃가락지를 양손에 담아 팔을 내밀었다.

‘이거…….’

‘음?’

‘이, 이거…….’

언영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꽃가락지를 잡느라 두 사람의 손이 함께 스쳤을 때, 목린의 의식은 희미해지고 말았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마주하게 된 의원의 말은 절망적이었다.

‘이대로 목린이가 주언영에게 더 다가간다면 위험하네. 더 이상 심장에 무리가 가면 안 돼.’

그 이후로는 어제와 같이 멀리서 말도 못 걸고 주변을 배회할 뿐이었다.

당황한 목린의 친구들은 모두 한 마디씩 던졌다.

“아니야, 목린이 네가 얼마나 착하고 예쁜데.”

“그 사람은 아직 네 진가를 모르는 것뿐…….”

그러나 목린이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고, 친구들이 던지던 위로는 모두 공중에서 바스러졌다.

“이제 그만할래. 너무 힘들어.”

목린은 지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거칠게 비벼 닦았다. 하지만 아무리 닦아도 계속 흘러나왔다. 친구들이 가까이 다가와 안아 주고, 토닥여 줘도 소용없었다. 수년간 쌓아온 마음이 결국 이렇게 터졌다.

"나도 이제 날 좋아하는 사람 만날래."

“……그래, 목린아. 잘했어. 수고했어.”

“더 좋은 분을 만나게 될 거야.”

“덕복 오라버니는 어떠니? 괜찮지 않아?”

덕복 외에도 괜찮은 마을 청년 이름이 몇 번 오르내리며 대화는 끝이 났다.

오후에 있을 귀혈족과의 작별 시간에 목린은 참석하지 않을 편이 좋을 것 같다는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그들은 목린을 집으로 데려가 편하게 눕혀 주었다. 편히 낮잠을 자며 슬픔을 달래라는 뜻에서 그랬다.

목린 역시 그러려 했다.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지만. 아직 저녁이 오려면 먼 지금, 잠은 방문을 꺼렸다. 되레 아까까지는 한 적 없던 생각들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목린은 계속 몸을 뒤척였다. 좀 전에 들었던 친우의 말 중의 하나가 계속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중이었다.

‘아직 마음을 제대로 드러낸 적도 없잖아.’

그러게. 그렇게 마음고생을 했는데 그는 하나도 모른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는데……. 말하지 않으면 정말로 나중에 가서 후회할까.’

어차피 고백하나 마나 결과는 똑같을 터다. 그러니 많이 좋아했다고, 그런 설렘을 안겨 주어서 고맙다고, 잠깐의 인사만 하고 나온다면…….

‘그러면 더 후련하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목린은 조용히 다짐했다.

물론 남들이 다 보는 곳에서 고백을 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귀혈족은 오늘 오후에 떠난다. 곧 금방이다.

목린은 집에서 쫑쫑쫑 걸어 나왔다. 그리고 바다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귀혈족의 배 안으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밖에 나와 있어 내부는 매우 한산했다.

‘여기서 잠깐 인사만 하고 나와야지.’

언영의 처소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서 잠깐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배가 떠나기 직전에 얼른 자리를 뜨면 될 것이다.

목린은 심호흡을 하며 가만히 벽에 기댔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흐암…….”

지금쯤이면 올 때가 되었는데. 목린은 하품을 한 손으로 가리며 생각했다. 그 생각이 원인이 된 양, 마침 저 멀리서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목린은 예상보다 그 소음이 훨씬 크자 적잖이 당황했다.

귀혈족 사람들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중이었고, 그렇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 복도 앞에 몰릴지도 모른다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언영과 단둘이 조용한 대화는 물 건너가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왜 여기 서 있느냐고 수많은 귀혈족에게 질문을 받을 것을 상상하니 벌써 앞길이 캄캄했다.

시끄러운 무리가 통로를 돌고 돌아 목린을 마주하기 직전이었다.

‘못 하겠어!’

결국 목린은 굴복하고야 말았다.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언영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숨었다.

그토록 사모하는 이의 개인적인 공간에 들어왔는데도 내부를 감상할 틈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목린은 곧장 문에 기대어 바깥 복도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엿들었다. 어서 저 무리가 여기를 떠나야 목린 또한 이곳을 벗어나 함선에서 탈출할 수 있을 터였다.

목린의 기대는 금세 배반당했다. 시끄러운 무리는 이곳을 떠나기는커녕 되레 문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떠들기 시작했다. 목린의 얼굴은 매 순간 더더욱 창백해졌다.

이윽고 가장 최악의 순간이 도래했다. 그동안 무리 속에서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문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수백 명이 섞여 있다 한들 목린이 바로 분간할 수 있는 음성이었다.

“그러면 난 들어갈게.”

“그래, 언영아.”

목린은 황급히 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등을 틀어 가장 먼저 보이는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허둥지둥 하얀 이불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차피 지금은 아직 오후니까 벌써 그가 잠자리에 들진 않을 거라는, 그러니까 안 들키고 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계산을 바탕으로 벌인 행동이었다.

목린의 작은 발까지 아슬아슬하게 이불 속으로 숨겨진 바로 그 순간에 언영이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도 바로 들려왔다. 목린은 바깥을 훔쳐보긴커녕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밀폐된 방 안에 오로지 단둘이 함께 있었다.

목린의 심장이 난동을 피웠다. 얼굴로 열이 몰리고,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불 밖에서 언영이 걸어가는 소리가 났다. 터벅터벅. 뒤이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달각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목린의 추측이 맞는다면 입고 있던 갑옷을 탈의하는 소리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목린은 숨이 가빠졌다. 이불 속에 있는 공기만으로는 부족했다.

목린은 위험을 무릅쓰고 결국 눈만 빼꼼 내밀었다. 숨을 쉬려면, 바깥 상황을 파악해 언제, 어떻게 도망칠지 파악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눈에 들어온 광경 탓에 목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헉!”

언영은 위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목린을 등지고 있었는데, 하여 울퉁불퉁 두꺼운 근육이나 몸을 가로지르는 흉터와 같은 것들을 목린은 더 세밀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어떻게 사람의 몸이 저렇지? 목린은 속으로 비명에 가까운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어깨가 저렇게 넓을까?

게다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가 하의마저도 벗으면서, 근육으로 딱딱한 둔부며 사이를 가로지르는 골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경악한 목린의 입이 조용히 쩌억 벌어졌다.

“언영아!”

갑작스러운 외침이 방을 갈랐다.

언영은 내리던 바지를 다시 올려 입었다. 엉덩이골이 아쉽게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목소리에서 이미 예상했지만, 상대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현오였다.

“벌써 쉬려고? 오랜만에 모여서 잠깐만 한잔하자.”

“좋아.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얼른 와. 네가 빠지면 재미없으니까.”

언영과 현오는 정겹게 서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다른 목소리가 들렸던 시점에 다시 이불 속으로 얼굴을 숨겼던 목린이다. 그녀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언영이 술을 마시러 나가면, 다시 방이 빌 테니 조용히 빠져나가면 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가 길을 잃었다고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 있었던 일은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갈 수 있을 터다.

“누구야.”

그렇게 생각했기에 목린은 처음에 저 부름이 그녀를 향하는 줄도 몰랐다.

“다 알고 있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목린은 조용히 얼어붙었다. 경계심 짙은 목소리. 누구를 향한 질문인지는 굳이 고심할 필요 없으리라.

목린은 대답하는 대신 여린 몸을 떨었다.

단지 언영에게 고맙단 말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많이 우울했고, 많이 힘들었고, 많이 불안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많이 좋아하는 그 마음은 목린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 주었다. 비록 그는 꿈에도 몰랐겠지만 목린에게는 인생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잠깐이나마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 그 이상의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보면 남의 방에 숨어드는 이상한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을 게 뻔했다.

목린에게 정말 당황스러운 일은 다음 순간 벌어졌다.

언영은 무거운 몸을 휙 던져 두 팔로 이불 속 상대를 꽈악 얼싸안았다. 두 사람이 함께 굴렀다. 목린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꺄악!”

“누구냐니까.”

비록 바깥 상황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가 근육질 팔로 그녀를 휘감았음은 느낄 수 있었다. 목린의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때.

“화영이 너…….”

당연히 누이겠거니 생각한 언영은 별생각 없이 싱글싱글 웃으며 이불을 들쳤다. 암살자라고 생각하기엔 몸을 숨기는 능력이 너무나도 형편없었다. 사실 처음 방에 들어오자마자 눈치챘다. 이불 속에 숨어 있는 이는 친구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덩치가 작았다. 하여 아마 어린 누이 두 명이 같이 장난을 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간지럼이나 태워 줄 요량으로 장난스럽게 바짝 달라붙은 것이다.

하나 바로 코앞에 목린의 동그란 얼굴이 나타난 순간, 언영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몸이 지나치게 크게 응했다. 자연스레 입 또한 크게 벌어졌다. 복도에 있는 모든 이들의 귀를 찌를 고함이 밖으로 삐져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때, 목린이 얼른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입술 위에 자신의 보드라운 입술을 포갰다.

언영의 팔에 몸통이 압박된 상태에서, 고함을 제지하기 위해 목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바깥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행위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입술이 닿는 순간 두 사람 모두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버렸다.

목린은 뒤늦게 자신이 충동적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입술을 떨었다. 그 미세한 움직임이 언영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부드럽고 달다. 그의 몸이 뜨거워졌다. 사타구니로 힘이 팍 들어갔다.

목린은 움찔 놀라며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그러자 이번엔 언영이 목린을 더욱 바짝 끌어안으며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그는 목린의 입술을 더 과감하게 깨물고, 쪽쪽 빨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 안으로 그의 혀가 들어오는 동안 목린은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촉촉한 느낌에 온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 * *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목린과 언영은 따로 떨어져 앉았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둘 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만 뚫어져라 보는 중이었다.

먼저 어색하게 고개를 들고 말문을 연 건 언영이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네, 네?”

목린 또한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우릴 계속 따라올 생각이야? 너도 집에 가야 할 거 아냐.”

언영이 말했다.

다시 조용해졌다.

목린도 얼른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지금쯤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그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귀혈족에게 번거로운 일만 더 늘어나게 하는 것 같아서, 직접 제 입으로 ‘네, 맞아요. 집에 보내 주세요!’라고 뻔뻔하게 말하기 힘들었다.

목린이 아무 말도 못 하고 꾸물거렸다. 언영이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말문을 열었다.

“아니면…… 우리 마을에 좀 있다가 갈래?”

목린이 눈을 크게 떴다. 언영이 재빨리 변명했다.

“무서운 거 아니야! 너, 우리 마을에 온 적 없잖아.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마을에서 좀 놀다가 가도 괜찮다고. 우리가 섬에 새를 보내 설명할 테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언영은 말을 하다 말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하아, 그러니까…….”

자꾸만 목린의 입술로 눈이 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목린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 목린이랑. 목린이 속으로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을지 그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언영은 다시 바닥으로 눈을 고정했다.

“그리고, 네가 여기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네, 네.”

“상황이…… 네가 이 시간에 여기서 나오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굉장히 이상하게 보일 거란 말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지 언영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는 가까운 사람들한테 놀림당하는 데 퍽 익숙했다. 어차피 일종의 투덕거리는 장난 그 이상에 지나지 않으니 별 상관없었다. 문제는 목린이었다. 분명 이상한 소문이 날 텐데 목린이 그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끔찍하게 여긴다면 모를까…….

물론 목린이 왜 여기에 숨어 있었는지는 그도 이해가 가지 않긴 했다. 하나 사람들이 멋대로 지레짐작할 ‘바로 그 연유’는 아니라는 것에 오랜 노력으로 키워 낸 가슴 근육을 걸 수도 있었다.

“그, 그렇군요…….”

목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언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안다. 그렇지만 그가 저렇게 인상을 구기고 말하니 다른 의미로도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함께하는 게 이상하게 보이는구나. 그만큼 어울리지 않는구나, 뭐 이런 느낌으로.

“왜, 왜 그래! 슬퍼하지 마. 내가 조금 전에 한 말 때문에 그래? 왜?”

“저, 저는 언영 님과 한방에 있는 게…….”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얼른 고백하고 마음을 털어 버리자.

“싫지 않아요.”

목린이 언영과 눈을 맞추고, 처음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언영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져 나갔다.

* * *

기다리다 지친 현오가 저 멀리 복도에서부터 쾅쾅 걸어오며 외쳤다.

“언영아! 거기 있어? 언영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볼 거 다 본 만큼 오래 지낸 같은 사내끼리 숨길 게 뭐 있겠는가. 현오는 동의도 얻지 않고 바로 문을 열어 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아슬아슬하게 먼저 모습을 드러낸 언영 탓에 무산됐다.

급하게 나왔는지 언영의 얼굴에 다급함이 적나라하게 묻어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 표정이 왜 그래.”

같이 마시기로 한 거 아니었나. 이미 안에서 진탕 끝내고 온 사람처럼 언영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게다가 거대한 상반신엔 여전히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아 분위기가 꽤 이상야릇했다.

“땀도 꽤 나는데.”

“나…….”

언영이 볼을 빨갛게 붉히고 더듬거렸다.

“안에 누구 있어?”

혼자서 이렇게 변했을 리는 없단 생각에, 현오는 상체를 휙 기울여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방 안을 살폈다. 하얀 이불을 덮고 있는 커다란 덩어리 같은 것이 겨우 시야에 들어왔을 즈음에 언영이 몸을 크게 움직이며 내부를 모두 가렸다. 그가 살짝 어색하게 말했다.

“나…… 몸이 좀 안 좋아.”

“응, 좀 그래 보인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래.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만나자.”

현오는 바로 답했다. 아픈 애를 데려다가 앉혀 놓고 술을 퍼먹일 생각은 없었으므로.

“아, 그런데 언영아.”

“어?”

“입술 아래로 흐르는 침 좀 닦아.”

깜짝 놀란 언영이 손등으로 턱을 문질렀다. 현오는 씨익 웃으며 등을 돌렸다. 터벅터벅 그냥 별생각 없는 표정으로 복도를 떠났다.

물론 머릿속을 계속 차지하던 생각이 하나 있긴 했다.

‘분위기가 꼭…… 안에 여자라도 있었던 것 같았단 말이지.’

하지만.

‘언영이가? 여자? 무슨…….’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현오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언영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문을 닫았다. 닫자마자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귀엽게 꼬물거리는 하얀 이불 꾸러미를 향해 무섭게 달려갔다.

“아!”

언영이 절반 정도 들춰내자 수줍은 목린의 얼굴과 벌거벗은 어깨가 드러났다.

“떠, 떠난 거 맞아요?”

목린이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으나, 언영은 답을 주기는커녕 그녀 위로 자신을 던졌다.

* * *

현오가 혼자 돌아오자 다인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술잔을 팍 내려놨다.

“언영이는 어디 두고 혼자 오냐?”

“아픈가 본데.”

다인의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가만히 술을 마시고 있던 은평도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현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두 쌍의 눈을 향해 현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인이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내질렀다.

“뭐? 주언영이 아프다고? 말이나 되는 소리냐?”

“진짜야. 얼굴도 시뻘게져선……. 그렇게 정신 못 차리는 건 처음 봤어.”

* * *

얼굴이 시뻘게진 언영은 정신을 못 차리며 허리를 격렬하게 튕겼다. 종마 같은 그의 근육질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이 팽창했다.

“목린아, 나한테 시집와, 응? 내가, 평생 잘해 줄게.”

그가 헐떡거리며 계속 속삭였다.

목린의 앙상한 두 다리는 언영의 허리에 둘러진 상태였다. 두 사람 다 오롯한 나신이었다. 언영이 앞으로 허리를 휙휙 쳐올릴 때마다 목린의 부드러운 여체가 힘없이 흔들거렸다. 무슨 상황인지 아직도 정확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목린의 얼굴에 당혹감과 흥분이 함께 떠다녔다.

언영은 목린의 허리와 등을 쉬지 않고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응? 내 색시 하자.”

“아, 아아, 아앙!”

“나 무서워하지 마, 목린아. 제발…….”

다리 사이가 관통당하는 느낌에 목린은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쑤걱쑤걱 들어오는 그의 기둥은 마침내 안에 거칠게 씨를 흩뿌렸다. 목린의 심장이 날뛰었다. 너무 설렌 나머지 그녀의 의식이 사라짐과 동시에, 언영 또한 코피를 쏟아내며 아래로 무너졌다.

* * *

[아버지, 저 목린이에요.

많이 걱정하셨지요? 어쩌다 보니 귀혈족 배에 타게 되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언영 님께서 마을 구경을 시켜 주신댔어요. 실컷 놀고, 경험하고 나서 금방 돌아올게요!]

[아버지, 저 목린이에요.

예상보다 더 오래 여기 머물게 될 것 같아요. 저는 잘 지내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정말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돌아갈 때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저 목린이에요.

드디어, 일곱 달이 지난 뒤에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요. 그동안 아버지와 오라버니 생각 많이 했어요.

아버지, 제가 돌아가면서 충격적인 소식을 알려도 부디 놀라지 마세요…….]

* * *

목린에게 돌아온다는 글을 전해 받은 이후, 익문은 매일같이 틈만 나면 바다로 나왔다.

그의 딸은 어느 날 갑자기 섬에서 사라져 버렸다. 난데없이 자신이 귀혈족과 함께 떠난다며 새를 보내 통보하더니,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어기고 무려 200일이 넘는 기간을 타지에서 보내는 중이었다.

‘게다가, 충격적인 소식이라니.’

무언지 미리 말해 줄 수는 없었던 건가. 솟아오르는 의구심과 불안감 탓에 익문은 다가오는 딸의 귀환을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귀혈족이 오고 있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바다로 내달렸다. 특히나 목현과 익문은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얼른 목린이 보고 싶었다.

귀혈족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가장 앞에서 언영이 크게 웃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조그만 사람의 어깨를 감싼 채였다.

익문을 본 언영이 호탕하게 외쳤다.

“장인! 하하하하하!”

“장인……?”

익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장인이라니. 그 말은 마치…….

그러나 익문은 더는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아버지…….”

언영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작은 여인은 다름 아닌 그의 귀한 딸이었다. 물론 익문은 멀리서 귀한 여식을 못 알아볼 정도로 무심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가까이 와서야 겨우 목린임을 확인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하하하! 저희 아이입니다!”

익문의 눈이 향하는 곳을 보고 언영이 자랑스럽게 웃었다.

목린의 배가 볼록 나와 있었다. 단순히 많이 먹어서라고 하기엔 체형이 뭔가 달랐다.

“축복이 굉장히 빨리 저희 곁에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죄송해요…….”

목린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백했다.

“알려 드리기 너무 무서워서…….”

“…….”

벌어진 익문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언영과 목린, 두 사람은 배에서 내려 익문 앞으로 다가왔다. 목린은 뒤에서 술렁이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 못해 고개를 수그렸다. 반면에 너무 기뻐서 이 상황을 파악할 정신이 없는 언영은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목린이가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하하하!”

익문은 그대로 시간이 멈춘 양 얼어붙었다. 믿기지 않는 언영의 발언에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상황이 목린의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

“제가 하자고 했어요, 아버지. 언영 님은 아무 잘못 없으셔요! 진짜예요!”

“무슨 소리야, 목린아? 내가 와락 덮쳤잖아. 하하하하!”

애써 뱉은 거짓말을 언영이 다 망쳐 버리자 목린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던 목현이 갑자기 성큼성큼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는 가장 가까운 귀혈족 사람 앞으로 가더니, 귀혈족 사람이 차고 있는 칼을 겁도 없이 빼 들었다.

“장인! 형님! 하하하하! 말로만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하다가 이제 정말 가족이 되었으니, 앞으로 함께 잘해 볼…….”

“오라버니!”

“목현아!”

“와아아아!”

“싸움이다!”

귀혈족 사람들이 두 팔을 들어 환호했다.

목린(木隣)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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