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이른 새벽부터 바다에 나와 있는 단월도의 어부는 콧물을 들이켜며 억지로 잠을 이겨내는 중이었다. 계절이 바뀌며 매서워진 바람은 이에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흐음, 또 잠들 뻔했군.”
그가 낚싯대를 잡지 않은 손으로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사실 추운 바람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해 주는 것도 처음 며칠 정도였지, 인간인지라 금방 적응해 가고 있었다. 물결치는 바다에 맞춰 흔들리는 배도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집에 있는 침상에 비하면야 택도 없었지만.
‘아직 해도 뜨지 않았는데 이게 뭔 고생인지.’
바다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이 즐거워서 선택한 일이었으나, 요 근래 회의감이 자주 고개를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섬 주변 물고기는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한 마리라도 더 잡아들이겠다는 결심으로 여명이 밝아오기도 전에 출항한 지 오늘부로 몇 주째.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좌절을 맛보았는지.
‘이 일을 관두면 어떻게 살아야 한담.’
어부는 머리를 굴려 보았다.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하고 있는 이 짓만큼이나 그가 능숙한 게 없었다. 익문한테 부탁하면 잡일이라도 구해 줄까나. 집에 있는 가족 생각에 그는 가슴이 텁텁해졌다. 으슬으슬해지는 몸을 앞으로 웅크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때문에 그는 알지 못했다. 바닷속에서 검은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 * *
“아버지, 눈은 언제 오나요?”
“이제 겨울이니까 곧 있으면 볼 수 있겠지? 눈이 보고 싶으냐?”
“보고 싶어요!”
장터에 가던 목린은 어떤 부녀의 대화를 듣고 걸음을 늦췄다.
겨울이 찾아왔다.
언영이 집에 돌아왔을 때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고 정든 공간을 주고 싶었다. 하여 그를 위해 맛난 고추 부각을 준비하고, 저녁에 함께 식사할 생각에 들떠 기쁜 마음으로 재료를 구하러 거리를 나섰다.
쌀쌀해지면서 갖춰 입기 시작한 녹색의 두루마기를 움켜쥐며 목린은 두 사람을 계속 지켜보았다. 어느새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대화에 홀딱 빠져들었다.
제 허리까지 오는 딸의 손을 잡고 거니는 아비의 표정이 그리도 유쾌할 수 없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고 있는 아이 또한 비슷한 미소를 보답하고 있었다.
“…….”
목린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평평한 배를 어루만졌다.
아이를 가지는 상상을 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눈 오면 하고 싶은 게 뭐더냐?”
“눈사태 위에서 썰매 타기요!”
“역시! 자랑스럽다!”
하지만 지금처럼 벅차오른 건 처음이었다. 천천히 멀어져 가는 부녀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도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 * *
“서방님. 자고 있어요?”
“……아니.”
조금 늦게 언영의 대답이 들려왔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두 사람이 찰싹 달라붙어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춥지 않으세요?”
“아니, 괜찮아. 딱 좋아. 목린이 안고 자니까 따뜻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언영은 목린을 제대로 안고 있지 않았다. 대충 팔만 둘렀다고 봐도 좋았다.
“오히려 너는? 춥지 않아?”
그래서 언영이 화가 났나 생각했다가도, 물어오는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어서 혼란스러움만 더해졌다.
“저는…….”
망설이지 않고 괜찮다고 하려 했던 목린이 바로 직전에 머뭇거렸다.
춥지는 않지만 더 따뜻하길 바랐다. 지금보다 더 언영의 품에 깊숙이 안겨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지길 원했다. 그와 온전히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저는 좀 추워요…….”
목린은 언영의 몸에 제 몸을 비비며 그의 가슴팍에 더 파고들었다. 그가 바짝 굳는 게 느껴졌다. 만족감이 목린의 심장을 기분 좋게 어루만졌다.
목린은 더 과감하게 한 손을 그의 커다란 가슴 위에 얹었다. 부풀어 터질 것 같은 그의 가슴에 그녀의 작은 손바닥이 닿았다. 목린의 정수리 쪽에서 언영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목린은 조용히 생각했다.
‘주물러 보고 싶다.’
맨가슴은 좀 부끄럽지만, 지금처럼 겨울옷을 걸쳤을 땐 괜찮지 않을까? 언영은 마음껏 그녀의 가슴을 만지니까 그 반대라고 안 될 것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언영이 몸을 뒤로 내빼며 피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당황한 표정이 잘 보였다.
“안 돼! 목린아, 저번처럼 주무르면…….”
“저번이요?”
“아니, 그러니까.”
저번이라니, 언제 저 가슴을 주물러 봤단 말인가. 저런 걸 주물러 보고 까먹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마치 저번부터 해 왔던 척하듯이, 그렇게 익숙하게 잡으면 안 된다고.”
“네…….”
“저번에도 했다는 게 아니라.”
“네에…….”
목린도 눈치는 있었다. 싫다는 것을 돌려 말하는 게 분명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조금만 더 부탁해 볼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가슴을 만지고 싶다고 계속 우기기는 너무 부끄러웠다. 결국 말없이 물러나야만 했다.
‘서방님은 내 거 많이 만지면서…….’
목린은 잠들 때까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 * *
“하아.”
“너 요즘 표정이 왜 그래?”
참다못한 현오가 걸음을 멈추고 나란히 함께 하던 언영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못 본 척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 나흘이 지나도 언영의 우울한 표정은 하등 나아지지 않았다.
처음엔 목린과 싸워서 그런 줄 알고 현오는 일부러 관여하지 않았다. 둘이서 해결할 일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제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목린이 평소와 같이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해 준 탓에, 현오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언영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보다 살짝 작은 현오를 내려다보다가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피곤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네가 저번에 내게 말했지. 목린이가 내게 감정이 없는 줄 알았다고.”
“어,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현오는 손톱 끝으로 볼을 살살 긁었다.
“왜, 알려 줄 거라도 있어?”
“알려 줄 수 없어.”
“그러면 왜 말하는 거야?”
“…….”
돌이켜 보면, 목린이는 한 번도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언영은 그 점에 큰 불만을 품은 적은 없었다. 목린이는 수줍음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니까. 물론 목린이가 마음을 표현해 준다면야 좋아서 입이 찢어지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언영은 이런 점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사내였다.
하지만, 여태껏 사랑을 고백하지 않은 이유에 다른 게 있다면…….
언영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비볐다. 이렇게 혼자 고뇌해 봤자 해결되는 건 없었다.
“어, 목린 님 오신다.”
“뭐?”
현오의 말에 언영은 정신을 퍼뜩 차리고 앞을 보았다.
“서방님!”
정말이었다. 목린이가 귀여운 몸을 흔들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후광이 비추는 것 같아서 언영은 눈을 찡그렸다. 차마 생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황홀한 광경이었다.
“현오 님도 안녕하세요. 오늘도 뵙네요.”
“네. 오늘도 반갑습니다.”
목린은 현오와 짧은 인사를 주고받고 금방 다시 언영을 올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서방님, 저랑 산책하실래요?”
“어, 나는…….”
언영이 뻣뻣한 자세로 형편없이 더듬거렸다.
현오는 옆에서 조용히 목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누가 봐도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다.
“좋을 때다.”
다인과의 관계가 애매한 그에겐 그저 부럽기만 한 상황이었다.
“잘 다녀와라, 언영아. 뒤 일은 내게 맡기고.”
현오는 언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다른 생각에 푹 빠져 있었는지 언영은 현오의 손이 닿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목린은 팔을 뻗어 언영의 검지를 살며시 쥐고 흔들었다.
“들었어요, 서방님? 일은 현오 님께 맡기면 된대요. 어서 가요.”
“크흠. 분명 예전엔 저한테 일 맡기는 것에 대해 무척 미안해하셨던 것 같은데…….”
현오가 장난스럽게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농인지 눈치 못 챈 목린이 허둥지둥 해명했다.
“지금도 많이 미안해요! 정말이에요! 미안해요, 현오 님…….”
“되었습니다. 사람은 원래 변한다는 사실 알고 있습니다. 목린 님도 예외는 아니었군요, 흑흑흑.”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
언영이 약간 음산하게 말하자 주변이 대번에 조용해졌다. 목린과 현오 둘 다 눈만 크게 뜨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상해진 분위기를 홀로 개의치 않아 하며 언영이 말을 이었다.
“갈게. 지금 바로 가자.”
“네, 네.”
목린이 우물쭈물 답했다.
언영은 목린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떠났다. 손가락 끝이 차마 그녀의 둥근 어깨를 감지 못하고 허공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현오만이 제 자리에 남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누가 보면 내가 추파라도 던진 줄 알겠네.”
다른 이도 아닌 가장 절친한 벗의 여자를 꾀어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결코 그런 이상야릇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언영이 평소에도 질투가 심한 모습을 보였다면 이해라도 할 텐데, 그것도 아니라 더 당황스러운 것이다. 다른 남자는 몰라도 현오 그는 이런 대우를 받지 않았다.
게다가 추파를 던진다고 목린이 넘어올 사람이던가. 저 끈끈한 두 사람 사이에 과연 누가 비집고 들어간단 말인가. 무언가가 언영의 걱정을 자극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서방님, 손 주세요. 가락지 만들어 드릴게요!”
“아니야. 괜히 번거롭게…….”
“전혀 번거롭지 않아요!”
둘이 있어도 자리가 남는 커다란 바위에 함께 앉았다. 목린은 언영의 투박한 열 손가락 모두에 꽃을 달아 주느라 아주 열심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알록달록한 잎을 가득 달아 주는 그녀의 입꼬리가 시종일관 올라가 내려갈 줄을 몰랐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뜯어 살피던 언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어?”
“네!”
“뭔지 물어봐도 돼?”
“서방님도 아시는 거예요.”
언영은 눈을 굴리다가 천천히 말했다.
“어……. 은평이가 이제 이상한 춤을 그만두는 거야?”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정말 모르시겠어요?”
목린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언영은 우람한 어깨를 으쓱였다.
“서방님 생일이 다가오고 있잖아요!”
“아.”
언영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정신이 완전히 다른 곳에 팔려서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북동쪽으로 떠났을 때, 그 망할 놈들이 다 온다고 했는데. 설마. 언영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서방님, 매번 서방님 생일 앞뒤로 몇 주 동안은 저희 섬에 오지 않으셨잖아요. 그래서 뭔가를 드리고 싶어도 늘 적당한 때를 놓쳤어요.”
목린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가락지 만들기에 열중하느라, 그녀는 움찔 놀라는 언영의 몸을 보지 못했다.
“일부러 그러신 건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건지는 저도 모르지만…….”
“일부러라니! 하하.”
“이번에는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서방님 위해서 정말 기억에 남는 날 만들어 드릴 거예요.”
“아니야. 그러지 않아도…….”
생일만 되면 단월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목린에게 주는 것이 익숙했지, 그녀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말 그 자리에서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아서, 괜히 쑥스러워서 그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이제 와 보면 너무나도 잘한 선택처럼 여겨졌다. 목린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니까. 아니, 아니지. 그날 엿들은 건 오해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편 목린 또한 어떤 생각에 푹 빠져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언영의 생일에 마음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언영에게 선물을 사 줄 여윳돈을 충분히 구하지는 못했지만, 어딘가 방법이 있을 터. 풍성하게 준비한 것들을 주변에 두고 언영에게 용기 있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가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나는 정말 서방님을 사랑하고 있구나. 이게 사랑이구나.
그리고 분위기가 더 사뭇 진지해지면 언영에게만 아주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그동안의 오해를 털어놓고 함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손을 잡고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여기까지가 목린이 구상한 꿈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계획을 되새겼을 때 마침 마지막 열 번째 가락지가 완성되었다. 목린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봐요! 서방님 손에 무지개가 폈어요.”
“정말 예쁘다. 고마워.”
언영은 꽃이 풍성한 손 하나로 목린의 뺨을 쓰다듬었다. 떨려하는 목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게다가 그녀의 얼굴도 이글이글 타는 불처럼 새빨개졌다.
마치 진짜 같잖아. 언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 다람쥐예요!”
얼른 다른 데에 관심 있는 척 목린은 괜히 지나가는 다람쥐를 삿대질했다. 뽈뽈뽈 땅을 달려가고 있던 다람쥐는 목린과 눈을 마주치고 자리에서 굳었다.
목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 다람쥐에게 다가갔다.
“이 추운 겨울에 왜 나와 있을까요? 잠을 자야 할 시간인데.”
얼어붙어 있던 조그만 다람쥐는 목린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자 더욱 당황하며 작게 삑삑 울었다.
언영이 그녀의 뒤에 서서 차분히 설명했다.
“다람쥐는 덩치가 작아서 체내에 음식을 오래 못 쌓아 놔. 그래서 겨울잠을 자는 도중에도 깨서 새로운 걸 섭취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이 행위를 봄이 올 때까지 계속 반복하고.”
“그래요?”
목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언영을 돌아봤다가 다시 눈썹을 내리며 다람쥐와 시선을 마주했다. 근심 가득한 그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면 이 아이는 먹이가 부족해서 나왔을까요? 불쌍해…….”
목린은 다소곳하게 양손을 뻗었다.
“이리 와.”
손이 다가오자 처음에 소스라치게 놀란 다람쥐는 몇 번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싱긋 웃고 있는 귀여운 목린의 미소를 무심코 올려다본 다람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람쥐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천천히 목린의 손 위에 걸어왔다. 목린은 다람쥐를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며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리고 보란 듯이 언영을 향해 다람쥐를 더 가까이 보여 주었다.
처음 봤는데 다람쥐도 목린을 좋아하는 게 언영의 눈에도 보였다. 목린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런 게 틀림없었다. 언영은 그 사실만으로도 지금 좋아서 어깨가 후들거렸다.
“어, 추우세요? 내려갈까요?”
“아니, 아니.”
언영은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목린이 다람쥐와 교감하는 모습만 평생 보고 죽어야 한다고 해도 아무 불만 없었다.
“정말 귀여워요.”
목린은 다람쥐 앞에 얼굴을 바짝 대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며 언영은 다람쥐가 아닌 다른 게 더 귀엽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다람쥐가 그보다 나았다. 적어도 다람쥐는 이렇게 목린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덕분에 언영은 질투도 났지만, 무엇보다도 이 행복을 주는 쪼끄만 놈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도 목린처럼 다람쥐 앞으로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불쑥 들이댔다.
“삐이이이익!”
다람쥐는 굉장히 망측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목린은 얼른 손으로 다람쥐를 감싸며 달래주었다.
목린은 혹시라도 언영이 마음 아파할까 봐 머쓱해하며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수줍음이 많은가 봐요.”
“아니, 누가 봐도 무서워하는…….”
언영의 입이 돌연 꾹 다물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 대 매서운 따귀를 맞은 양 갑자기 이성이 마비되었다.
“먹이가 없어서 깨어난 거라면 이대로 이별했다간 큰일 날지도 모르겠어요. 어떡할까요?”
목린의 목소리가 윙윙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방님?”
생각해 보니 첫 만남부터 쭉 다람쥐는 목린이었고 목린은 과거의 언영이었다. 목린은 지금의 다람쥐처럼 늘 바들바들 떨었고 귀혈족은 당연히 그녀가 수줍어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영은 그저 그런 목린이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오해였다면?
목린이 정말 오로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마을에 다람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일단 마을에 이 아이를 데리고 가고, 그분의 제안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서방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서방님!”
“……응. 그래.”
언영이 목소리는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저, 목린아.”
“네?”
목린이 한 손으로 다람쥐를 쓰다듬으며 언영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줘. 혼례 전에도 한 번 물어봤던 거지만 한 번 더 물어볼게. 혹시 너…….”
한 번이라도 내가 무서웠던 적 있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는데.
“눈이에요!”
목린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하얀 눈이 하늘에서 잔잔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지 않아서 큰 미동 없이 떨어져 땅에 사뿐히 앉았다.
첫눈이었다. 게다가 목린에게는 여기서 난생처음 만나는 눈이기도 했다.
“서방님…….”
목린은 팔을 뻗어 소심하게 언영의 허리를 안았다.
“첫눈이 올 때 입을 맞추면…… 좋대요.”
“그래?”
“네. 제가 갑자기 지어낸 게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 오라버니께서 저번에 오셔서 말씀하신 거예요!”
“형님께서 그런 걸 알려 주셨어?”
언영은 정말 순전히 신기해하며 물어본 것이지만 목린이 당황하며 더듬거렸다.
“네? 네! 물론이죠! 서방님은 아가씨들이랑 그, 그런 얘기도 안 하세요?”
“안 하는데…….”
“저희 남매는 해요! 정말 오라버니께서 알려 주셨어요! 정말이에요!”
“어, 응.”
그렇구나. 언영은 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런데 뭐에 좋은 거야?”
“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
목린이 멍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언영은 목린이 더욱 바짝 몸을 붙여오자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목린이 그를 향해 달콤하게 속삭였다.
“지금 해서 한번 알아봐요.”
“…….”
언영의 깊은 눈동자에 갈등이 물결쳤다.
“나는.”
그가 억지로 손가락을 목 안에 넣고 토해내듯 말했다.
“목린아, 나는…….”
목린이 빈틈없이 언영과 맞닿았다.
입맞춤을 기다리는 여인은 고개를 들고 살포시 눈을 감았다. 눈송이가 떨어진 기다란 속눈썹이 떨리듯 팔랑거렸지만, 상대를 기다리느라 결코 눈을 뜨지 않았다.
언영은 홀린 듯이 목린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다. 너무 곱고 너무 소중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목린아.”
언영은 입을 맞추는 대신 목린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밀어냈다.
“목린아, 아까 문을 열어 놓고 나온 것 같아. 눈이 오는데 그 상태로 방치해 두면 안 되거든.”
목린이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꿈에 빠져 있는 듯 몽롱한 눈빛이었다.
“미안해, 목린아. 먼저 집에 가 있을래?”
“네?”
언영은 목린의 정신이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면서, 혼란이 뒤엉키는 그녀의 표정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았다.
혼란이 보였다. 상처가 보였다. 아픔이 보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입을 맞추고 종일 놓지 않고 싶은 욕심이 크다. 하지만.
목린아.
“네…….”
목린아, 나는 네가 어디까지 진심인지 모르겠어.
* * *
망했다.
정말 망한 거다.
마을의 식량 창고 내부를 확인하다 말고 그 안에서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숨겨왔던 공포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언영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피곤함에 절은 그의 안색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목린을 강제로 데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족 간의 사소한 오해라고 떠넘기기엔 너무도 오랜 길을 걸어왔다. 한번 깨닫고 나니 장인과 목현 형님, 그리고 나머지 초족 사람들의 이상했던 태도가 단번에 이해되었다.
그중에서도 목린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여기서 살게 되면서 얼마나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까.
사죄해야 한다. 무조건 사죄해야 했다. 회피하고픈 이기적인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무릎을 꿇고, 바닥을 핥고, 혀 깨물어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그 이후의 목린은 어디로 떠날 것인가.
언영은 나날이 목린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목린과의 소중한 추억이 그의 숨통이 되어 주었다. 혼인하기 전이었다면, 많이 힘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목린을 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서 바라만 보면서 여생을 보냈을 테지.
하지만 언영은 목린에 대해 너무도 많이 알아 버렸다. 그녀가 잘 때 살짝 입을 벌리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가끔 작게 코골이를 할 때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조그만 입술로 열심히 조잘거릴 때 얼마나 안아 주고 싶은지. 맛있게 밥을 먹고 배를 톡톡 두드릴 때 얼마나 예쁜지.
너무도 이기적이고 한심했지만 언영은 목린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단월도로 돌아간 목린이가 다른 남자랑 배 맞는 걸 상상하니 구역질까지 치밀어 올랐다.
사죄는 하되, 목린의 미움은 받기 싫었다. 구질구질하지만 옆에 계속 있게 해 달라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그렇게 하면, 목린이가 겁먹을까 봐.
하루는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면 그걸 빌미로 목린을 붙잡을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까지 뻗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래도 언영은 기분이 끔찍했다. 자신은 정말 나쁜 새끼였다.
자괴감을 꾹꾹 억누르며 창고에서 나왔다.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언영을 골목을 거닐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인사를 몇 번 놓칠 뻔하기도 했고 표정도 불안했다.
그러므로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눈사람은 전혀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
눈사람이 스스로 떨지만 않았더라면, 그대로 가던 길을 갔을 것이다.
정면을 보고 걷던 언영이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옆으로 돌이고 다섯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문제의 그 눈사람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겉으로 볼 때는 매우 평범한 모양새였다. 열심히 튼튼하게 지었는지 키는 언영의 어깨 정도 왔고, 옆으로도 꽤 넓었다.
하지만 마치 스스로 자아를 가진 것처럼 그것의 떨림이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좌우로 둥그런 머리가 흔들거렸다. 그 기괴한 모습 탓에 언영을 눈살을 찌푸리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팔로 눈을 살짝 가렸다.
이윽고 그것의 앞 얼굴이 펑 터졌다.
“서방님!”
눈이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창백한 표정의 목린이었다. 그녀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 목린이에요!”
눈사람 안에 숨어 있는 목린을 보고 언영이 느낀 감정은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움이었다.
“목린아! 춥게 왜 그러고 있어!”
“서방님이 예전에 하셨던 것처럼 똑같이 놀라게 해 드리려고…….”
목린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에취이!”
목린의 아담한 몸이 푸르르 떨렸다. 예사롭지 않은 혈색이라 언영이 기겁하며 정신없이 목린의 머리와 상체를 압박하는 눈을 손으로 퍽퍽 쳐내며 떨어뜨렸다.
“누가 도와줬어?”
“혀, 혀, 현오 님이요.”
“그럴 줄 알았어. 어떡해. 몸이 너무 차가워.”
상체가 전부 드러나자 언영은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고 무를 뽑듯 뽁 꺼냈다. 온기라고는 찾을 수 없는 그녀의 몸을 바짝 안으며 크고 뜨거운 손으로 계속 어루만졌다.
식량 창고에 너무 오래 있었다. 쓸데없이 그 안에서 괴로워하지 않았다면 목린의 몸도 이렇게 식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의 잘못으로 인해 목린이 아팠다.
그의 찢어지는 마음과 무너지는 표정을 모르는 목린은 활짝 웃으며 후들거리는 팔로 언영의 넓은 몸을 안았다.
“아니에요. 서방님 기다리느라 하나도 괴롭지 않았어요.”
“…….”
“전엔 왜 이런 행동을 하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알겠어요. 서방님 기다리느라 엄청나게 설렜어요.”
“…….”
그녀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그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해야 했을까.
“서방님, 요즘 안 좋은 일 있으세요? 혼자만 앓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언영의 귓가를 애태웠다. 혈기 넘치는 사내의 몸이 끓어올랐다. 당장 그녀의 입술을 먹어 치우고 싶었다. 쪽쪽 빨아서 온통 그의 흔적을 묻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목린이는 또 얼마나 좋은 척을 하며 견뎌야 하며…….
“목린아.”
“서방님.”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언영이 목린을 뜨겁게 바라보며 얼른 덧붙였다.
“먼저 말해.”
“서방님, 저…….”
달거리 끝난 지 꽤 되었다고, 그러니까 이제 해도 된다고…… 물론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용기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이게 언영이 요즘 어색하게 그녀를 피하고 다니는 이유라면, 그렇다면 솔직하게 마음을 밝히면 그도 다시 다가오지 않을까. 그에게 선물을 주는 건 나중 일이고, 일단 지금이라도 고백을 먼저…….
“사…….”
하지만 용기를 내어 한 음절을 밖으로 내던진 그 순간, 너무 오래 추운 날씨에 노출되어 있었던 탓일까.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목린아!”
언영이 다급하게 뻗은 팔 안으로 목린이 쓰러지며 안겼다.
* * *
익숙한 곳이었다.
찾아가지 못한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흐릿한 시야임에도 분명했다.
여기는 단월도의 숲이었다. 아무도 없는 자연은 평화로웠다. 다른 날보다 유독 햇빛이 화창했고, 목린은 이마에 손을 대 그늘을 만들려다가 깜짝 놀랐다.
그녀의 손이 마치 아이의 것만큼이나 작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나무들이 못 본 사이 기가 막히게 자랐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게 아니라 목린이 짧아진 것이다. 마치 어린 꼬마처럼.
어린아이의 몸이 된 목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꿈이라는 것을 한 번 인식하고 나니 괴리가 눈에 들어왔다. 봄에 피는 꽃과 겨울에 피는 꽃이 함께 뒤섞여 있는데, 날씨는 또 여름 같다.
재밌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렸을 때.
목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반짝거리는 꽃이 바로 저쪽에 있었다.
목린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는 목현에게 지난번에 들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원금화를 떠올리게 하는 꽃을 예전에 보았더라고 했다. 잠깐 그 얘기에 솔깃하였으나, 당시 어린아이의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싶어 그저 속에 그대로 묻어 놓았다.
하지만 지금의 이 꿈이, 무의식 속에 가둬져 있던 과거의 잔상이라면?
게다가 눈앞에 이렇게 드러나니, 정말로 언젠가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분명하다. 각도도 비슷하다. 목린은 이렇게 숲에 덩그러니 서 있었고, 왼편에서 그 무엇보다도 영롱한 것들이 제 존재를 밝히고 있었다.
목린은 천천히 걸어갔다. 흙이 밟히는 소리가 편안했다. 손을 앞으로 뻗고 저 눈부신 상대를 향해 앞으로 다가갔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 닿으면…….
* * *
“목린아, 정신이 들어?!”
목린이 눈을 뜨자마자 초조한 언영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차지했다.
“너 이틀 만에 눈뜬 거야. 몸에서 열이 펄펄 났었어.”
“제가…….”
목린이 입을 열자마자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쉬어, 더 쉬어.”
언영은 안절부절못하며 목린의 몸을 토닥거렸다.
목린은 지금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언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보였다. 고작 이틀 사이에 그의 안색은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미안함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서방님, 저번에 말씀하신 꽃 있잖아요.”
“무슨 꽃?”
오랜만에 입을 연 목린의 목소리가 다소 거칠었다. 언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장 입술을 열었다.
“혹시 원금화?”
“네, 그거요. 저 그거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요.”
아직 창백한 얼굴이었으나, 목린은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였다. 언영은 가볍게 웃었다.
“무슨 소리야? 그건 그냥 은도 그 자식이 한심하게…….”
“아니에요. 제가 어릴 때 봤어요. 방금 생각났어요.”
“단월도에서?”
“네.”
언영은 목린의 표정을 살피듯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목린의 얼굴에서 장난기를 찾을 수 없자 그도 사뭇 진지하게 입술을 뗐다.
“……뭐,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지. 그 숲은 제대로 확인한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어릴 때 이후로는 본 적 없는 거야?”
“네. 하지만 분명히 봤어요.”
꿈도 그렇고, 얼마 전에 목현도 말해 주지 않았는가. 과거의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나온 게 틀림없었다. 목린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건 어린 시절의 그녀였다. 꿈과 현실이 완전히 일치하진 않았겠지만, 본질은 비슷하리라.
언영이 다소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찾으러 가고 싶어서 그래?”
“은도 님만큼은 아니지만, 네. 한 번 다시 찾아보고 싶어요. 그리고 꼭 서방님께 드리고 싶어요. 우리 같이 찾아가 봐요.”
목린의 단호한 목소리에 언영이 약간 당황했다.
“일단…… 다 나아야 찾으러 가든지 말든지 하지.”
그리 말하며 그는 시선을 피했다. 목린은 더욱더 확고한 음성으로 첨언했다.
“걱정 마세요. 서방님 생일 전엔 꼭 일어날 거예요. 제가 가장 열심히 축하해 드릴 거예요.”
“그까짓 생일이 뭐라고.”
시선을 피하다 못해 이제 언영은 슬슬 그녀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을 불편해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방황 중이었다.
“그날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서방님이 가장 중요하신 날이잖아요. 그러니까…….”
연이어 터져 나오는 기침 탓에 목린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언영은 안절부절못하며 목린을 내려다보았다. 더 자라고, 제발 더 쉬라고,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려 주며 다정하게 토닥거렸다.
* * *
꽃을 찾으러 가겠다는 목린의 의지는 더욱 더 확고해졌다. 봄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할 일로 결정했다. 늦은 오후에 집에 방문해 준 의원에게서도 봄이면 충분히 다 낫고도 남는다는 긍정적인 말을 들었다. 서방님 드릴 거야. 서방님 행복하게 해 드려야지. 그리 결심을 하며 잠들었다.
한밤중에 목린은 우연히 깨어났다. 이전보다 훨씬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목도 덜 아팠다. 으슬으슬 떨리는 느낌도 줄었다.
“목린아.”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달콤한 수면에서 깨운 것도 분명 이것이리라.
“목린아.”
졸음을 이겨 내고 목린은 끄응거리며 눈꺼풀을 힘들게 들어 올렸다.
단순히 잠깐 눈만 붙인 게 아니었다. 그사이 밤낮이 바뀌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으나 누군가가 든든하게 덮어 준 이불 덕에 괴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린을 놀라게 한 것은 방의 밝기 따위가 아니었다. 언영이 그녀를 두 팔 사이에 가두고 위에 올라타 있었다. 거대한 몸이 그녀를 완전히 가렸다. 표정 없는 건조한 얼굴이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다.
“서방님……?”
목린이 찌뿌둥하게 눈을 뜨고 여전히 잠이 덜 깬 목소리와 함께 입술을 달싹거렸다. 여전히 굳은 그의 이목구비는 가만히 있고, 눈동자만 살짝 내려가 오물거리는 목린의 입술을 빤히 응시했다.
언영의 목울대가 빠르고 짧게 울렁였다. 그러면서 그의 상체도 함께 살짝 흔들렸다. 안 그래도 거구인 몸통을 메꾸는 중인 갑옷 또한 움직이며 잠깐 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작은 소음이었으나 모든 게 자고 있는 늦은 밤에는 그 무엇보다 크게 들렸다.
“……어디 가세요?”
목린이 반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긴장한 음성과 함께 내뱉었다.
“해가 뜨자마자, 마을을 나갈 생각이야.”
“어디요……? 멀리 가시는……요?”
잠결에 목린의 목소리가 뭉개져 나왔다. 하지만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기엔 충분했다. 두 팔뚝을 아래에 받쳐 목린을 가두고 있던 언영은 한 손으로 목린의 보드라운 뺨을 살살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그가 가까이서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목린은 눈을 여전히 감은 상태에서 몽롱한 목소리로 웅얼웅얼 대답했다.
“생일 전에는 꼭 돌아오셔야 해요. 제가 정말 열심히 해서…….”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돼. 약은 다 챙겨 놨고, 다인이가 네 곁에 있어 줄 거야.”
목린의 입술을 검지와 중지로 더듬던 언영은, 그 행위에 푹 빠진 탓에 점점 목소리 크기가 줄어들었다. 목린이 말을 시작하려 입을 벌릴 때가 되어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놀라며 다시 손을 뗐다.
“다치지 말고 안전하게 돌아오세요…….”
“당연하지. 위험한 일 하러 가는 거 아니야.”
“입 맞추어 주세요…….”
언영의 손이 굳었다.
목린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희미하게 뜬 눈으로 가만히 올려다보는 그 모습이 언영의 눈엔 너무도 아름다웠다. 목린과 제대로 뜨겁게 입을 맞춘 것도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순간에 모든 자제력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언영은 목린의 두 뺨을 꽉 잡고 격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동안 퍼붓지 못하였던 모든 열정을 지금 다 쏟아내었다. 미치도록 황홀했다. 잠결에도 열심히 그의 입맞춤에 응하는 목린의 행동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이대로 죽어도 좋았다.
“서방님.”
목린은 언영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자신의 이불을 거두어 내려고 했다.
“서방님.”
“응, 목린아. 말해.”
“저 서방님 아이 갖고 싶어요…….”
언영의 이성의 끈이 무참히 찢어졌다.
두 사람은 허겁지겁 몸을 겹쳤다. 옷을 다 벗을 이성도 없었다. 서로의 몸을 정신없이 물고 빨고 깨물다가, 언영이 하의만 살짝 내려 목린의 안으로 푹 들어갔다. 늦은 밤, 두 사람 다 정신없이 몸을 흔들며 헐떡거렸다. 목린은 잠결에도 언영의 허리에 열심히 다리를 휘감으며 신음을 내질렀다. 짐승같이 호흡하며 같이 한 몸이 되었다.
잠시 뒤, 언영은 슬슬 일어날 준비를 하며 침상을 팔뚝이 아닌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렇게 상체도 함께 일으키려 했을 때.
지쳐서 잠에 든 목린이 몽롱하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언영은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희미한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한 목린은 그 이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사랑한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꿈나라로 떠난 듯했다.
언영은 이를 악물었다. 흥분과 혼란이 함께 뒤엉켰다.
깨우고, 다시 한번 말해 보게 할까.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됐어.”
언영은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목린을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순하게 자는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저런 아기 같은 얼굴로 어떻게 아기를 갖고 싶다며 유혹할 수 있단 말인가.
언영이 아무리 오래 생각해봐도 결국 답은 하나였다. 목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며 비는 수밖에 없었다. 평생 용서받지 않아도 좋았다. 목린이에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므로…….
아니, 용서받지 않아도 좋을 리가 없었다. 목린의 발목이라도 붙잡고, 나 좀 받아 달라고, 날 버리지 말라고 오열해도 상관없었다. 육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해야 한다 한들 하등 치욕스럽지 않았다. 목린에게 거절당하는 삶이야말로 고뇌일 터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제대로 용서를 빌어야 할 텐데, 단순히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면 부족할지도 몰랐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계속 줄기차게 고민하던 끝에 깨어난 직후 목린의 말이 그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원금화.
희귀하고 아름다운 것, 사랑을 맹세하는 아름다운 꽃을 들고 애원한다면 목린이 마음의 문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 비록 언영은 이 꽃과 얽힌 미신에 대해선 다소 회의적이었으나, 목린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지금은 아무거나 붙잡고 매달려야 하는 상황인지라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목린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너무 어릴 때였고, 그 이후에 섬에서 그 꽃이 발견된 기록이 없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제대로 수색할 가치가 있었다. 원래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꽃일 리가 없었으므로.
서서히 방으로 햇빛이 비치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영은 몸을 일으키며, 무거운 마음과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