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장(4권) (19/25)

19장

“오라버니 말씀이 옳아요……. 저는 힘이 없었지만…….”

목린은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떨렸다. 무서웠다.

하지만 언젠가는 넘어야 할 고비였다.

언영을 위해서,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제 힘이 생겼다고 한다면, 믿으시겠어요?”

목린이 얼굴을 들었다. 목현과 눈을 똑바로 맞추고 물었다.

“그리고 그게 서방님 덕분이라면, 믿으시겠어요?”

필사적으로 떨리는 손을 감추었다. 의혹이 잔뜩 깔린 오라버니의 눈이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설득할 수 있을까. 숨이 턱 막혔다.

그래도 해내야 한다.

“단월도에서의 삶이 끔찍했다는 뜻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곳에 계속 살았더라면 별일 없이 평탄하게 살 수 있었을 거예요. 아마도 옆집에 살던 덕복 오라버니랑 혼인해서, 아이 낳고, 오라버니랑 소중한 오랜 벗들이랑 함께 오손도손 살 수 있었을 거예요.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했겠지요. 문제가 없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둘러싸인 삶이라니, 얼마나 풍족한 인생이에요. 하지만…….”

목린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하며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계속 살았더라면 이곳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일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을 거예요. 잡아먹겠다고 협박당해서 기절하는 거나, 설산을 데굴데굴 구르는 일이나…… 거의 벌거벗고 있는 사내들한테 둘러싸여 인사를 받을 리도 없을 테고, 귀여운 시누이에게 피로 쓴 편지를 받게 될 리도 없었겠죠. 덕복 오라버니께는 누이가 없으니까요.”

목린은 앞서 들은 말 때문에 안색이 창백해지는 목현을 보고 아차 싶었다. 제대로 된 사연을 모른다면 확실히 속이 뒤집힐 내용이기는 했다.

목현이 더 캐묻기 전에 목린은 얼른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저예요. 이제 그런 경험은 저와 떼 놓을 수 없는 하나가 되었어요. 저의 일부분이 되었어요.”

“…….”

“단월도로 돌아간 저는 이전과 다를 거예요. 제가 완전히 귀혈족과 동화되었다는 뜻이 아니에요. 저는 여전히 저니까요. 하지만 저는 강해졌어요. 단순히 힘이 좋아졌다는 뜻이 아니에요.”

목린이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음절 하나하나에 마음을 실어 담으며 털어놓았다.

“이제 어딜 가더라도,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를 사랑할 자신이 있어요. 저를 더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리고 목린은 당당하게 목현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오라버니께선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겠지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실 테고요. 하지만…….”

목현의 표정이 아리송했다. 원래 워낙 낯빛에 변화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이상할 것은 없었으나, 지금으로선 썩 달갑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의 무표정이 목린의 인내심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설득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언영과 말다툼을 했던 목현이라면 더더욱. 무슨 용기로 이런 말을 했던 걸까. 목린은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제 오라버니가 어떻게 나설까? 그런 황당한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실까? 당장 팔목을 잡고 여기를 나가자고 끌어낼지도 몰랐다. 아니면, 너도 변한 거냐며 냉대할지도 모르겠다.

무슨 상상이든 최악에 다다랐다. 목린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그러니까, 제발 저를 조금만 더 믿어 주시고…….”

“믿어.”

그때, 목현이 말했다. 목린은 눈을 깜박거렸다.

“……예?”

“믿어, 목린아. 네 말을 믿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장난기 하나 없는 진솔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목린이었다.

“정말이에요……?”

“그래.”

“저는…… 이렇게 쉽게 설득할 수 있을 줄은…….”

“몰랐겠지. 내가 널 끌고 나가리라 생각했겠지.”

“……네.”

부끄럽지만 목린은 순순히 인정했다. 목현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았을 때 물론 반가움도 컸으나, 그가 무슨 일을 하러 왔을까 감히 예상도 할 수 없어 불안함 또한 꿈틀거렸다.

목현은 웃지 않았다. 미소를 보여 주며 누이를 안심시켜 줄 만도 한데 그런 것 하나 없었다. 대신 그는 목린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그때 기억나니? 봄에, 우리가 처음으로 솔직한 서간을 주고받았을 때. 정확히 말하면 내가 먼저 너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목현은 잠시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결심한 듯 내뱉었다.

“단순히 내가 용기가 생겨서 벌인 일이 아니야.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어.”

“……누군지 맞혀 보라는 뜻인가요?”

“그래. 누구라고 생각해?”

목린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혹시…….”

고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냥 알 수 있었다.

마치 두 사람끼리의 비밀이 있는 양 예의를 바르게 차리던 두 사람…….

“처음엔 봉투가 무척 두껍기에 네가 나한테만 은밀히 보내는 글인 줄 알았단다. 꼭 나만 보라고 쓰여 있어서 말이지. 그런데 열어 봤더니 뭔 지렁이만도 못한 글자들이 춤을 추고 있더구나. 귀여운 누이에게 장문의 글이 왔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는데, 그때의 실망감이란.”

목현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단월도를 떠나던 날 나한테 무턱대고 화부터 내서 미안하다고, 목린이 네가 걱정돼서 그랬다고, 나한테 용서를 빌더구나. 그리고 나보고 많이 힘들어 보인다면서, 여러 가지 힘이 되는 말, 좋은 말, 약재까지 같이 보냈어. 너한테 솔직하게 먼저 얘기를 해 보는 게 어떠냐고 용기를 북돋아 준 사람도 그였다. 정말 따뜻한 글이었어. 알아보기는 많이 힘들었지만.”

“하지만…….”

참지 못하고 목린이 속에 담겼던 의문을 끄집어냈다.

“제가 기억하는 서방님께선 제가 오라버니 생각을 오래 하는 것, 오라버니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것 자체를 석연치 않게 생각하셨는걸요.”

“그건 아마 내가 그 당시 많이 불안정해서 아니었을까. 나도 오늘에서야 너를 마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봄에 이렇게 다시 만났다면 중간에 어긋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아마 너와 나를 모두 걱정해서 보인 행동이었을 거라 확신한다.”

아아…….

“솔직히 말하면 글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 혼란스러운 말도 많았어. 왜냐하면…….”

“보고 자란 게 너무 달라서,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요.”

목린이 문장을 부드럽게 이어받았다. 목현은 누이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정말 신기했던 점은, 이해할 수 없음과 동시에…….”

마치 답해 보라는 듯 목현이 말허리를 끊었다. 목린은 이번에도 정답을 말할 자신이 있었다.

“이해받는 느낌을 받으셨던 거지요.”

목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무슨 느낌인지 저도 알아요.”

“넌 매제가 한 말이 아버지를 떠올린다고 했지. 나는 그 반대였단다.”

‘함께 나아가는 거란다, 목현아.’

“매제가 보낸 장문의 글을 읽고 그 다음에 아버지를 뵈러 갔는데, 똑같은 말을 들었지. 그래서…….”

목린의 눈에 물기가 차기 시작했다.

“나는 네 말을 믿는다, 목린아. 정확히 어떤 일이 그동안 네게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네가 느꼈다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 같아.”

“아…….”

떠밀려 오는 감정의 너울에 목린은 몸을 맡겼다. 눈물이 쉼 없이 터져 나왔다. 오라버니의 얼굴이 눈물에 흐릿해졌다. 어린아이도 이렇게까지 울진 않겠다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들춰냈다. 그렇게 꺼이꺼이 오열하며 간신히 더듬었다. 처음으로 입 밖에 내뱉은 고백이었다.

“오라버니. 저 서방님을 사랑해요. 서방님이 없는 삶은 절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분이 너무 좋아요…….”

* * *

자리를 옮기자 제안한 사람은 목린이었다. 그녀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입 밖에 터져 나온 고백은 속사포 같은 오열을 동반했다. 언영에게 이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털어놓는 방법은 멋지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근처에 아무도 없는 해변으로 갔다. 모래 위에 서서 몸을 서로 마주했다. 하지만 눈은 각자 다른 곳을 주시했다. 목현은 사색에 깊이 잠긴 채 눈으로 하얀 구름을 좇았고, 목린은 오밀조밀 모인 모래알을 내려다보며 하루라도 저들 중 하나가 되면 어떨까 상상했다.

수십만, 아니, 수백만 개의 비슷비슷한 모래알과 섞이면 하나도 구별이 되지 않을 테다. 하지만 언영은, 그 속에서도 기필코 그녀를 찾아내서 그녀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알려 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마음에 담았다는 것이 목린은 자랑스러웠다.

“웃는 모습으로 만나자고 하더니.”

목현의 중얼거림에 목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춥지는 않니?”

누이의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보며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목린은 살포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귀혈족 옷은 따뜻해서 좋아요. 그러면…… 이제 돌아갈까요? 울음도 멎은 것 같은데.”

“목린아.”

목현의 사뭇 진지한 부름에 목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어서 그의 말이 계속 그녀의 귀에 내리꽂혔다.

“너는 기억을 못 하겠지만 네가 고작 네 살이었을 때, 우리 집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단다. 해가 다 저물어 가는 데도 네가 집에서 보이지 않았거든.”

목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으며 물었다.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아……. 지난번에 보내 주신 서간에서 말씀하셨던 그 날인가요?”

“서간? 아, 그래. 맞다, 맞아.”

봄에, 목현이 자신의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냈을 때 지나가는 말로 분명 얘기했었다.

“그러면 그날이 기억나니?”

천천히 고개를 젓는 목린을 보며 목현은 슬프게 웃었다. 다시 바다를 향해 시선을 뻗었다.

“이기적인 나는 네가 기억을 못 한다고 하니 마음이 살짝은 놓이는구나. 어떤 관점에서 보든 그건 철저히 내 잘못이었으니까.”

바다는 노을과 만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푸른 물은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태양에 아름답게 먹혀들어 갔다.

“뭘 말해도 변명이 되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냥, 아무 일도 안 생길 거라 생각했어. 네가 꽤 말괄량이였는데도, 그걸 잘 알고 있는데도 널 혼자 두고 친우와 낚시하러 가는 거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설마 잠깐 그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싶었던 거지. 유독 햇빛이 쨍쨍하여 기분 좋은 날이기도 했고. 물론 지금의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 한심한 소년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아 줄 테지만.”

“제가 말괄량이였다고요?”

너무도 놀란 목린은 이대로 지나칠 수 없어 물었다. 목현이 그녀를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래. 엄청.”

하지만 그의 입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네가 없음을 확인하고 얼마나 겁에 질리셨는지……. 나는 물론이고 다른 마을 어른들까지 합세하여 다 같이 너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단다.”

“신기해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럴 수도 있지. 네가 너무 어렸을 때니까.”

“저는 어디에 있었나요?”

“숲에.”

그리 답한 목현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마을 사람들 모두가 네 이름을 목청껏 외쳐 대는 동안 너는 숲에서 잎사귀 여러 개를 모아 그 위에서 편안하게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더구나.”

그리고 목현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왜 거기에 갔었냐 물었던 건 기억나니, 혹시?”

“아니요. 전혀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목린을 보며 목현은 살짝 아쉬워하는 표정을 내보였다. 호기심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목린이 얼른 물었다.

“제가 뭐라고 답하였는데요?”

“네가 숲에서 금빛의 꽃을 보았다고 했어.”

목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목현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반짝반짝 금으로 만들어진 꽃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꽃을 다시 찾느라 숲을 헤맸다고 한 거야. 그 말을 듣고 아버지의 어깨에 바짝 들어가 있던 힘이 대번에 풀어졌지. 어린애한테 그럴싸한 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마는, 너무 어이가 없으니 말이다. 뭐, 그것도 피범벅이 되어 있던 네 손을 보기 전까지의 얘기지만.”

목린은 살짝 초조하게 물었다. 목현이 조금 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면 그 위에 떠오른 기대감을 읽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그 꽃은요? 정말로 있던 거예요?”

“있었겠니.”

“아…….”

목린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혹시 몰라서 정말 그 주변을 대낮에 수색해 본 이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네가 말한 꽃은 없었어.”

“그렇군요…….”

“그리고 그 당시 아버지께선 꽤 무섭게 너를 꾸짖으셨다. 네가 벌벌 떨 정도로 엄중하셨던 건 아니었지만, 네 살짜리 어린아이에게는 퍽 가혹했지. 그리고 그때부터였을까.”

목현은 바다를 다시 천천히 살폈다.

“……네가 점점 얌전해지더구나.”

목현은 바다를 보고 있었지만, 바다를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노을빛 바다를 보고 있다고 하기엔 너무도 추억에 젖은 눈이었다. 말괄량이였다던 어린 소녀가 물 위에서 춤을 추기라도 하는 양, 목현은 바다를 그런 눈길로 쳐다보았다.

“네가 그날 갑자기 변한 건 아니야.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겠지. 조심해야겠구나. 더 얌전히 놀아야겠구나. 그리고 그 이후의 크고 작은 다양한 일이 잇달아 몇 해 동안 벌어지고 지금의 네가 생겨난 거란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아니, 우리는 네가 이곳에 살면서 변한다 한들 나쁘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란 얘기다, 목린아. 설령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가 생기더라도, 내가 어떻게든 바꿔 놓겠어. 너는 언제나 변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거란다. 말괄량이였던 너, 내가 쭉 봐온 너, 이곳에 와서 바뀐 너. 모두가 같은 사람이야. 우린 그저 네가 즐겁고, 바르게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눈으로 보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나이라고 믿으니. 그런 변화는 나쁜 게 아니야. 행복으로 내딛는 과정이란다.”

“오라버니…….”

목현은 측면을 바라보며 목을 어색하게 가다듬었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입 밖으로 직접 내뱉으며 누이와 대화한 건 오늘이 난생처음이었다.

목현은 살짝 팔을 옆으로 벌렸고, 목린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그의 품에 달려들어 안겼다. 놀란 목현의 몸이 살짝 뒤로 기울여졌다가 다시 균형을 잡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따뜻한 석양이 남매의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그들의 심장에 평화의 노래를 불러다 주었다. 바람이 그들의 주변을 지켰다.

부끄럽고 어색한 마음을 이겨 보고자 목현이 목린의 귓가에 농담을 던졌다.

“그렇다고 너무 이상한 것까지 다 따라 하진 말아라. 아버지께서 보고 기절하실지도 모르니.”

목린은 목현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눈웃음쳤다. 그리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목숨이 걸린 짓도 무턱대고 하지 말고.”

“네!”

목린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엔 목현이 다소 진지한 투로 말했다.

“사실 난 여전히 주언영이 너를 취한 그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점 하나만큼은 너도 내 고집을 돌릴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내에 대해서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하여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온전히 네게 맡기마. 나는 네 선택을 지지하겠다. 그러니 내가 필요할 땐 언제나 말해 주렴.”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지만 목린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한편, 거구의 사내가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지, 바람에 휘날리는 그의 머리카락 아래 짙은 눈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쉿.”

그는 자신의 애마가 목린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자 팔을 뻗어 앞길을 막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너 때문에 들킬 뻔했잖아.”

륭은 툴툴거리며 뒷걸음쳤다. 언영은 다시 시선을 두 남매 쪽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노을이 선명한 하늘을 뒤에 두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에, 언영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표정과 몸짓은 또렷하게 보였다.

목현을 얼싸안은 목린은 진정으로 행복해 보였다. 즐거움에 휩싸인 두 남매의 사이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저대로 놔두고 언영이 영원히 떠난다 해도, 하등 괘념치 않고 끝까지 마냥 저렇게 웃을 것처럼…….

“…….”

언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두려움이 가득 찬 얼굴을 아래로 푹 숙이며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 *

“조만간 다시 볼 수 있겠지.”

“네, 물론이에요.”

“겨울은 너무 추우니 고생일 테야. 봄이 되면 찾아오거라. 기다리고 있으마.”

“네!”

날씨는 빠르게 추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늘한 칼바람도 오라버니와의 이별 때문에 뜨거워진 마음을 얼릴 수는 없었다.

항구에는 언영의 가족과 목현을 바래다줄 선원들이 모여 있었다. 월진과 윤근이 껄껄 웃으며 인사하는 동안 언영의 세 누이가 나란히 서서 호기심 넘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목현을 구경했다. 목현이 가볍게 웃어 주자 아이들은 더욱 크게 미소 지었다.

그다음으로 언영과 목현, 목린이 셋이서 함께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 매제, 목린이를 그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예.”

언영이 대답했지만 그는 영혼은 어딘가 다른 데 날아가 있는 표정이었다. 목현이 빤히 쳐다보자 언영이 횡설수설 말했다.

“아. 짐을…… 짐을, 옮겨다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무겁지 않은 짐을 사이에 두고 아웅다웅 실랑이가 벌어졌다.

목현은 언영과 자신 사이에 흐르는 의미심장한 기류를 읽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눈 글이 오갔다. 함께 그런 경험을 했는데 서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시작했던 언영은 굳이 목현 앞에서 그날의 일을 입 밖으로 들춰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묵묵히 굴었다. 기실 그가 아는 척을 해 왔더라면 얼굴이 화끈해졌을 터.

언영이 목현이 불편해할 것을 알고 부러 얘기를 삼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과실을 남 앞에서 편히 얘기할 수 있는 이는 몇 없으니 말이다.

“제가 하겠습니다. 목린이와 조금이라도 더 얘기 나누십시오.”

언영이 목현의 짐을 확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잡아당겼다. 목현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고맙습니다.”

언영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목현이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언영은 목현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며 배를 향해 저벅저벅 어색하게 걸어갔다. 자리에는 목린과 목현만이 남았다.

목현이 먼저 입술을 뗐다.

“목린아, 요 며칠 동안 매제의 낯빛이 좋지 못하구나.”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지요?”

목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그래. 혹시라도 내가 불편하게 만든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서는구나.”

“그건 아닐 거예요. 애초에 오라버니를 서방님이 초대하셨잖아요.”

목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정말 보고 싶을 거예요.”

“더 붙잡고 있으면 매제가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얼른 서방님은 그럴 분이 아니시라고 말하려던 목린은 웃음기 섞인 목현의 표정을 보고, 그가 장난을 쳤음을 늦게 깨달았다.

“하하, 농이었고…… 섬에 돌아가서 네가 잘살고 있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분명히 말해 두고 오마.”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지요.”

“그 외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니? 섬사람들에게 전하고픈 얘기는?”

목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니요.”

“있을 줄 알았는데.”

“직접 섬사람들과 마주 보고 해야 할 말 같아요.”

목현과 지난번 일이 있고 나서 더욱 생각이 확고해졌다. 단순히 글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눈을 맞추고 하는 진솔한 대화가 필요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목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마침내 목현을 태운 배가 바다를 향해 뻗어 나갔다. 언영의 가족은 나란히 한 줄로 서서 떠나는 이를 향해 열심히 팔을 흔들었다. 세 누이들은 두 팔을 모두 들어 장난스럽게 휘날렸다.

가장 끝 쪽, 언영의 옆에서 인사 중이던 목린은 갑자기 미간을 좁히며 흔들던 손을 복부에 얹었다. 언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아.”

목린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아래로 떨구었다.

“달거리를 시작했어요.”

“…….”

“죄송해요…….”

당황한 언영이 곧바로 말했다.

“나한테 뭐가 죄송해? 이건 사과할 일이 아니야.”

“서방님은 얼른 아이 보고 싶으시니까…….”

“그렇다고 누가 사과까지 하랬어?”

“……아무도 안 그랬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절대 그런 말 하지 마.”

“네.”

목린은 고개를 두 번 끄덕이며 성실하게 대답했다. 언영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절대…… 하지 마.”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얼마나 잘못된 걸까.

너는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언제까지 숨기려 했던 걸까.

언영은 멀어지는 배를 멍하니 주시했다.

흐릿해지는 배의 형적이 그들 부부의 관계를 지탱하던 신뢰와 비슷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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