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귀혈족 마을로 돌아온 목린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의원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쪽에서 치료를 하긴 하였으나 익숙한 이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얘기를 듣는 편이 마음에 놓였다.
“그렇게 다치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연습했는데, 막상 대회 날에 이렇게 되다니 아쉬워요.”
마지막 순간에 다친 목린은 조만간 편히 걷지 못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 동안에도 덕분에 크게 고생을 했다.
“그래도 부인, 마을이 부인 얘기로 떠들썩합니다.”
“가장 꼴찌였는걸요.”
“다시 말해, 가장 오래 노력을 보여 준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겉모습은 무서운 산적같이 생긴 의원의 입에서 마음을 다독여 주는 따스한 말이 나왔다.
목린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날아오는 칭찬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 자신을 더 사랑하기로 했다.
여기에 목린의 후방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정겹게 끼어들었다.
“게다가 다리를 못 쓰니까 내가 들어줄 수 있잖아, 하하하하!”
“다리가 멀쩡해도 들어주시잖아요.”
“그렇네? 하하하하하!”
언영은 팔짱을 끼고 호탕하게 웃었다.
여기까지 혼자 목린의 힘으로 오지 않았다. 당연히 언영이 그녀를 번쩍 들고 와 주었다. 아무도 언영이 자신의 아내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았고, 목린도 이제 놀라지 않는 표정으로 그에게 가만히 안겼다.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의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언영을 흘겨보았다가, 한 번 손으로 얼굴을 쓸며 표정을 다잡았다.
“열다섯 명 아이 계획은 아직 그대로인 겁니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언영은 두 손으로 목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보셨지 않습니까. 우리 목린이가 심지어, 결승전에 올랐습니다! 다시는 우리 목린이가 약하다는 말하지 마십시오!”
“하아, 저는 이제 모르겠습니다.”
의원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신음했다. 그는 연민의 눈길로 목린을 바라보았다.
“부인, 어차피 후계를 생각하여 한 명은 꼭 낳아야 할 테고, 그날이 도래하면 분명 열다섯 얘기는 쏙 들어갈 테니 걱정 마십시오.”
“네…….”
“그리고 다리 또한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대로 계속 휴식을 충분히 취하면 금방 나을 겁니다.”
“네, 정말 고맙습니다.”
의원님 댁을 나오자마자 언영은 목린을 바로 다시 안아 들었다. 목린은 죽지 않기 위해 두 팔을 얼른 언영의 목에 감쌌다.
“어?”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발길을 보고 목린이 얼굴에 의아함을 띄웠다.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언영이 다정하게 웃으며 목린을 내려다보았다.
“갈 데가 있어. 잠시 멀리 떨어져 있던 동안 내가 쭉 생각했던 거야. 왜 더 일찍 하지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했다고. 기다려.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니까.”
가는 길에도 꾸준히 귀혈족 사람들의 함성이 잇따랐다. 바다를 구한 이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 모두를 향한 찬사였다. 그들은 목린과 언영을 보며 두 팔을 들었다.
목린은 이제 마냥 쑥스러워하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들과 눈을 맞추며 수줍게 웃었다. 고맙다고 일일이 말해 주었다.
도착한 곳은 언영의 가족이 사는 거처였다. 커다란 기와집이 그들을 반겼다. 예상치 못한 행로 때문에 살짝 긴장한 목린은 꿀꺽 침을 삼켰다.
“아버지!”
“언영이랑 우리 아가 왔느냐! 기다리고 있었다.”
대문이 열리고 언영의 아버지 윤근이 그들을 반겼다. 언영은 월진을 더 닮은 편이긴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 또한 귀혈족답게 엄청난 몸을 갖고 있었다.
윤근은 팔을 움직이며 얼른 들어오라고 이끌었다. 목린은 여기서부턴 자기 발로 걸어가고 싶었지만 언영에겐 도통 그녀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윤근은 저택 깊숙한 곳으로 부부를 이끌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언영의 발걸음이 자신감에 차 있었다.
“생각해 놓은 것이라도 있느냐?”
“아니요. 목린이한테 쭉 비밀로 하고 있었어서요.”
결국 목린이 참다못해 물었다.
“지금 뭐 하러 온 건지 물어보아도 될까요?”
“우리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길 거야!”
목린이 언영의 가족 중에 다른 사람들보다 특히 윤근과 서먹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목린이 여름 동안 나가 있었던 탓도 있지만, 윤근 또한 마을에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여 마주칠 상황이 적었다.
윤근은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그는 그리고픈 대상이 생기면 잠시 마을을 떠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부득이하게 함께하는 시간이 드물게 겹쳤던 것이다.
놀란 목린의 입술에 한 번 쪽 입을 맞추고 언영이 활기차게 말했다.
“바다에서 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몰라. 팔에 그려 놓고 갈 걸 후회도 했다니까.”
윤근이 목린에게 물었다.
“내 작업실을 제대로 구경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요, 처음이에요.”
목린이 기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는 봄에 그려 주려고 했었는데, 그땐 내가 호랑이를 그리느라 한창 바빴지. 그러면 준비하는 동안 구경하고 있거라.”
윤근이 다른 방에서 도구를 배치하고 있는 동안, 언영은 목린을 재차 품에 단단히 안고서 걸어갔다. 그가 당도한 곳은 얇은 목재를 엮어서 만든 조그마한 창고였는데, 들어서자마자 온갖 다양한 그림들이 벽에 빼곡하게 걸린 채 그들을 맞이했다.
“어이쿠.”
바닥은 상당히 어수선했다. 언영은 떨궈져 있는 붓을 밟고 순간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목린을 꽉 끌어안으며 금세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벽부터 차례대로 다가갔다.
먼저 처음에 보인 건 풍경화였다. 각종 산맥, 강가, 마을을 담은 그림은 귀혈족의 성격처럼 시원시원했다. 붓질에 자신감이 보였다. 목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나하나 세세하게 구경했다. 언영도 그에 맞추어 느긋하게 발걸음을 뗐다.
처음엔 풍경으로 시작했던 그림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인물로 넘어갔다. 윤근이 그리는 사람들 또한 활기가 넘쳤다. 그들은 종이 속에서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짐승을 두 손으로 찢고 있기도 했고, 자기 몸통만 한 망치를 휘두르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이건 윤근의 특성인지, 그는 사람의 근육을 적어도 두 배는 부풀려서 그렸다. 종아리 근육이 수박만 하게 커다랬다.
“…….”
목린같이 생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슬슬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언영이 목린의 뺨에 자기 얼굴을 비비며 다정하게 물었다.
“어때, 멋있지?”
“네에…….”
목린이 작게 대답했다. 언영은 그런 목린이 귀여워 죽겠는지 광대뼈를 터질 듯 올리며 그녀의 볼에 입술을 세게 꾸욱 찍어 눌렀다.
“들어오려무나!”
윤근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손짓했다.
“그러면 원하는 자세가 있는가?”
안은 아무것도 없고 넓었다. 단지 다리가 여전히 살짝 아픈 목린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가운데에 구비되어 있을 뿐이었다. 목린은 얌전히 그곳에 그녀를 앉히는 언영의 손길을 받았다.
언영과 윤근의 부담스러운 시선이 동시에 목린에게 몰렸다. 목린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자연스럽게 서 있는 게 가장 무난할 것 같아요.”
두 사람 다 목린의 의견에 토 달지 않았다. 목린은 두 손을 배꼽 아래쪽에 모아 깍지 낀 자세로 얌전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언영이 그 옆에 자연스럽게 섰다. 다정히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윤근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빨라서 보이지 않았다. 목린이 서 있는 곳에선 종이 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긴장한 목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딸꾹질을 참는 어린아이처럼 뻣뻣하게 허리를 폈다. 그러다가 언영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언영은 이미 아까부터 계속 목린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미 벌어진 채 웃고 있던 그의 입이 더 크게 찢어졌다. 잇몸이 다 보였다.
“흐흐흐흐흐히이히히히…….”
그의 눈이 부담스럽게 번득였다.
‘계속 보니까……. 저런 징그러운 미소도 나름 귀여우신 것 같아.’
차마 똑같이 저런 표정으로 웃어 줄 수는 없었지만, 목린 또한 수줍게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기쁨을 표현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눈을 맞추었다.
“어딘가 많이 어색한데.”
“네?”
두 사람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목린이 화들짝 놀라 윤근 쪽으로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뭔가가 빠져 있어.”
윤근은 한 손으로 턱을 쓸면서 목린과 언영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고뇌에 찬 예술인의 얼굴이 자못 심각했다.
“제 근육 아닐까요?”
목린은 신중하게 의견을 제기했다.
하지만 윤근의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닌 듯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쓸면서 고뇌에 빠졌다. 목린이 슬쩍 언영을 올려다보며 눈을 맞췄지만, 언영도 어깨를 으쓱일 뿐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주지는 못했다.
그때 밖에서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가 번졌다.
“아버지이이!”
언영의 어린 세 누이가 차례대로 뛰어 들어왔다. 조용했던 작업실은 삽시간에 야단법석해졌다. 누이들은 언영과 목린을 보고, 그들이 있을 것을 예상치 못했는지 입을 크게 벌리며 빙그레 웃었다.
“어! 오라버니!”
“목린 님이다!”
“이리 와! 으쌰!”
언영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팔을 활짝 벌리자 화영과 혜영이 꺄악 소리를 지르며 그의 품에 달려갔다. 언영은 각각 두 팔을 이용하여 안정적인 자세로 아이들을 안고 일어났다.
가장 어린 선영은 목린의 옷을 꾸욱꾸욱 잡아당기며 매달렸다. 목린도 몸을 숙여서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이거다!”
다섯 명의 기분 좋은 만남을 잠자코 지켜보던 윤근이 돌연 외쳤다.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두 손을 서로 비비는 동작에서 그가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두근거려 하고 있는지가 보였다.
“아깐 두 사람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단다. 언영아, 다섯 명이 그냥 자연스럽게 있어 보아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있으라고만 하시면 도통 무슨 말인지……. 으아아아!”
그때 화영이 언영의 코를 꽉 잡아 비틀었다. 언영이 목을 꺾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아악!”
“오라버니,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화영이 손에 힘을 주며 뻔뻔하게 말했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그러다가 서방님이 아가씨를 품에서 놓칠지도 몰라요.”
목린이 선영을 꽉 끌어안으며 초조하게 당부했다. 그녀의 품에서 입꼬리를 넓게 찢으며 웃고 있는 막내와 지극히 대조적인 표정이 드러났다.
“아악!”
언영의 반대쪽 팔에 안긴 혜영 또한 오라버니 괴롭히기에 가담했다. 그녀는 양손을 뻗어 언영의 얼굴을 꾸깃 구기고 누르며 놀았다. 얼굴 뜯기랴, 코 꼬집히랴 바쁜 언영이 고통에 찬 소리를 지으며 당했다. 그래도 동생들을 안고 있는 팔은 든든했다.
“서방님!”
“하하하하하!”
목린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의 품 안에서는 선영이 목을 젖히고 웃었다. 선영은 찰싹 달라붙어 매달리며 목린의 뺨에 귀엽게 뽀뽀했다.
“야. 야, 잠시만……. 그거, 그 볼 오라버니 건데 누가 마음대로 뽀뽀하래.”
혜영의 손에 얼굴이 무참히 구겨져 거의 앞이 보이지 않았을 텐데 언영은 그걸 또 잡아냈다. 비틀거리면서도 당당히 할 말은 다 했다.
“응? 주선영. 말해 봐. 오라버니한테 혼날래? 왜 그 위에 마음대로 뽀뽀를……. 혜영아, 나 말 좀 하자.”
혜영이 언영의 아랫입술을 쥐고 멋대로 아래쪽으로 쭉 내렸다. 선영은 언영의 얼굴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못생겼어!’라고 외치고 깔깔 웃었다.
“그리고…… 그리고 화영아, 나 코가 너무 아파.”
화영은 아직도 실실거리며 언영의 코를 붙잡고 있었다. 목린이 살며시 웃으며 화영에게 부드럽게 타일렀다.
“화영 아가씨, 이제 그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인제 그만 놔드려요.”
“네에.”
목린이 말하자마자 화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하게 손을 뗐다. 그리고 두 팔을 언영의 목에 휘감으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화영이 멈추자 혜영도 자연스레 언영을 괴롭히던 손을 거두었다.
“후우.”
얼굴이 자유로워진 언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한 번 세게 눌렸던 코는 시뻘게져서는, 얼마나 세게 잡은 건지 아직도 콧구멍이 안으로 짓눌려져 있었다.
“큽…….”
목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웃음을 참는 그녀의 입술이 마구 씰룩거렸다.
“……푸하하하하하!”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목린의 얼굴이 뒤로 넘어갔다. 쾌활하게 터지는 웃음소리는 내부를 가득 기분 좋게 채웠다.
언영은 그런 목린을 얼빠진 눈으로 구경하다가 마찬가지로 웃어 보였다.
“아하하하!”
그리고 언영은 허리를 아래로 쭉 숙여 목린과 가볍게 입술을 쪽쪽거렸다. 그리고 서로의 코를 함께 맞대 비비며 같이 히죽거렸다.
이 모든 과정을 구경하던 윤근의 눈이 열정적으로 빛났다. 그의 빠른 손이 쉬지 않고 종이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되었다!”
“네? 벌써요?”
목린은 선영을 안은 손을 고쳐 잡으며 물었다. 요즘 언영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정말로 빨리 갔다.
“얼른 볼래요!”
목린은 앞서 달려가는 어린 시누이들의 등을 보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보고 싶으면서도 보기 두려웠다. 윤근의 그림이 그녀를 어떻게 바꿔 놓았을지 조금 무서웠다. 목린이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언영이 얼른 옆에서 허리를 받쳐 주었다.
“우아!”
가장 먼저 작품을 눈에 담은 선영이 감탄했다.
“이것 봐요!”
선영은 그림을 잡고 목린과 언영 쪽으로 돌려주었다.
“……!”
목린의 눈이 상하로 팽창했다.
그림 속 목린은 그녀가 염려했던 것처럼 우락부락하지 않았다. 행복하게 웃으며 언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올라간 입꼬리와 접힌 눈이 어여뻤다. 그녀를 마주하며 방글방글 웃고 있는 언영 또한 듬직한 자태를 뽐냈다.
어린 세 누이가 주변에서 까르르 웃는 모습도 실감 나게 담겨 있었다. 그림만 봐도 소녀들의 지저귐이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림 속 그들은 진정한 가족이었다.
* * *
“그렇게 좋아?”
“네!”
목린은 언영에게 업힌 채 집으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두 손으로 윤근이 준 그림을 계속 펼쳐 놓고 꼭 쥐고 있는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그림을 얼마나 자세히 살피고 또 살폈는지 모른다. 눈을 감아도 바로 머릿속에 세세히 그려질 정도였다.
언영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틀어 목린을 눈에 담고 미소 지었다.
“벌써 그렇게 좋아하면 안 되는데.”
“……?”
목린이 눈을 깜박거렸다. 이보다 더 기쁠 일이 또 있다고?
언영은 앞니가 드러나는 짓궂은 미소로 그녀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너무 놀라지 마.”
골목을 돌아 집 대문을 마주하기 전, 언영이 경고했다. 목린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들의 집 대문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갖고 온 짐 보따리가 그의 다리 옆에 내려진 상태였다. 문에 기댄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목린을 발견하자마자 얼른 허리를 곧게 폈다.
목린이 행복에 겨워 소리쳤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리운 이름을 힘차게 불렀다.
“오라버니!”
“하하하하하! 초대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형님!”
“아닙니다. 저야말로 초대를 받아 영광입니다, 공자. 아니, 이젠 매제라 불러야 맞겠지요.”
목린을 가운데에 두고 세 사람이 정겹게 바닥에 앉았다. 목린은 예의 바르게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는 언영과 목현을 보며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양면적인 감정을 느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사이가 좋았었나 싶을 정도로 괜찮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형님 아우야 부르는 다정다감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서로에게 지극히 공손했으며 그 어떤 악의도 보이지 않았다. 굉장히 의외였다.
분명 목린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두 사람의 끝은 엉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그녀 혼자만이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물론 목린은 그 사건을 입 밖에 꺼내 좋은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않았다. 나긋나긋하게 웃으면서도 무슨 일이 있는지 가끔 두 남자의 표정을 관찰했다.
“저, 오라버니. 정확히 언제 초대를 받으신 거예요?”
“얼마 되지 않았어. 네가 살짝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짐을 쌌단다. 아버지께서도 오고 싶어 하셨지만 여유가 없었어.”
“조만간 꼭 찾아갈게요!”
목린이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목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사랑스러운 누이를 바라보았다. 언영은 남매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바닥에 손을 짚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계속 있으면 제가 방해만 되겠지요. 잠시 나가 있을 테니 두 분이서 마음껏 못다 한 얘기 나누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매제.”
“금방 끝날 거예요, 서방님!”
언영과 목린은 서로 눈인사를 던졌다. 마지막까지 기분 좋아 보이는 언영의 얼굴을 보니 목린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오라버니, 표정이 저번보다 훨씬 좋아 보이셔요.”
언영이 사라지자마자 목린은 목현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진지한 얘기를 시작했다. 목현은 나머지 손을 목린의 것 위에 포개고 담담히 웃었다.
“그래. 네가 큰 힘이 되었단다.”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그래.”
목현의 입술 옆에 작은 보조개가 파였다.
“네 말이 맞았다, 목린아. 처음 해 보는 일이니 잘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서툰 게 당연했어. 주변을 더 바라보고, 귀 기울여 듣는 대신 나 자신을 고립시키기만 했단다. 미래의 나에게 더욱 당당해지기 위해 하나하나 바꿔 나가고 있어.”
“저도, 저도예요.”
“그러니 목린아.”
목현은 누이의 고운 손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보들보들한 걸 보면 다행히 험한 고생을 한 것 같지는 않았으나, 먼 땅에 홀로 나와 있는 누이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렸다.
“내 걱정은 하지 마렴. 오히려 우리는 모두 너를 걱정하고 있단다.”
“…….”
여태까지 목현을 똑바로 바라보던 목린이 자신 없이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복에 겨운 삶을 살고 있었다. 이제 단순히 서방님이 진실을 알고 마음 아파하실까 봐, 진실을 맞닥뜨린 초족이 귀혈족에게 화를 내고 혼인을 파하자고 요구할까 봐, 그런 이유로 상황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슬슬 밝힐 때가 왔다. 이대로 초족 사람들의 속을 타게 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제 서방님이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닌 거…… 알고 계시지요.”
목린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했다. 목현은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구나.”
“지금 와서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해도, 그런데도 제가 여전히 서방님의 아내로 남겠다 말해도, 엄청 이상하게 보실 일 없겠지요?”
“…….”
목현은 대답이 없었다.
“오라버니, 귀혈족 사람들은 좋은 분들이에요.”
목린은 천천히 다시 목현과 눈을 맞추었다. 목현은 의외로 묵묵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네가 서간에도 그렇게 남겼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남긴 글이에요, 오라버니. 정말로요.”
목린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오라버니, 예전에 제가 아주 어릴 때, 제 손을 잡고 말씀해 주셨잖아요. 기억나세요?”
“…….”
“사람의 존재는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 증명되는 거라서,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서방님에게서 그 모습을 보았어요. 혼인을 앞당기자고 했던 날 기억하시지요? 그쯤에 생겼던 일이에요. 어쩌면 우리는 서방님과, 귀혈족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아닐지도 몰라요. 생각보다 비슷한 점이 많아요.”
“…….”
목현의 침묵은 목린을 두렵게 했다. 하지만 목린은 애써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서방님은 저를 많이 아껴 주세요. 제게 정말 다정하셔요. 그러니-.”
순간 목현의 눈이 크게 팽창했다. 그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휘휘 강하게 젓기 시작했다.
“아니다, 아니야. 목린아. 아니야.”
“예? 무엇이……?”
“목린아. 나는 매제가 나쁜 지아비라고 한 적 없다. 매제가 누구보다 너에게 푹 빠져 있는 것을 섬에서 모르는 이가 없어. 아버지께서도 그 점만큼은 인정하신다. 우리가 너를 걱정하는 이유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란다.”
“그러면 왜…….”
“처음부터 네가 원한 일이 아니었잖니.”
차분하던 목현의 목소리가 서서히 격정적으로 돌변하고 있었다.
“바꾸어 생각해 보렴. 네가 귀혈족의 여인이고 매제가 초족의 사내였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느냔 말이다. 아니, 절대 아니지. 주언영 그자는 평생 네 얼굴을 다시 한번 못 보고 내쫓겼을 거야. 아무리 매제가 괜찮은 이라고 해도,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것에서부터 좋지 못한 거야.”
“그건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목현의 속에 답답함이 가득 들어찼다.
“그건 모르는 일이 아니다, 목린아! 왜냐하면…….”
한편, 밖에 나갔던 언영은 맛난 강정을 놓은 작은 상을 들고 신나게 돌아오는 중이었다. 목린이 분명 기뻐할 것이다. 우물우물하며 맛있게 먹을 목린을 상상만 해도 언영의 머릿속이 기쁨으로 풍성해졌다. 그렇게 귀여운 모습을 구경할 기회를 목현에게 빼앗겨 살짝 아쉽기는 했지만, 목린이 행복하다면야 상관없었다.
언영은 요즘 기분이 매우 좋았다. 날아다닐 것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아니겠는가 싶을 정도로 황홀했다. 이유는 물론 목린 때문이었다. 나날이 밝아지는 아내를 보면서 언영은 삶의 달콤함을 즐기고 있었다. 지난번에 물리친 괴물 덕분에 그의 자신감은 더더욱 올라간 상태였다.
이제 여기서 목린과 자신 사이에 아이만 생긴다면 완벽할 것 같았다. 반년 정도가 흘렀다지만 아직 크게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시간은 많았고,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은 나날이 깊어지고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 기다린다면 알아서 생기겠지. 우리 목린이 애라면 얼마나 예쁠까.
그렇게 싱글벙글 웃으며 마루 위로 올라왔을 때.
“너는 주언영을 사랑하지 않았잖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 언영의 몸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손을 애매하게 뻗은 자세로 얼어붙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 자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착각하고, 몰아붙이고, 마음대로 다 하는 동안, 나의 누이는 무서워서 거절 한마디 못 했잖니.”
언영의 숨이 떨렸다.
“그 사람들이 정말 좋은 이들이라 치자. 그래. 그렇다고 나와 섬사람들이 옳다구나 하고 그들을 곧장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힘없는 나의 누이를 데려갔는데!”
“오라버니, 목소리를 너무 키우셨어요! 바깥에 다 들려요!”
목린은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다. 혹시라도 바깥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휴우…….”
휑한 마당을 발견한 목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도한 표정과 함께 천천히 문을 닫았다.
쿵.
그리고 잽싸게 지붕 위에 올라간 덕분에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던 언영은, 다시 가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그의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이마에선 어느새 식은땀으로 홍수가 나고 있었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잘못 들었겠지. 아니, 제대로 들었다고 해도, 그건 단순히 형님의 오해일 것이다. 목린이 성격을 보았을 때 남들하고 쉽게 마음에 담은 남자 얘기를 할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목린이가 부정하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언영은 가까이 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오라버니 말씀이 옳아요…….”
심장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언영의 마음에 균열이 잃었다.
나이 먹고 평생 보인 적 없는 겁먹은 얼굴로 그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등을 틀었다. 뛰쳐나갔다. 어디든 좋았다. 여기서 멀어질 수 있는 곳이라면.
목린(木隣) 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