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장 (17/25)

17장

언영이 곁에 없는 쓸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정답게 인사를 주고받고, 함께 활기찬 대화를 나누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특히 늦은 밤에 언영 없이 홀로 있을 때면 더욱 울적해졌다. 마구간에 누워 봄비 옆에서 잠든 적도 있었다. 자리가 불편했지만 홀로 있을 때 느끼는 외로움에 비할 바 아니었다.

빠르게 추워지는 날씨는 괜히 언영과 떨어진 지 무척 오래되었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언영과 같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면 얼마나 즐거울지 상상되었다.

글을 써서 마음을 보내고 싶어도 넓은 망망대해 어디에 있을지 모를 그에게 섣불리 새를 보낼 수도 없었다.

‘나도 서방님께 뭔가를 해 드리고 싶어.’

매일 침상에 홀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귀혈족이 무서워서, 언영이 무서워서 억지로 하는 것 말고. 정말 그를 사랑해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행동을 그에게 보이고 싶었다. 그렇다고 꽃 가락지처럼 너무 쉬운 건 말고. 엄청난 노력이나 많은 양의 금전을 통해 보여 줄 수 있는 것. 그가 진정으로 놀라서 감동할 만한 어떤 것이 있었음 했다.

의외로 해결책은 쉽게 찾아왔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번엔 동쪽 마을에서 열리는 부족대회에 함께 하고픈 이를 받는 공고가 이곳저곳에 나붙어 있었다. 가을에 서방님께서 참여하는 것을 꼭 보고 싶었는데. 목린이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그대로 골목을 지나치려던 그때였다.

공고 끝에 쓰인 우승 상금이 그녀의 발목을 세게 붙잡았다.

* * *

“종목은 그때그때 달라서 뭐가 나올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자주 나오는 게 따로 있다 보니 사람들은 그것 위주로 준비를 한답니다.”

“그중에 제가 연습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오목 같은 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실 거예요. 하지만 그 외 몸을 쓰는 일은…….”

누가 뭐라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목린이 가장 부담 없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이는 다인이었다.

물론 다인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목린이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고, 무엇보다 목린이 언영의 부재 탓에 우울해한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혼자 괴로움의 늪에서 헤엄치는 대신, 다른 일에 시간을 공들인다는 것은 좋은 발전이었다.

두 사람은 지난여름을 함께 보냈던 훈련장에 같이 서 있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두꺼운 옷이 날씨의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약간 더 서늘한 바람과 붉게 물든 주변 산이 가을이 왔음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씩씩하게 옆으로 땋아 내린 목린의 머리가 흔들거렸다.

목린은 그녀의 몸을 훑는 다인의 눈동자에서 걱정과 염려를 읽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직전에 다인은 얼른 활짝 웃으며 감정을 숨겼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마셔요! 오로지 재미를 위한 대회예요. 누군가가 더 부족하다고 해서 결코 비웃지 않아요. 물론 과도한 호승심을 지닌 이들도 종종 있지만…….”

다인의 눈동자가 은근슬쩍 옆으로 향했기에 목린의 고개도 그쪽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여인들이 눈에서 살기를 피우며 수련하고 있었다. 지켜만 봐도 숨이 턱 막히고 머리털이 곤두섰다. 하늘 위로 온갖 칼날이 날아다녔다. 그들은 몸통만한 돌덩이를 함께 던지며 놀고 있었다(따라 하지 마세요).

다인은 얼른 말을 끝맺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우린 우리 나름대로 열심히 놀면 그만이랍니다!”

다인은 바위가 나란히 놓인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머리통보다도 큰 것을 한 손으로 쉽게 집었다. 그리고 머리 위로 치켜들며 목린의 앞에서 자세를 선보였다.

“저처럼 이렇게 서서 버텨 보시겠어요?”

목린은 망설이듯 끄덕이며 바위를 건네받았다.

“흐아! 으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그만! 그만하셔도 돼요!”

“아아아아아으아아!”

고통이 가득한 괴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주변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다인은 팔을 흔들어 가면서 목린을 저지해야만 했다. 의욕이 충만한 목린은 얼굴이 시뻘게지고 팔이 후들거리다 못해 부러질 것으로 보여도 최대한 열심히 버텼다.

“어째 갈수록 표정이 언영이를 점점 닮아 가시네…….”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다인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얼른 손뼉을 치며 밝게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앞서 말했다시피 몸을 쓰는 일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틈틈이 여러 가지를 번갈아 연습하면 될 거예요.”

“네……!”

* * *

떨어져있는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처음엔 언영이 없어서 그 무엇에도 자신이 없었는데, 이는 도전해 보지 않았기에 생기는 불안함이었다. 밤새 다른 이들과 공터에 앉아 노닥거렸다. 언영이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고 잔소리했을 술도 사람들과 마음껏 마셨다. 모두가 취한 밤에는 여자들의 은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목린은 이때마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나 표정과는 달리, 개중에는 아주 이로운 정보가 많았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하는 태도를 접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이번 가을에 목린이 가장 오래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는 다인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한 터라 이젠 서로가 어색하지 않았다. 언영이 없으니까 늦은 밤 서로의 집에서 묵고 오는 일도 잦았다.

지금은 함께 들판에 누워 밤하늘을 구경하고 있었다. 조금 더 추위를 타는 목린은 따뜻한 털을 손에 둘렀고 다인은 머리 뒤에 팔짱을 끼고 털털한 자세로 드러누웠다. 늘 멈출 줄 모르는 다인의 입술이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굳게 닫혀 있었다.

목린은 고개를 돌려 빤히 다인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현오 님 생각하시는 거예요?”

다인이 움찔 놀라며 몸을 떨었다.

“그걸 어떻게…….”

“얼굴에 다 보이셔요.”

지난여름 같이 여행을 다니며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눈치챈 건 아니었지만 가면 갈수록 확실해지는 두 사람의 관계 탓에 부러 자리를 피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다인에게 직접 말한 건 처음이었다. 민감한 문제 같아서 먼저 서두에 꺼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다인은 다소 우울해 보였던 탓이다.

“그렇게 다 보여요? 주언영은 눈치라곤 좁쌀만큼도 없는 놈이고, 문은평은 워낙 이상한 놈이라 따로 제게 말을 해 주지 않더군요. 좀 숨기고 다닐걸.”

“저,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제가 성심껏 들어드릴게요.”

“글쎄요.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다인은 결국 낭만적인 밤하늘의 힘을 빌려 털어놓았다. 여름에 모두 술에 취해 나뒹굴었던 그 날, 현오는 다인을 바래다주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눈이 맞아 함께 밤을 보냈다고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다인은 본격적으로 두 사람이 잘해 보길 바랐으나 현오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상황을 설명해 주는 다인은 혈기 넘치는 귀혈족답지않게 꽤 쑥스러워했다.

“현오 그 자식은 절 실망시킬까봐 불안해하고 있어요. 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 자식은 우리의 우애가 깨질지도 모른다면서 확실하지 못한 미래나 걱정하고 있지요.”

그렇게 말하며 다인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모두 핑계예요. 어릴 때부터 녀석이 얼마나 여유로운 성격인지 잘 보고 자랐거든요. 갑자기 저라고 주춤거리니 이상하잖아요. 그날 밤 제 필사적인 유혹도 소용없었던 것이겠지요.”

“글쎄요, 어쩌면 현오 님께 다인 님이 너무 소중해서 그럴지도 몰라요.”

목린이 신중하게 말했다.

“너무 소중해서, 다시 잃기 두려운 거예요.”

다인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쉽게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 없는 사람인데도 귀 끝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다인은 더는 이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목린도 그런 다인을 억지로 대화에 이끌 생각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다인이 부러 활기찬 목소리로 시작했다.

“그러면 이제 목린 님 차례예요.”

“네?”

“제 비밀을 털어놓았잖아요. 공평해야겠지요.”

“저는…….”

결국 목린도 우물쭈물 털어놓았다. 여름에 그녀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다른 귀혈족 여인들을 따라 하는 것이 그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지름길이라고 얼마나 크게 착각하고 있었는지.

다인은 목린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큰 반응을 보였다. 화들짝 놀라며 몸을 반쯤 일으키고 빠르게 사과했다.

“저, 목린 님. 목린 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을 알았더라면 저는 애초에 훈련을 제안하지 않았을 거예요. 언영이가 좋아할 거라고 옆에서 부추겼는데, 오해의 여지를 남겨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언영이 그 자식이 좀 바보 같긴 해도 절대 그럴 놈은 아니에요.”

“아니에요. 다인 님은 사과하실 필요 하나도 없어요. 다 제가 혼자 오해해서 그랬는걸요.”

목린도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며 웃었다.

“혹시 지금도……?”

다인이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목린이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아니에요. 이번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들고나니 이리도 마음이 풍요로웠다.

‘그러니까 나도 보답해야지. 상금 얻어서 서방님 멋있는 거 사다 드릴 거야.’

그리고 언영에게뿐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도 더 따뜻해지려고 노력하고 싶었다. 이런 행복감을 다 같이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목린은 얼굴을 푹 수그리며 얼굴을 붉혔다.

어쩌면 언젠가는, 언영에게 용기 내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인이 팔을 괴고 하늘을 노려보았다.

“우리 모두 별것도 아닌 거로 고민이 많네요.”

“그래도 제 걱정은 말이 되는 것 같은데요.”

“어? 목린 님 그런 분일 줄 몰랐는데.”

다인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친한 벗들에게 으레 그러듯, 본능적으로 주먹을 내밀어 목린의 어깨를 팍 쳤다.

하지만 귀혈족과는 다른 목린의 몸이 반 정도 날아갔다.

“아아아아!”

“에구머니나! 죄송해요! 너무 친근해진 나머지 평소 친한 녀석들 다루듯 해 버렸어요.”

다인이 얼른 팔을 뻗어 날아간 목린을 당겨 안았다. 목린은 다인의 품 안에서 어색하게 꼬물거렸다.

“저기, 다인 님.”

“네?”

“그러면 저희 이제 꽤 친하다는 뜻이겠지요?”

목린은 수줍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인을 올려다보았다. 다인은 저도 모르게 숨 쉬는 것을 멈췄다.

“그러니까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목린이 속삭이듯 물었다.

‘귀여워.’

목린을 어떻게든 자기 아내로 맞아들이겠다고 바다를 넘나들며 수 해 동안 난리를 치던 언영의 행각이 한꺼번에 이해되었다. 다인은 홀린 듯이 더듬거렸다.

“네, 무, 물론이에요.”

“그리고 말 놓으셔도 돼요.”

“그래. 많이, 언니라 불러 줘요. 많이, 많이 불러 줘. 많이…….”

더듬거리는 다인에게서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 * *

커다란 다섯 척의 함선이 바다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제도, 그저께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가끔 배를 공격하고자 하는 녀석이 물에서 올라왔으나 배에 탄 이들이 경계하고 있던 대상은 아니었다. 손쉽게 해치웠다.

흔적을 쫓아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바닷속 보이지 않는 길로 가는 적을 따라가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에 띄지 않는 편을 좋아하는지, 지난번과 같이 참혹한 현장이나 물을 시꺼멓게 만들어 놓은 독과 같은 증거를 충분히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배 위의 전사들의 표정은 위풍당당했다. 마냥 걱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 불안감을 내보이면 남들에게도 얼마나 영향이 갈지 알기에 숨기고 있을 뿐이다.

언영은 다섯 척의 배 중에 정중앙에서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귀혈족하고 명족이 함께 탄 배였다. 그는 그보다 스무 살 정도가 많은 명족의 족장과 나란히 서서 배의 가장 앞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팔짱을 끼고 있는 명족의 족장 옆에서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린 채 무표정으로 바다를 탐색했다. 서늘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오늘따라 바다는 더 조용하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늦어도 언제까지 포획해야 할까.”

“올해가 지나기 전에 해결하는 게 좋겠지.”

언영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명족 족장의 조카인 호민이 그 근처에 서 있었다. 언영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을 보았다.

“올해라…….”

생각에 잠기는 언영의 눈이 감겼다. 그건 다시 말해 겨울이 한참 지나고서도 목린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여름에 목린과 쌓은 싱그러운 추억은 이 지독한 바다에서 크나큰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었다. 목린이가 그를 향해 웃어 주는 모습, 품에 안겼을 때 꼬물거리는 귀여운 몸짓, 맛있게 식사하는 사랑스러운 미소, 만지면 손이 녹을 것 같은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속살과 그의 귀를 벌겋게 익게 하는 야릇한 신음 소리. 그 모든 게 지겨운 이 푸른 물결 속에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좋은 벗이었다.

그리움이 더 커진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석 달이군.”

언영은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명족 족장이 그를 힐끔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호민은 굉장히 위엄 있는 자세로 주변을 무겁게 압도하고 있는 벗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을 깨고 그가 말했다.

“두 달, 언영아.”

“…….”

언영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서 명족 족장이 꾸역꾸역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났다.

“괜찮아, 언영아. 넌 성격이 좋잖아.”

호민은 그런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넌 지금도 충분히 멋있는 사람이야.”

“이번엔 분명히 팔짱 아래에서 몰래 손가락을 접으며 세 봤는데 뭐지? 네가 틀린 거 아냐?”

“그건 아닐 거야.”

“그건 아닐 거다.”

“모두 굉장히 확신하는 말투군요.”

귀가 밝은 이들 몇몇이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주언영 등신 새끼 숫자도 셀 줄 모르냐!”

“멍청한 놈!”

사방에서 장난기 섞인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다는 평화롭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 부상한 대화 주제는 심심한 이들의 귀를 바로 사로잡았다.

“네 생일도 마지막 달에 있지 않았냐!”

“이 누님이 특별히 네 생일에 찾아가 준다! 네가 못 셀 것 같아 그런다! 딱히 축하해 주려고 가는 건 아니다!”

“나도 찾아간다!”

“나도!”

“저도 갑니다!”

“그런 의도로 올 거면 절대 오지 마!”

언영의 외침은 모든 배에서 타오르는 괴성에 묻혀 버렸다. 어느새 이곳에 모인 자들 중 한 명도 빠짐없이 다 함께 언영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겠다고 맹세 중이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은 다 데려오겠다는 자들도 많았다.

“무조건 올 거다!”

“오지 말래도!”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아니! 무조건 올 거다. 왜냐하면 그건, 네 생일이 당도했을 즈음엔 우리가 깔끔히 녀석을 죽이고 안전하게 집에 있는 가족 품으로 돌아갔을 거란 뜻이니까!”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모두가 두 팔을 들어 환호했다. 집과 가족. 지금 여기 있는 모두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두 단어였다. 언영도 버럭하던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야, 올해뿐만이 아니라 매해 그렇게 놀리려 쳐들어와도 상관없었다.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있으리라.

본디 그들은 해저에 있는 괴물들을 모두 죽이려 들지 않았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임은 물론이며, 굳이 그쪽에서 육지까지 기어들어 오거나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이 아닌 이상 서로에게 피해를 줄 일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이 식인 물고기를 처치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경우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제껏 없었던 강한 놈의 등장이었다. 바닷물 속에서도 당연히 먹고 먹히는 관계가 있음은 알고 있었으나, 그렇게 바다를 피 냄새나는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놈은 처음이었다. 기록이 맞는다면 약 200년 만의 불균형이었고, 불균형은 언제나 좋지 않은 일을 가져다준다. 그것이 봄에 호민이 언영에게 일러두었던 탐사의 시작을 던졌다.

그리고 여름에 나갔던 명족 일행이 보고 돌아온 것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언영이 목린과 친우들하고 세상을 둘러보고 오는 동안 그들은 죽음을 접했다.

‘뱀 같기도 하고, 그런데 뱀이라고 하기엔 이상하고, 또 마치 사람 같기도 했어.’

명족의 마을에 도착해서야 언영은 호민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봄에 생기가 흘러넘치던 친우는 어디 가고, 겁에 질린 창백한 청년이 눌러앉아 있었다.

호민이 떨리는 입술로 속삭였다.

‘언영아, 녀석은 귀찮아서 우리를 살려 둔 거야.’

육지에 있는 부족들이라고 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진 않았다. 다만 그들은 무서움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 믿었기에, 그 점에 의미를 품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우렁차게 내지르는 행동도 어떻게 보면 함께 이겨 나가자는 다짐과도 같았다.

씩씩거리던 언영은 갑자기 주저앉는 호민을 보고 당황했다.

“호민아, 왜 그래?”

언영은 호민과 눈을 맞추기 위해 똑같이 무릎을 굽혔다.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어디 또 안 좋아? 들어가서 쉴래?”

“아니, 그게 아니라…….”

호민은 고개를 저었다.

시끄러운 소리에 예민한 호민은 이렇게 주변이 함성으로 가득 차면 귀를 틀어막고 자리에 주저앉고는 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두통에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호민이 말을 간신히 이었다.

“우리 너무 시끄러운 거 아니…….”

그리고 그때였다.

바다가 찢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시커멓고 거대한 것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솟구치고 나와, 마치 바다를 양옆으로 갈라 버리는 착각을 자아냈다.

넋 놓고 그것의 출현을 지켜본 모든 이들이 할 말을 잃었다. 이미 이전에 목격한 경험이 있는 명족 사람들의 태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민의 말대로 그것은 뱀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했다. 뱀이 거론되는 이유는 그것의 뒤로 길게 뻗어 나가는 꼬리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충 한 번 철썩거리기만 해도 파도를 자아내어 커다란 배를 삼켜 낼 것만 같았다.

다만 그것을 단순히 뱀하고만 비교하기엔 너무도 터무니없었다. 너무 컸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수많은 괴물, 식인 물고기와 대적하긴 하였으나 이렇게 커다란 녀석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경험이 모두 고작 포말로 느껴질 정도였다. 감히 육지의 생물 중에 이것에 비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저것이 사람과도 유사하다 언급되는 원인은 크게 말해 둘이었는데, 하나는 두 팔과 열 두 개의 손가락, 그리고 이성을 지닌 듯한 누런 눈이었다. 여태까지 보았던, 단순히 죽이고 먹는 행위 그 이상엔 관심이 없어 하던 짐승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하늘로 올라온 그것의 머리가 차차 아래로 숙여졌다. 검은 눈동자는 자신의 앞에 놓인 배 다섯 척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조금의 두려움이나 불안도 없이, 단순히 땅을 지나가는 개미를 구경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양옆으로 크게 찢어진 입 안에 불규칙적으로 자란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다.

“…….”

언영도 잠시 말을 잃고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하하하하하!”

다행히 누군가가 웃기 시작했다. 어떤 은인 덕분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대경실색하던 이들이 차차 정신을 되찾았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두려움을 물리치고자 모두가 하나씩 웃음소리를 더했다. 가슴을 앞으로 당당하게 내밀고 현란하게 미소 지었다. 괴물은 살짝 눈을 찡그렸다.

“하하하하!”

그때를 시작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호탕한 웃음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용기 있게 돌진한 그들은 괴물의 두꺼운 가죽 위에 올라타고, 무기를 던지고, 난동을 피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의 껍질을 뚫을 수 있는 무기는 얼마 없었다. 거의 모두 튕겨 나가거나 부러지고 구부러졌다. 정말로 날카로운 칼날은 간신히 박히긴 하였으나 고통을 줄 정도의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웃음 뒤로 난감함이 드러누웠다.

이번에는 괴물의 차례였다.

“으아아아악!”

괴물은 일부러 물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말기를 반복하며 몸을 뒤틀었다. 물이 매달려 있던 이들의 몸통을 매섭게 후려쳤다. 고작 이 정도로 나가떨어질 체력이 아닌지라 모두 여전히 끈질기게 괴물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으나, 물을 먹은 그들의 인상이 점차 어두워졌다.

이어서 괴물은 손을 휘저어가며 몸통에 매달린 인간들을 잡아 뜯으려 했다. 날카로운 손톱이 몸을 가르러 다가오는 그 순간, 모두 자진해서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괴물의 움직임은 처절한 발악이라기보다는 귀찮게 달라붙는 조그만 먼지들을 떼어 내는 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그 행동이 일으키는 커다란 파도와 크게 상반되었다. 가시가 여러 개 박힌 꼬리만 몇 번 흔들었을 뿐인데 그로 생겨난 어마어마한 너울이 배에 타고 있던 인간들을 덮쳤다. 갑판 위로 물이 고이고, 파도 위에 휩쓸린 배들은 기울어져, 아주 잠깐이었으나 거의 수직으로 서기까지 했다.

여전히 귀가 아파 웅크리고 있는 호민을 지켜 주느라 배에 남아 있던 언영은 화들짝 놀랐다. 한쪽 팔로는 호민을, 나머지로는 배 기둥을 잡으며 매달렸다.

호민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영아, 괜찮아?”

“어. 나는 멀쩡…….”

활기차게 답하던 언영의 말이 툭 끊겼다.

눈앞에서 생긴 엄청난 파도에, 옆에 있던 배가 완전히 뒤집혀 버리고 말았다. 언영이 타고 있던 배는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뒤집힌 배에 타고 있던 이들이 허우적거리며 바다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행히 이런 일 따위로 목숨을 잃을 이들은 없었다. 모두 어려서부터 물속에서 온갖 경험을 다 하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하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대로 모든 배가 뒤집어지고, 망가진다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기회마저도 물거품이 된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바다에서 살아남는 것과 헤엄을 쳐서 그 먼 길을 돌아가는 행위는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빨리 처리해야 해.”

언영이 긴박하게 중얼거렸다.

상황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이번에 괴물은 여섯 손가락이 달린 징그러운 손을 뻗어 가장 끝에 있던 배를 위로 쑥 들어 올렸다. 커다란 밥그릇을 제 입 근처에 가까이 갖다 대는 모양새와 유사했다.

안에 있던 용감한 전사들은 더 나은 기회를 노리기 위해 부러 바다에 직접 몸을 던지기도 했으며, 또는 오히려 이것을 발판으로 삼아 입 안을 공격하려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아무래도 딱딱한 껍질보다는 여린 입 속에 무기가 잘 침투하리라 생각한 탓이다.

후자는 괴물 또한 예상치 못한 듯했다. 잠깐이나마 징그러운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런데 당혹은 아주 잠시뿐, 그것은 약점이 될 법한 입을 다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크게 벌리는 자세를 취했다. 아래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언영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이상하게 여긴 것은 언영뿐만이 아닌 듯했다. 경험이 쌓인 무사들 또한 용케 무언가를 직감하고 몸을 뒤로 내뺐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것의 입에서 검붉은 것이 쏟아져 나왔다.

자칫하면 피로 보일 법하였으나, 하나의 공격도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이 혈흔을 토해 낼 이유가 없었다. 꿀렁거리는 그 정체불명의 것이 배 위로 투두둑 쏟아지며 웅덩이를 자아냈다. 이상한 악취가 났다. 어떻게 보아도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독이 분명했다.

괴물은 계속 이어서 발악했고 인간의 공격은 먹히지 않았다. 전혀 지치지 않는 괴물의 안색과는 상반되게, 인간들의 낯빛은 서서히 초조함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시끌시끌 날아올라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이미 실패한 전적이 있었으나 다시 한번 시도했다. 이번에는 몸통이 아닌 눈과 입 등이 위치한 얼굴 쪽을 과녁으로 두고 발사했다. 그러자 이상한 점이 두드러졌다.

인간들의 행동에도 하등 겁먹지 않고 되레 귀찮아하던 태도를 보이던 그것이 확 돌변했다. 몸통을 뒤틀며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거칠게 흔들리는 배 안에서 언영은 열심히 중심을 잡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것이 갑자기 저렇게 반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주아주 세심하게 살핀 후에야 간신히 발견했다. 저것의 두 눈 사이 미간이 위치한 곳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입술보다 살짝 위쪽에 붉은 점 같은 것이 보였다. 거칠고 딱딱해 보이는 가죽과는 달리 그 부분만 마치 얇은 피부로 번들거리는 것 같아 보였다.

몸을 날려 누군가가 괴물의 머리통 위에 올라갔다. 그러나 붙잡고 매달릴 것이 없었다.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괴물이 머리를 몇 번 흔들며 저항하자 그는 금세 나가떨어졌다. 어떻게든 두피 속으로 박아 넣으려고 했던 검을 손에서 놓치고야 말았다.

순간, 검날에서 반사된 빛이 괴물의 눈을 향해 정통으로 돌격했다. 그러자 그것은 몸을 격하게 뒤흔들며 듣기 끔찍한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싸움은 더욱 힘들어졌다. 물속에 빠진 이들이 온 힘을 다해 정신을 붙잡고, 또 다른 나머지 배 중 한 척이 똑같이 엎어질 위기에 처했다. 어떻게든 괴물의 몸에 달라붙은 이들도 필사적인 힘을 써 매달려야만 했다.

그런데도 언영과 호민의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빛에 약해.”

둘이 거의 동시에 중얼거렸다.

해저에 사는 동물에게 흔히 나타나는 약점이라 특별할 것은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절망에서 찾아낸 희망이라 그 의미가 컸다.

드디어 언영이 몸을 던졌다.

전투는 계속되어 가고, 무적의 상대를 앞에 둔 사람들은 지쳐갔다. 주변에서 고함과 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거센 파도에 배들은 길 잃은 아이처럼 흔들렸다. 한편, 모두가 정의롭게 맞서 싸우는 와중에 배에서 떨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형님, 어지럽습니다!”

“그러게 너는 따라오기 아직 어리다고 말했잖아!”

북쪽에 있는 부족에 사는 한 소년은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이 일에 참여하겠다고 지원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신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본래 이런 일을 좋아하는 부족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 막을 정도라면 얼마나 힘든 사건인지 예상했어야 했다.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 거의 뒤집히기 직전까지도 갔다. 괴물이 움직이며 만드는 거대한 파도 탓에 자꾸만 갑판으로 물이 쏟아졌다. 배 기둥을 꽉 안고 꼼짝도 하지 않는 소년의 전신이 모두 홀딱 젖어 있었다. 입을 벌리니 거기서 실수로 삼켜 버린 바닷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손톱자국이 생길 정도로 기둥을 긁으며 소년이 크게 울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그거 잘 붙잡고 있어! 위험하게 움직일 생각하지 말고!”

옆집에 살고 있어서 평소에 막역한 친분을 쌓고 있는 다 큰 청년이 반대쪽 기둥에 기대어 외쳤다. 소년은 눈물, 콧물, 바닷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열심히 끄덕거렸다.

그런데 그때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도 놓칠 수 없는 엄청난 움직임이 보였다.

“저것 좀 보세요!”

굉장히 빠른 사람이 거침없이 위로 도약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괴물의 눈앞이 분명했다.

“대단하다!”

“언영이라면 저럴 만하지.”

청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깜짝 놀라 청년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래도 어린 나이라 자신의 부족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상대적으로 아는 것이 부족했다.

“정말 그분입니까? 아까 놀림당하시길래 바본 줄 알았어요!”

“저 녀석, 누이를 죽이려고 했던 패거리를 어린 나이에 혼자 다 찢어발겼어.”

급격하게 올라오는 존재를 인식한 괴물이 거센 바람이 들이닥칠 정도로 팔을 휘휘 저으며 언영을 잡아 손으로 으깨려고 했다. 언영을 뒤따르던 이들 몇몇은 부딪혀 날아갔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날렵하게 나아갔다.

“저런 놈들이 더 있을 게 분명하다며 아예 뿌리를 뽑고 싶다고 나섰지. 당시에는 지금처럼 이렇게 부족들끼리 친하지가 않아서, 함께 힘을 모아 적대적인 세력을 물리치자는 소견도 적었지. 어린 나이에도 그때 우리를 단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게 저 녀석이야.”

언영은 위로 단검을 푹 찍어 날렸다. 괴물의 피부에 찍힌 그것을 뛰어올라 잡고, 또 그 자리에서 새로운 검을 날린 후, 몸을 위로 돌려 던졌다. 그런 방식으로 괴물의 얼굴까지 올라갔다.

“한데 평상시 성격은 유들유들하고 호방하기 그지없으니, 모두 편하게 대하며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지.”

언영이 갑자기 갖고 있던 장검을 난데없이 허공으로 내던졌다. 하나라도 더 쥐고 있어야 이득인 무기를 왜 내던졌나 싶었는데, 바로 그곳으로 햇빛이 부딪쳐서 모였다. 지척에서 강력한 섬광이 날아오자 괴물은 눈을 감고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이제 언영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눈에는 동경이 가득 차 있었다. 아이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그러면 바보가 아니셨군요!”

“아니, 그런데 또 바보는 맞는 것 같단 말이지.”

괴물의 시야 위로 날아오른 언영이 태양을 가렸다. 그 순간 모두 넋을 놓고 그를 주시했다.

언영의 손을 향하여 양쪽에 있던 동료들이 확신에 찬 눈빛과 함께 검을 던져 주었다. 언영은 그것을 간단히 쥐고, 손목을 위로 돌려 검날이 아래로 향하도록 두 팔을 강하게 들어 올렸다.

뒤늦게 시뻘게진 눈을 뜬 괴물이 언영을 잡기 위해 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검은 멀리 날아간 후였다.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그 둘은 서서히 간격을 좁혀나갔다. 언영은 공중에서 날쌔게 뒤구르기를 하며 괴물의 손아귀를 유연하게 피했다.

언영이 던진 두 검 끝이 모두 붉은 점 위에 정확히 박혀 들어갔다.

* * *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 마침내 목린은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동쪽에 있는 운혜족 마을로 향하는 대열 안에 수줍게 꼈다.

언영이 없이 이렇게 멀리 이동하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처음엔 긴장되었지만 그래도 다인을 비롯해 같이 함께하는 동료들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나중에 가서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농담도 주고받을 줄도 알게 되었다. 다만 언영을 향한 그리움은 식지 않은 터라, 지나가다가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면 언영과 함께 왔으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피어올랐다.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 서방님. 돌아오시면 수고했다고 꼭 안아 드려야지.’

목린은 언영이 이기고 돌아오리라는 굳은 확신이 있었다.

‘서방님께서도 내 생각하고 계실까? 하셨으면 좋겠어…….’

언영이 바다의 어디쯤 있을지 종잡을 수 없기에 목린은 단월도 사람들에게 글을 쓰며 그나마 아쉬움을 좀 달랬다. 아버지 익문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언영이 얼마나 그녀를 아껴 주고 좋아하는지를 구구절절 써 넣어 보냈다. 한밤중에도 불을 피워 놓고 써 내려가서, 옆에서 자던 다인이 이젠 좀 쉬라고 잠결에 칭얼거리기도 했다.

가끔은 힘들고 지쳤지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마침내 대회 날이 당도했다.

운혜족의 마을은 육지 가장 끝에 있느라 동쪽에 바다를 끼고 있는 한가한 곳이었다. 귀혈족의 마을보다 전체적으로 건물들이 아담하고 소박했으며(물론 주민들의 육체는 아담함과 거리가 멀었다) 가을을 맞이하여 이곳저곳에 물든 단풍이 함께하여 더욱 포근한 분위기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이는 목린의 마음 상태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겼어요!”

첫 번째 종목이었던 오목에서 이기면서 목린은 두 팔을 높게 들었다. 다소 여유만만하게 따낸 승리라 그때 긴장감이 팍 죽었다.

목린은 이 기세를 이어 나갔다. 그다음은 알까기였다. 목린도, 그 상대도 특출나게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비슷한 실력 안에서 흥미로운 대결이 벌어졌다. 누가 이길지 가늠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상태에서 상대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손가락을 튕기다가 그만 알을 아예 부숴 버리며 실격 처리가 되었다. 목린의 두 번째 승리가 이어지자 귀혈족 사람들은 두 팔을 들고 껑충껑충 뛰었다.

낚시 대결에서 살짝 위험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상대가 너무 답답해 힘을 주다가 결국 낚싯대를 부러뜨려서 실격 처리되었다. 결국 목린이 자연스레 위에 올라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수많은 이들이 탈락한 뒤였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목린은 다음 종목이 적힌 제비를 고르는 운혜족의 족장을 약간 기대 어린 눈빛과 함께 올려다보았다.

운혜족 족장이 쩌렁쩌렁 외쳤다.

“도끼 던지기!”

“아…….”

여기까지구나. 목린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지난봄에 현오가 다인의 지붕을 깨뜨렸던 모습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목린은 결코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괜찮아요, 목린 님. 정말 잘하셨어요.”

“맞습니다. 저희가 보기엔 목린 님만큼 이번 가을에 발전한 분이 없으셔요.”

“모두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온 건 모두 여러분 덕분이에요.”

목린은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알기에, 아쉬웠지만 억울하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언영에게 미안한 마음만 커졌다.

이름이 불리고, 목린은 양손으로 도끼를 붙잡으며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안 되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내던졌다.

도끼는 목린으로부터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꽂혔다. 결과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러나 저벅저벅 꽂힌 도끼를 뽑으러 간 목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아!”

도끼가 찍은 곳은 다름 아닌 개미집의 입구였다. 목린이 도끼를 잡고 뽑아버리니 개미 여러 마리가 같이 밖으로 나왔다. 목린은 얼른 뒷걸음질 쳤다. 도끼를 손에서 쿵 떨어뜨렸다.

목린의 갑작스러운 격한 행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모두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웅성거림이 곳곳에서 태어났다.

“개미집이군!”

“개미집도 ‘집’이니까 엄밀히 따지면 맞는 것 아니오?”

“그렇소이다!”

주변에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목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두리번거렸다.

긴급회의가 열렸다. 각 족장이 모여 빠르게 얘기를 나누었다. 모두가 귀를 쫑긋 세우며 결과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회는 단순히 친목 도모의 목적일 뿐, 실제 실력자를 가르고자 함이 아니었기에 규칙은 그렇게 깐깐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상의 전환을 굉장히 열린 마음으로 두 팔 벌려 받아들였다.

“합격!”

“목린 님, 붙었어요!”

귀혈족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는 목린을 벌써 승리한 것처럼 공중에 들어 올리며 기뻐했다.

그다음 종목도 목린이 자신 있는 분야였다. 유독 탈락하는 이들이 많았던 종목에서 많은 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어쩌다 보니 결국 결승 단계까지 올라왔다.

예상 밖의 활약에 목린의 두 눈이 의욕으로 반짝거렸다.

어쩌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어쩌면…….

선물을 받고 흐하하하 기뻐할 언영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니 모든 피로가 다 녹았다. 그에게 제대로 된 것을 줄 수만 있다면 이까짓 대회는 날마다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희망은 마지막 종목이 발표됨과 동시에 박살 났다.

“달리기라니…….”

게다가 재미로 달리는 것도 아닌, 진심으로 체력을 가지고 승부를 보는 시합이었다. 더하여 마지막에 가서는 약간의 암벽 또한 올라야 했다.

아무리 오늘 목린의 운이 좋다고 한들 절대 이길 수 없는 대결이었다.

물결치는 환호 속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다리는 움직이는 데 머리는 다른 곳에서 방황했다. 이미 저 멀리 달려 나가는 나머지 사람들이 보였다. 눈동자가 초조하게 그들을 훑는 동안에 발이 자신의 위치를 잃었다. 우스꽝스럽게 앞으로 철퍼덕 넘어지고야 말았다.

목린은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돌연 전신의 힘이 빠져나갔다. 갑자기 엄청난 벽이 눈앞에 자라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마을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하나하나 스쳐 지나가며, 그들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점에서 죄책감이 솟아났다.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다짐을 했을까.

‘맞아. 여기 나온 거부터가 터무니없는 욕심이었어. 내가 너무 멍청했어.’

여기까지 생각하니 다시 일어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모두가 비웃고 있는 표정을 마주할까 봐 겁이 났다. 아니, 지금도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소름 끼쳤다.

‘서방님이 너무 잘한다, 잘한다 해 주셔서 나 혼자 쓸데없이 자신감만 키웠나 봐.’

언영의 눈에만 잘하는 것처럼 보이면 뭐 하나.

그가 만들어 주는 방패 속에서만 안전하게 살아갈 것도 아니면서.

언영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에 참여하는 거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길 잘했다. 만약에 그런 말을 들었더라면 누구라도 속으로 비웃었을 터이니.

목린은 작은 몸을 더더욱 작게 웅크렸다.

* * *

다섯 척의 배 중에 둘이 완전히 바닷속에 잠식되었다. 소중한 식량과 처소가 모두 저 아래로 떠내려갔다. 워낙 건강한 이들이라 죽은 사람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상처를 입은 이들은 좁아터진 배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육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이다.

빽빽한 통로를 지나가는 와중에 쉬지 않고 쏟아지는 인사를 받았다. 언영은 다정하게 어깨를 부딪쳐 오는 사람들, 손바닥을 마주치고자 팔을 들어 올리는 사람들에게 밝게 응수해 주었다. 그 조그만 괴물의 약점을 완벽하게 명중시킨 언영은 이 배의 영웅이었다. 붉은 점이 관통당한 괴물은 마치 그 점이 신체의 모든 부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양, 결국 힘을 잃고 스르르 무너져 저절로 파멸했기 때문이다.

인사를 받아 주는 와중에도 주변을 살피는 언영의 눈동자는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다 마침내 목적을 발견했다. 언영은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들을 밟지 않게 조심했다.

“괜찮냐?”

“당연하지……. 윽.”

답을 하면서도 현오는 허벅지를 잡고 신음을 내뱉었다.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던 그는 바다를 하염없이 내다보는 중이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영이 차마 못 본 사이에 부서진 배의 커다란 잔재 중 하나가 현오의 다리를 덮쳤다. 다행히 빠른 치료 덕분에 더 끔찍한 일은 모면할 수 있었으나, 고통이 상당했다.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제대로 걸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곧 있으면 육지에 도착해.”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바다와도 안녕이군.”

“업힐래?”

“그건 너무 자존심 상하잖아.”

“기대, 그러면.”

“……그럼 미안하지만 어깨 좀 빌릴게.”

웬만하면 거절하겠으나 이번엔 현오도 참을 수 없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모두가 두 팔을 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땀과 이물질이 뒤엉킨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있는 상대를 마구 끌어안으며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덕담을 주고받았다. 혹시라도 부상이 악화될까봐 언영은 현오를 안으러 오는 이들을 저지했다.

배에서 내리면서도 모두 다 언영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들기고 갔다.

“언영아, 대단했어!”

“정말 멋있었다!”

“아니야. 아까 너 어디 다친 것 같던데 푹 쉬고. 든든하게 잘 먹고.”

언영은 호쾌하게 대응했다. 간혹 언영에게 인사를 한 이 중에는 현오의 부축을 돕겠다는 자들도 있었다.

“좀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현오가 말렸다. 언영의 도움을 받는 것도 미안한데 또 다른 사람의 손까지 빌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다리가 불편하니 나머지와 비교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고된 여정에 지친 이들은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부으며 식사하러, 몸을 씻으러, 또는 잠을 자러 달려 나갔다. 현오는 앞서 달려 나가는 동지들을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영아, 너도 힘들 텐데 그냥 먼저 가.”

“어떻게 친우를 버리고 그냥 가냐. 뒤처지는 이들을 모두 안아 주는 게 내 의무야.”

언영이 무덤덤하게 내뱉은 말이 현오의 가슴을 따뜻하게 감쌌다.

“언영아.”

현오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너 같은 벗을 곁에 둬서 행복하다.”

언영은 살짝 놀란 듯 걸음을 멈추다가, 현오를 힐끔 보다 피식 웃으며 감정을 숨겼다.

“안 어울리게.”

“아니, 정말이야. 너같이 마음 따뜻하고 재밌는 놈을 곁에 둬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현오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언영은 가볍게 웃어넘기며 정면을 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본래 배는 명족의 마을에서 출발했지만, 괴물을 죽이고 나니 가장 가까운 육지는 운혜족의 땅이었다. 배가 부서지면서 많은 식량을 잃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도 종착지가 바뀌었다. 다행히 운혜족도 동맹 중의 하나였기에 갑작스럽게 밀려들어 오는 이들을 환영했다. 깔끔하게 적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마침 부족대회 중이었다는 운혜족 족장의 말에 도리어 언영 일행이 놀랐다.

재밌는 우연이라고 생각하던 언영의 시야에 마침 대회장이 들어왔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들의 얼굴이 모두 들떠 보여서 언영은 기분 좋게 웃었다.

함께하고 싶었지만 언영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얼른 적절한 곳으로 가 현오를 눕혀 주는 게 우선이었다. 필요하다면 저쪽에 가 사람들과 인사 또한 나누고. 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와중에, 저 대회에 적극적으로 끼어들 생각은 하등 없었다.

그렇게 돌아서려던 차에.

“……?”

믿을 수 없는 것이 보였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현오는 여전히 감동에 빠져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털어놓았다.

“내가 너와 가장 친한 벗이라 자랑스럽다. 네가 이끌어 나갈 부족의 미래가 기대……. 아아아아악!”

“목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언영은 현오를 옆으로 던져 버리고 앞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목린아! 목린아아아아!”

몸을 웅크리듯 누워 있던 목린의 귀가 쫑긋했다. 설마?

“목린아, 나야! 보고 싶었어!”

목린은 고개를 얼른 들어 올렸다.

이건 환청이 아니야.

홀린 듯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났다.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하하하하하하! 저기 보세요, 제 부인입니다! 흐흐흐흐하하하하하!”

“……!”

드디어 언영을 발견했다.

늦게 참석한 터라 상당히 뒤에 서 있었으나 키가 큰 그의 미소를 못 알아볼 리가 만무했다. 언영은 목린을 잘 볼 수 있게 제 자리에서 뛰며 계속 주변 사람들의 어깨를 안고 목린을 자랑했다. 언영이 그 누구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목린은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무너져도, 실패해도. 실수해도 나를 나라는 사실 그 자체로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용기를 내 고개를 드니 알 수 있었다.

주변에 그녀를 비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 목린의 두려움이 만들어 낸 환청일 뿐이었다. 오히려 제대로 귀 기울이니 들렸다.

“괜찮아요! 다시 일어서서 달리면 돼요!”

“아니면, 정 힘들면 그만해도 괜찮아요!”

언영뿐만이 아니었다. 귀혈족 사람들 또한 명랑하게 목린을 응원하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 만나는 이들까지도.

목린이 천천히 다시 걷기 시작하자 모두의 얼굴에 기쁨이 잡혔다.

이미 승자는 나온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노력하는 이가 있어 아무도 이 시합을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목린의 앞에 달리던 이까지 완주를 끝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목린 하나였다. 목린은 모두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숨이 가빠오면서도 귓가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쾌활한 응원을 들으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귀에 잘 들어오는 소리는 단언컨대 언영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다지 높지 않은 암벽을 오를 차례가 되었다. 보통의 육지 사람들은 그냥 팔짝 뛰어도 넘을 수 있는 높이였지만 목린에게는 가능하지 않았다. 목린의 손과 발이 하나하나,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잠자코 숨을 죽였다.

앞서 도착한 이들이 모두 나란히 서서 목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결같이 따스한 눈빛이었다. 그들은 목린이 올라오기 쉽도록 손을 아래로 내밀었다.

목린은 웃으며 그들을 붙잡았다. 그녀의 몸이 위로 쑥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목린까지 위에 올라가자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올라왔으면서 목린은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오히려 벅차올랐다.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가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언영도 있었다. 목린의 눈엔 그 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목린아!”

“서방님! 보고 싶었어요! 하하하하!”

목린은 언젠가 수년 전 언영이 가르쳐 주었던 방법 그대로, 머리를 뒤로 젖히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목린아!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언영은 목린과 보다 가까워지기 위해 사람들을 헤쳐 나갔다. 그 모습을 위에서 지켜보는 목린의 마음도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얼른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이 급했다. 그래서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두 팔을 머리 위로 들고 해맑게 웃었다.

“서방님! 서방님! 서방…….”

하지만 너무 앞서 나가고픈 마음이 큰 나머지, 이미 무리한 두 다리가 꼬였다.

“어어?”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목린의 몸이 앞으로 넘어지고, 발목이 접질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