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정말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언영이와 찾아오십시오, 허허허허.”
마침내 언영이 완전히 회복했다.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하는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깥으로 나와 스승과 작별 인사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눈은 그쳤고 바람도 세지 않았다. 겨울이 멈추지 않는 지역치고는 꽤 따뜻한 하루였다.
스승은 목린과 눈을 맞추고 물었다. 떠나가는 이들을 향한 아쉬움이 노인의 눈동자에 배어 있었다.
“한데 언영이가 왜 이렇게 늦는지 아십니까?”
“아니요!”
목린이 어색하게 외쳤다. 고개를 저으면서 양옆으로 땋은 머리가 열심히 흔들거렸다.
“모르겠어요, 전혀…….”
목린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서방님, 좋은 아침이에요!’
괜히 그녀의 존재를 신경 쓰이게 하느니 따로 자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목린은 바로 언영의 바로 옆에 있는 방에서 잠을 청했다. 조금 늦게 일어났기에 목린은 당연히 언영이 깨어 있으리라 내심 믿고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바지춤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언영이 황급히 손을 뗐다.
‘이제 혼자 일어설 수 있으시지요?’
목린은 품에 안고 있던 언영의 새 옷을 언영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언영이 알아서 갈아입으리라 예상하고 그를 등진 채 방에 있는 식물들을 돌보았다.
목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꽃망울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뒤에서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어? 아직도 힘드시면 좀 도와드릴까요?’
옷을 넘겨받은 그 상태에서 언영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단지 목린을 굳은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그랬다.
목린은 다시 일어나 언영의 옆으로 뽈뽈 움직였다. 그의 옆에 앉아 옷고름을 풀어 주고 상의를 벗는 것을 먼저 차근차근 도와주었다. 술렁술렁 벗겨지는 옷 안에서 그의 탄탄한 맨가슴이 드러났다. 목린은 이어서 언영의 허벅지 위에 올려둔 새 옷을 펼치기 위해 집어 들었다. 그렇게 무심코 들어 올린 옷 아래에서 허벅지 사이로 불끈 솟아올라 있는 그의 사타구니를 보고 기함했다.
‘헉!’
목린은 뻣뻣하게 굳었다.
너무 놀라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목린의 위에서 뜨거운 숨소리가 들렸다. 목린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떼굴떼굴 굴렀다. 언영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바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서방님이랑 못한 지가 벌써…….’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아무리 세도 끝이 없었다. 목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렸다. 달거리 중에도 이렇게 오래 못 한 적은 없었다.
‘하아.’
욕정이 쌓인 한숨이 조용한 방의 적막을 깼다.
언영의 커다란 손이 목린의 허리를 천천히 감쌌다. 적나라한 목적을 띠며 여인의 몸을 살살 쓰다듬었다. 목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언영은 그런 목린에게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맨가슴이 목린과 맞닿을 정도가 되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뒤로 확 그를 밀어냈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목린은 언영의 팔을 옆으로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애써 언영을 보지 않고 얼른 도망치며 외쳤다.
‘서방님께선 준비되시면 나오세요! 천천히 하세요!’
언영이 싫은 것이 아니었다. 목린도 언영과 언젠가 다시 함께 보낼 밤이 기대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표정으로 다가오는 언영은 처음인지라 좀 매우 무서웠다. 동굴에서 홀로 백 년을 굶다가 처음 밖으로 나온 짐승 같았다.
‘그래도 그렇게 도망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적어도 눈은 마주치거나 차분히 대화는 하고 나와야 했다. 이제 어떻게 다시 언영을 봐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가 뿌리치고 떠난 뒤 언영이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나빴어.’
“저기 오는군. 허허허허.”
목린은 부러 스승이 시선을 주고 있는 쪽을 피했다. 그리고 얼른 도망치듯이 봄비 앞으로 총총 걸어갔다.
이미 몸에 필요한 짐을 지고 준비 중이던 봄비가 목린을 향해 기쁘게 울었다. 목린이 봄비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이어서 곧장 그 위에 올라타려고 했다.
“어?”
앞에 검은 그림자가 졌다.
목린은 기겁하며 뒤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얼마나 빠르게 다가온 건지 언영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의 거대한 몸이 그녀의 작은 체구를 뒤에서 완전히 가렸다.
“…….”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심각한 표정으로, 언영은 륭이 매고 있던 짐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봄비의 몸에 대신 매달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목린은 아무 말도 못하고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언영과 목린의 짐을 모두 등에 지게 된 봄비는 힘든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 상황에 목린까지 올라타는 것은 무리였다. 당황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목린의 손목을 그때 언영이 낚아챘다.
“아!”
언영은 말없이 목린을 륭의 앞으로 끌고 갔다. 그의 어두운 기운은 주변에 있던 모든 이까지 침묵하게 했다. 현오와 다인 모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들 쪽을 흘겨보았다.
봄비가 두 사람 몫의 보따리를 이고 가니 륭의 등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언영은 목린을 륭 위에 태우고 자신이 그 뒤에 바짝 붙어 앉았다.
‘……!’
몸이 딱 달라붙고 목린은 숨을 들이켰다.
언영이 딱딱한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맞닿을 일은 없었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의 부풀어 오른 양물이 목린에게 닿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녀의 추측을 확신시키려는 듯 언영이 다시 한번 바짝 몸을 앞으로 당겼다.
언영은 뻣뻣하게 얼어 있는 목린의 손에 고삐를 쥐여 주었다.
“잡아.”
“네…….”
목린은 손가락만 바깥으로 나와 있는 토시를 낀 상태에서 주뼛주뼛 고삐를 붙잡았다. 그리고 언영이 뒤에서 같은 곳을 겹쳐 잡았다.
목린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찬가지로 바깥에 드러난 언영의 까칠한 손가락이 목린의 맨살을 천천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무리 목린이 둔한 편이라고 하여도 이게 고삐를 잡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두 사람의 살이 닿는 곳에 불꽃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언영이 내뱉은 진한 한숨이 목린의 귀에 닿았다. 목린은 이대로 기절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목린 일행은 스승의 댁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언영을 살짝 선두로, 나머지 세 명도 비슷한 속도로 함께 나아갔다.
주변에서 현오나 다인이 날씨가 적당히 춥고 좋다고, 이 지역의 나무는 굉장히 길다고 감탄을 늘어놓아도 목린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언영이 의미심장한 분위기로 뒤에 달라붙어 있는 지금은, 목린에게 식은땀 나는 여름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굳어 있는 목린을 보며 다인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목린 님 많이 추우세요?”
“아, 아니…….”
“여기만 벗어나면 다시 여름처럼 더워지니까 걱정 마시어요!”
목린은 숨이 막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언영이 티 나지 않게 하반신을 더욱 가까이 붙였기 때문이다.
“언영이 너는 괜찮냐? 표정을 보니 아직 낫지 않은 것 같은데.”
이번엔 현오가 물어왔고 목린은 혼자 움찔거렸다.
이 말에 올라탄 뒤로는 한 번도 언영의 표정을 살피지 않았다. 아니, 살펴보지 못했다는 말이 옳을 터였다.
그는 어떤 낯빛으로 뒤에서 뜨거운 숨을 내뱉고 있을까.
상상해 보려 하니 허벅지 사이가 조금 조여들었다.
“응.”
언영이 차분히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언영의 손이 은밀하게 목린의 복부로 올라왔다. 얼핏 보면 떨어지지 않게 잡아 주려는 몸짓 같아도, 아니라는 것을 그 둘은 알았다.
“알았어. 그래도 쉬고 싶으면 바로 얘기하고.”
언영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현오는 금방 물러섰다.
목린에게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오로지 뒤에 있는 언영에게 모든 감각을 집중하여 가다 보니, 슬슬 겨울이 멀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하얀 눈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선선한 가을과 비스름한 풍경을 마주하며 가다가 어느새 갈림길 앞에 당도했다.
목린은 어디로 갈지 궁금하여 두리번거렸으나 언영은 이미 이 주변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가는 길에 륭을 움직였다. 목린도 그러려니 하고 가만히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언영아, 이쪽 아니야?”
현오는 언영이 고르지 않은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이 훨씬 빨라. 길이 더 거칠긴 하지만 그래도 힘들 정도는 아닌데.”
“…….”
“언영아?”
“천천히 가자.”
언영이 뒤돌지 않고 말했다. 현오는 잠시 멀뚱히 눈을 깜박이다가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뭐…….”
“경치가 좋은 계곡이 있다고 알고 있다. 둘러보면 뜻깊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동안 조용히 있던 은평이 말했다.
다인이 예고한 대로 갑작스레 날씨는 더워졌다. 은평의 말대로 바위가 험난했던 반대쪽 길과 달리 주변에 가득한 꽃이 마음을 메꾸어 주는 듯하였으나, 그것도 어느 정도 시원해야 가능했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선 옷을 더 가벼운 것으로 갈아입는 휴식이 불가피했다.
“저기 있는 바위 뒤에서 갈아입고 와.”
“네…….”
언영은 주변을 깔끔히 수색한 뒤에, 가장 안전하게 보이는 곳을 목린이 옷을 갈아입을 장소로 뽑았다. 목린은 옷가지들을 품에 안고 우물쭈물 대답했다.
“바위랑 주변 덤불이 커서 보일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네, 네.”
목린이 소심해 하는 것이 몸을 보일까 염려해서라 생각했는지 언영이 덧붙여 말했으나, 목린은 더욱더 고개를 수그리며 얼른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콩콩 뛰어갔다.
‘어떡하지…….’
스승님 댁에 있었던 동안에, 이동하면서 입은 여름옷을 빨았다. 다 말려서 챙겨 놨다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오는 길에 걸치지 않은 얇은 옷은 꺼낸 적도 없어서, 여전히 보따리 깊숙한 곳에 있었는데……. 딱 하나 남은 것이 다름 아닌 얇은 초족 치마였다.
혹시, 정말 혹시 몰라서 입을 일이 있겠거니 싶어 가져왔는데, 다른 날도 아닌 바로 지금 걸치게 될 줄이야.
‘이거 입고 말에 탈 수 있을까? 다인 님한테 빌려 달라고 할까? 다인 님 옷을 내가 걸치면 너무 웃길 텐데…….’
“목린 님, 다 갈아입으셨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다인이 부르자 목린은 말을 흐렸다. 물론 목린은 치마를 매우 좋아했다. 한데,
‘나는 네가 치마를 입을 때면 뒤집어 까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어.’
이런 상황에 입어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드는 탓이다.
‘서방님 꼬드기려고 하는 헤픈 여자로 보이면 어떡하지……. 나한테 실망하실지도 몰라.’
목린은 입술을 앙다물고 생각했다.
목린이 뭘 해도 예뻐 죽겠다고 언영이 말한 게 불과 얼마 전이었으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무엇보다 목린을 가장 거슬리게 하는 사실은 헤프지 않다고, 억울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거 입고 나가서 서방님이 괴로워하실 모습 상상하니까 꽤 즐거워. 난 정말 나쁜 아내가 분명해.’
이 사실을 알면 서방님께서 배신감을 느끼실 게 분명하다. 상상만 해도 오한이 들었다.
“목린 님!”
머릿속이 바쁜 목린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느라 다인의 부름에 답하지 못했다. 저쪽의 웅성거림은 옆에서 흐르는 폭포 소리에 묻혔다. 뒤늦게 웃옷을 입고, 끌려 올라간 치마를 내리려고 하는데 예고도 없이 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감감무소식인 목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걱정했는지 그의 얼굴이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목린아, 괜찮…….”
서둘러 외친 언영의 눈이 자연스레 목린의 맨다리로 향했다. 허벅지 중반부터 발까지 뽀얀 살결이 햇빛 아래에서 사랑스럽게 드러났다.
언영이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목린은 황급히 치마를 내렸다. 나풀거리는 천이 목린의 하반신을 덮은 건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드는 어색한 침묵은 자리에 눌러앉았다.
“…….”
언영은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의 가슴이 서서히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목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얼른 언영을 지나쳐 달아났다.
“목린 님, 언영이는요?”
“고, 곧 올 거예요!”
목린은 봄비가 이고 있던 짐 중에 하나를 빠르게 륭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는 더 이상 한 말에 같이 붙어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목린이 막 봄비 위에 올라타려고 할 때 언영이 다시 무표정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봄비와 륭을 번갈아보며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아무 말 없이 그는 륭의 위에 올라타 여전히 선두로 앞장서 나아갔다. 아무도 그의 낯빛이 어떤지 확인할 수 없었다.
여정은 계속 이어졌다.
언영의 바로 뒤에서는 현오와 목린이 나아갔다. 맨 뒤는 다인과 은평이 지켰다. 목린의 치마는 얇을 뿐 다행히 길어서 발목 위만 조금 드러났다. 목린이 앞만 보고 묵묵히 걸어가는 동안 현오, 다인, 은평은 미간을 좁히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상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잠시만!”
언영을 따라가려는 자신의 말을 붙들며 현오가 갑자기 외쳤다.
“언영아! 그쪽 아니야.”
“……다리.”
“그래, 그쪽에 다리가 있기는 한데 우리가 가는 방향은 아니잖아.”
“다리…….”
목린은 벌겋게 익은 얼굴을 아래로 푹 숙였다. 아무래도 저기서 말하는 다리라는 것이 현오가 생각하는 그 다리가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너 괜찮냐? 아무래도 곧 있으면 나타날 계곡에서 쉬는 게 좋겠어.”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언영이 결국 다시 자리를 잡고, 목린 일행은 앞으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목린의 눈은 오롯이 언영의 뒤태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굵고 남자다운 목과 넓은 바다와도 같은 어깨, 그리고 가슴에서 허리로 들어가면서 굴곡을 그리는 몸 선을 천천히 살폈다. 고삐를 쥐고 있는 손에 땀이 찼다.
두 번째로 목린 일행은 멈춰 섰다. 이번엔 경치를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계곡이 얼마나 예쁜지 살필 겨를도 없이, 목린은 도망가다시피 땅으로 내려가 허겁지겁 덤불을 헤치고 달려 나갔다. 언영의 눈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는 살필 여유가 없었다.
* * *
목린은 다리를 쭈그리고 앉아 어푸어푸 물로 얼굴을 닦았다. 뭐가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잡념을 떨쳐 내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빨개진 얼굴은 원래 상태로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진정하자…….”
가슴께에 손을 꽉 쥐며 혼자 속삭였지만, 허벅지 사이에 움찔거리는 열기는 식지 않았다. 촉촉이 젖어 버린 속곳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목린은 울고 싶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리 음란해질 수 있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
느리고 무거웠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헉.”
목린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냥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서방님…….”
목린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음부에서 나온 물이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목린이 뒤로 채 틀기도 전에 언영이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서방님!”
딱딱하게 발기한 양물이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목린의 엉덩이에 닿았다.
“이젠, 못 참아.”
목린은 제 귀를 의심했다. 언영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며칠을 굶다 나온 짐승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럴 것 같았다.
“서방님, 여기선 안 돼요!”
“차라리 날 죽여.”
언영은 한 손으로 거칠게 목린의 치마를 휘릭 뒤집었다.
“아무도 오지 말라고 해 놨어.”
걱정하고 있을 걸 알고, 그가 목린의 귓가에 밀착해 속삭였다. 그리고 속곳을 확 끌어 내렸다. 해방된 뽀얗고 동그란 엉덩이를 언영이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렀다.
“힘들지 않게 해 줄게.”
한쪽 팔은 목린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한쪽 손을 허벅지 사이에 집어넣으며 언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약조했다. 목린이 초조해하며 엉덩이를 비틀었다.
“그래도…….”
“……?”
음순을 쓰다듬는 언영의 팔이 그대로 굳었다. 그의 손가락 끝으로 축축한 물이 달라붙어 있었다.
“아아.”
목린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땋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더 당겨 빨개진 얼굴을 애써 가렸다.
언영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머리가 느리게 돌아갔다. 축축한 구멍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정말 그가 생각하는 그 의미가 맞는 건지 천천히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언영의 입이 찢어질 정도로 해맑게 벌어졌다.
“아으읏!”
언영은 목린의 안에 두 손가락을 급하게 집어넣고 손목을 빠르게 털었다. 이미 젖을 대로 젖은 곳이라 바로 쑥 들어갔다. 꿀쩍꿀쩍하는 음탕한 소리가 잘도 나며 언영의 손가락에 목린의 끈적한 물이 치덕치덕 잘도 달라붙었다. 그의 손바닥은 살과 부딪쳐 착착 거리는 소리를 자아냈다.
“좀, 좀 더 천천히!”
“나랑 하고 싶었어? 목린이 너도 나랑 얼른 하고 싶었어?”
언영이 기쁨에 젖어 재촉하듯 물었다. 목린은 답할 수 없었다. 언영의 손이 너무 빨랐다. 그의 긴 손가락이 찰박찰박 내벽을 쑤실 때마다 절로 몸이 비틀렸다. 아래로 울컥울컥 물을 쭉쭉 쏟아냈다.
언영은 손을 빼낸 후 질질 새어 나와 그의 손목에까지 흘러내리는 물을 성스러운 양 빤히 바라보았다. 목린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리를 꼬았다.
“서방님, 저 옷…….”
목린은 치마를 다시 내려 달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으나, 언영은 오히려 아예 그 얇은 천을 아래로 벗겼다. 목린이 뺨에 홍조를 보이며 더듬거렸다.
“여, 여기서?”
언영은 대답을 하는 대신 목린의 허리를 양손으로 안고 하반신을 가까이 붙였다.
목린은 우왕좌왕하며 팔을 앞으로 뻗었다. 앞에 보이는 나무를 의지하듯 끌어안았다. 그러자 뒤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언영이 뜨겁게 쳐들어왔다. 여러 번 관계를 맺었으나 그가 들어올 때마다 굵은 성기는 쫀득한 구멍을 쩍쩍 벌리며 내부를 마구 넓혔다.
다소 오랜만에 벌어지는 삽입에 목린이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언영의 손이 목린의 허리와 엉덩이, 허벅지를 감미롭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는 상체를 숙여 목린의 귓가에 바짝 입을 대고 거칠게 속삭였다.
“얼른, 애 뱄으면 좋겠어.”
언영의 손이 목린의 아랫배를 안았다.
“여기 가득 싸서.”
처음 듣는 경악스러운 말에 목린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아이, 갖게 하고 싶어.”
그리고 언영의 하반신이 거칠게 흔들렸다.
“윽!”
근육으로 딱딱한 언영의 하체가 목린의 몸을 퍽퍽 때리고 살결을 함께 비볐다. 목린은 헐떡거리며 나무를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날것의 교미였다. 입에서 신음인지 울음인지 분간 못 할 것들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온몸이 덜렁거리는 기분이었다. 기둥이 들어오는 통로가 젖었는데도 뻑뻑했다.
“가슴, 가슴…….”
언영이 헐떡이며 속삭였다. 한 손으로 거칠게 목린의 옷고름을 풀었다. 그리고 목린의 출렁거리는 가슴이 잘 보이도록 옷을 당겼다. 흔들거리는 뽀얀 속살을 보며 언영이 눈을 떼지 못했다. 표정만 보면 미쳐 버린 자의 그것이 보였다.
“하아, 하아, 하아…….”
언영은 미쳐 버린 사람같이 허리를 앞뒤로 튕겼다. 턱턱 부딪쳐 오는 두꺼운 하체에 맞춰 목린의 가는 다리가 안쓰럽게 비틀거렸다. 까치발을 하기 너무 힘들었다. 벌벌 떨던 목린이 결국 포기하고 주저앉으려 하기 직전에, 언영이 그녀의 두 허벅지를 번쩍 들어 안았다.
“서, 서방님!”
“하, 하아, 아.”
목린의 몸이 공중에서 찧어졌다.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목린은 나무가 마치 목숨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았다. 언영이 온 힘을 다해 밀어 박으니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만큼 몸이 울렁거렸다. 후방에서 들리는 사람 같지 않은 숨소리가 더욱 공포를 고조시켰다.
공중에 들린 목린의 다리가 힘없이 흔들거리고 목린이 가냘프게 울었다. 언영은 그의 두 손에 딱 맞을 것 같은 목린의 마른 허리를 홀린 듯이 내려다보며 쿵쿵거렸다. 목린이 주는 조임에 황홀해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씨를 내뱉는 과정에도 자비가 없었다. 하반신을 최대한 앞으로 퍽 밀어붙이고 안으로 울컥울컥 쏟아냈다. 목린의 하얀 엉덩이가 덕분에 매 맞은 것처럼 빨갛게 부었다.
“목린아. 우리 저기 있는 물로 씻을까?”
“네…….”
“일어나자. 팔로 나 안아.”
목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두 팔을 언영의 목에 둘렀다. 언영이 깃털을 들고 움직이듯 자리에서 편하게 벌떡 일어섰다. 목린은 얼른 근육으로 두툼한 허리에 다리를 둘러서 매달렸다.
“좀 차가울 거야.”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성큼성큼 물 앞으로 발을 내디딘 언영은 목린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먼저 그의 다리가 물에 들어가고 이어서 목린의 엉덩이가 따라갔다.
시원한 물이 닿자 목린이 흠칫 놀랐다. 예상했다는 듯 언영이 목린의 등을 계속 토닥거렸다. 그는 목린을 위에 두고 자리에 앉아, 마주 본 상태에서 목린의 얼굴을 물로 천천히 닦아 주기 시작했다.
언영은 일부러 목린과 눈을 마주치지 않을 작정인지, 닦아 주는 과정에서도 시선을 잠깐 옆으로 피했다. 오히려 목린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특히 붉어진 그의 뺨에 눈을 고정했다.
“어깨도……. 땀났으니까 여기도 닦자.”
언영이 시선을 흐리며 나직이 말했다. 목린의 뜨거운 눈을 느끼고 있는지 더욱 고개를 들 줄 몰랐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굴었다.
그래서 목린이 먼저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입술이 닿자 언영은 마치 처음으로 여자와 입을 맞춰 본 소년처럼 얼굴을 뻣뻣이 굳혔다. 목린은 물러서지 않고 되레 더 바짝 달라붙었다. 목린의 말랑한 가슴이 그의 가슴에 닿아 꽉 눌렸다. 목린은 언영의 아랫입술을 조심스럽게 물고 빨았다. 언영의 입에 틈이 생기자, 수줍어하면서도 혀를 먼저 밀어 넣었다.
언영의 두 팔이 목린을 꽉 압박시켰다. 목린도 언영의 목을 단단히 안으며 이에 응했다. 누가 더 적극적인지 겨루듯 뜨겁게 혀를 섞었다.
언영이 한 손을 내려 목린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듯하더니 이어서 제 발기한 양물을 또다시 목린의 안에 밀어 넣었다. 목린의 좁다란 길이 언영의 것을 오물쪼물 먹듯 받아냈고 끝까지 처박히자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짙은 한숨이 우러나왔다.
목린이 엉덩이를 직접 첨벙첨벙 흔들었다. 언영이 잠시 입을 맞추다 말고 목을 뒤로 꺾으며 숨을 헐떡였다. 그러다가 얼른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목린의 목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입 맞췄다. 목린은 취한 사람처럼 그를 뜨겁고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사랑에 취했다.
* * *
“언영이에게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아침이니 아마 일어나 있을 겁니다.”
요즘 머무는 마을의 족장이 아침부터 찾아와, 맛난 과일을 싸 줄 테니 갖고 가지 않겠느냐는 말을 물어왔다. 언영이 아직 방에서 나오지 않아 현오가 대신 답했다. 운반할 수 있는 짐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마냥 기쁘게 받을 수 없었다.
언영과 목린의 방으로 발을 옮기던 현오는 불안한 생각에 잠겼다.
‘정말 일어나 있는 거 맞으려나.’
언영과 목린은 요즘 거의 종일 달라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별똥별 떨어진다!’
‘언영아, 목린 님 별똥별 좀 보시게 놔 드려라!’
허겁지겁 옷을 대충 갖춰 입은 목린이 몸통만 나올 정도로 문을 빼꼼 열고 나와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잔뜩 풀어헤쳐진 머리카락 사이로 순진한 눈이 동글동글 빛났다.
목린이 나온 것을 확인한 다인이 주먹으로 때려서 쪼갠 수박을 한 조각 잡고 목린을 향해 걸어갔다.
‘목린 님, 나오신 김에 이거 드시고…….’
그때 목린의 뒤에서 맨팔만 튀어나와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팔은 순식간에 목린을 다시 방 안으로 납치해 가고 문을 쾅 닫았다.
목린을 위해서 결정된 유랑인데, 어째 목린이 가장 바깥 구경을 못하고 있었다.
분명 둘이서 밤새 또 놀았을 텐데 언영이 깨어 있을지, 아니면 아침부터 그 짓거리를 하고 있지는 않을지 현오는 슬슬 걱정되던 차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목린을 복도에서 봤다. 웬일로 아침 일찍부터 나와 계시는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히 방에는 언영 혼자이리라는 생각에 현오는 잽싸게 달려가 아무런 주저 없이 문을 바로 열었다.
“주언영, 빨리 나오……. 으아악!”
현오는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으리라 다짐했다.
언영은 목린을 두 팔에 압박하듯 가둔 상태에서 아침부터 허리를 짐승처럼 쿵쿵 튕기고 있었다. 근육밖에 없는 엉덩이와 허벅지가 질겅질겅 난동을 피우며 들썩였다. 그의 품 안에 구겨진 것처럼 갇혀 있는 목린의 나신은 다행히 전부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서 맥없이 흔들리는 가녀린 다리만 간신히 드러났다. 곰이 아기 토끼를 잡아먹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까 복도에서 보았던 목린의 옷은 어느새 벗겨져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목린이 울음 섞인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현오는 냉큼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문을 등지고 헐떡였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뛰어가야 하는데 주저앉아 버렸다. 못 본 거야. 조금 전 그건 못 본 거야. 난 못 봤어.
“오늘 그만할래…….”
“미안해, 목린아. 놀랐어? 정말 미안해. 울지 마, 뚝.”
가까이 있으니 저 너머에서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가 다 들렸다. 뒤에서 언영의 초조한 음성에 이어 쭙쭙 빨고 뽀뽀하는 소리가 들렸다. 언영이 다정다감하게 목린을 달랬다.
“내 몸에 가려서 하나도 안 보였을 거야.”
“그만……. 오늘은, 오늘은 더는 못하겠어요. 흐윽.”
“그래, 알았어. 그만하자. 오늘은 우리 목린이 쉬자.”
아기도 저렇게 소중히 다룰 순 없을 것 같았다. 계속 뽀뽀하는 소리가 들렸다. 입술이 헐겠다, 헐겠어. 현오는 쿵 하고 머리를 문에 기대며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 가만히 있어. 내가 처리하고 올게.”
축 늘어져 있던 현오의 눈이 팽창했다. 처리?
“으아아아악!”
갑자기 현오의 얼굴 바로 옆으로 날카로운 검이 문을 찢고 나왔다.
아까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잽싸게 현오가 앞으로 기어갔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간신히 바닥을 짚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기대고 있던 창호 문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만 옆으로 실수했더라면 뒤통수에 검이 박혀 그대로 저세상으로 갈 뻔했다.
미친 새끼……. 현오가 입술만 움직이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안쪽에서 검이 다시 뽑혀 사라졌다.
그리고 부서질 것처럼 문이 열렸다.
“너 죽었어.”
급하게 아래 바지만 차려입은 언영이 사람 하나 쉽게 찢을 것 같은 흉흉한 표정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는 목린이 몸 전체에 이불을 덮고 눈만 빼꼼 내밀어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현오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고 언영은 머리 위로 검을 휙휙 돌리며 내달렸다. 그들의 질주는 반나절 동안이나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 * *
그다음 마을은 적당히 선선한 바람을 가진 온화한 여름 분위기의 향리였다. 특히나 다인이 이곳 음식이 유독 맛나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줬기 때문에 목린의 기대치가 매우 높았다. 다인과 재잘재잘 떠드느라 목린은 뒤에서 언영이 웃음을 참으며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 당도했을 때 목린을 놀라게 한 건 외경도, 사람들도, 그 땅의 분위기도 아닌, 그들을 기다린 듯 숙소에 미리 차려져 있던 진수성찬이었다.
“와아아!”
그 마을의 족장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부인의 생일이 오늘이니, 비용은 어떻게든 보상할 것을 약속하겠다, 그러니 도착할 날에 맞춰 온갖 산해진미를 구해 달라고 부탁받았음을 그들이 밝혔다. 목린이 입을 크게 벌리고 언영을 올려다보았다. 언영은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검지로 긁었다.
“어때, 목린아? 좋아?”
“네! 좋아요!”
“여기 있는 거 다 먹어도 돼.”
“정말이요?!”
목린이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열정적으로 물었다. 언영이 안내해 준 곳으로 가 착석한 목린은 다시 한번 눈앞에 마련된 현란한 밥상을 보며 세상 그 누구보다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행복해요!”
“하하하하하!”
옆에 앉은 언영이 한쪽 팔은 상 위에 올려놓고 목린 쪽으로 몸을 튼 상태에서 호탕하게 웃었다. 목린은 서둘러 수저를 들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신나게 외쳤다.
“모두 같이 먹어요!”
식사가 시작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목린의 오른손은 절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영은 의자를 옮겨 목린의 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열심히 식사 중인 목린의 몸을 두 팔로 와락 끌어안았다. 탱탱하게 부푼 목린의 뺨 위에 쉬지 않고 입을 맞추며 감탄을 늘어놓았다.
“귀여워, 귀여워.”
목린이 살짝 눈을 찡긋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서방님, 지금은 밥 먹고 있잖아요!”
“흐흐흐흐…….”
언영은 목린의 뺨에 그의 뺨을 비비며 즐거워했다. 그 순간, 목린이 들고 있던 수저를 탕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정함이라곤 일절 찾아볼 수 없는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지금은 밥 먹고 있다고요.”
“아, 응.”
언영이 어색하게 떨어졌다. 목린의 허리를 휘감고 있던 한쪽 팔만 어색하게 남았다. 그러자 언제 사납게 노려봤냐는 듯, 목린은 다시 수저를 들고 행복하게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맞은편에 앉은 다인이 혀를 끌끌 찼다.
“주언영도 한물갔구나. 밥만도 못한 존재가 되다니.”
“…….”
언영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다인을 쏘아보았다. 언영의 옆에 있던 현오도 짓궂게 입술을 뗐다.
“너한텐 저렇게 웃어 주시는 걸 본 적이 없…….”
“시끄러워. 조용히 처먹기나 해.”
“예.”
다 먹은 뒤 볼록 나온 배를 토닥이며 여운을 즐기는 목린의 손을 이끌고 언영은 거리로 나섰다.
장터를 돌아다니며 목린에게 어울릴 것 같은 장신구는 보이는 대로 족족 집어 들어 어떤지 물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낌새를 보이면 바로 넉살 좋은 미소와 함께 상인에게 금전을 건넸다.
“오늘은 너무 많이 먹었어요…….”
밤이 되어 누운 목린은 언영이 위에 달라붙어 뜨거운 입맞춤을 퍼붓자 부끄러워하며 살짝 피했다.
“몸 움직일 힘이 없어요.”
“괜찮아. 나 혼자만 움직일게. 넌 가만히 있어.”
언영이 목린의 쇄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의 손이 목린의 옷고름을 천천히 풀었다. 목린이 움찔거리며 언영의 손목을 잡았다.
“많이 먹어서 배도 뽈록 나왔어요.”
“하나도 상관없어. 예뻐 죽겠어.”
언영이 제 손목을 포박한 목린의 손에 오히려 입술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목린은 결국 머뭇거리며 언영을 잡은 손을 뒤로 뺐고, 그러자마자 바로 언영이 목린의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겨 냈다.
“으으응…….”
언영의 입술이 목린의 젖꼭지를 집요하게 빨았다. 입술을 오므려 빨아 마시듯 먹다가도 예뻐 죽겠다는 듯 그 위에 쪽쪽 입을 맞추다가 맛있게 핥았다.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음탕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목린이 탁한 숨을 내쉬며 느끼자, 언영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급하게 그녀와 입을 맞췄다. 그가 축축하게 젖어 민감해진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꾸준히 농락하자 혀가 섞이는 순간에도 목린이 헐떡거렸다.
이어서 언영은 목린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목린의 안에서 꿀쩍꿀쩍 물이 새어 나와 아래 작은 웅덩이를 만들 때까지 멈추지 않고 혀와 입술을 움직였다. 절정에 다다랐을 때 언영은 목린의 부풀어 오른 음순을 혀끝으로 더욱 세차게 핥았고, 목린은 덩어리처럼 보일 정도의 물을 울컥 쏟아내며 날것의 교성을 냈다. 듣기만 해도 언영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서방님, 제발. 제발.”
목린이 사지를 격렬하게 떨며 속삭였다.
“제발 넣어 주세요…….”
“넣어 줘? 뭐를?”
츄릅츄릅 핥으며 언영이 부러 짓궂게 물었다.
“아, 아, 알면서.”
“하나도 모르겠어.”
태연하게 그리 내뱉었다. 그러고선 다시 목린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몇 번 깔짝대는 소리가 난 후, 뒤이어 목린이 아래로 물을 듬뿍 쏟았다. 이제 목린은 울고 있었다.
“얼, 얼른.”
“무얼 넣어 달라는 건지 알려 줘야지.”
“서방님, 흐윽, 너무 나빴어요…….”
덜덜 떠는 목린의 전신이 땀으로 젖었다.
씨익 웃은 언영은 몸을 일으켜 앉아 검지와 중지를 목린의 축축한 안에 밀어 넣었다. 찌걱거리며 들쑤셨지만 목린을 만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이거 말고.”
끙끙거리며 목린이 애원했다.
“이거 말고, 서방님…….”
“그러면 뭔데?”
“더, 더 큰 거…….”
목린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더 큰 거? 더 큰 게 뭐야?”
“으, 으으으응!”
“말을 해 줘야 넣어 주지.”
목린은 몸을 일으켜 앉더니 허겁지겁 언영의 하의를 직접 벗겨 내렸다. 언영의 양쪽 입 끝이 천장을 찌를 듯이 올라갔다. 목린은 무섭게 드러난 언영의 성기를 직접 쥐고 자신의 안에 밀어 넣었다. 목린이 정신 나간 것처럼 허리를 흔들었고 언영도 그 아래에서 힘차게 위로 들이박았다. 사정한 후에는 숨 막힐 것처럼 서로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대로 죽어도 좋았다.
* * *
목린이 늦게 잠에서 깼을 때 언영은 사라진 상태였다.
목린은 밖으로 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며 몸을 풀고 있는 은평을 발견했다. 그가 언영의 행방을 알까 싶어 목린은 얼른 다가가 물었다.
“은평 님! 서방님 어디 가셨는지 아세요?”
“해변에 간 거로 알고 있습니다.”
“해변요?”
“오늘은 륭이랑 좀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했습니다. 륭이는 혈기 넘치는 녀석이니 근처 조금 거니는 거로는 만족 못하는 녀석이죠.”
하루 동안은 언영을 륭에게 맡기고 혼자 사적인 나날을 보낼 수 있었겠지만, 목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언영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에게 찾아갈 생각으로 밖으로 나왔다.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대충 짐작하고 봄비 없이 홀로 걸어 나갔다.
그것이 엄청난 착각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 부족 사람들은 목린의 억양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해변이 있는 곳을 캐묻고 다녔는데 그들이 변소를 알려 주고 있음을 알게 된 건 한참이 지난 이후였다. 졸지에 내내 볼일 볼 곳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되어 버린 목린은 울상을 지었다.
정말 해변 근처에 왔을 때는 기력도 다 잃고 좋았던 기분도 이미 망가진 이후였다. 피로했다. 언영의 잘못이 아님을 알면서도 괘씸했다.
목린이 도달한 곳은 아래에 해변을 둔 그리 높지 않은 절벽이었다. 거기서 돌계단을 내려가면 부드러운 모래가 밟히는 바다의 시작이었다. 수평선 위에서 태양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목린은 손을 이용해 눈 위에 그늘을 만들었다. 반짝반짝 일렁이는 차분한 파란을 훑어보며 언영의 흔적을 좇았다.
“하하하하하하!”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언영과 륭은 둘 다 바다에 들어가 있었다. 상반신을 탈의한 언영의 몸이 가슴과 허리 사이까지 물에 잠겨 있었다. 물에 잠기지 않은 곳도 흠뻑 젖은 채였다.
언영은 륭을 씻기고 있었다. 륭은 물을 싫어하는지, 언영이 손을 뻗어 얼굴 주변을 닦아 주면 앞발을 휘날리며 바로 진저리를 쳤다. 그 과정에서 언영의 위로 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언영은 반은 웃고 반은 화를 내며 앙탈 부리는 륭을 싸우듯 씻겼다. ‘야! 가만히 좀 있어!’라 외치는 그의 입에서 명랑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
그 모습을 보자 여기 찾아오면서 쌓인 모든 짜증이 다 허물어졌다.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을 넋 놓고 계속 보게 되고.’
목린은 해맑은 언영의 미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 갑자기 그를 향한 마음이 이토록 커져 버렸을까.
하루하루 쌓이고 쌓여서 애정이 튼튼한 성벽을 이루었다.
언영이 좋았다. 이전의 풋사랑 때처럼 허구 속 존재에 환상을 가진 것과는 달랐다.
그의 지금 이 모습이 좋았다. 지금 저 미소가 목린을 설레게 했다. 저 청량한 웃음소리가 치유제였다.
시간이 영원히 멈춰도 좋아.
“어? 목린아!”
고개를 든 언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절벽 위의 목린을 알아보고 팔을 들었다.
깜짝 놀란 목린은 얼른 못 본 척 등을 돌렸다. 심장이 쿵쿵쿵 난리를 쳤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그를 마주했다간 심장이 터져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목린아, 나 여깄어! 네 뒤에! 흐하하하하!”
좋아 죽는 언영의 눈이 곱게 접혔다. 그가 좌우로 팔을 넓게 흔들었다. 목청껏 색시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옆에서 륭 또한 앞발을 들면서 기쁘게 히히힝 울었다.
“목린아! 목린아! 뒤돌아봐!”
“…….”
“목린아아아아아!”
언영이 목린의 뒤통수를 보며 ‘안 들리나?’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포기하려 했을 때, 목린이 몸통을 틀었다.
“서방님!”
목린은 얼른 표정을 정리하고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굴을 숙이고 달리며 붉게 물든 얼굴을 가렸다.
“목린아, 여긴 어쩐 일이야? 나 찾아온 거야? 아니면 우연히 왔어?”
언영은 륭을 끌고 물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마치 바위로 만든 것같이 딴딴하고 거대한 어깨와 가슴이 햇빛 아래에서 빛났다. 저 모습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떨렸다. 그러니 보러 왔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웠다.
우물쭈물하던 목린은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있는 륭을 보았다. 화제를 돌릴 좋은 기회다 싶어 쫑쫑 걸어가 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가 이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다정하게 말했다.
“봄비는 안 데리고 왔어. 미안해.”
륭의 눈에 실망이 가득했다. 언영은 한쪽 팔을 륭의 몸에 걸치며 짓궂게 말했다.
“네가 씻기 싫어하는 왕고집이라는 걸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냐.”
륭이 휙 고개를 돌리더니 언영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나 언영은 으스스한 륭의 표정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더 장난을 섞어 대꾸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어, 야!”
갑자기 륭이 시끄럽게 울며 앞으로 달려갔다. 물을 온전히 벗어나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그가 달려가는 곳은, 언영이 갈아입을 옷을 대충 모아 놓은 장소였다.
륭은 머리를 숙여 언영의 옷을 입으로 덥석 물었다. 모래가 조금 떨어졌다. 괘념치 않고 륭은 그것을 꽉 악문 채 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언영이 팔을 뻗었다. 축축 젖어 버린 바지 때문에 앞으로 가는 걸음걸이가 매우 엉성했다.
“그거 입고 돌아가야 한단 말이야! 내놔! 야!”
“륭아! 서방님 옷 돌려줘!”
결국 셋이서 해변을 달렸다. 륭이 가장 선두에서 달리기를 뽐내고 멀리 떨어진 뒤에서 목린이 안절부절못하며 따라갔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뒤에서 언영이 젖은 바지와 함께 엉거주춤 뛰었다. 모래 위에 생기는 수많은 발자국이 시선을 어지럽혔다.
“아, 힘들어……!”
얼굴이 복숭아처럼 빨개진 목린이 제일 먼저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숨을 헐떡이며 발목을 조물거렸다.
앞서가던 륭이 그 소리를 듣고 머뭇거리듯 멈췄다. 원래 언영을 놀릴 목적이었지, 목린까지 괴롭힐 의도는 없었다. 어차피 저 뒤에서 어정쩡한 자세로 쫓아오는 언영은 따라오려면 한참이나 멀었고 하니, 륭은 결국 몸을 틀어 목린의 앞으로 다가갔다. 입에 문 언영의 옷가지가 덜렁거렸다.
륭은 발목을 주무르고 있는 목린의 작은 손에 머리를 숙여 코를 비볐다. 그리고 그때, 힘이 다 빠진 듯 늘어진 채 앉아 있던 목린이 갑자기 언영의 옷을 쥐고 어마어마한 힘으로 휙 잡아당겼다. 화들짝 놀란 륭은 입을 벌리고 마는 실수를 저질렀다. 어느새 목린의 손에 모두 빼앗긴 지 오래였다.
“잡았다!”
목린이 꽃처럼 활짝 웃었다. 뒤에서 다가오는 언영을 향해 등을 틀고, 한쪽 팔을 이용해 옷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려 과시했다.
“서방님, 제가 잡았어요!”
“잘했어, 목린아!”
언영이 두 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웃었다.
“제가 얼른 돌려드릴게요!”
“그래, 던져!”
“네!”
목린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이용하여 두 팔로 옷을 던졌다.
“에잇!”
하지만 던지는 순간에 눈을 감아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각오는 봐 줄 만했지만 명확한 목적지를 잃은 옷가지는, 오히려 방향을 휘더니 이상한 곳으로 떨어졌다. 바닷물로 첨벙 빠지며 주변으로 가볍게 물이 튀겼다.
“어어……!”
목린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울상을 지었다.
언영은 한 대 맞은 표정이 되었다. 옷이 물을 먹으며 점점 깊숙이 빨려들어 갈수록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미 늦었음을 알기에 다시 꺼내서 구하러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할 말을 잃은 부부 옆에서 오로지 륭만이 눈치 없이 이빨을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 꼬리 또한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언영이 살벌하게 운을 뗐다.
“너.”
그가 무서운 눈을 하고 서늘하게 씹어뱉었다.
“돌아가면 봄비랑 같은 마구간 못 쓰게 할 거야.”
여유 부리던 륭의 입이 바보같이 쩍 벌어졌다.
* * *
언제부턴가 걸어 다닐 때 땀이 나지 않았고, 목린은 가을이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돌아가면 해 줄 말이 너무 많은데 무슨 얘기부터 들려주지?”
오랜 유랑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언영 일행의 안색이 밝았다. 피곤했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재미있는 일화를 고향 사람들에게 들려줄 생각에 현오와 다인의 표정이 빛났다.
언영은 가장 선두에서 륭을 타고 늠름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가을 풍경을 가만히 구경하며 숲을 가로지던 그의 얼굴이, 뒤에서 들리는 현오의 외침을 듣고 팍 구겨졌다.
“그야 당연히 옷이 바다에 빠져서, 입을 걸 빌리고 다니던 주언영이지. 빌린 옷이 너무 작아서 결국 달려가면서 가슴 부분이 찢어졌다는 것도 절대 빼먹지 말자고.”
“소문내기만 해 봐.”
언영이 고개를 휙 돌리고 으르렁거리듯 협박했다. 다인이 코웃음 쳤다.
“어차피 더 망가질 것도 없잖아.”
“그래, 언영아. 어차피 이미 발가락 얘기가 다 퍼져서 이젠 놀라울 것도 없어.”
“발가락?”
언영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아. 아직 모르나?”
다인과 현오 모두 갑자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 구석에서 얌전히 그들을 따라오고 있던 목린이 소심하게 끼어들었다.
“그게 뭐예요?”
소문을 낸 장본인인 목린이 고개를 물었다. 대화에 조용히 빠져 있었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목린 님!”
다인은 마침 잘되었다는 듯 목린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재밌는 제안을 하면서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목린 님이 정해 주세요. 언영이 옷이 찢어진 사건을 마을에 소문내는 게 좋을까요? 목린 님이 하지 말자고 하시면 안 할게요.”
“그런 거 목린이한테 떠넘기지 마! 부담스러워하잖아.”
“아니에요, 서방님! 전 괜찮아요.”
목린은 열심히 고개를 젓느라 봄비의 고삐를 잡은 손까지 함께 흔들었다.
“저는…….”
목린이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언영, 다인, 현오는 물론이고 가장 이 사건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은평마저도 목린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들도 걸음을 멈췄다. 모두의 눈이 목린에게 쏠렸다. 저쪽에서 현오가 눈을 계속 찡그려 가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된다고 해 주세요, 된다고 해 주세요. 목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현오의 목소리가 벌써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목린은 앞쪽에서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언영과 눈을 맞추었다. 살짝 초조한 듯 표정을 잡고 있는 언영을 마주 보고 있자니, 심장이 콩콩 뛰고 얼굴로 열이 몰렸다. 뺨이 이토록 새빨개진 이유에 대한 적절한 변명을 찾지 못할 것 같아서, 목린은 서둘러 고개를 푹 숙이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서방님께서 일부러 저지르신 일도 아니고, 실수니까……. 저희끼리만 아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언영이 목을 뒤로 꺾고 하늘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인은 살짝 아쉬워하면서도 속내를 숨기며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현오가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재미없게…….”
하지만 다인이 바로 그의 얼굴 쪽으로 단검을 날려 버렸기 때문에 문장은 중간에 끊어져 아스라이 흩어졌다.
“얼른 가자. 날씨도 쌀쌀해지고 있으니, 해가 지기 전에 도달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언영은 씰룩쌜룩 웃으려는 입술을 억지로 늘어뜨리며 진지한 척 말했다. 고삐를 여유로운 자세로 살짝 흔들자 륭이 다시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 있던 말들도 얌전히 뒤따랐다.
목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고삐를 만지작거렸다.
소문을 내지 말자고 한 이유가, 남들이 서방님 가슴을 생각하는 게 싫어서라면. 서방님 가슴이 크고 멋진 걸 혼자만 알고 있고 싶어서라는 걸 알게 된다면…… 서방님께선 지금처럼 저렇게 웃고 계실 수 있을까?
목린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서방님이 이번 일로 내가 착하다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사실 나는 완전 이기적인 욕심쟁이인걸.’
언영을 속이는 것 같아서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내가 착하다고 오해하셨으면 좋겠어. 난 너무 나쁜 사람인가 봐.’
서방님, 정말 죄송해요. 목린은 속으로 울먹이며 사죄했다. 서방님께서 계속 저를 사랑해 주셨으면 해서 그랬어요. 그래도 서방님, 사타구니 쪽도 찢어지지 않은 게 어디에요. 저는 사실 가슴보다 그쪽이 찢어질까 더 걱정되었어요…….
오후 내내 쉬지 않고 성실히 이동한 결과, 귀혈족 마을의 입구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섯 명은 모두 두 팔을 들고 환호했다. 얼른 돌아가자마자 빨리 대충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목린은 수고했다는 의미로 봄비의 머리를 미리 톡톡 두드려 주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귀혈족은 마을에 들어오거나 나가는 이들이 있을 때 즐겁게 다가가 말을 걸곤 했다. 그래서 다섯 명이 함께 우글우글 몰려오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언영 일행은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다르게 돌아가자 그들은 약간 놀랐다. 물론 주민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언영 일행을 환영해 주고 반갑게 인사하긴 했다. 하지만 어딘가 어수선해진 마을 분위기를 숨기지는 못했다. 형체 없는 긴장감이 공기를 포박하는 중이었다. 큰 짐을 어딘가로 옮기고 있는 이들도 보였다.
“어머니께선 어디 계시지?”
언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뒤에 있던 목린은 다인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별거 아닐 거예요.”
월진을 비롯한 대부분의 마을에서 힘 있는 사람들은 마을의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통로에 포진하고 있었다. 멀리서만 봐도 시끌시끌했다. 입을 옷이나 식량이 갖춰진 짐 꾸러미들이 그쪽으로 차곡차곡 옮겨 가는 중이었다. 그 앞에서 가족과 잠깐 작별 인사를 하는 이들도 보였다. 물론 귀혈족의 특성상, 이런 이별을 한다고 울지는 않았다. 웃으면서 잘 갔다 오라고 퍽퍽 어깨를 때려 주는 행위가 다였지만 어딘가 불안한 분위기를 떨쳐낼 수 없었다.
월진은 가장 가운데에서 우글거리는 사람들과 함께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그녀에게 다가갈 틈이 없었다. 언영 일행이 구석진 곳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때마침 어떤 어른이 그들 쪽으로 달려들었다.
“마침 도착했군요!”
“무슨 일입니까?”
말에 올라 타 있는 언영이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명족이…….”
호민의 부족 이름이 거론되자 언영이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얼른 고개를 돌려 목린과 눈을 맞추었다. 깜짝 놀란 목린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잠시만요. 목린아, 아까 골목을 지나면서 단검을 떨어뜨리고 온 것 같은데 보고 와 주지 않을래?”
“네? 네……. 봄비야, 가자.”
목린은 봄비의 옆얼굴을 토닥이며 차분히 말했다.
언영은 목린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갈 때까지 기다렸다. 안심할 정도가 되어서야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마저 말씀해 주세요.”
“바다에서 찾았단 그놈이 생각보다 강한 놈이라……. 도와줄 사람을 더 구한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빨리 와 달라 그쪽에서 청했습니다.”
“…….”
“하지만 아무래도 방금 막 유랑을 마치고 왔으니 몸도 고단하실 테고, 그러니 지금까지 모은 사람들만 데리고 출발하는 것이…….”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언영의 말을 들은 주변의 모든 이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참말입니까?”
“언영아, 괜찮겠어?”
물론 언영이 함께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지만, 방금 막 여정을 마치고 온 그가 얼마나 피곤할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영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목린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면 해결되었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오는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설령 단월도의 일과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괴물을 가만히 놔둔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아끼는 이들에게 해를 가할 것이 뻔했다.
언영은 고개를 휙 돌려 현오와 눈을 맞췄다.
“너도 같이 가.”
“뭐? 나?”
현오는 자기 얼굴을 손가락질하며 되물었다. 언영이 말없이 한번 주억거렸다.
현오는 난감하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물론 귀혈족은 도전을 좋아하고 의리를 중요시했다. 다른 날이었다면 별 망설임 없이 당장 같이 가서 쳐부수고 오자고 떵떵거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힘들고, 멋없는 건 알지만 당장 퍼질러 눕고 싶은 생각만 가득하고…… 그런데 그 와중에 현오의 눈에 다인이 들어왔다. 다인은 현오가 무슨 대답을 할지 궁금해하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현오의 가슴속에 난데없는 정의감이 일었다.
“그래, 가야지.”
현오는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다인과 은평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차분하게 운을 뗐다.
“목린이 잘 부탁해.”
“응.”
다인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은평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골목을 돌고 온 목린이 다시 왔다.
“서방님, 아무 데도 안 보여요.”
여상히 말을 잇던 목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
언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귀혈족 모두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이전에 언영이 바다에서 이상한 일을 느끼고 한참 수색하고 다녔음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언영이 같은 이유로 유독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목린에게 진실을 알려 줘 봤자 더 좋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불안감만 줄 테고, 고향 사람들을 걱정하게 할 뿐이었다.
언영이 말에서 훌쩍 내려 성큼성큼 걸어가 목린의 옆에 바짝 다가가 섰다. 목린 또한 측면으로 몸통을 돌렸다. 언영이 목린의 허리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목린아. 내가 지금 어디 급하게 갈 데가 있거든.”
목린은 살짝 숨을 들이켰다.
“위험한 일인가요?”
“아니. 위험한 거 전혀 아니야.”
목린은 언영의 품에 안겨 반쯤 봄비에게서 내려왔다. 언영이 한 손으로 목린의 뺨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몇 번 자고 일어나면 바로 와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집에서 잘 쉬고 있어.”
“조심해서 다녀오셔야 해요. 다치지 마세요!”
“괜찮다니까? 그냥 잠깐 몸만 풀다 오는 거야.”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아파서 누워 쉬어야 했던 모습을 봐서 그런지, 안심되는 말은 아니었다. 목린은 언영의 어깨를 꽉 쥐고 또박또박 말했다.
“서방님은 강하시니까 크게 걱정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혹시라도 또 코피가 나는 일이 벌어지면 당장 쉬셔야 해요.”
“걱정하지 마.”
그거야말로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리고 서방님……!”
언영이 그녀를 다시 제대로 말에 태워 주려고 할 때, 목린이 그의 팔을 꽉 붙잡고 막았다. 언영은 동작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뜬 채 목린을 올려다보았다.
목린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
목린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속삭이듯 말했다.
“사아…….”
“으응?”
“사……. 사아……. 아…….”
제대로 들리지 않자 언영이 미간을 좁히고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목린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녀가 눈을 어디에다 둘지 모르며 더듬거렸다.
“라……. 앙…….”
“언영아. 어서 가야 해.”
뒤에서 사람들이 재촉했다.
“그러면 다녀올게.”
“아!”
언영은 재빨리 목린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달려가는 와중에도 언영은 틈틈이 등을 돌려 목린과 눈을 마주쳤다. 차마 그가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는 목린은 슬픈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순식간에 그가 떠나갔다. 마치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허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