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아아…….”
“서방님! 정신이 좀 드세요?”
머리가 아프고, 피로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해가 떴을지 달이 떴을지도 감이 하등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흐릿한 현실에서 한 가지는 자명했다. 목린이 울고 있었다.
“울지 마, 목린아.”
“서방님…….”
언영은 손을 뻗어 목린의 눈가에 묻은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여기 왜 자신이 누워 있는지 기를 쓰며 고뇌해 봐도 아무 해답도 나오지 않았다. 목린이 얼마나 오래 그의 옆에 앉아 울었을지는 감히 생각해 보기가 두려웠다.
“여기는 어디야?”
오랜만에 입을 열어서 그럴까 그의 목소리가 약간 쉬어 있었다. 목린은 눈물을 닦아 주는 그의 손을 감싸며 입술 끝을 올렸다.
“저번에 있었던 그 방이에요. 스승님을 바로 모셔 올게요. 정말 다행이에요……!”
언영이 뭐라 하기도 전에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드르륵 문이 재빠르게 열렸다가 닫혔다.
언영은 멍하니 누워 기억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분명 두 사람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목린이가 비명을 질렀고, 스승님도 달려오셨고, 륭이가 울부짖었고, 그리고…….
생각을 마치기 전에 다시 문이 열리고 스승님이 들어왔다.
“스승님.”
언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갑자기 상체를 뚫고 가는 고통 탓에 다시 뒤로 쓰러졌다.
항상 평온한 낯빛을 유지하던 스승의 모습은 냉연하기만 했다. 그가 저벅저벅 다가오며 으스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준 약을 대체 얼마나 많이 마셨길래.”
“예?”
언영은 눈을 끔벅였다. 스승은 언영의 질문을 무시하고 목린을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매끄럽게 태도가 바뀌었다.
“귀하신 분께 이런 부탁을 드리기 송구스러우나, 잠시 오랜 제자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아, 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마음껏 하고픈 말씀 하시어요.”
목린은 마지막으로 언영과 눈을 맞춘 뒤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언영은 다시 한번 팔로 몸을 지탱하며 이번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사뿐사뿐 그녀의 발이 복도로 넘어가는 모습을 얼빠진 눈으로 구경했다. 어떻게 걷는 모양마저 저렇게 귀여울 수 있단 말인가.
너무 황홀하게 구경하다가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지팡이를 그대로 맞을 뻔했다. 언영은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틀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앗!”
“준다고 그걸 그냥 매일 마셨느냐!”
스승의 눈에서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니, 마시려고 달라고 한 거 아니겠습니까!”
언영이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꺼림칙함은 남아 있어서, 어깨를 문지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나 스승의 다음 발언을 귀에 담는 순간 팔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거기엔 산만 한 크기의 짐승의 갈아 낸 뼈, 벌레의 찌든 내장, 전설 속 괴물이 품은 맹독, 각종 짐승의 배설물까지! 온갖 위험한 것이 잔뜩 들어 있단 말이다!”
“예? 사, 사, 사실입니까? 그런 걸 왜 제자에게 주십니까?!”
“그걸 밥 먹듯 마실 줄 내가 알았겠느냐! 단순히 가끔 한 번 다쳤을 때 조금 들이켤 줄 알았지! 그걸 등신같이 매일 들이켤 일이 어딨더냐! 네 전신에 독이 우글우글 퍼져 있더구나!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길래!”
“그러면…… 그러면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걸 마시고도 괜찮은 겁니까?”
제발. 제발 이 불길한 예감이 틀리기를…….
스승은 불안함에 떠는 언영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손가락 세 개를 딱 펼쳤다.
“예……?”
“…….”
스승은 똑바로 다시 보라는 듯, 짧은 손가락을 더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부릅뜬 노인의 눈동자가 마치 앞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언영은 눈앞이 까마득해진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거구나, 하고 느꼈다.
“아, 안됩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몸이 반사적으로 튕겨 나왔다. 무서운 표정을 한 스승의 팔을 쥐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아직, 아직 목린이랑 못다 한 게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가면 목린이는 어떡합니까! 평생 사랑해 주고 지켜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저 목린이 두고 못 떠납니다! 그리고 우리 륭이 장가도 보내 줘야 합니다! 그런데 남은 기간이 겨우 석 달이라니요!”
“…….”
스승의 검은 눈동자가 바닥에 기다시피 하는 언영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언영은 보이지 않는 매질로 종아리가 찢기는 기분이었다.
“스승님, 제발 말씀 좀 해 보십시오!”
“…….”
“제발! 살아야 합니다! 스승니이이이이이임!”
“앞으로 세 가지만 잘 지켜라.”
스승은 나머지 다른 손의 검지를 이용해 펼쳐진 세 손가락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설명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움직여. 그러면 별문제 없이 네 몸에 내성이 잘 생길 것이야. 고비는 다행히 넘겼다.”
“……아.”
언영이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스승의 입술이 큰 웃음을 참느라 꿈틀거리고 있었다.
“허허허허.”
“……하하하하.”
언영이 억지로 입술 끝을 올렸다.
“허허허허.”
“하하하……하.”
“허허허…… 아, 그리고.”
웃음을 그친 스승의 표정이 미묘했다. 감히 어떤 얘기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어 언영의 입이 조용히 메말랐다.
노인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좋은 소식이라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또 코피가 날 일은 없을 거다.”
언영은 제 귀를 의심했다. 자세를 바로잡고 빠르게 물었다.
“예? 그게 사실입니까?”
“네가 지나치게 성실히 마셔 대서 코 점막이 강철 수준이 되었다. 누가 네 코를 도끼로 내리찍는 게 아닌 이상 끄떡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하하하하하하!”
언영은 두 팔을 위로 높게 펼쳤다.
“만세!”
“그게 뭐 좋은 일이냐! 전신이 튼튼해진 것도 아니고 그냥 코피에 불과한데!”
“좋은 일입니다! 정말 좋은 일입니다!”
이제 목린이와 관계 중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잠깐 자리를 뜰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난 가끔 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기쁨을 주체할 수 없던 언영은 이내 스승의 몸통을 끌어안기에 이르렀다.
“커헉!”
제자의 육중한 상체에 짓눌린 노인은 불편함을 토해냈다. 상대방의 팔을 주먹으로 때렸다. 언영은 그제야 힘을 조금 풀었지만, 여전히 스승을 감싼 팔을 내려놓지 않았다.
스승이 푹 꺼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진작 세상을 떴을 거다. 이만큼 독이 퍼졌는데 걸어 돌아다녔다는 게 신기하구나!”
“하하하하하!”
언영은 기분 좋게 시시덕거렸다.
“정말…… 몸 하나는 내가 여태껏 널 이기는 자를 본 적이 없다. 네 어미도 널 이기질 못할 거다. 네 머리도 네 몸의 반만 닮았더라면…….”
“아닙니다, 사람은 착하게 사는 게 중요합니다, 스승님! 결국에 남는 건 인덕(人德)뿐이고 사랑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소인은 생각합니다!”
“그래, 그래…….”
“하하, 고맙고 사랑합니다, 스승님!”
“알았으니까 놔줘! 난 그만 신경 쓰고 네 부인이나 안아 주거라. 종일 훌쩍이더구나.”
“목린아! 들어와!”
언영이 스승을 놔주며 쩌렁쩌렁 외쳤다. 그러자 바로 다다다다 복도를 뛰어오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문이 바로 열렸다.
“서방님……!”
그사이 또 크게 울었는지 목린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목린은 언영을 향해 다시 뛰었고 언영은 두 팔 벌려 목린을 반겼다. 스승은 얼른 멀찌감치 떨어져 섰다.
바로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뛰어드는 목린의 등을 언영이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서방님……. 흐윽…….”
“우리 목린이 걱정 많이 했어?”
“서방님……. 죽는 줄 알고…….”
“내가 우리 목린이 두고 떠날 리가 없잖아.”
목린의 눈물 탓에 언영의 어깨 부분이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더 마음 놓고 울어도 된다 응원하듯이 그의 아내를 훨씬 꽉 끌어안았다. 목린은 언영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반복하고 훌쩍거렸다.
사고뭉치 제자 때문에 온종일 주름이 잡혀 있었던 스승의 미간도, 부부의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펴졌다.
“더 누워 있으면 완전히 회복할 터이니, 그때까지는 안정을 취하도록 하려무나.”
그래서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스승은 그 부드러운 어투를 되찾은 채였다. 말꼬리에 붙이는 편안한 웃음소리 또한 다시 돌아왔다.
“동행에게 독수리를 보내 놨으니, 왔을 때 함께 출발하면 되겠어. 허허허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목린은 마치 본인이 환자였던 것처럼 거듭 머리를 숙이며 극진히 감사함을 표했다. 그리고 다시 언영과 뜨겁게 눈을 맞추었다. 언영의 손가락이 귀 옆으로 삐져나온 목린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틈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부부를 내리쬐었다. 둘 다 상대방의 다정함 속에서 이대로 녹아내려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번거롭게 이러지 않아도 돼. 나도 일어나서 씻을 수 있어.”
“해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땀이 많이 나잖아요.”
“그건 네가 옆에서 계속 나를 만져서……. 아니야.”
목린은 언영의 이마, 목, 그리고 어깨를 틈만 나면 꼼꼼히 닦아 주었다. 그가 땀을 흘리지 않을 때도 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언영이 피곤하지 않느냐고, 바람 좀 쐬고 오라고 제안해도 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가 의식이 없을 때 이미 충분히 주변 구경은 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깨어 있을 때도 이 정도인데, 독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땐 그녀가 얼마나 걱정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게다가 매번 아파서 약을 드셨으면서도 제게 언질도 한 번 주지 않으셨는데……. 정말 괜찮으신지 제가 어떻게 믿겠어요.”
“그건.”
언영이 어색하게 몇 번 눈을 굴렸다.
“그래도 이제 말끔히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 스승님 말씀 들었잖아.”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목린이 습관적으로 검지를 이용해 눈가를 닦았다. 언영이 조용히 호소했다.
“이제 제발 그만 울어.”
“네, 그만 울게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에요.”
훌쩍거리는 목린의 울음소리를 언영은 불편한 표정으로 들었다. 결국 그가 참다못해 허리를 일으키고 직접 닦아 주려고 하자 목린은 얼른 몸을 뒤로 내뺐다. 손등으로 거칠게 눈을 비빈 뒤에 이제 정말 다 울었다고 하며 활짝 웃었다.
언영이 다시 자리에 눕고 목린도 아까 있던 곳에 와 앉았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두 사람의 미세한 숨소리가 방을 데웠다.
“이제 밤인데, 목린이 너도 자야지.”
“서방님 주무시는 거 보고 잘게요.”
“나 아까 낮잠도 자서 하나도 졸리지 않은데…….”
“그러면 조금만 있다가 누울게요.”
“얼른 쉬어.”
목린은 짧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지만 그 이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언영은 천장을 노려보면서 미뤄진 일정을 생각하느라 바빴다.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던 그는 목린이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는 움직임을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바닥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목린이 입술을 열었을 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는 서방님께서 싫어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응?”
“너무 깊게 들어가면…….”
“깊게 들어가다니?”
의아해하는 언영을 보는 목린의 뺨에 살며시 홍조가 피어올랐다.
“어렸던 서방님이요.”
언영이 쓰러져 있었을 당시, 목린은 계속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다. 세세하게 캐물었다면 정말 서방님이 싫어하셨을까. 반대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들뜬 눈으로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서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붓는 서방님. 새로 알게 된 사실 덕분에 호탕하게 웃으며 목을 젖히는 서방님…….
“……아.”
언영도 그제야 질문을 이해한 표정이었다. 그가 할 말을 잊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놀란 건 아주 잠깐뿐, 다시 편하게 웃으며 목린에게 물었다.
“왜 싫어해? 우린 부부잖아.”
“부부면 다 물어봐도 되는 거예요?”
“아니, 그렇다기보단…… 알고 싶잖아.”
언영이 팔을 뻗어 목린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검지를 쓰다듬어 보고, 약지를 주물러 보고, 세 손가락을 함께 감싸 쥐어 보고……. 마치 세상에서 이게 제일 재밌다는 눈으로.
“상대가 뭘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와 만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과정에서 내가 모르는 추억을 함께 한 사람들한테 살짝 질투도 나고.”
목린 또한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서방님이랑 오래 친하셨나 봐요…….’
‘그렇죠! 아기 때부터 같이 붙어 있었으니까.’
‘그래요?’
“조금이라도 더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고.”
‘저, 창을 던지는 자세를 제대로 잡고 싶어요. 서방님께는…… 될 수 있으면 비밀로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아등바등하게 되고.”
‘그러면 서방님께서…… 제 어떤 모습을 특히 좋아하셨는지도 아세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을 넋 놓고 계속 보게 되고.”
목린이 결국 쑥스러워 손을 빼려고 했으나 언영은 더욱 깍지를 단단히 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목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말을 이으며 목린은 천천히 상체를 아래로 숙였다. 그녀의 손가락을 가져다 놀고 있는 그의 옆에 나란히 함께 누워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 물기가 남아 있는 그녀의 안구가 촉촉하게 반짝거렸다.
“그런 마음을 직접 표현하는 게…… 두렵지 않아요? 어떻게 그렇게 솔직해요?”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소곤소곤 물어오는 목린을 보는 언영의 귀가 붉게 익었다. 잠깐 정신이 빼앗겨 몇 번 바보처럼 눈만 끔벅이다가, 얼른 태연하게 표정을 고치고 말을 이었다.
“글쎄. 확실히 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표현을 하지 않았다가…….”
자유로운 그의 나머지 한 손이 목린의 움푹 들어간 허리 부근을 쓰다듬었다.
“놓칠 뻔한 게 있으니까.”
“아, 그러면…….”
목린이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묘하게 힘이 없었다.
“저 이전에 다른 여자들을…….”
“뭐? 아니야! 절대 아니야.”
언영이 허리를 쓸던 손을 얼른 목린의 뺨으로 옮겼다. 목린의 말랑말랑한 얼굴을 문지르면서 안절부절못한 목소리로 달래기 시작했다. 많이 초조했는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갑절은 빨랐다.
“미안해, 목린아.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 나한텐 평생 너뿐이야. 얼굴 펴, 응?”
언영은 목린의 얼굴 위 이곳저곳에 불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쪽쪽거렸다.
내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구나. 목린은 그가 말해 주고 나서야 알았다.
목린의 낯빛이 점점 괜찮아지자 언영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계속 뽀뽀하던 입술은 떨어졌지만, 끈적거리게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거두지 않았다. 언영은 그의 손에 눌리는 목린의 볼을 빤히 바라보았다. 괜스레 부끄러워져 목린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위에서 평소보다 진지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동생이 크게 다쳤던 적이 있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목린의 눈이 커졌다. 어둠 속에서 언영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너랑 만나기 세 해 전이었을 거야. 화영이는 그때 겨우 두세 살 정도 됐었는데, 서쪽 마을에 가서 놀고 싶다고 매일 노래를 부르고 다녔어. 하지만 그 당시에 무기 창고에 불이 나서 보충하는 걸 돕느라 어머니도 아버지도 너무 바쁘셨고, 둘째 혜영이도 키워야 되고……. 결국 내가 혼자 화영이를 데리고 나왔어.”
기억을 더듬는 그의 눈동자를 위로 향했다.
“그러다가 이상한 놈들과 부딪혔지. 가선 안 되는 마을에 갔어. 당시에 신기한 게 보고 싶어서 처음 보는 길목에 호기심 때문에 들어갔던 내 잘못이지.”
“이상한 놈들이요?”
“나쁜 사람들 말이야. 그러니까, 정말 악독한 놈들 있잖아.”
“나쁜 사람들도 있어요, 여기?”
“뭐? 당연하지.”
목린의 질문이 신기했는지 언영이 미소 지었다.
“그랬구나. 여기 와서 만난 분들은 다들 좋은 사람들뿐이어서 몰랐어요.”
“그러면 내가 잘하고 있다는 뜻이네.”
언영은 목린의 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목린이 너한텐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고, 좋은 것만 들려주고 싶어.”
그리고 이마와 뺨에 살짝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아무튼, 그 패거리는 어린 우리 두 사람을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고 안달이었어. 그런데 우리가 계속 용케 잔꾀를 피해 가니까 그놈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지. 그렇다고 우리가 영리하거나 그쪽이 멍청한 건 아니었어. 그저…… 그 당시에는 눈빛만 봐도 어딘가 꺼림칙한 게 느껴져서 내가 애써 피한 것뿐이야.”
“그런 건 어떻게 느끼는 거예요?”
“그 당시 나 같은 경우에는, 글쎄.”
언영은 눈동자를 굴렸다.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으나 입 밖으로 내뱉기는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많이 봐 와서 그런 건가?”
“많이 봐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예요?”
“지금은 별로 없고. 예전에는…… 좀 많았지. 거의 내쫓겼지만.”
목린의 얼굴에 놀라움이 비치자 언영은 싱긋 웃었다.
“애초에 부족 연합이 그냥 생긴 게 아니야. 이상한 놈들을 함께 몰아내자는 취지로 결성되었으니까.”
“그러면 소문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네요!”
“소문?”
“아…….”
목린은 한 손으로 입을 서둘러 가렸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위에서 언영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목린은 결국 이리저리 시선을 회피하며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그, 단월도에 돌던 소문이 있어요. 육지에는…… 엄청 무섭고 나쁜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산다고…….”
“뭐? 하하하하!”
“…….”
“그러면 우리도 나쁜 사람이라고 착각한 거 아냐? 하하하!”
“…….”
“하하하하!”
목린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어색한 그녀의 표정을 본 언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목린아?”
“네. 그, 귀혈족은 처음부터 치, 친절하셔서 괜찮았어요…….”
“하하하!”
언영이 목을 젖히고 가가대소했다. 눈을 내리깔며 우물쭈물하던 목린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 아무튼 뒤의 얘기 더 해 주세요.”
“아, 그래…….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너무 웃어서 눈에 맺힌 눈물을 검지로 닦아 내며 언영이 중얼거렸다.
“녀석들은 피해 가는 나를 보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우리를 뒤쫓아 오기까지 이르렀어. 다행히 화영이는 그 사실을 눈치채기엔 너무 어렸고, 나는 처소 안에서 녀석들이 언제 쳐들어올까 긴장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데…….”
언영이 말끝을 흐렸다.
“어머니께서 등장하셨어.”
“네? 어머님이요?”
“응.”
언영은 짧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목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쩌다 나타나신 거예요?”
“우리 둘을 보내긴 했지만, 걱정이 되셨던 거지.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달려오신 거야.”
“어머님 멋있으셔요……!”
“그래, 멋있으시지.”
그리 답하는 언영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서방님……?”
“그 당시의 나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았을 텐데.”
언영이 어둡게 중얼거렸다.
“네?”
“나는, 내가 못 미더워서 어머니께서 오셨다고 생각했어.”
“못 미덥다니……?”
“말 그대로야. 내게 누이를 지킬 힘이 부족해서 어머니께서 찾아오신 줄 알았어. 나를 힘없는 존재로 보시는 것 같아서 속상하고, 울분이 터졌어. 그땐 몸도 마음도 지쳤던 때라 모든 게 부정적으로 보였거든.”
천천히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한 그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뱉은 한숨엔 후회와 미안함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화가 났어. 말도 안 되는 성질을 부리며 밖으로 뛰쳐나갔지. 어머니는 바로 나를 데리고 들어오실 생각으로 따라 나오셨고.”
그리고 거기까지 들었을 때, 목린은 언영의 표정에서 불길함을 읽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어.”
언영이 느리게 말했다.
“어머니도 예상치 못하셨던 게 너무 당연해. 하필이면 그때…… 그 새끼들이 화영이만 남은 처소에 불을 지를 줄 누가 알았겠어.”
목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언영은 그날을 머릿속에 그리듯 눈을 감고 있었다.
“직접 들어가시려던 어머니 앞을 막고 내가 직접 무너지는 처소로 들어갔어. 사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그래도 알다시피 화영이는 구해 냈고…….”
“그 패거리는 어떻게 된 거예요?”
“어? 녀석들은 도망갔지.”
언영은 목린의 몸을 쓰다듬으며 말을 빨리 이었다.
“내가 멍청하게 굴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벌어나지 않았겠지. 원래도 적극적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특히 더 이런 성격으로 자리 잡게 된 것 같아. 가족이 건강하게 살아 있음에 감사해. 목린이 네가 내 새로운 가족이 된 것에도. 고마워서 더욱 더 마음을 베풀 수밖에 없게 돼.”
그러나 언영의 얼굴은 금세 바짝 굳었다.
“……하지만 화영이한텐 여전히 많이 미안해. 걔는 너무 어렸어서 기억도 잘 못 하거든.”
목린은 언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화영의 등에서 화상 자국을 보았었다. 당시 화영이 했던 말도 함께 곱씹어 보면 아무래도 방금 언급된 그날의 상처가 맞을 터.
목린은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입술을 뗐다.
“서방님. 화영 아가씨는 덕분에 서방님을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계세요.”
“뭐?”
언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목린이 가볍게 싱긋 웃어 주었다.
“정말이에요. 흉터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몰라요. 제가 직접 들었어요. 서방님께서 자길 지켜 주시느라 생긴 영광의 상처라고 했어요.”
“그거야, 어쩌다 생긴 흉터인지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 거고. 알고 있다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건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서방님 생각이 옳으실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어머님 대신 달려든 건 분명 용기 있는 행동이고, 설령 세 분이 정말 갈등 없이 그 집에서 나왔다고 해도, 다른 방식의 습격을 받았을 수도 있어요. 만약 그랬다면 오히려 더 위험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서방님 생각과 달리 화영 아가씨께서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실지도 모르고요! 그날 서방님은 화영 아가씨 목숨만을 구한 게 아니라 세 분의 목숨을 모두 구한 거예요.”
목린이 언영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언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두 팔로 목린을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 하지만 내가 정말 세 사람의 목숨을 구한 거라면 그걸로 뿌듯해할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사랑을 베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더 착하게 살고 싶어.”
목린은 그의 품에 폭삭 잠겨 배시시 웃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좋았다.
“조금 전에 정말 서방님다운 대답이었어요.”
“응? 나다운 게 뭔데?”
언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목린은 대충 얼버무리며 답을 피했다. 그의 속에 더 파고든 다음 쫑알거리며 물었다.
“서방님은 이곳저곳을 많이 다녀 보신 거예요?”
“글쎄. 많이 다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특이한 걸 자주 목격했던 것 같아.”
“궁금해요…….”
목린이 용기 내 말했다. 언영의 입이 헤벌쭉 바보같이 벌어졌다.
“흐음. 뭐 먼저 말하면 좋을까.”
그는 목린의 이마에 수도 없이 쪽쪽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그는 턱을 살짝 들어 목을 가로지르는 연한 흉터를 보여 주었다.
“먼저 이건 수문족 마을에 놀러 갔다가 침입자로 오인당해서 생긴 상처고.”
“정말요? 많이 아프셨어요?”
종종 보이긴 했지만, 그저 누군가와 장난으로 싸우다가 난 상처일 거라 넘겨짚어 왔다. 목린이 안절부절못하며 그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자 언영은 키득키득 웃었다. 괜찮다고, 지금은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하며 그녀의 이마를 맞댔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아, 지지난번 가을이었나? 그때는…….”
한번 물어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언영의 입에서 과거 일화가 쏟아져 나왔다. 가지각색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의 눈에서 생기가 반짝거렸다. 그를 마주 보는 목린의 얼굴 또한 저절로 미소로 환하게 밝혀졌다.
그리고 목린은 어제 왜 언영이 지난번에 잠깐 시무룩한 모습을 보였는지 확신했다. 설령 목린이 묻는 게 부끄럽고 난처한 질문일지라도, 밝히기 민망한 순간이 올지라도, 언영은 그가 좋아하는 목린이 그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길 훨씬 기대했던 것이다. 애정과 관심을 확인받을 수 있다면 잠깐 동안의 굴욕 따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터다. 목린은 괜스레 미안해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가 얘기했었나? 너랑 처음 만났던 날, 왜 내가 숲에 있었는지.”
“아니요, 해 주지 않으셨어요.”
“스승님께서 아주 예전에 말씀해 주셨는데, 원금화라는 전설 속의 꽃이 있대. 들어 본 적 있어?”
목린은 입을 여는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꽃이 금처럼 번쩍인다나 봐.”
“정말요? 어떻게 생겼는데요?”
“그건 남아 있지 않아. 전설이니까. 아무튼 확실한 건, 그 꽃은 금색을 띠고 그걸 발견한 자는 영구적인 사랑, 즉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된다는 거야. 사내일 경우 경국지색의 미인을 만날 거라나.”
목린은 푸흐흐 웃었다. 그녀는 그런 미신을 믿지 않았다.
“귀여워요. 서방님께선 믿으신 거예요?”
“아니, 나는 아니고 은도 그 자식이 좋아서 환장을 하지. 걘 가장 아름다운 보석, 가장 예쁜 여인. 가장 멋진 검, 최강자. 뭐 이런 걸 정말 좋아하거든.”
‘너는 여기서 아직도 그 꽃인지 뭔지 찾는 거냐?’
‘너도 찾아다녔잖아? 나만 갈구니까 좀 억울한데.’
‘다 부질없는 짓이야.’
‘그건, 찾아야 아는 거고.’
그러고 보니 그날, 두 사람이 꽃에 관한 얘기를 했던 것 같기도 했다. 목린은 알아듣지 못해서 대충 듣고 넘어갔었는데.
“은도가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틈만 나면 찾으러 다니는데, 그 녀석을 늘 이기고 싶으니까 나도 가끔 시간을 내 숲을 뒤져 보곤 했지. 하지만 역시 전설은 전설인지라,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고. 은도는 끝까지 인정하기 싫어하고 있지만. 다 사실은 쓸데없는 짓인데도 말이야.”
언영은 얼굴을 찡그리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계속 누워 있느라 그의 머리카락이 꽤 재밌게 흐트러져 있었다.
“너랑 처음 만났던 그날, 혼자 숲속에 들어간 것도 그 이유 때문이야. 단월도는 처음이니까 이곳 숲엔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그렇게 말하고 언영은 행복하게 웃으며 목린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래도 난 거기서 그 꽃보다 훨씬 예쁜 꽃을 찾았어.”
“요즘은 찾아다니지 않으세요?”
“응. 널 만난 이후로는 전혀. 혹시 원금화에 대해 아는 거 있어?”
목린은 고개를 또 저었다.
“아니요. 그런 게 있었더라면 제가 모를 리 없을 거예요.”
“하긴 그렇겠지.”
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린은 꽃을 정말 좋아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왜?”
목린은 얼굴을 살며시 붉히며 어깨를 으쓱였다. 언영의 품으로 더 꼼지락거리며 들어갔다.
“낭만적이잖아요.”
“그런가? 난 잘 모르겠어서. 나한텐 목린이 발견한 게 훨씬 낭만적인데…….”
언영은 아리송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낯빛을 바꾸어 다소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만약에 어떤 처음 보는 놈이랑 둘이 있다가 갑자기 원금화를 발견했다고 치자. 그놈한테 바로 갈 거야?”
“음…….”
목린은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한번 그려 보았다. 같이 있을 남자가 어떻게 생겼을지 감이 잡히지 않아 꽤 오랜 시간 넋 놓았다.
그래서 언영의 표정이 무너지고 있는 것도 꽤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 그게.”
당연히 곧바로 ‘아니요!’라고 답할 줄 알았던 목린이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언영의 영혼이 저 멀리 날아갔다. 공허한 눈과 살짝 벌어진 입이 그가 받은 충격을 보여 주고 있었다.
“서방님! 아니에요! 가지 않아요! 서방님 곁에 있을 거예요!”
목린이 긴박하게 외쳤다. 언영의 근육질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죄송해요! 어떤 상황인지 상상해 보느라 그랬어요. 정말이에요……!”
“…….”
“서방님!”
목린은 제 몸을 두른 언영의 두꺼운 팔을 빠르게 문질렀다. 초조한 그녀의 눈에 걱정이 헤엄쳤다. 언영의 눈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바라보지 않았다.
“서방님, 제발……!”
“……푸흑.”
굳어 있던 언영의 입술이 결국 못 참고 꿈틀거렸다.
“흐흐흐하하하하하!”
“……뭐예요?”
“하하하하하하!”
“장난친 거예요?”
목린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언영이 얼른 ‘미안해, 미안해.’를 연발하며 목린의 허리를 끌어안아 다시 눕혔다.
언영은 좀 더 나긋한 말투로 마저 이야기를 이었다. 다른 마을을 순회하며 생긴 사건, 귀혈족과 함께 하는 소소한 일상 얘기(물론 몇 가지는 목린의 귀에 전혀 소소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니면 바로 여기서 어릴 적에 겪은 다양한 경험담 등등.
밤이 무르익을수록 두 사람이 서로 섞는 눈빛 또한 뜨거워졌다. 언영의 커다란 손이 자연스럽게 목린의 팔과 목, 허리를 쓰다듬고 다녔다. 목린도 그와 간간이 손을 겹치며 따뜻한 눈빛으로 응수했다.
“여기 살면서 불편한 건 없어?”
둘 다 옆으로 마주 보고 누운 상태에서, 언영이 목린의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낮고 다정하게 물었다. 그의 코가 겨우 반 뼘을 두고 그녀의 얼굴과 떨어져 있었다. 목린의 심장이 이유 모르게 세차게 뛰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낯설었는데……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이젠 괜찮아요. 재밌어요.”
목린은 얼굴을 붉히며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였던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며 그의 관심을 돌렸다.
“저기, 아까 했던 말 말이에요.”
“응?”
“무서운 사람들을 해치웠다는 거……. 그럼 이제 우린 안전한 거예요? 바다는 괜찮아요?”
언영은 살짝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글쎄.”
“…….”
“물론 언제나 이런 평화가 계속되지는 않겠지.”
든든한 언영마저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니 목린은 간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다시 언영이 머리를 숙여 목린과 눈을 마주쳤다. 언제 심각했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가 싱그럽게 그의 얼굴에 피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아.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어딘가 길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
그의 눈이 선한 미소를 지으며 곱게 접혔다. 목린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뗐다.
“방금 그 말도 서방님다웠어요.”
“그러니까 아까부터 나다운 게 뭐길래 그래?”
“으음……. 서방님이 저와 너무 다른 사람인 게 느껴지는 답이요.”
목린은 머뭇거리며 답했다.
한번 말하려고 결심하니까 속에 계속 숨어 있던 생각이 입 밖으로 술술 쏟아져 나왔다.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도, 조용한 밤의 분위기에 취해 술술 나왔다.
“저는 서방님처럼 긍정적이지도 못하잖아요. 방금 전의 서방님처럼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웃으며 용기 있게 말하지도 못해요. 게다가 창도 여전히 제대로 못 던지고……. 열심히 연습했는데도…….”
“우리 목린이, 그런 걸 걱정했어?”
언영이 헤벌쭉 웃으며 목린의 엉덩이를 팡팡 토닥였다. 당황한 목린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움찔거렸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해명했다.
“아니, 저는, 그러니까…… 서방님께서 좋아해 주셔서 열심히 하는데도, 원하는 만큼 실력이 늘지 않아서 슬퍼요.”
“내가 좋아한다고?”
“귀혈족처럼 창을 썼더니 엄청나게 기뻐하셨잖아요.”
“목린아, 내가 좋아한 건…….”
언영이 크게 당황했다. 장난스레 목린의 엉덩이를 두들기던 손을 떼고 얼른 다시 진지하게 그녀를 안았다. 어둠 속에서 짝을 찾듯 두 사람의 시선이 끈끈히 맞닿았다.
“네가 우리와 동화되어서가 아니야. 네가 어떤 일에 즐거움이나 가치를 느끼며 계속해 나간다는 거, 네가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사실 덕분에 기뻤던 거야.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면 당장 그만해도 돼. 온전히 네 선택이고 나는 그게 무엇이든 널 존중할 거야.”
“정말이에요?”
“당연하지.”
“하지만…… 여기서 남들과 다른 제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세요?”
“이상하다니! 게다가 다른 게 뭐 어때서. 봄비가 내리던 날에 내가 말했잖아. 다양한 사람들을 모두 안고 가고 싶다고.”
“…….”
지금 밖에 떠오른 별무리도, 언영의 눈동자만큼 맑고 명징할 수는 없다고 목린은 생각했다.
밤은 조용했지만, 그의 또렷한 눈을 마주한 목린의 머릿속은 시끌벅적했다. 흥분이 가라앉은 언영의 얼굴은 밤빛에 녹아들어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다. 곧은 코와 매끈한 입술이 어둠 속에서도 제 윤곽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때, 목린은 등을 휙 돌려 언영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흥.”
“어어?”
언영이 너무 당황하여 내뱉었다. 목린은 몸을 웅크리며 중얼거렸다.
“흐응…….”
“목린아?”
언영이 조심스럽게 목린의 어깨를 잡아 살짝 흔들었다.
“목린아, 왜 그래? 응? 내가 상처 주는 말했어?”
“안 믿어요.”
언영의 입이 아무 말도 못하고 벌어졌다.
“왜…….”
“그러면 서방님은 제가 쭈글쭈글 할머니가 돼도 마냥 귀여운 것도 모자라서, 제가 아무것도 못 해도 좋다는 거잖아요.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그게?”
“처음부터 그냥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모두.”
“처음부터? 뭐가?”
“처음부터 첫눈에 반했다고 하면서……. 거침없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언영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말투였다. 목린은 한숨을 쉬며 다시 언영을 돌아보았다. 그와 눈을 맞추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도 상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신중히 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목린이 그의 사랑의 영구성을 크게 의심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목린은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목린아.”
언영은 목린을 든든히 안은 상태에서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
“시간을 백 번 거슬러 올라가도, 수많은 다른 세상에서 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너를 재회한다고 해도, 나는 너에게 열렬히 구애할 거야.”
“그러니까 왜…….”
“네가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건 알겠어. 그래도 내 방식도 받아들이면 안 될까? 난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숨이 멎었고, 머릿속이 새하얘졌어. 그리고 나는 그런 감정을 내게 안겨 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바로 내 모든 것을 퍼부어 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내 방식인걸. 그렇다고 그게 다인 것도 아냐. 만일 네가 기대와 다르거나, 실망을 주는 사람이었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너와 멀어졌을 거야. 하지만 그 반대잖아. 목린이 너는 내게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사람이야.”
“그래도 저는…… 잘하는 것도 없고…….”
“우리 목린이가 잘하는 게 왜 없어!”
언영이 마치 자기 얘기인 것처럼 억울해했다.
“이 세상에서 우리 목린이만큼이나 꽃 가락지 잘 만드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해 준 사람 뿌듯하게 밥 잘 먹어 주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봐. 네 미소는 한밤중에도 혼자 눈부시게 빛나고, 마음씨는 얼마나 고운지 몰라. 게다가 낚시도 잘하잖아! 낚시로 나도 건졌잖아. 나 그렇게 쉽게 잡히는 사람 아니야. 하하하하!”
“…….”
“그러니까 조금 전처럼 잘하는 게 없다느니,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정말 설령 잘하는 게 없다고 해도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만일 제가 정말 아무것도 못 해서 늘 남의 도움만 필요로 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러면 내가 종일 품에 안고 다녀야지, 뭐. 내 평생소원을 이루는 거네.”
목린은 언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농이 아니라 진지하게 말하자면……. 뭘 잘하고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오직 그런 것만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은 너무도 어둡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 안에 속하고 싶지는 않은데…….”
목린은 결국 참지 못해 몸을 들어 올려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만 잠깐 겹치고 마는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목린이 먼저 시도한 것 중엔, 이것도 처음이었다.
꽤 오랜 시간 입술만 붙이고 가만히 있었다. 온몸이 설렘으로 간질거리고, 상대방의 움직임, 숨결 하나하나에 모든 오감이 쏠렸다.
“서방님?”
목린이 천천히 입술을 떼고 언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꺼풀이 쩍 벌어진 상태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목린은 언영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흔들어 보았다.
“…….”
“서방님, 괜찮으세요?”
언영의 눈이 한 번 깜박였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
“서방…….”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격렬한 입맞춤이 목린을 마구 뒤흔들었다.
언영의 두 손이 허겁지겁 목린의 몸을 쓰다듬다가 이내 치마를 끌어 올렸다. 뽀얀 허벅지를 한 손에 쥔 언영이 목린의 입 안으로 뜨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그의 입술은 더 아래로 내려가 목린의 목을 간절하게 물었다. 손은 허벅지를 주물거리다가 욕심을 내 점점 위로 올라갔다. 달아오른 하체가 맞붙고 두 몸이 엉겨 붙었다.
목린이 절박하게 외쳤다. 갑자기 거대한 몸을 밀어붙이는 그 때문에 숨이 막혔다.
“여기선 안 돼요, 서방님!”
“하아.”
언영의 한 손이 옷 안에 들어가 목린의 가슴을 말아 쥐었다. 목린이 허둥지둥 말했다.
“여, 여기는 스승님 댁이잖아요!”
그 말이 다행히 언영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흥분해서 아예 잊고 있었는지 언영이 듣고 흠칫 놀랐다.
“……네가 먼저 했잖아.”
목린의 목덜미에 입을 파묻고 언영이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그의 손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덕분에 옷을 벗기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목린이 안절부절못했다.
“죄송해요!”
“하아, 사과할 필요는 없고.”
언영은 끌려 올라간 목린의 치마를 다시 천천히 아래로 내려주었다. 흥분한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가자마자…….”
뜨거운 그의 숨이 목린의 가녀린 목에 내려앉았다.
“엄청나게 할 거야.”
목린의 몸에 소름이 한꺼번에 돋아났다. 얼른 옷을 다시 제대로 갖춰 입었다.
분위기를 바꾸고자 목린은 밖에 나가서 언영이 마실 물을 떠 왔다. 일부러 느긋한 걸음걸이로 걸어가 천천히 움직이며 시간을 때웠다. 목린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언영이 아까보다는 그래도 침착해진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목린은 아까보다 거리를 두고 앉아서 언영과 마저 얘기를 나누었다. 주로 마을 사람들에 대한 가벼운 일상 얘기를 주고받았다. 대화가 끊기지 않고 술술 이어졌다.
창으로 빛이 들어오자 목린은 화들짝 놀라 허리를 폈다.
“어! 벌써 해가 뜨고 있어요!”
“그러네.”
언영도 고개를 돌리며 확인했다.
여명이 밝아 오며 이른 새벽을 알리고 있었다. 낮과 밤 중간을 달리는 하늘의 빛깔이 오묘했다.
“말도 안 돼요! 서방님이랑 노닥거리다 보니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가는 것 같아요.”
목린이 언영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 * *
언영이 쓰러지고 나서 스승은 나중에 만나기로 한 일행에게 다시 새를 보냈다. 언영의 회복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일단 이쪽으로 와서 상황을 함께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언영의 원기가 절반 정도 돌아왔을 때 세 명이 돌아왔다. 목린은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다인을 간신히 저지한 후,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믿지 못하는 세 사람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언영이 누워 있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야 간신히 수긍했다.
“저 녀석이 옹알이밖에 못 할 때부터 같이 지낸 사이인데, 쓰러진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진 별말도 안 되는 핑계가 다 있다며 우리끼리 웃었거든요.”
현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목린에게 설명했다.
“무슨 일이냐고 여쭤보아도 언영이 스승님께선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설명을 피하시고……. 이번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건 언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몸이 근질근질한지 계속 팍 인상을 쓰고 있었다. 평소라면 다 내팽개치고 그냥 밖으로 나갔겠지만, 다른 것도 아닌 정체불명의 맹독들이라 언영도 이번엔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
목린은 꼭 나가야 할 일이 없는 이상 늘 언영의 주변을 지켰다. 지금도 무릎으로 앉은 상태에서, 방에 있는 화분을 정리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서방님, 서방님 다 나으시면 이곳저곳 빨리 찾아가요! 맛난 것도 많이 먹고, 아가씨들 드릴 선물도 엄청나게 많이 사요.”
“당연하지. 생각보다 너무 시간이 지체돼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언영은 상상만 해도 괴로운 듯 팔로 눈을 가리며 신음을 흘렸다. 목린은 꽃을 정리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뭔가 결심한 표정과 함께 언영의 앞으로 무릎을 이용해 기어갔다.
“그리고 서방님.”
“응?”
언영은 여전히 눈을 가린 채 답했다. 그래서 발그레해진 목린의 얼굴을 못 보고 지나갔다.
“서방님이 말씀하신 대로……. 엄청나게 많이 해요.”
“…….”
“그, 그거.”
잠시 모든 게 조용해졌다. 언영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목린은 무안함을 이기기 위해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언영 탓에 화들짝 놀라 등을 뒤로 젖혔다.
언영은 두 팔을 굽혀 울퉁불퉁 근육을 만들며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원기 회복!”
“아니에요! 아직 아니에요!”
목린은 허둥지둥 팔을 뻗어 언영을 겨우 간신히 다시 눕혔다.